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1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부

2. 생물의 진화를 생각하다



 



뷔퐁 Count de Buffon(1707~1788)



프랑스의 자연학자이며 파리 왕립 식물원의 총책임자였던 뷔퐁백작은 귀티가 좔좔흐르는 사진에서 느껴지듯 벼락부자 아버지를 두었던 재벌 2세 출신이었다. 부잣집 가정사가 늘 그렇듯 이 집안도 재산문제로 시끄러웠다. 재혼하려는 아버지와 뷔퐁과의 재산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뷔퐁이 승리하며 많은 재산을 차지한다. 게다가 뷔퐁은 헐랭이 재벌 2세가 아니었다.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여러 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돈이 차고 넘치는 뷔퐁형님이었지만 유별나게도 자연사 공부에 열중 했다. 뭐 느긋하게 자연사 책이나 뒤적이며 지적인 모양새나 풍길 요량인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자연사를 파고들었다. 형님은 1749년부터 1804년에 걸쳐 무려 44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며 다산(?)의 제왕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 중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는 그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이자 과학사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


독창적인 이론은 없지만 풍부한 자료들을 끌어모아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함으로써 


여러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사람들에게 박물학자 붐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뷔퐁형님은 과학 행정가이자 대중적인 활동가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은 종들은 진화한다고 주장했던 초기 진화론자 중 한 분이었다. 형님은 진화를 과거의 튼튼한 조상으로부터 점점 퇴화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창조에 개입하는 것은 오로지 열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지구는 온도가 높았기 때문에 생물의 창조가 더 쉬웠고, 고대의 뼈에서 보듯 당시의 생물 역시 그렇게 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사] 4권에서 당나귀는 말이라는 종에서 진화한(그러니까 퇴보한) 후손이며 


원숭이도 인간의 종에서 진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뷔퐁형님은 돼지의 발가락뼈나 꼬리처럼 쓸모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은 창조할 때 
궁극적인 목적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지적 설계론에 맞불을 놓는다.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뷔퐁형님은 생물의 진화를 인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진화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윈이 진화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듯 진화의 개념은 휠씬 전에 등장했다. 다윈이 본좌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진화의 매커니즘을 훌륭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였던 분이 계셨다. 바로 비극의 주인공 라마르크 형님이시다! 두둥~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드디어 생물학계 최고의 비극의 주인공인 라마르크 형님이 등장하셨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의 메커니즘에 눈을 뜬 훌륭한 형님이지만 ‘기린’이라는 포유동물 하나로 인해 그의 업적과 이론들은 모두 버로우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님은 결코 기린이란 단어 하나로 평가되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라마르크 형님의 진화이론은 비록 틀리긴 했지만 후배 진화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윈 역시 라마르크 형님의 이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님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진화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학계는 진화 메커니즘을 둘러싸고 다윈주의와 라마르크주의로 나뉘어 박터지게 싸우게 된다. 이 싸움에서 다윈주의가 승리하면서 라마르트 형님의 이론은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라마르크 형님은 ‘장-밥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드 라마르크’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별 볼일 없는 군소귀족 출신이었다. 군인, 은행원 등 초반 직업은 과학과는 멀어 보였지만 마음속엔 과학을 향한 알콜 램프를 태우고 있던 분이었다. 은행 일을 하는 틈틈이 의학, 생물학, 기상학을 공부했고 결국 책까지 집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1776년에는 [대기의 주요 현상에 대하여]를,
1778년에는 [프랑스의 식물 flore-francaise]을 출판한다.
이 중 [프랑스의 식물]은 프랑스 식물의 분류에 관한 표준 교재가 되면서
식물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며 학술회 회원으로 선출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식물]의 대박이후 은행일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생물학계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런 라마르크 형님 뒤를 봐준 이가 바로 재벌 2세 생물학자 뷔퐁이었다. 뷔퐁의 달콤한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라마르크 형님은 1790년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 입성하여 곤충과 벌레 분야의 연구 책임을 맡게 된다. 형님은 이 연구에서 무척추동물invertebrates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여 이들을 분류한다.

 

척추가 없는 친구들을 분류하고 무척추동물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다름아닌 라마르크 형님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많았던 형님은 생물학, 기상학, 물리학, 화학 등에 까지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냈다. 그 중에는 라부아지에 본좌님의 이론에 반대되는 물리화학적 이야기를 논하는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형님의 글솜씨가 안드로메다스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형님이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가 돈 안되는 명예직들이어서 일생동안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말년에는 눈이 머는 등 순탄한 일생은 아니었다.


화학계의 본좌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혁명사상에 동조적이었던 라마르크 형님은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된다.

무척추동물을 분류했고 고생물학을 창시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화석 용어를 고안하는 등 후덜덜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역시 가장 손꼽히는 업적은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한 점과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운 점일 것이다.

형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이나 해부학 등의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던 연구들을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여기에 생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동물, 식물, 광물의 3개로 나뉘어있던 것을 동식물을 합친 생물계와 무기계로 재편성했다. 이후 생물계는 일관된 물리화학적 체계를 근거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생기론이라 하여 생물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과 무기체를
이루는 물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마르크 형님도 생명체와 무기체는
엄격히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생기론자는 아니었다.
형님은 생명체든 무기체든
그 구성물질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법칙은 동일하며 단지
이 구성물질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생명체와 무기체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평생 동안 개체가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진화의 방식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 드러난 것이 1809년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인데 바로 책이 라마르크 형님을 지금까지도 기린의 아버지(?)로 기억되게 만든 악몽의 출발점이 된다.

그럼 어째서 [동물철학]은 논란의 장작더미가 되었을까?

라마르크 형님은 [동물철학]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2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환경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필요성에 의해 기관을 창조하고, 그 기관은 사용할수록 강해지며, 사용하지 않을수록 퇴화된다는 용불용설이론과 둘째는 이렇게 획득한 것은 세대를 거쳐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획득형질의 유전설이다.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는 기린의 목을 예로 든다.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기위해 목을 길게 빼 용을 쓰다보니 목이 점점 늘어났으며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유전이 되어 지금의 기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진화이론은 단지 1부의 내용일 뿐이다. 2부는 생명체와 무기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반 생물학, 3부는 심리 생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동물 철학]은 진화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명확히 세우고 이를 연장으로 심리학적 토대까지 세우려고 했던 거창하고 값진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저서였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사람들이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라마르크 형님의 글솜씨는 훌륭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이 너울거렸고 지독한 문어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내용이 접수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생물을 분석하는 데 사용된 물리화학적 이론들은 구닥다리였다. 이미 세상은 화학계의 본좌인 라부아지에의 화학이론들로 갈아탔는데 [동물철학]에는 18세기 화학이론이 적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동물철학]에서 진화와 관련된 제1부만 발췌하여 번역되고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그의 책은 왜곡되어 단편적으로 수용되면서 알멩이는 없어지고 이해를 돕기 위해 등장했던 기린만이 살아남아 구천을 떠돌게 된다.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이론의 차이.
즉 기린의 목은 목적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이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목이 긴 돌연변이가 환경에 더 적합하였고 
그럼으로서 목이 짧은 기린은 도태되고 목이 긴 기린만 살아 남은 것이다.

 


 어쩌면 다윈과 라마르크는 참 비슷한 구석이 많다.
둘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하였고 그 예로 든 동물로 인해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멸종되는 종은 없고 다만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물에서 점점 복잡한 생물로 진화되었으며 이런 메커니즘으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진화의 과정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한 인물이 발끈하고 튀어나오게 된다. 라마르크 형님은 사후에 다윈주의자들에게 시달렸지만 살아생전에도 만만찮은 상대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를 괴롭힌 인물은 형님보다 늦게 파리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온 후배였다. 그는 종은 변하지 않으며 단지 대격변으로 모든 종이 멸종하고 다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명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생물학자였다. 

그는 퀴비에였다.



영진공 self_fish

 

“페어 러브”, 외화내빈의 독립 멜로 영화

최근에 새로 개봉한 세 편의 한국영화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의외의 수확을 기대해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람했습니다. 예전에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나 되는 독립영화가 만들어져서 호평을 얻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었는데 그게 바로 신연식 감독의 <좋은 배우>(2005)였더군요. 포스터에서 보이는 안성기와 이하나의 멜러가 특별히 궁금할 이유는 없었지만 새로운 연출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페어 러브>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안성기와 이하나의 관계는 대놓고 연애를 할 수도 있고 포스터와 제목에서 암시되는 것과는 달리 연애가 아닌 좋은 관계만 유지하는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매우 드라이한 설정과 전개의 영화일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영화의 내용이 어찌되었건 제가 기대했던 것은 엇비슷한 이야기도 아주 맛깔스럽게 가공해내는 신인 감독의 연출 솜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었는지를 우선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물론 영화가 기대했던 바를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페어 러브>는 카메라 수리 전문가인 50대의 독신남이 죽은 친구의 20대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어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분에게서 먼저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시작하고야 맙니다. 주인공 형만(안성기)이 얼토당토 않게 럭셔리한 스튜디오를 차려놓은 미중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관계에 서툴고 그나마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인물로 설정된 것은 참 다행한 출발이었습니다.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친구의 딸을 떠맡아 돌보려고 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편의 멜러 영화로 보았을 때 <페어 러브>는 정체성이 아주 애매모호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담백한 러브 스토리의 세계로 관객들을 데려가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득한 성찰의 편린을 남겨주는 것도 아닙니다. <페어 러브>에서 본격적인 연애의 시간은 뮤직비디오처럼 흘러가고 이별 후의 희망 찾기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지기만 할 뿐입니다. 뜬금없이 시작되었다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깨져버리는 것은 – 사랑이 그렇게 왔다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가 그렇게 뜬금없이 느껴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던 2시간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감독은 분명 자신의 연애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구상해서 각본으로 완성하고 마침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 경험에 비해 연애 영화에 대한 분석, 특히 만드는 이로서 갖춰야 할 화법에 대한 분석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페어 러브>를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안성기를 배우로서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입장입니다만 <페어 러브>에서 안성기는 무난한 수준 이상의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대가 되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가난한 카메라 수리공으로서는 잘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캐스팅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 그러나 이 영화는 안성기의 캐스팅을 통해 투자와 제작 여부가 결정된 경우였을 겁니다 –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안성기는 50대 노총각의 추레함을 연기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배우입니다.

결국 50대 노총각이어야할 형만을 인스턴트 커피 광고를 통해 보던 CF 모델 안성기로 보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캐릭터를 요구한 감독의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안성기가 연기한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캐릭터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사실성도 없고 그래서 몰입도 안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하나의 경우 그야말로 발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역시 이하나의 능력 부족이라기 보다는 배우에게서 제대로된 연기를 이끌어내지 못한 연출가의 능력 부족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모호하고 배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된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때론 연출가의 천재적인 재능이 배우의 발연기를 오히려 새로운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페어 러브>는 그런 작품에 해당되지는 않는 쪽입니다. 형만과 남은(이하나)의 대화는 때론 불필요하게 긴 시간 동안 주절대기만 한다는 느낌을 주고 특히 마지막 엔딩은 한 편의 영화를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는 신인 감독의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에게 <페어 러브>는 마치 형만에게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3년 동안 짜증이 나게 만들던 조카 녀석 같은 영화입니다. 간간히 웃게 만드는 대목도 없진 않았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자기 감정에만 빠져 대화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형만은 뒤늦은 연애로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인지상정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페어 러브>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이 사랑의 아픔 중에 있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무릇 제대로된 멜러 영화란 – 사랑을 소재로 한 예술 영화가 아니라 기왕에 일반적인 기준의 대중 영화이기로 했던 거라면 – 없던 사랑의 감정까지 마구 불러일으키는 묘약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예쁘게만 보이려다 사랑과 연애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면 결국 외화내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잘 알려진 배우들과 저예산 독립영화의 접목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애매한 작품들만 양산하다가 끝날 소지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가십 걸>, 척 진땀 흘리다 …

<가십 걸> 주인공들의 또다른 가십- 세번째 이야기 
척, 진땀 흘리다



* 이 글은 <가십 걸> 실제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 이 글에서 묘사된 산부인과 병원 및 처방에 관한 내용은, 드라마의 배경인 미국의 상황이 아닌한국의 상황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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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가십 걸이야.

매일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이곳이 조용한 날이 있다면, 그게 뉴스감이겠지?

오늘은 남자들이 시끄럽군. 그런데 들려오는 단어가 심상치 않아. 게다가 척의 표정도 아주 구겨져 있네? 대체 누가 왕자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게 만든 건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얘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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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캠퍼스. 계단 한쪽에 블레어가 심복들에 둘러싸여 있다. 무리들 앞엔 커다란 왕 리본 머리띠를 한 여학생이 방실방실 웃으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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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  (찌푸리며) 대체 그 리본은 뭐야? 디즈니랜드에서 미니마우스한테 빼앗아 온 거야?
여학생: 이건 샤넬인데요?
블레어: 샤넬이라구? 그럴 리가. (실눈으로 바라봄.)
여학생: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사실은 모조품이긴 하지만, 이건 진짜 S급이거든요. 거의 차이가 안 나는 건데….
블레어: (한숨)

(심복들, 여학생을 밀어낸다. 풀 죽은 표정으로 가버리는 여학생. 이어서 다른 여학생이 활짝 웃으며 블레어 앞에 선다.)

블레어: (여학생을 슬쩍 훑어보고 고개를 가로저음.)
여학생: (당황해서) 저는 왜 안 되죠? 제가 하고 있는 건 전부 디자이너 제품인데요?
블레어:  (버럭) 그 구두는 작년 봄 모델이잖아!!
여학생: (어이없는 표정으로 심복들에 떠밀려 내려간다.)
블레어:  모조품 머리띠에, 한참 지난 모델에! 저런 애들이 우리 틈에 끼려고 하다니 기가 막히네. 요즘엔 왜 이렇게 쓸만한 애가 없는 거야?

(블레어, 찌푸린 표정으로 교정을 둘러보다가, 척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 일부러 못 본 듯 고개를 돌려 도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블레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휙 지나가 버리는 척. 게다가 잔뜩 구겨진 얼굴이다.)

블레어: (불쾌한 듯)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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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바 한쪽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척.)

블레어: (갑자기 나타나 척의 옆에 앉으며)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 있나 보네?
척: (외면)  
블레어: 천하의 척을 그렇게 심란하게 만들 수 있는 게 누굴까?
척: (웃음) 여왕님이 아닌 다른 여자일까 봐 걱정이 되나 보지?
블레어: (자존심 상한 듯, 척을 쏘아보며 바를 나간다.)

(금세 댄이 들어와서)
댄: (척의 옆에 앉으며 멋쩍게) 안녕?
척: (본 체도 안 함.)
댄:  나도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까, 그렇게 밥맛 없다는 표정은 짓지 말아주면 좋겠다. 길에서 네이트를 만났는데 어딘가 급하게 뛰어가더라구. 너한테 와봐야 하는데 급한 일이 생겼고, 핸드폰도 다른 데 놓고 왔다고. 그러면서 나더러 대신 와 달라더라.
척: (단호하게) 가 봐.
댄: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_-;;
척: 난 네이트를 부른 거지 널 부른 게 아니라고. 가 봐.
댄: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네이트가 신신당부를 해서 말이지. 네가 ‘위급상황’이란 단어를 썼다면서 꼭 가 달라고 부탁하던데, 그러니 무슨 위급상황인지 들어보고나 갈게.
척: 네이트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댄: ‘쓸데없는 짓’이란 소리지? ‘쓸데없는 인간’이 왔다는 말은 아니지? -_-;;

(그때, 두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린다. 문자 알림 벨소리. 동시에 핸드폰을 확인하는 댄과 척.)

[문자]  “어퍼 이스트 사이드 최고의 바람둥이 척, 드디어 발목을 잡힌 걸까?
몇 달 전 파티에서 만나, 단지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임신했다는 뉴스를 입수했어.
무엇이든 남들보다 일찍 손에 넣는 척이, 결국 아이도 일찍 갖게 된 것 같지?
빠른 게 꼭 좋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 맞나 봐.   -가십 걸.”

 

척: (핸드폰을 접으며 잔뜩 화난 표정.)
댄: (물끄러미 척을 바라보다가) 이게 바로 ‘위급상황’이었나 보군.
척: (바를 내리치며) 젠장!!


댄: 정확한 거야?
척: 아직은 몰라. 여자가 그렇게 주장하는 상태지.
댄: 어떻게 할 거야?
척: 사실이 아니란 증거를 찾아서 혼내 줘야지. 일부러 접근한 게 분명하니까… (말끝을 흐림.)
댄: 그냥 속 시원히 말하지 그래? 어차피 알게 된 거.
척: (에라 모르겠다)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오빠란 남자가 집에 찾아왔었어. 동생이 임신했으니까 돈을 내놓으라더군. 그럴 리가 없다고 비웃어 줬지. 당장 꺼지라면서 쫓아냈는데, 그 놈이 가십 걸에 제보한 모양이야.
댄: 그럼 거짓말이 아닌 거 아냐?
척: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100% 사기꾼이야.

(바 문이 벌컥 열리더니 블레어가 뛰어들어옴. 아무 말 없이 척의 뺨을 때리고 다시 쏜살같이 나가는 블레어.)

댄: (으쓱)
척: 환장하겠군.
댄: 그런데 어떻게 사기라고 장담하는 거지?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을 수도 있잖아.  
척: (피식) 이봐, 난 베테랑이야.  I’m Chuck Bass.  계획에 없던 임신 같은 건 내 사전에 없어. 그날 밤 피임도 100% 완벽했다.
댄: 상대방 여자가 피임을 하고 있었어?
척: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날 처음 만나서 하루 잔 앤데.
댄: 그럼… 애무만 하고 삽입은 하지 않은 거야?
척: (피식)
댄: 그럼 피임이 완벽했는지 어떻게 알지? 너 설마…….  
척: ??
댄: 여자들 만나고 다니려고 그 수술이라도 받은 거야?
척: 무슨 수술?
댄: (양손으로 뭔가 질끈 묶는 제스츄어)
척: ??? 그게 뭐야??
댄: ……정관수술 말야.  
척: ……
댄: 안했어?
척:  (빤히…)  
댄: 아니, 난 그냥… 네가 그 여자랑 관계를 가진 게 사실이라면, 그 여자가 임신했다는 게 사기라고 어떻게 장담하냐는 거지. 그게 궁금해서 그래.
척: 가지가지 하는군. 지금 나더러 피임방법이라도 알려달라는 거야?
댄:  강의를 해 보시죠, 척 베스 교수님.
척: (댄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그날 밤, 나는 질외사정을 했다.
댄: (어리둥절) ???
척: 설명이 부족한가?
댄:  지금, 그래서 임신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거야? 질외사정을 했다는 이유로?
척: 그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댄: 그게 100% 피임법이란 말야?
척: (얼굴이 일그러지며) 아니라는 거야?
댄:  뭐랄까, 아까 네가 하도 확신을 하길래, 상대방 여자가 먹는 피임약을 먹고 있든지, ‘루프’라는 자궁내 장치를 하고 있든지, 난자의 통로인 나팔관을 묶는 수술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아예 네가 정관수술을 받았든지…. 넷 중 하나인가 보다 했지. 그런 방법들의 피임 확률은 98% 이상이니까. 하지만 질외사정은… 그건 정말 아니야. 물론 질 내에 사정한 경우보다 임신 가능성이 줄어들긴 하지. 하지만 사정하기 전에 일부 정액에 섞여 분비되는 정자가 있고, 또 실수로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방법이라고. 20%쯤 될걸?
척: ……
댄:  아니, 어떻게 여태 그런 걸 모르고 있었어?  (가십 걸의 문자를 다시 들여다보며) ‘어퍼이스트사이드 최고의 바람둥이 척’이?
척: 그 얘기, 확실한 거야?  
댄: 왜? 내가 꾸며낸 얘기 같아서? 난 거짓말로 남 골탕 먹이는 것엔 취미 없어.
척: 난 지금까지 질외사정만으로도 피임에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댄: 그랬다면 상대 여자가 따로 피임을 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을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언제까지 운에만 기댈 순 없는 거잖아? 더욱이 피임 같은 중요한 문제를 말야.
척: (바를 다시 내리치며)  제길! 응급피임약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댄: (화들짝)   뭐? 응급피임약을 들고 다니면서 여자한테 먹이려고?
척: 왜? 먹으라고 있는 거 아냐?
댄:  너 그게 무슨 약인 줄 아냐? 관계 후 72시간 안에 복용해서,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걸 방해하는 약이야. 응급피임약은 사용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피임 실패율이 높아지고, 호르몬도 고용량이 투여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작용도 커져. 생리주기 장애, 어지러움, 두통, 메스꺼움, 복부 통증 같은 부작용이 수반될 수도 있어. 야, 그 피임약 이름이 왜 ‘응급’ 피임약이겠어? 말 그대로 계획되지 않는 관계, 콘돔이 갑자기 찢어진 경우, 성폭력처럼 원하지 않는 임신 가능성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돼. 그런 걸 들고 다니면서, 관계 후에 꼭꼭 먹이려고? 아서라. 그건 정말 아니다. 하긴 참, 그건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아서 사용해야 하는 약이구나. 어차피 네 맘대로 구할 수도 없겠다;;
척:  그럼 뭐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댄: 아까도 말했지만 피임법엔 종류가 많아.  일단 콘돔이 있지. 콘돔은 쉽게 구할 수 있고 사용이 편리해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야. 들고 다니려면 응급피임약이 아니라 콘돔을 들고 다녀. 그런데 사용을 잘 해야 해. 착용을 제대로 못해 콘돔이 찢어진다거나, 사정이 끝난 후에 콘돔이 빠져서 질 내로 정액이 흘러 들어간다거나 해서 생기는 실패율이 꽤 높은 편이거든. 10~15%까지도 되니까 말야.

페미돔’이란 여성용 콘돔도 있어. 여성의 질 내부를 감싸주어 정자가 들어오는 걸 막는 방법인데, 성병예방에 효과가 크고 피임 효과도 99% 정도로 매우 높아. 하지만 착용하기가 어렵고 콘돔에 비해 가격이 비싼 게 단점이지.

그리고 먹는 피임약이 있지. 그건 성공률이 98%이고, 여성의 몸에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조절해 배란과 생리를 조절하는 약이야. 성감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실패율이 낮아 잦은 관계를 갖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이지. 초창기 피임약이 살이 찌거나 여드름이 나는 등 부작용이 있기도 했는데, 최근 나오는 약들은 그런 부작용이 없고, 임신능력이나 기형발생에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또 ‘루프’ 라고 부르는 자궁내 장치가 있어. 그건 특수한 화학제를 입힌 구리가 감긴 작은 기구야. 여성의 자궁 내에 장착되어 난자와 정자의 수정을 막거나, 수정란이 착상되는 걸 방해하지. 주로 한 명 이상 출산하고 가족 계획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여성들이 장기 피임을 할 때 사용한대. 최근엔 효능이 더 뛰어난 ‘미레나’란 장치도 나왔다지. 5년 동안 매일 일정한 속도로 미량의 여성호르몬을 자궁내막에 방출해서 임신을 막는대.
 네가 질색한 정관수술은 ‘영구불임시술’의 하나야. 남성은 정자의 운반을 담당하는 정관을 자르거나 일시로 묶는 정관수술이 있고, 여성은 난자의 통로인 나팔관을 묶어 수정을 막는 난관수술이 있어. 피임 실패율로만 치면 이 두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긴 해.

살정제’ 란 것도 있어. 관계하기 약 10분 내기 한 시간 전에 질에 삽입 혹은 주입해야 돼. 섹스를 반복할 때마다 다시 넣어야 하고. 이건 질 내에 사정된 정자가 자궁에 들어가기 전에 죽이는 방법인데, 질 안에서 녹는 시간을 감안해야 효과적인데… 평균 실패율이 21%에 이르니 꽤 높은 편이지.


이밖에도 ‘자연주기법’ 이란 게 있어. 배란을 전후로 한 임신 가능시기를 피하는 방법이지. 생리 주기가 정확한 여성에게만 가능하기도 한데, 설령 주기가 정확한 편이라도 심리적인 이유 등으로 배란일이 갑자기 변경되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에만 의존해선 곤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했다는 그 ‘질외사정법’은,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에만 피임을 의존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피임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척:
 듣다 보니 여자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군.
댄: 그런가?
척:  그런데 사실 난, 자기가 알아서 피임약을 먹거나 하는 여자들을 보면 너무 선수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지.
댄: …… 네가 선수 운운하다니 기가 막힌다. -_-;; 나는 오히려 자기 몸을 알아서 책임지는 여자란 생각이 들어서 현명해 보이던데. 오히려 피임에 대해선 여성들이 지금보단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원치 않던 임신을 했을 경우에, 누구보다 여성 자신이 치러야 하는 심적, 육체적 고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당장 관계할 때 ‘피임’이란 단어를 꺼내기 부끄러워서, 또는 평소에 피임을 챙긴다는 게 어쩐지 민망해서 회피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임신이라는 걸 운에 맡기거나 남자에게 맡기기 싫다면, 여성 스스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척: 그렇다면 남자들은 피임에 신경쓸 것 없이, 여자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겠군.
댄: ……어디가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소문 나면 아무도 너랑 안 만나려고 할 거다.
그 렇다고 남자들은 손 딱 놓고 관심 끊고, “나는 저지를 테니 피임은 혼자 알아서 해라” 란 자세는 너무 무책임하잖아? 피임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 대처하면 좋을 거야. 그게 관계에 책임감을 보이는 남자, 바로 매너남 아니겠냐.

척: 오늘 잘난 척 많이 하는군.
댄: (으쓱)  
척: 어떻게 그렇게 피임 전문가가 되셨지?
댄: (당황) 아, 어쩌다가. 제니 때문에 피임약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까;
척: 흠.
댄: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대처할 거야?
척: 뭘??? (다시 정신이 드는 듯) 아, 간단하지.   I’m Chuck Bass.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뒷조사를 하나 해 줘야겠어. 둘이 진짜 남매인지 궁금한 남녀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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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은 오늘 댄에게 여러 가지 피임법에 대해 배웠어. 바람둥이 척이 지금까지 피임법에 대해 저렇게 아는 게 없었다니, 놀랄 노자네. 자칫하면 뉴욕 곳곳에 척의 자손이 나타날 뻔 했어. 상상만 해도 암울한데? 뉴욕이 고담시가 될 뻔 했잖아.

(그새 가까워진 듯 보이는 댄과 척, 간간이 웃기도 하며 술을 마시고 있다. 이윽고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 척이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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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의 상대였던 여자가 임신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대. 연인 관계였던 두 남녀가 남매로 위장하고, 척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거였다는군. 물론 여자도 임신하지 않은 상태였고. 하지만 척, 운 좋은 줄 알라고. 오늘 십년감수했으니, 앞으론 조심하길 바라. 댄의 말처럼 좀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 보라구.

……내가 누군지 아직도 궁금하다고? 그것만은 비밀로 해 둘게. 어쨌든, 모두들 날 좋아하잖아? ^^ 새로운 소식이 생기면 다시 찾아올게. 그때까지 모두들 안녕!

-XOXO, Gossip girl.

영진공 도대체

“더 로드”, 지옥에 떨어져서도 삶을 선택한 사람들

원작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에 ‘마침내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주연은 비고 모텐슨’이라는 소식을 누군가의 흥분된 글을 통해 접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화가 마침내 국내 상영관에 걸렸고 저는 여전히 원작에 대해서는 그저 ‘성서에 비견될 작품’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홍보 문구 정도로만 접한 채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이 인류의 멸망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 아이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투라는 사전 정보도 접했습니다 –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는 미리 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되었거나 영화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거나 눈 뜨고 보기 괴롭다 하더라도 중간에 나가버리시면 마지막 엔딩에서 비춰지는 작지만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실 수가 없으니 부디 끝까지 인내하시길.

대재난의 원인과 사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극중 대화와 플래쉬백을 통해 대략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핵전쟁이나 대자연의 역습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사실 <더 로드>는 대재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 보다는 그 이후의 삶에 집중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위를 통해 세상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고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생지옥이 되어버려 오직 고통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까요. 그런 지옥에서의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정과 선택이 납득이 갈 만큼 영화는 대재난 이후의 세상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재난의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이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죠. <더 로드> 속의 광경은 마치 <매트릭스>(1999) 이전 기계들에 의해 인류 문명이 초토화된 직후의 모습, 시온에 모여 다시 반란과 재건을 꿈꿀 수 있게 되기 이전 인류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동식물이 거의 멸종해버린 상황이니 쓰레기를 줍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운 좋게 숨겨진 식량 창고를 발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리고 병약한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생존을 할 수 있는 극악의 상황입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간단히 구분될 따름이고, 그런 딜레마가 고통스럽다면 미리 죽는 것으로 이른 안식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피어스나 네오와 같은 영웅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 발버둥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란 그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객들의 잠재적인 낙관 의식 때문에 대체로 상징적인 이야기로 보여지게 되고, 좀 더 근원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 로드>는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닌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라 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일어서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비견된다는 코맥 맥카시 원작의 <더 로드>는 사실은 성서 보다는 인본주의 정신의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성서에 비교하자면 구약 보다는 신약이겠지요.

그러나 영화 <더 로드>의 관람 자체가 성서를 읽는 것 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더 로드>는 메시지의 전달에 집착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이야기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내지는 노파심이 든다고 할까요. 사실은 영화가 다소 밋밋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뭐라 탓하기가 어려운 것이 <더 로드>의 화법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차라리 영화 보다는 원작의 풀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원작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원작의 줄거리만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했을 따름인 것 같거든요. 그 장면들 사이사이의 행간을 영화가 재미 없다는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서 <더 로드>는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비고 모텐슨의 헌신적인 연기에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좀 흉칙한 분장이긴 했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는 가이 피어스, 너무 반가웠습니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러나 마지막에 만난 이 베테랑 아저씨는 “어서 길을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작에선 이에 관한 뭔가 충분한 설명이 있을 것 같은데, 영화만으로 접하고 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류 문명의 멸망 이후에 생존과 재건을 위해서는 과거 문명의 잔재를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 정도입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던 놀라운 아버지였지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 히어로는 될 수가 없었던 거죠. 리어커를 훔쳐가던 흑인을 길 위에서 붙잡아 홀딱 벗겨버린 사건도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래저래 마음에 남습니다.

어쨌든 <더 로드>를 보며 인류 문명의 역사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몇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으며 또한 재건의 희망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끼린 이러지 맙시다’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인 룰을 끝내 지키려는 자와 그런 것 쯤이야 진작에 개무시하며 사는 자, 그리고 그와 같은 딜레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로 이뤄진 곳이 아닐까요.

영진공 신어지

소녀시대 성희롱? 누가??

TV에 안티를 몰고다니는 쩌리짱이 있다면,
인터넷에는 안티를 몰고다니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가 있다.

이 양반 만화는 종종 논란을 일으키고, 그 논란만큼 주목을 받는다.

조이라이드가 까이는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그 근저의 원인은 하나다.

이 양반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검열을 별로 하지 않는다.

-= IMAGE 1 =-

검열이 없으니 아무 생각없이 삼성 찬양도 하고,
땅박이 찬양도 하고, 그러다가도 주식 떨어지면 또 삐지기도 하고,
생각없이 일본 좋다고 했다고 돌맞고,
생각없이 기독교에 문제제기 했다가 돌 맞고 …
계속 그런 식이다.

일반적으로 초딩은 자기 생각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니까 그만큼 솔직하지 않던가.

당사자에겐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이 양반 만화를 볼때면 딱 그런 기분이다.
그림 세련되게 그리는 초딩의 만화를 보는 느낌 …

사실 이 양반의 진짜 장점은 그림이 깔끔하고 섹시하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그 생각들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걸러지지 않은 생각이 사람들에게 매우 잘 전달되니, 그만큼 그 반향도 크다.

이번에 소녀시대 만화도 딱 그런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초딩스러운 농담의 결과물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118190517291h9&linkid=4&newssetid=1352

문제는 그게 왜 문제냐는 거다.
<소녀시대>를 포함한 걸그룹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에는 분명히 윤서인이 지적한 면이 있거든. 소녀시대를 순수하게 귀여운 아이들로만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으면 나는 피식 웃을거다.
 
거기에 선정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윤서인의 만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조금씩은 들어있는,
하지만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서 신경쓰이고 거슬리게 만드는 만화다.

나는 그래서 이 양반의 만화가 재미있다.
그리고 이 양반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정말 (그 양반식으로 보기엔) 좋을 거라고 믿는다. 전에 칭찬한 치약 같은 거는 정말 사보고 싶더라는.

어쨌든, 나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를 지지한다.

이 양반이 대단한 인격자여서도 아니고,
이 양반의 만화가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 양반이 정치가도 아니고, 공직자도 아니고 그냥 만화가이기 때문이다.

만화든 글이든 우리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생각대로 쓰고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만화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비판하는 건 좀 그렇다.
저 만화를 보고 “소녀시대 능욕”이라고 이름붙이는 거야말로 정말 오바 아닐까?
저 제목의 기사 찾으려 보니까 그런 제목의 야소설만 잔뜩 뜨더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요즘 대중문화계를 보면 저런 식으로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던가? 적어도 그건 이해되지 않느냔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도 자기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데,
왜 사람들은 화만 내는 걸까?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