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걸작선

-= IMAGE 1 =-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번씩이나 웃었다.

내용이 웃기기 때문도 아니고 실소도 아니다.

작가가 아주 간단한 트릭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엉뚱한 세계관이 실제인 세상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그 엉뚱한 세계관은 사실은 아시아적 세계관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바빌론의 탑’의 배경은 실제로 하늘이 물리적 ‘천정’인 세상이다.
소설 속에서 탑은 정말로 높이 올라가 결국 그 천정에 닿았고 (이 소설 속의 신은 언어를 나눈다든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제 그 하늘을 뚫기 위해서 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뚫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광부들이 불려온다. 이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소설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묘사한다.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어쨌든 천정이라는 개념도,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도 동양(혹은 중국)의 순환론 철학을 이해한다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렇게 구약성경의 배경에다 집어넣으니까 이게 웬지 참신하다. 당연한 이치다. 이 두 개념을 한데 엮을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이미 참신한 거다.

‘이해’는 깨달음과 묵상을 통해서 진리의 끝에 도달한 초지능자의 이야기다.
이 초지능자의 상태는 불교나 도교의 깨달음과 통한다. 이 소설 묘사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세상이 코드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주인공) 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매트릭스와 이해 모두 같은 철학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여 자연과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육체를 시냅스 단위에서 제어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 결과 그는 극강의 신체와 최상의 정신상태를 유지한다. 아마도 무협소설에서 말하는 화경의 경지에 이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또 다른 고수가 그에게 도전해온다. 그리고 이 두 고수의 결전이 벌어진다. 아주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아이러니하게도 이 깨달음의 극치에 도달한 이에게 최대의 약점은 역시 깨달음이다. 색즉시공.

‘영으로 나누면’은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처음에는 시치미 뚝 떼고 수학적 난제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수학이 싫어서 심리학을 선택한 나로서는 정말 읽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수학도 고차원적인 영역이 되면 거의 철학적인 질문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정말 그런가?)  어쨌든 여기서 최고의 수학자가 도달한 수학의 부조리가 등장한다. 문제의 영으로 나누면… 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두 사람의 상호 이해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두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된다.
둘은 같은데 다르다. 영으로 나누면 누구든 같아진다. 하지만 같다는 것을 말하는 순간 모든 차이가 의미없어지고 이해도 날라간다. 결국 같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진정 같아지는 길이다. 무위자연과 무슨 차이가 있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네 인생의 이야기’는 인과론이 아니라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진 우주인과의 소통이다.
이 단편은 특히나 중국문화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외계인의 문자는 중국문자(한자)의 변형이다. 글자 하나에 한 문장 뿐만 아니라 철학이 담겨있고, 부수를 이용해서 다양한 뜻을 표현하는 기호체계..게다가 목적론적 세계관? 중세 중국정치의 목표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요순시대로 돌아가는 것)였음을 기억한다면, 이 세계관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의 소설의 핵심 트릭을 보여주는 작품은 ‘인류과학의 진화’라는 짧은 단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메타인류는 결국 서양의 상징이고, 원래 인류는 중국문화의 상징이다. 원래 모든 문명의 기원은 중국인데(적어도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 중국문명에서 시작한 서구문명이 지금은 첨단을 달린다.중국은 과학기술의 변방이 되어 그저 저 먼 중심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달받고 번역하기에 바쁠 뿐이다. 거기에 중국철학적 해석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사실 학자가 번역자에 불과한 곳은 중국 뿐만은 아니다.

나머지 단편들은 그의 트릭을 다른 서구세계관에 적용한다. ‘일흔 두글자’의 세계는 전성설이 실제로 통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노력에 의해서 세상은 전성설에서 후성설의 세계로 진화한다. ㅎㅎㅎ (그런데 왜 일흔 두글자일까? 마흔 여섯글자면 되는거 아닌가?)

테드 창은 중국계 이민의 2세이다. 그는 주류 SF문학계에서는 아마도 주변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영원한 주변인으로서의 위치를 이렇게 영리하게 활용한 작가는 처음이다. 그는 주변인이었기에 지금 현재 가장 주목받는 주류가 되었다.

물론 중국문화와 트릭만 있다면 그의 소설이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풍부한 과학지식이라는 살이 붙어서 간결한 골격에 큰 무게를 담은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지적인 자극 뿐만 아니라 나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강추

영진공 짱가

무료하십니까? <쏜다>와

무료하십니까

아니 우울 합니다, 아니 답답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상을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님들의 충고는 동일 하십니다
그저 살아가는 거라고

그냥 살아가는 동안
오늘하루 좋은일 가득 하시길 빕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약간 무기력증과 우울증의 증세로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영화도 멀리하고 글도 별로 올리지 않고 열심히 하루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가족을 재우고 난 밤 온라인의 세계로 들어 갑니다. 그곳은 고민도 나이도 답답함도 없습니다. 그저 멍하니 화면을 보며 온라인의 신께서 시키시는 데로 매뉴얼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레벨이 올라가고 레벨이 올라가면 지위가 높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 중독이니 현실 도피니 오타쿠의 생활들이 감이 잡힙니다. 술,담배와 거의 같은 수준입니다 아님 더한 쾌락일지도 모릅니다.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현실로 다시 복귀 하기로 하였습니다. 컴퓨터의 게임을 일단 지움니다. 다시 영화를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영화를 보려고 고른게 쏜다였습니다. 수로님과 우성님의 좌충우돌 코메디는 시각을 즐겁게 했지만 내용은 20대에 조금은 이해 할 수 없게 보았던 Falling Down이 다시 기억 나기 시작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쏜다는 내용이나 구성에서 코메디와 드라마란 차이를 뺀다면 정말 비슷한 이야기 입니다.
대다수일지 일부분일지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세상사는게 참 힘들어진다고 생각 됩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많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살아가는 세상의 선택이 참 좁아 집니다. 더이상 새로운 출발도 힘들어 지고 그리고 가족과 사회의 책임이라는 울타리에서 살아 갑니다. 정말 영화처럼 일이 꼬여서 수습 불가능해지는 해프닝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에 보았던 마이클 더글라스의 폴링다운은 답답한 큰 형님들의 이야기 였지만 쏜다를 보는 지금은 많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참 많은 격변속에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조금 우울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인생은 관점에 따라 즐겁고 행복한 길인지도 모릅니다. 동전의 양면은 언제나 존재하고 우리는 언제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오늘을 살고 있으니까요.

하루 하루 충실히 살아가자
온라인에서 돌아온 타자의 새로운 마음 가짐입니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께
즐거운일 한가지는 그래도 찾아 볼 수 있을거라고 기원하며 화이팅 !

영진공 클린트

애 낳고 나니 감상도 단순해지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토욜날 오전에 언니가 애를 봐줘서. (흑흑 언니~~. 역시 여자는 시집가면 여자형제가 최고) 남편이랑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영화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이 『디워』를 보자고 했다.
나는 집에서 애기를 보겠다고 했다.

남편이 『화려한 휴가』를 보자고 했다.
나는 집에서 애기를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타협한게 흘러간 영화 (어차피 우리 부부에게는 흘러간 영화 개념이 없다)
『트랜스포머』와 『해리포터』 중에 결정하기로 했고.
(나는 “해리포터』 아직 개봉 안 하지 않았어?”라는 엽기적인 대사를 날렸고)
마침 해리포터가 집에서 젤 가까운 극장에서 하더라.

그래서 봤음.
에…. 늠후 유명한 배우가 마니 나와서.
무슨 영국 국내 영화제 시상식 온거 아닌가 했다.
늠늠 긴 소설을 짧게 줄이다 보니까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는데.

이상하게 이거, 영국, 학원, 판타지물인데.
자꾸 안기부 생각나고.
말죽거리 잔혹사, 두사부일체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해리가 크고 나면 바보들의 행진 삘의 영화를 찍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성장이라는 건 안 좋은 것 같다.
성장 영화의 결론은 성장은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거라던데.
지켜야 될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는거.
그거 삶의 더러운 무게 아니던가.

영진공 라이

<심슨 (The Simpsons Movie)> – “문제는 영화가 ‘낄낄’도 아닌 ‘피식’ 단계에서 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TV 시리즈를 영화로 만든 걸 극장까지 와서 보고 있다니! 이런 얼간이들!”

 – 호머 심슨의 말, [심슨 The Simpsons Movie] 중에서



모든 쓸데없는 사설을 생략하고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영화 시작 초반에 호머 심슨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식상해질 대로 식상해진 TV 시리즈의 영화판을 극장까지 가서 본 내가 바보지!



모든 개그물은 다섯 가지 레벨로 구분할 수 있다. 제일 낮은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콧방귀만 뀌게 되는 ‘킁킁’ 레벨, 그 다음은 코웃음만 치게 되는 ‘피식’ 레벨, 중간은 그런대로 간간이 웃음이 나오는 ‘낄낄’ 레벨, 그 위는 배꼽을 잡고 웃게 되는 ‘푸하하’ 레벨, 최고 단계는 땅바닥을 구르며 미친 듯이 웃어제끼는 ‘데굴데굴’ 레벨이다.


심슨 TV 시리즈는 대체로 ‘낄낄’ 단계에서 맴돌았다. 양키들이야 ‘푸하하’와 ‘데굴데굴’ 사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그 무시칸 코쟁이들이 어떻게 느꼈든지간에 나하곤 상관 없는 일이다.



문제는 영화가 ‘낄낄’도 아닌  ‘피식’ 단계에서 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그는 쉴새없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 제작진은 ‘이 개그를 보면 제아무리 목석 같은 관객이라도 배꼽을 붙잡고 땅바닥을 구르다가 의자에 머리를 부딪혀서 뒈져버릴 거야!’라고 자신하고 만든 것 같은데, 불행히도 내 콧구멍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온 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즉, 별로 안 웃겼다.



어쨌건 심슨 팬이 아닌 다음에야 이 영화를 극장까지 찾아가서 볼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엔 TV 시리즈 중에서 재미있었던 편을 골라 다시 보는 편이 2억 5천만배 이상 낫다.



평점: 별 5개 만점 중에서 1점 반. 터미네이터 대통령 슈왈제네거(?)의 체면을 봐서 별 반 점을 더 얹어줬다.


영진공 DJ Han

<화려한 휴가>의 작은 의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영화 <화려한 휴가>는 영화적 요소로만 이야기하자면 좀 많이 모자라다 못해 실망스러운 면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감정 이입이 되어 펑펑 운 사람들과 ‘5.18’을 팔아먹는 상업주의 영화라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민감한 소재임엔 틀림없다.

난 사실 이 영화를 많이 봐주기 보다 차라리 5.18 다큐멘터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것이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쉬운 방법이긴 하나 – 이 나라는 이미 한 영화에 천만 인구가 들러붙은 적이 있지 않은가? – 그 참혹한 진상을 사실 그대로 전하는 게 더 필요해 보여서다.

왜냐고?

30~40대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 영화를 ‘젊은 사람들’이 보고 과거를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건데. 이건 정말 어렵다.

생각없이 사는 건 죄가 아닌데. 그 생각없이 사는 ‘덕’을 보는 권력자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만인’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 못 하고, 심지어 복지 정책과 공산주의 정책을 구분 못 하는 ‘젊은이’ 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얻은 감상은 뭘까?

‘전두환이 나쁜 놈인데, 거 대학생들은 김대중이 부추겨서 데모한 겨. 맞을 짓 했지’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주유소에서 기름 넣으려면 김대중 만세 세 번 외쳐야해’

내가 이런 이야기를 20대, 심지어 10대의 ‘서울’ 아이들이 영화를 본 후에 나오면서 뇌까리는 것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안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네 대학에서는 학력 인플레로 인한 바보들은 늘어났을 지언정, 자신이 뭔 삽질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아해들이 더 많아졌다.

이 아해들은 5.18에 어떤 일이 이 나라에서 벌어졌는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아니.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왜’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아해들이 ‘생각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로 그 둘을 비교할 줄 모른다.

‘데모’가 얼마나 ‘나쁜 걸’로 인식이 되었는지, 헌법에서 보장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눈 뜨고 퍼렇게 살아 있어도, 데모는 나쁘다고 생각하나보다.

하긴 이랜드 사태로 인한 ‘기업’의 손실이 막대함을 이야기하며 ‘불법 투쟁’이라는 단어를 붙여 생존권을 가볍게 무시하는 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세상엔 아직도. 5.16이 혁명이라 주장하는 ‘미친 새끼들’과, 5.18이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라 굳게 믿고, 그 믿음을 ‘복음’처럼 – 이 땅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굽어 살피사 – 전파하는 ‘개새끼들’이 많다.

그렇기에 ‘상업주의 영화’든 뭐든.

광주의 ‘참상’을 좀 더 많은 ‘無知人’에게 알릴 수 있는 방식이라면 분명 ‘화려한 휴가’가 가진 의미로 충분하다.

그러나 넘쳐나는 영화평과, 그 시절에 대한 회고도 중요하지만.

저 위에 언급한 쓰레기 생각들을 어떻게 까부수느냐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