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사건 관련 시국선언을 지지합니다.

 

 


 


 


“영화진흥공화국”(이하 영진공)은 금번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사건 관련 학생 및 시민단체들의 시국선언을 적극 지지합니다.


 


○ “영화진흥공화국”의 입장은 오늘(6월 20일) 기자회견을 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시국선언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과 경찰 축소수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

–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공공기관이 주도한 선거개입,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합작

지난 6월 14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지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국가정보원 소속 직원들에게 인터넷상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종북 세력’에 대항하는 심리전을 수행하고 종북세력의 제도권 진입을 차단한다는 미명 하에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을 지시하였다. 국가정보원은, 막대한 재원과 조직력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정보력으로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었다. 우리는 국민의 눈길이 닿지 않는 정부기관이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고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문제는 사건이 알려진 지 반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판에 넘겨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에 의한 수사축소 및 은폐 사태가 있었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재직 중이었던 지난 12월, 선거운동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인터넷 댓글 의혹이 도마 위에 오르자, ‘신속한 수사’를 이유로 키워드를 78개에서 4개로 축소수사하였고,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두고 갑자기 무혐의 내용의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하는 등 특정 후보에게 명백하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 했다.

결국 검찰에 의해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수천 건의 댓글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김용판 전 청장도 불구속 기소가 되었다. 경찰은 국가정보원과 한패가 되어 정권 재창출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주권 행사에 개입한 국가권력, 정부는 엄중한 조치를 단행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하라.

이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핵심적인 권력기관들이 국민들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거에 개입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에 있다. 본 사건은 공권력이 국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불법적이면서도 은밀하게 행사할 때,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1조가 공문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오늘날 보통, 직접, 평등, 비밀원칙에 기반을 둔 선거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희생에 기반한 성과이다. 그러나 권력기관들이 정권의 개가 되어 오히려 국민들의 여론을 통제하는 데 앞장서는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모습이 군사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가 수행하던 역할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짓밟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관계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인 황교안의 행보를 보면 정부가 이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는 이미 원세훈 전 원장에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한다는 검찰의 입장을 꺾은 바 있다.

국가정보원의 범죄사실을 공개한 내부고발자들은 파면, 기소 처분된 데 비춰볼 때 범죄의 총책임자인 원세훈, 김용판에 대한 처분은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벌써부터 정권의 외압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본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고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국가정보원의 행보를 옹호하면서, 국가권력기관이 민주주의의 절차를 마음대로 훼손하고 있는 중차대한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국가정보원 인사들과 축소수사와 허위보도로 국민을 속인 경찰 관계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권력기관이 어떠한 형태로도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국민들을 속이지 않겠다는 약속과 구체적인 방안을 정부 스스로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정부가 책임지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이 땅의 국민들과 함께 더 이상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모습을 방관하지 않고 직접 일어날 것이다. 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기는 권력은 용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똑똑히 기억하기 바란다.

선거에 개입하고 수사를 축소 은폐한 관련자들을 처벌하라!

권력기관의 간섭 없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장하라!

민중해방의 불꽃

제55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2013. 6. 20.


 


영진공 일동


 


 


 


 


 


 


 


 


 


 


 


 


 


 


 


 


 


 


 


 


 


 


 


 


 


 


 


 

“경계도시2”, 의심스런 15세 관람가 판정

아들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때쯤,

이른 감이 있다면

동화책을 읽고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때쯤,


이분법의 선악 구조 말고도

여러 가치로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쯤.


아마도 열 살. 열 한 살쯤,

2010년에 엄마를 놀라게 한 이 영화를

꼭 보여줘야지 생각했었다. 


지난 주, 한 시사회 현장에서,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은

몇몇은 눈시울을 붉힌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 (2010년 3월 18일 개봉 예정)의 감동이

지금까지 마음 한 구석에 그대로 자리해 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가.

영화를 본 뒤 스스로에게 여러차례 질문도 던져본다.  

이념과 신념, 경계인에 대한

그간 미처 진지해지지 못했던 주제들이

가깝게 다가와 살갗을 깊숙이 파고드는 영화 <경계도시2> .



놀라운 건

<경계도시2>가 15세 관람가라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기준에 의해 영상물을 심의하고 판단해

관객의 볼 권리를 박탈하는 심의제도에 대한 비판은

워낙 근본적인 문제니 차치해 놓자.


영등위에서 밝힌 바 

<경계도시2>의 심의 결과는 이렇다.

‘주제, 내용, 대사, 영상 표현에 있어

사회에서 습득한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제한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게

표현한 수준으로 15세 이상 청소년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과연 ‘영화의 수준’과 ’15세’를 동등하게 적용한

영등위의 판단은 정당한가.


아무리 양보해도 긍정할 수가 없어,
언젠가 아들에게 보여줄
필견의 영화리스트에 <경계도시2>를 올려놓는데

더이상 나이 제한 따윈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어떠한 선정, 폭령성도 배제된
그저 훌륭해 마지않는 
다큐멘터리에게 부끄러운 자의적 판단으로

관객 일부를 떼어놓고자 한 영등위를 부끄럽다 기억하면서.

훗날 아들에게 이 짧은 단상까지 얘기해 줘야겠다. 

영진공 애플

[조두순 사건] 문제는 형량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최근 한 아동성폭행 사건으로 온갖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의미있는 결과로 이어지려면 깊이 생각해볼 것들이 몇가지 있다. 지금부터 그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1. 형량은 인권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거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형량은 인권하고 상관이 없다.

이번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게 형량의 크고 작음, 특히 작은 형량이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한 탓”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인권은 그런 거 아니다.

예를 들어, 범죄 수사과정에서 용의자의 권리가 얼마나 존중되었는지, 혹은 사형제를 폐지할지의 여부 같은 것은 인권하고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일단 유죄로 확정된 이후에 내려지는 형량은 죄질에 대한 법적 판단의 결과일 뿐, 인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내가 봐도 그 형량은 좀 문제있다. 12년 징역. 수감 중 감형이 전혀 없다 해도 나이 69세에 사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 인간, 이번에 저지른 짓을 보면 69세가 되어도 안전하다 볼 수 없는 상태일 거다. 전자발찌? 그건 일이 벌어진 다음에 수사할 때나 편하지 범죄 자체를 막는 수단은 아니다.

그럼 왜 그 따위 형량이 나왔나? 다른 범죄에 비교해서, 그리고 현재 수형시설의 여력으로 봐서… 여러 가지 법적, 행정적인 이유로 그 형량이 내려진 거다. 아동성범죄의 형량을 늘리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범죄들의 형량도 늘려야 한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수형시설의 규모를 늘려야 하고, 세금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 물론 교정직 공무원들도 더 많이 뽑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정부는 그런데 쓸 돈이 없다. 예전에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더 없고.

나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형법의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번 같이 주목을 받는 사건 범인의 형량을 크게 때리는 것보다, 죄형법정주의의 취지에 따라 같은 죄에는 같은 형벌이 매겨지는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게 사실 인권 문제다.

누구는 수십억 배임에, 수천억 조세포탈을 해도 그냥 추징금만 물면 되는데, 누구는 수백만원 배임으로 일자리 잃고 징역까지 산다. 누구는 위장전입하고 “죄송합니다” 라고만 하면 총리도 되는데, 누구는 그 위장전입으로 검찰에 기소된다. 2007년에만 위장전입 혐의로 1504명이 입건돼 733명이 기소됐다. 이게 진짜 조까튼거 아닌가?

생각해보라. 이 위장전입자와 배임, 탈세범들에게 그렇게 가벼운(혹은 아예 없는) 형벌만 내려진 이유가 ‘인권 존중’ 때문일까? 아니지. 그들의 인권이 아니라 그들의 재력과 권력 때문이다. 반면에 인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본권이다. 누구든 상관없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인권정신에 더 가깝단 말이다.

2. 인권을 존중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

오히려 이번 사건의 범인을 확정한 증거 중에 피해자의 증언을 고려한 것은 인권 신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어린아이의 증언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이 그렇다) 물론 아이들의 증언은 암시나 유도질문에 의해서 왜곡되기 쉽다. (그런데 어른들의 증언도 사실 많이 그렇다) 하지만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아이들의 증언도 믿을 수 있으며, 아이의 증언 밖에는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사건은 그렇지 않다. 여러가지 다른 물증들도 있었기에 신속하게 기소할 수 있었다)

인권은 사법처리를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정확한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까 말했던, 수사과정에서 용의자의 인권이 지켜지면 보다 정확한 사법처리에도 도움이 된다. 용의자를 제대로 대우하면서 수사를 해야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것이고, 그래야 진범을 잡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 아닌가.

어제 (이름도 언급하기 싫은) 한 신문을 보니 기자가 칼럼이랍시고 인권단체들이 이 사건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고 드립 치던데…
그런 애들보고 오바마가 한 마디 했단다 … Jackass …


인권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특별히 할 말 없어서 안하는 거다.
앞서 말했듯이 형량을 낮춘다고 범죄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고, 형량을 높인다고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피해자와 가족의 인적사항이 노출되는 것 같은 것이 진정한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 나는 비록 그 이름이 가명일지라도 이 사건을 피해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그 가족은 지금 무슨 느낌을 받고 있을까?

3. 정의라는 것

이번 사건을 보며 분노하고 범죄자를 욕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정의를 실현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의미와 결실도 있을게다.
문제는 범죄자를 욕하고, 죽이고 찢어버려도 이 세상이 더 정의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더 이상 이런 사건을 봐도 화를 내지 않게 된다면 세상은 이미 망쪼겠지만, 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려면 조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렇게 열받아 하는 와중에 정운찬씨는 총리가 되었다.

요즘 연예인을 동네 북으로 삼는 분위기가 더 커진 듯 하던데,
이게 과연 정의감의 발로인지, 아니면 단순히 전위(남대문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분풀이하는)의 결과인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모순이 많은 동네일수록 도덕을 더 내세운다.
하지만 언제나 그 ‘도덕’의 대상은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다.
만만한 애들을 밟으라고 던져주고, 대중은 그 만만한 애들을 밟아주고는 뿌듯해하며 돌아간다. 그들이 내세우는 도덕은 대중의 관심을 진짜 중요한 곳으로부터 돌리고
스스로 정의를 실현했다고 자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떡밥이란 거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정치가들이 여론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여론이 정치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니까.
하지만 여론이 누군가의 떡밥을 물고 흔들리면,
정치가가 여론을 좌지우지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과연 이 아동성폭행 사건이 한 연예인을 성매매 대상으로 삼아 자살로 내몬 사건보다 더 추악할까?
하나는 뇌부터 잘못된 또라이의 참혹한 범죄이지만, 다른 하나는 겉보기엔 멀쩡한 작자들이 권력을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약자들을 착취한 추잡한 범죄다. 분노로 정의를 판가름한다면 적어도 두 범죄에 대한 분노는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번 아동성폭행 사건에 인권단체까지 끌어들여 욕하는 설레발을 떨던 앞서의 그 신문은 연예인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에 대해서는 (즉, 자기들에 관련된 것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뭘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정의는?

어느 아동성범죄자의 컴퓨터에서 나온 이미지를 인터폴이 해독하여 추적하였다.
이 사내의 정체는 당시 32세의 캐나다인이자 전직 교사인 크리스토퍼 폴 닐.
그는 태국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3세의 남자아이를 강간한 죄값으로 3년 3개월의 형을 받았다.

4. 악성댓글

이 글을 쓰는 와중에 라디오에서 “당신이 남긴 악성댓글 …” 운운하며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흉기” 드립 광고가 나오더라.

악성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자기나 남의 인생을, 심지어 자그마치 대한민국을 갉아먹기 위해서?
아니지. 그들 나름으로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자기들이 욕할만 하니까 욕을 한다고 생각하는거다.
욕먹어도 싼 것들에게 욕하고, 자살해야 하는 것들에게 자살청원을 하고, 사형해야 할 것에게 사형 댓글을 주고 찢어죽이고, 어쩌고 저쩌고… 다 그럴만 하니까 하는 거 아니던가.

이번 아동성폭행 사건 범인에 대해서도 온갖 악플들이 난무했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도 분명 악플 하나쯤 날린 이도 있을 거다. 그런데 당신은 그 글을 쓸 때 그게 악플이라고 생각했나? 아닐걸, 정의의 응징이라고 생각했겠지.
이게 악플 날릴 때의 기본 자세다.
그러니 그 악플을 쓰는 동안은 대부분 떳떳하다.
악플러들은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심 때문에 악플을 날리는 거다.

그런데 이런 ‘욕먹을 만하니까 욕을 준다’는 사고방식은 무엇하고 비슷하냐하면…
“그들은 보상금 좀 더 받겠다고 철거에 저항하고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으니까 불 타 죽었어도 어쩔 수 없다(혹은 그래도 싸다)” 라는 식의 사고와 똑 닮았다.
더 나가면 “그들은 유태인이니까 죽어도 싸다.” “그들은 대지진의 혼란속에서 약탈을 한 조센징이니까 죽여도 된다” 는 식의 사고로 이어진다. 인권개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도덕과 정의만 남았을 때, 세상은 그렇게 무시무시해진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 난무하는 악성댓글이 과연 용산참사를 다루는 신문기사보다 더 악한지 의문이다. 진짜 악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것은 용산참사에 대한 경찰관계자와 여당정치인들의 강아지소리들, 그걸 더 키워서 보도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들은 쏙 빼는 신문들이 아닐까? 나는 최근에야 그 사건이 삼성하고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당 의원 누구가 총리 청문회에서 말씀해주시더군. 삼성이 보상금을 왜 준대? 그나마 합의한 것도 아니더만 …

악플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도 많다.
악플을 줄이고 싶다면 인권에 대한 의식부터 키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어떤 대우가 있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의심받고 있든, 일단은 모두 사람이니까.
우리가 다른 인간을을 그렇게 대우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진정 사람이 되는 거다.
인권은 남을 존중하는 것이고 동시에 나를 존중하는 것이니까.

영화 <래리플린트>의 원제, ‘국민 대 래리플린트’ 사건에서 저질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 플린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쓰레기 맞다. 그런데 나 같은 쓰레기마저도 존중받을 수 있다면,
그건 이 나라의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거다.”


이런 꼬라지가 그리도 싫다고?
그냥 어떤 짓을 했느냐, 아니 어떤 사상을 가지느냐, 혹은 어떤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그 대우가 생과 사를 가를 만큼 달라져야 된다고 믿는다고?
그래서 사형제 폐지하라는 인권위가 그렇게 밉다고?

그러면 최소한 악플가지고 뭐라 하지 말자.
그런 무시무시한 믿음에 의해 발휘된 행동들 중에서
악플은 그나마 가장 덜 추악하고 가장 덜 위험한 행동이다.

“대한민국을 갉아먹는 흉기“
악플에 붙여주기엔 너무 거창한 이름이다.
근데 악플에 이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뭘까?

5. 민주주의

민주주의. 말로는 쉽기 때문인지 개나 소나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히틀러의 나치독일도 자칭 민주주의국가 였다. 물론 북한도 자칭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왜 민주주의냐고? 걔네들도 투표 하거든.
북한에서도 투표를 한다. 근데 그 결과가 보통 99.9% 찬성이다.
만약 “다수결의 원칙”만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면, 북한도 민주주의 맞다.
하지만 대다수는 북한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할 거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가 빠졌기 때문이지.

북한은 싫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는 나라,
반대의사를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밝힐 수 없는 나라다.
그러니까 투표를 하면 99.9%가 나오는 것 아니겠나.
국론통일? 좋다. 근데 자유로운 언론을 지워버린 상태에서의 국론통일은 바로 전체주의다.
다시 말해서,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빠진 채로 다수결의 원칙만 따르면 그대로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 되는 거다.

분명히 북한에는 악플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악플없는 북한보다는 악플 넘치는 이 나라가 더 좋다.
여기에 안 그런 사람 있나? 왜냐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늘 시끄럽기 마련이거든.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지금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는 과연 얼마나 존중되고 있나?
혹시 그것을 저해하려는 법안이나 시도는 없던가?
작금의 소위 불법시위에 대한 온갖 처벌과 손해배상 소송은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고,
전체주의 국가로 이행할 가능성을 높이지 않나?

원칙적으로는 악플도 개인의 의사 표현이므로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거짓말을 유포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여서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기회만 준다면 그리 심각하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고 최진실씨가 과연 악플때문에 죽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원래 악플에 대한 최선의 대처법은 ‘개무시’ 다. 악플러들이 원하는 거는 관심이거든 … 그걸 안주면 걔네들 딴데간다.
하지만 연예인은 악플을 개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면, 개념없는 찌라시들이 그걸 받아적어서 기사화 하니까.


최근에 소위 악플 혹은 인터넷에서 이슈화된 사건들을 돌이켜보라.
사실 그거 기성 언론이 받아쓰기하거나 뻥튀기 시킨 바람에 더 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악플이 아니다. 인터넷 서핑을 취재로 착각하는 개념없는 찌라시들이 문제지. 기자라면 기사를 쓰기 전에 진위여부부터 파악하고 볼 일 아닌가? 그냥 인터넷 뒤져서 기사 쓰는거면 그게 기자냐, 그게 언론이냐고 …

난 악플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악플을 보면 나도 기분 나쁘다.
기왕이면 더 점잖고 고상한 표현으로 통쾌상쾌하게 표현하면 좋지 않나.
근데 어쩌랴. 걔네들은 표현법이라곤 고작 그따위 밖에 배우지 못했는 걸 …

악플은 결국 지 얼굴에 똥칠하는 건데, 정말 그걸 모르는 경우도 있고

하도 열받아서 잠시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고(나도 가끔 그런다), 혹은 나는 이미 망가졌으니 같이 망가지자는 심정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좋지 않지만, 악플은 그런 모든 좋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거다.

근데 악플만 쏙 빼버리자고? 그게 되겠나 …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사이트나 포털에 달린 댓글들은 (우리가 보기엔) 매우 점잖다.
사실 인터넷 댓글이 제일 지저분한 동네로 우리나라는 분명 3위 안에 들거다.
그럼 외국애들은 왜 대체로 공공 공간에서 욕을하기 꺼려하는 걸까?

욕을 하는 순간 내 수준이 떨어진다는 걸 교육과 경험으로 알고 있고,

욕설 말고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를 써야 제대로 욕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걔네들도 진짜 열받으면 욕설을 한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러고 나서는 자기가 진 거라고 쪽팔려 한다는 것 뿐이다.

어쨌든, 인권, 표현의 자유..
이런 것들은 성범죄자 처벌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가 전체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다.


현재 인터폴에 의해 공개수배 중인 아동성범죄 용의자. 2006년부터 수사를 하였으나 여전히 신원과 거주국가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영진공 짱가

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1.
진중권이 말했던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전쟁나지 않는다고.
이명박이 집권한 지 1년. 지금 북한은 정전협정을 깨겠다며 엄포 중이다.

유시민이 말했던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 망하지 않는다고.
이명박이 집권한 지 1년. 국세청, 검찰, 감사원, 국정원이 권력 아래 옹기종기 모였고, 광장은 봉쇄됐으며, 언론은 통제 당하고, 인터넷은 검열되며, 각종 관직에는 권력의 하수인들이 내리꽂히고 있다.

불과 1년.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는 이렇게나 약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못 느끼고 있었으나, 그가 떠난 후 우리는 우리의나약한 민주주의를 본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렇게 쉽게 퇴보할 수 있는 것이었고, 한 사람이 자리를 뜨자 나약한 민주주의는 훨씬 뒤로 퇴보했다.

이 결과는 국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2.
그와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한미 FTA 문제나 비정규직의 아픔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는 마음에도 동감한다.그러나 비록 생각이 달랐어도, 그는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비판하고, 논쟁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는우리의 언어로 된 비판과 우리의 언어를 빌은 논쟁을 이해하고 답변할 수 있는 대통령이었다.

민주주의란 것이 생각의 다양성 안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그 다양한 생각들 중 거대한 한 축이었다. 맡아 하던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모질게도 비판했지만 나는 당시 어떤 압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프로그램은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항의로 인해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은 권력자는 다른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 권력자는 비판이 아닌 비난, 논쟁이 아닌 투쟁의 대상이 되어 간다.그는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촛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권력자는 ‘촛불은 누구 돈으로 산 것이냐’고 말한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처럼 나약하다.

3.
그가 최고 권력자로 있는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착각하고 있었다. 여의도에 있는 그들도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일것이라고. 최고 권력자가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으니 당연히 관료, 국회의원들도 모두 우리의 언어를 이해할 것이라고.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다른 생각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민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 사람을 선택한 우리 역시 ‘민주’라는 말을소홀히 대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반에서 꼴찌하는 것도 노무현 때문’이라는 노통 씹기 국민 스포츠에 빠져 그를 놀려먹고 있을 때, 역설적이게도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민주주의를 듬뿍 즐기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 즐거움 또한 사라졌으니 그 즐거움의 공로는 오로지 그의것일 테다. 그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는 가능했던 것이다.

슬픈 것은 그가 있을 때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지만, 그 즐거운민주주의만은 오롯이 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내다버린 것은 오롯이 국민들이었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처럼나약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수가 침묵하거나 방관할 때 나약할 수밖에 없다. 그민주주의를 한 사람에게만 맡겨놨으니 그는 그 무게에 질려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의 죽음에서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나약하다. 그것을 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일은 그 민주주의를 누리는 다수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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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즐거운 민주주의’를 한 사람에게만 맡겨놓고는 침묵하고 방관한 공범인 나는 그의 부재가 이제와서야 무척이나 서럽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