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코리아


 

*
대선 전 등록금 반값 정책이니 뭐니 서민 부담 줄여준다던 현 집권당.

하지만 집권 후, 등록금 대출금리를 2% 인하하겠다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책을 내놓지 않는다.  운전면허 학원 비용 줄여야 한다, 라면값 관리해야 한다, 심지어 청와대 내 보고서는 흑백 출력이 킹왕짱이라고 초딩 반장처럼 뛰다니던 MB께선 애써 등록금엔 눈감은 거다.  사학재단 출신의 한나라당 의원은 있어도, 운전면허 학원 운영하는 한나라당 의원은 없나 보다. 

아무튼 그래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를 위한 시위를 청계 광장에서 하였다.  참석자는 약 1만명 수준.  이에 대한 MB의 반응은 ‘체포전담조’ 투입.

하나 더, 이번 시위의 주최자들은 각당에 시위 참석을 요청했단다.  그리고 모든 당에서 참석하기로 약속했단다.  단 한나라당은 일언지하에 거절.

어쩌겠어요.  이미 집권당인데 …
(그 당이 그래도 과반 의석 확보가 유력하답니다.)

**
얼마 전 백분 토론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운하는 총선 후에 국민여론을 수렴해서 할 생각’이라고 말한 나 모 의원의 입술에 침도 마르기 전에 내년 4월 착공을 목표로 한 대운하 시나리오가 공개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사이드 잡으로 연기학원을 운영하나 싶을 정도다.  마스크 좋은 분들, 연기 잘하는 분들 줄줄이 섭외해서 국민을 상대로 열연한다.

일명 면상 정치.  나경*, 김은*, 유정*, 조윤* 등등 … 이 분들 대부분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다.  연기파 이덕화가 괜히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닌가보다.  30년 경력의 연기자도 울고 갈 연기력들을 보여주는 집권당.  이덕화가 존경할 만하다.

대운하 반대여론이 60 %가 넘어간다는데 어떻게 그 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유력한다는 걸까?  대한민국은 호그와트 마법학교인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마구 벌어지지는데 ….

그래도 어쩌겠어요. 과반 의석이면 뭘 해도 된다는데 …

***
게다가,

내셔널지오그라픽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철새 이인*.  이번 공천에서 떨어지더니 무소속으로 출마했단다.  지금 1위란다.  철새왕자 탄생 일보 직전.

젖사마 최연* 선생.  대개는 정치생명이 끝나야 되는 게 순리지만 무소속으로 지금 지지율 상위다.

노회찬과 홍정욱이 맞붙는 서울 노원병.  노회찬은 따로 썰 풀 필요가 없고 홍정욱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영화배우 남 모씨 아들로 미국에서 대학 나오고, 재미교포 만나서 결혼했고, 자식들도 거기서 나았고, 한국 들어와서 헤럴드 신문 인수해서 신문사 사장하던 대한민국 1% 엘리트.  신문의 퀄리티는 재벌 핥아주기 전용이랄까 …

아무튼 이 두 인물이 맞붙는 서울 노원병은 노회찬의 지지율이 높다.  노원병이라는 지역 칼라가 반영된 결과인 듯.  그런데 재밌는 조사 수치 하나.

대부분의 유권자 층에서 노회찬의 지지율이 높은데, 학력이 낮을 수록 그리고 소득이 낮을 수록 홍정욱을 많이 지지한다는 것.

이인*가 당선 유력하고, 최연*가 당선권에 있는 상황에서 ‘어쩌겠어요, 니들이 뽑았걸랑요’라는 멘트를 또 날려주고 싶지만 이 조사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사기 당하기 쉽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인가 …


영진공 철구

<스트레인저 댄 픽션>,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포일러 있습니다)

DVD로 감상한지가 벌써 2주 전인데 개봉작 쫓아다니고 다른 일에 치여서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봤던 영화들 가운데 하나가 ‘넘지 말았으면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추격자>였었고 그랬던 덕에 이 영화의 내용에 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일종의 메타-픽션 드라마입니다. 국세청 직원인 주인공 해롤드(윌 패럴)와 그의 일상과 운명을 결정하는 소설가 카렌(엠마 톰슨)이 등장하고 마침내 두 인물이 직접 만나기까지 하죠. 카렌은 원래 자기 작품 속 주인공을 매번 죽는 것으로 처리하는 ‘비극’ 전문 작가인데 10년 만에 탈고하게 된 새 작품의 주인공 해롤드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소설의 결말을 바꾸게 됩니다. 자기가 창조해낸 허구 속 인물이 만약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작가로서의 성취를 위해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죽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그냥 넘기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하여 예술 작품이 추구하는 목표가 독자나 관객이 되는 사람이 아닌 작품 자체가 되어버림으로서 예술의 참된 가치를 잊어버리게 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는 작품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입니다. 해롤드의 상황을 도와주기 위해 개입했던 영문학 교수 쥴스(더스틴 호프먼)가 카렌의 초고를 읽고 난 후, 이 위대한 작품의 완성을 위해 해롤드가 죽어야만 한다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추격자>의 미진(서영희)도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고 눈을 부라렸을 것만 같습니다. 작품 속의 인물이 허구가 아닌 실제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목적성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 좀 무섭기까지 합니다. 다행히 작가인 카렌은 평소의 괴팍한 성격과 달리 그렇게까지 잔인한 인물은 아니었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중심 메시지는 사실 평범합니다. 내 인생의 전지적 작가는 곧 나 자신이니 내 인생의 일상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잘 살아보자는 얘기죠. 이 한 편의 시나리오로 헐리웃에서 가장 각광받는 작가로 떠오른 이는 최근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2007)으로 감독 데뷔한 자크 헬름입니다. 첫 장편 시나리오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를 썼던 찰리 카우프먼의 독창성과 식견에 버금간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하지만 너무 일찍 감독 겸업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1) 좋은 시나리오도 결국 좋은 연출자를 만나야 멋진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스트레인저 댄 픽션>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마크 포스터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꽤 재미있고 인상적인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2) 아주 기발하다고 할 수 있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지만 어쩌면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는 복잡한 내러티브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건 통제력 있는 연출의 힘입니다. 윌 패럴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코미디언이고 주인공 해롤드를 연기하기에 부족함이 없긴 했지만 다른 배우들이 같은 연기를 했더라도 별 무리가 없었으리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3) 더스틴 호프먼, 매기 길렌할, 퀸 라피타 등이 출연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소설가 카렌 아이펠 역을 맡은 엠마 톰슨입니다. 엠마 톰슨이라고 하면 아직도 케네스 브래너와의 90년대 영화들이 주로 생각나는 편인데, 검은 옷을 즐겨입는 꼴초 여류소설가의 괴팍하고도 엉뚱한 성격을 상당히 잘 드러냈다고 생각됩니다. 원래 코미디언인 윌 패럴이 정극 연기에 도전하는 영화에서 발견한 엠마 톰슨의 코믹한 연기는 그야말로 각별한 즐거움이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공 신어지

1) 전업 시나리오 작가로서 일반 관객들까지 그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던 찰리 카우프먼도 드디어 첫 감독 작품을 내놓기 위해 현재 후반 작업 중이시로군요. 필립 시모어 호프먼 주연의 <Synecdoche, New York>가 금년 내로 개봉될 예정입니다.

2) 마크 포스터의 최근작은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연을 쫓는 아이>(2007)인데 3월 13일로 국내 개봉일이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는 22번째 제임스 본드 영화 <Quantum of Solace>의 메가폰을 잡고 한창 촬영 중이시로군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에 마크 포스터의 연출이라고 하니 정말 기대해볼만 한 작품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3) 이렇게 얘기하면 영화의 흥행 실패는 윌 패럴의 미스 캐스팅 때문이란 소리가 되는 건가요? 짐 캐리의 정극 연기가 돋보였던 <이터널 선샤인>(2004)의 성공 덕분에 가능했던 캐스팅이 아니었냐는 생각도 듭니다. 노교수로 출연하고 있는 더스틴 호프먼이 몇 년만 젊었어도 해롤드 역에 상당히 잘 맞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피사의 사탑은 마(魔)의 지대일까?


 
 

굳이 과학에 관심이 있는 과학 꿈나무가 아니었더라도 어린 시절 한번쯤은 갈릴레이의 피사의 사탑 실험을 들어봤을 것이다.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무거운 물체일수록 속도가 빠르다고 설레발 친 것을 16세기에 갈릴레이가 ‘그게 아닐텐데!’ 하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냅다 올라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어떤 책에는 쇠공과 깃털이라고도 적혀있다!)를 동시에 놓자 지면에 동시에 떨어져 ‘모든 물체는 무게와 상관없이 동시에 떨어진다’라고 일갈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뻑큐 한 방 먹였다는 이 훈훈한 이야기는 갈릴레이만 나오면 볶음밥에 딸려 나오는 계란 후라이 마냥 어김없이 따라 나온다.

하지만 쥐똥만큼의 호기심이라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주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 무슨 버뮤다 삼각지대도 아니고 어떤 어둠의 힘이 깃들여 있길래 무겁든 가볍든 동시에 떨어진단 말인가! 궁금증으로 삼일 밤낮을 고민하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피사의 사탑으로 날아가봤자 그 동네라고 우리 동네랑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각대로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 실험해 본들 동시에 떨어지지 않는다. 당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제자이자 전기작가인 비비아니가 구라친 이야기가 지금까지 내려오며 정설이 된 것이다.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동시에 떨어지는 것은 진공 상태에서만 가능한 실험이다. 대기 중에서는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질량이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지게 된다.




그럼 왜 이런 거짓부렁이 아직도 버젓이 책에 실려 호기심 충만한 아이들의 원형탈모를 유발시고 가뜩이나 관광수지 적자인 나라에 부담을 주는 것일까? 진정 관광산업을 노린 이탈리아 정부의 음모일까?!




사실 단지 갈릴레이가 낙하 실험만 하지 않았을 뿐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체의 낙하 운동’에 대한 갈릴레이의 반박은 실제 있었고 과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쓰여진, 팔다리 다 잘라내고 몸통만 갖다 붙여 놓은, ‘동시에 떨어진다’로 끝나는 피사의 사탑 이야기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도 아니고 수박밭 거름 씹어먹으며 수박 먹었다고 기지개 하는 꼴이라 볼 수 있다. 그럼 제대로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의 내막을 알아보자.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잘나가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색과 관찰을 통해 수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그가 제시한 대표적 이론 중에는 세상은 물, 불, 흙, 공기 이렇게 4가지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4원소설이 있다. 원소들은 적당한 성질을 더하거나 빼면 다른 것으로 전환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물질은 이 4가지 원소의 비율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에서 보면 굉장히 환타지한 이론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명성에 힘입어 4원소설은 연금술과 플로지스톤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며 오래도록 과학계의 발목을 제대로 잡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4원소설을 바탕으로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해서도 썰을 풀어놓는다. 


1. 물체의 자연적 운동은 그 내부에 존재하는 네 가지의 기본 원소의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흙으로 구성된 물체는 불의 원소의 비율이 큰 물체보다 더 큰 자유낙하 속력을 갖으며 흙 본연의 장소인 지구와 우주의 중심으로 가면 갈수록 더 빠르게 움직인다.




2.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 


 

낙하속도는 매질의 두께나 저항에 반비례한다. 진공은 저항이 0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물체의 낙하속도는 무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명성에서 후달렸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원자가 빈 공간에서 영구적 운동을 한다)은 물먹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의 전제는 물체의 낙하속도를 무게의 측정값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즉 A, B의 물체 중 B의 낙하속도가 더 빠르다면 이는 B의 무게가 A의 무게보다 무겁다라는 뜻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낙하 속도는 평균 속도에 가까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이론은 이후 계속적으로 문제들이 제기되긴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값 앞에서 무시되었고 오래도록 보편적 진리로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6세기에 이르자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기계주의 철학이라 일컫는 이 패밀리들은 아르키메데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과학적 유추와 실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 패밀리의 대표 타자 중 한 명이 바로 갈릴레오이다.




그는 과학적 유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운동을 반박한다.




① A는 v의 속도로 B는 v’의 속도로 떨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A는 B를 더빨리 떨어지게 하려하고 B는 A를 더 늦게 떨어지게 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A+B)는 A보다 낙하속도가 느리다. v’ < V < v 

② (A+B)는 A와 B의 무게가 합쳐졌기 때문에 A보다 더 빨리 떨어져야 한다. v’ < v < V


==> 모순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

결국 v = v’ = V 이 되어야만 이 모순을 없앨 수 있다. 즉 모든 물체는 같은 비율로 낙하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가정의 전제는 물체는 모양과 속력에 독립적이며 오로지 무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100g의 물체가 100m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10g의 물체가 10m에서 떨어지는 시간과 같다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서로 다른 물체는 서로 다른 (일정한) 값의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뿐이지 모든 물체가 같은 (일정한)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말과 같지 않다.




이와 같이 과학적 추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 ‘낙하실험’ 에피소드에서 추론과정은 엿 바꿔먹고 결론만(그마저도 틀린) 이야기 하는건 뭐 웃기지도 않고 남는 것도 없는 기껏해야 피사의 사탑 관광지 소개만 해주는 꼴인 거다. 

그러니 이제 없는 돈에 기껏 피사의 사탑에 놀러가서 저기가 모든 물체들이 동시에 떨어진다는 마의 지대인가 라며 증명사진이나 찍지말고 주위를 둘러보고 갈릴레이 낙하실험 운운하는 외국인들이 있으면 그 중에 참한 이를 골라 가까운 까페에 가서 차분히 위와 같이 이야기 해줘라. 바로 이때가 비로소 영어가 빛을 발하며(?) 진정한 글로벌 작업..아니 인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글로벌한 작업질의 일 순위는 지식이지 영어가 아니다. (이거 결론이 왜이래..)


영진공 self_fish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냐.


 

온오프라인 평론가들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영화의 절반에 해당하는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쉬거는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 속 세계의 중력장이 일그러지는 느낌을 줄 만큼 생생했다. 그 앞에서는 심지어 초코바 포장지까지도 덜덜덜 떤다. 그는 사실 인간이라기보다는 운명 혹은 죽음의 상징에 가깝다. 그의 행동은 인간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그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방식, 동전던지기만 봐도 그렇다. 동전을 던져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앞면과 뒷면이다. 0과 1, 그는 디지털 코드인 이진법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지금까지 나온 가장 참신한 <터미네이터>의 재해석” 이라고 평한 한동원에게 100% 동의한다. 쉬거가 있었기에 이 낡은 시절의 이야기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그대로 잠시 서 계시겠습니까?


아… 이 똘끼 제대로 뿜어주시는 포스…

내가 공감하지 못한 것은 영화의 나머지 절반인 에드(토미 리 존스)의 부분이다. 늙은 보안관 에드의 감정은 한 마디로 무력감이다. 쉬거가 휩쓸고 지나간 살인 현장을 돌아보며 그는 이번 상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감지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수사를 위해 미국 서부의 다른 지역을 찾아갈 때마다 해당 지역 담당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로 술집에 앉아 읖조린다. “세상이 우찌될라꼬..”

세상이 어찌되긴 뭘 어찌되는가.

그들이 그렇게 근심하던 1980년대 이후 27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에드의 젊은 시대 역시 그의 회상만큼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모티브가 되었던 에디 게인의 행각이 발각된 것이 1957년이다. 1964년에 제노비스는 뉴욕 주택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1969년에 찰스 맨슨 패거리는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인 샤론 데이트와 친구들을 난자해 죽였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마치 지금 이라크에서 그러는 것처럼 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댔고 그 여파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흉악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마약을 퍼트렸고, 미국의 공업생산성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강력범죄사건의 비율은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더 심각했다. 간단히 말하자. 문제는 언제나 있었으며, 과거가 지금이나 미래보다 더 나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다. 세상은 젊은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세상이 옛날 잣대로 보자면 황당하고 위험해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봐도 황당하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몇 개월간, 나는 이 나라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품목별 가격통제(도대체 만원짜리 바지와 수십만 원짜리 바지가 공존하는 요즘 세상에서 ‘바지’의 가격은 어떻게 정하려는가?), 휴일 없이 일하라 다그치는 공직사회, 경부고속도로의 신화를 운하로 재현하겠다는 토건 정책, 온갖 곳에 끼어들어 전문성을 무시하고 시시콜콜이 참견하는 대통령에서 나는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을 느낀다. 얼마나 혀를 꼬는지를 가지고 영어실력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주장은 막 아메리칸 드림이 피어오르던 1970년대에 어울린다. 딱 자기들 존재의 급수에 어울리는 어색한 영어이름을 가진 단체가 내놓은 자칭 교과서는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며, 심지어 신에게 뭔가를 봉헌하기를 좋아하는 전직시장의 행보는 제정일치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서는 이 나라가 북한과 총탄을 교환하던 1950년대에 매몰된 노인네들의 정서다. 도대체 지금 좌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4번의 ‘바지’ 를 보며 나는 “엄마바지~ 아빠바지~ 꾸에꾸에” 를 흥얼거렸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에서 살아본 몇 개월은 이 영화에 대한 내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에드가 정확히 무엇을 걱정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에드의 세상이 가고 낯선 세상이 오는 것이 무서운게 아니라,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에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 한계를 알고 물러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어나간 모텔방에 들른 에드는 이미 쉬거가 돈가방을 챙겨갔음을 발견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한번 쉬고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혹여 그가 범죄현장을 한번 더 수색할 생각을 했더라면, 그 역시 쉬거의 희생자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죽음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서려는 에드

노인이 현명한 것은 자신의 한계와 물러날 때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때 되었으면 제발 좀 사라져줘라.

지금은 당신들이 좌지우지할 시대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