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1.
진중권이 말했던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전쟁나지 않는다고.
이명박이 집권한 지 1년. 지금 북한은 정전협정을 깨겠다며 엄포 중이다.

유시민이 말했던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 망하지 않는다고.
이명박이 집권한 지 1년. 국세청, 검찰, 감사원, 국정원이 권력 아래 옹기종기 모였고, 광장은 봉쇄됐으며, 언론은 통제 당하고, 인터넷은 검열되며, 각종 관직에는 권력의 하수인들이 내리꽂히고 있다.

불과 1년.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는 이렇게나 약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못 느끼고 있었으나, 그가 떠난 후 우리는 우리의나약한 민주주의를 본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렇게 쉽게 퇴보할 수 있는 것이었고, 한 사람이 자리를 뜨자 나약한 민주주의는 훨씬 뒤로 퇴보했다.

이 결과는 국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2.
그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한미 FTA 문제나 비정규직의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는 마음에도 동감한다.그러나 비록 생각이 달랐어도, 그는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비판하고, 논쟁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는우리의 언어로 된 비판과 우리의 언어를 빌은 논쟁을 이해하고 답변할 수 있는 대통령이었다.

민주주의란 것이 생각의 다양성 안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그 다양한 생각들 중 거대한 한 축이었다. 맡아 하던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모질게도 비판했지만 나는 당시 어떤 압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프로그램은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항의로 인해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은 권력자는 다른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 권력자는 비판이 아닌 비난, 논쟁이 아닌 투쟁의 대상이 되어 간다.그는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촛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권력자는 ‘촛불은 누구 돈으로 산 것이냐’고 말한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처럼 나약하다.

3.
그가 최고 권력자로 있는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착각하고 있었다. 여의도에 있는 그들도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일것이라고. 최고 권력자가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관료, 국회의원들도 모두 우리의 언어를 이해할 것이라고.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다른 생각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민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 사람을 선택한 우리 역시 ‘민주’라는 말을소홀히 대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반에서 꼴찌하는 것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노통 씹기 국민 스포츠에 빠져 그를 놀려먹고 있을 때, 역설적이게도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민주주의를 듬뿍 즐기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 즐거움 또한 사라졌으니 그 즐거움의 공로는 오로지 그의것일 테다. 그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는 가능했던 것이다.

슬픈 것은 그가 있을 때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지만, 그 즐거운민주주의만은 오롯이 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내다버린 것은 오롯이 국민들이었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처럼나약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수가 침묵하거나 방관할 때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민주주의를 한 사람에게만 맡겨놨으니 그는 그 무게에 질려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에서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나약하다. 그것을 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일은 그 민주주의를 누리는 다수의 의무다.’

”]

그리고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한 사람에게만 맡겨놓고는 침묵하고 방관한 공범인 나는 그의 부재가 이제와서야 무척이나 서럽다.

영진공 철구

▦ 안녕 노무현

그런 사람 또 없다 합니다.

그날,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울음을 참으려 애씁니다.

어느 대중가요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버려진 마음 구석 어느 벌판에 마치 벌레와 같이 비참히,
한때 친한 친구였던 내 꿈이 죽었다고 …

꿈을 그리며 살고,
그걸 이루려 목표를 정하고,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다가,
종종 실수도 하다가,
제 자랑도 잘하는,

그대는 나와,
우리와 닮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어색해 하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하는,
순진한 건지 바보스러운 건지,
모를 그대는,

나와,
우리와 닮았습니다.

자기들과 다르다며 침을 뱉는 이들에게,
뻗대다가도 다가가고,
닮은 이들에게 살갑다가도,
문득 도와주지 않는다 역정을 내는,
그런 모습이 내가 꺼려하는 나와 닮아서 외면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마음 속 저 구석에 놓아두었던 그대를,
언제든 다시 꺼내놓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대를,
이제 보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 또 있을 겁니다.
그걸 알고 또 믿기에 편히 가시라고 인사 올립니다.

안녕 노무현

영진공 이규훈

▶◀ 저주와 분노를 두려워 하는 자들이여

인터넷을 보니 조갑제씨가 이번에는 저주의 굿판 운운하였다는데 …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20&fid=524&articleid=20090524113644893h4 ]

그런데 말이다…
원래 제일 구린 자들이 저주와 분노를 두려워 하기 마련이다.
저주는 그에 합당한 짓을 한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니까.

조문을 가서 배척당했다고 찌질거리는 이들아.
자기들이 죽음으로 몰고간 분에게 조문을 가는데 편히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가?
우선은 사과부터 하고, 그리고 조문을 했어야 하는 거다.

그것도 아니고 뻔뻔하게 그냥?
배척당해도 조문을 해야 하는 거다.
생수병에 맞아도 계속 가야지. 계란에 맞아도 안죽는다.

어떤 굴욕이라도 감수하고 조문을 한 자와
그저 그것을 핑계로 피한 자.
결국은 거기서 판결이 나는 거다.

조화를 짓밟는게 경우와 상식에 어긋난다고 하기 전에,
전직 대통령의 확정되지도 않은 수사상황을 매일같이 언론에 까발리는 거는 경우와 상식에 맞았는지 생각해보라.

명백한 증거 하나 없이 전직 대통령과 가족을 오라가라 하고,
심지어 전직대통령을 구속수사 할까 말까 대놓고 얼러대는 짓이 당신들의 경우와 상식이더냐?
로그인도 못하면서, 시스템 복사해간 것 가지고 해킹이니 유출이니 난리를 치더니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로 끝나고,
그리고도 사과 한마디 없었던 것은 경우와 상식에 맞았나?

노빠들이 극단적이라고 욕하기 전에,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가해진 고통들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
이제 노무현 탓을 못하겠으니까 노빠 탓을 하나?

경우가 아니라고? 상식이 없다고?
보도기관이 보도한 내용을 소위 장관이라는 자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것이 경우와 상식에 맞는가?
물적 증거 없이 한 쪽의 진술만으로 구속 수사를 하는 것은 경우와 상식에 맞는가?
폭력집회의 우려가 있다며 도심집회를 “불허”하겠다는 발표는 경우와 상식 이전에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에도 어긋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저주하는가?

자살은 그냥 모든 것을 놓아보내는 죽음이 아니다.
당신들의 소망이야 그냥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잊혀졌으면 하겠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자살은 자기 파괴이고, 자기파괴는 기본적으로 분노의 표현이다.
단지 그 분노를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불공평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저주의 굿판을 치우라고? 생각해보자. 그게 어디서 시작되었던가?

자살은 한을 남기는 죽음이다.
한은 저주를 동반한다.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해소책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은 저주를 푸는 굿판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굿판은 이미 벌어졌다.

“한국 사회에 증오와 갈등을 확산시킨 노 전 대통령” 이라고?
아무리 마음이 비뚤어지고 손가락이 뒤틀렸더라도 말은 제대로 하자.
누가 누구를 증오하고 누가 갈등을 유발했던가?
노무현이 그대들을 증오했나? 아니면 그대들이 노무현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나?
내가 너를 증오하게 만들었으니 니가 죄인이다. 이건가?
참으로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그래… 내 감정이 니 탓이지. 내 탓이겠니.
이 종속변수들아.

영진공 짱가

▶◀ 근조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배너

근   조

노   무   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2002)”, 관객을 피곤하게 만드는 영화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시퀀스 구성을 아예 시간 역순으로 되감아 올리는 역배열의 영화 형식은 <박하사탕>과 <메멘토> 등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선보인 예가 있어 더이상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엔딩 크레딧을 꺼꾸로 틀어보고, 제목과 배우들의 이름을 역상으로 보여준들 최초의 시도는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상적으로 편집된 영화를 아예 처음부터 꺼꾸로 틀어주는 시도라면 모를까, 어차피 영화를 구성하는 시퀀스 단위 내에서는 이렇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 역배열의 한계일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이 피곤한 이유는 역배열의 영화 형식 때문이 아니라 여과없이 보여주는 잔인한 폭력, 살인과 강간 장면, 그리고 시신경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신없는 카메라 워킹 때문이다. 워킹이 아니라 이건 뭐 위아래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아예 덤블링을 해댄다. 그리고 한 시퀀스를 한 테이크로 끝내는 방식으로 찍었으니 영화 전체가 열 몇 테이크 밖에 안되는 셈이다. 감독의 재주나 배우들의 연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관객의 정서와 육신은 무척 피곤해진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감독이 참 새디스트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의 가스파 노에(Gaspar Noe)는 한술 더 떠서 무척이나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영화적인 야심은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91년 단편 <까르네>에서 ‘자폐증세가 있는 딸의 초경을 강간당한 것으로 오인하고 무고한 남자를 살해한 한 도살업자의 생애’를 다룬 바 있는 그의 ’98년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은 바로 그 도살업자의 출소 이후의 이야기이고, <돌이킬 수 없는>의 첫 시퀀스에서 자기 딸아이를 강간했다고 고백하는 뚱뚱한 중년의 남자 역시 바로 그 도살업자다.

제도권 영화가 허용하는 한계를 시험하며 온갖 논란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면 그는 일단 성공한 축에 들어간다. 다시 보고싶지 않더라도 영화를 일단 본 사람은 이 영화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