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수” : 임창정, 슬픈 목숨의 노래
















우연히 버스에 붙은 영화 “창수” 포스터를 봤어요. 임창정이 껄렁한 변두리 달건이 티셔츠 입고 사람들한테 끌려다니는데 창수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근데 창수가 슬플 창(愴), 목숨 수(壽)예요. 보통 사람 이름에 누가 이런 한자를 써요. 번성할 창에 빼어날 수 정도 쓰지. 그것만으로 이 캐릭터가 설명되더군요. 이 창수라는 놈은 태어난 게 불행한 놈이구나. 그런데 그 역할이 다름아닌 임창정이에요. 임창정은 이 방면에 아주 독보적인 배우죠.




그런데 작품을 개인 화보로 생각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대표로 이범수. 이 분 첫 인상은 강렬했어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차승원 운전기사로 나올 때. 아주 생양아치 단발로 나오죠. “태양은 없다”에서도 그렇죠. 그러다가 지명도가 생기니까 자기가 원빈인 줄 아는 것 같아요. “아이리스” 보면 정보요원이 아니라 모델이더라고요, 연기를 하지 않고 화보를 찍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보면 임창정은 굉장히 영리한 배우예요. 자기가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를 잘 알죠. 시나리오 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아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스카우트”,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등은 그냥 망가지는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그 망가짐 안에 페이소스들이 가득차 있죠.



독재의 ㄷ자도 모르던 대학시절에 대한 페이소스, 가난하고 못 생겨서 뒤처져야 하는 젊은이들의 페이소스, 가난해서 깡패가 됐는데 다시 가난한 이를 수탈해야 하는 이의 페이소스. 망가짐 안에 그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최동훈의 “도둑들”에서 이정재를 보고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는 굉장히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정재에게는 그보다 더 특출난 이미지가 있지요.




배창호의 “젊은 남자”, 김성수의 “태양은 없다”에서의 이정재 말입니다. 그 이정재는 물질적인 욕망에 가득차 그것을 쫓아가는 ‘불나방 날라리’ 이미지예요. 그런데 그 속물적인 욕망이 너무 순수해서 안타까운 캐릭터죠. 또 그래서 남을 속이고 죽여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욕망을 이루지 못 하고 좌절하죠. 속물 날라리지만 좌절하는 날라리이고 애처로운 날라리이지요.



최동훈 감독이 “도둑들”을 개봉하면서 사실은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박신양 역할을 ‘이정재’를 생각했다고 했어요. 저는 옳다구나 했죠. 박신양은 자꾸 조폭이나 건달로 나오는데 도저히 조폭이나 건달, 날라리가 되지 못 해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 날라리 역할을 이정재가 했으면 더 잘 어울렸겠죠.



“도둑들”에서 최동훈은 이정재를 잘 읽었어요. 딱 어울리는 캐릭터를 주었지요. 이정재가 연기한 뽀빠이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가 십년 늙은 버전이에요. 개날라리에 똥폼 잡으며 힘껏 잔머리 쓰고 대가리 굴려봐야 선수들을 못 당하지요.



전 영화에서 캐스팅이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고, 캐스팅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데 임창정은 ‘슬픈 목숨 달건이’ 역할로는 보지 않아도 최고이지요. 그래서 살펴보니 감독이 각본까지 써서 입봉하는 작품이더라고요.




전 그러면 놀라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암튼 그런 말을 했지요. “모든 감독은 한 편의 걸작을 갖는다. 그건 바로 자기 이야기다.” 각본까지 쓴 거 보니, 거기다 입봉작이다 보니 아마 위의 말이 잘하면 이 작품에 들어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창수”의 시놉을 보니까, 태어난 게 불쌍한 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도 저는 매우 매력적으로 느낍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죠. 사랑해서는 안 되는 철천지 원수 집안.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 귀한 것이 됐고 고전이 되었죠.



“레이디 호크”도 있었어요. 서로 만날 수가 없어요. 여자는 낮에 매로 변하고, 남자는 밤에 늑대로 변하지요. “리벤지”도 생각납니다. 조폭의 첩을 사랑한 케빈 코스트너. 사랑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디 인간사가 그렇게 되나요? 댓가를 받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댓가는 아주 처참했지요. 그래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지요.



“여자의 남자”도 있었어요.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소설이 원작이었죠. 영화였나 드라마였나 암튼 김혜수가 나오는 … 여자가 대통령의 딸이었지요. 도저히 사랑할 신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은 시도 때도 없이 주제도 꼬라지도 안 보고 찾아와요.



“데미지”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아들의 아내, 며느리한테 사랑에 빠지지요.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주인공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리고 좌절시키고 죽이는데도 끊임없이 변주돼요. 조건, 배경, 재산, 학벌 따지는 안전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큰 코 다치는데 그게 사람 뜻대로 되지 않지요. 그게 사랑이지요.





영화를 꿈공장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에 꿈이며 그것들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성품처럼 찍어대니 공장이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꿈이지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나 “노팅힐”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꿈이겠지요. 하지만 “창수”는 제목만 봐도 해피엔딩일 리가 없죠.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은 시궁창 현실에 꼬라박히겠지요. 저는 그 꿈이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하게 좌절될지 기대가 돼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꾸는 게 좋을지,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



영화 결말에 가서 창수는 좌절된 꿈이더라도 행복해 할까요? 좌절된 꿈이기에 불행해 할까요? 그래서 “창수”라는 영화가 궁금해요.



저는 창수가 행여 목숨을 내놓더라도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랑이니까요.








영진공 철구



































































“컨저링”, 안전하고 가벼운 공포영화(?)

 

 


 


 


<컨저링>(Conjuring, 2013) 을 거의 개봉 직후 주말 낮에 봤는데, 주변에 ‘아줌마’ 관객들이 많았다는 게 흥미로웠다. 대체로 호러영화 하면 생각나는 관객들은 그 장르 매니아들이나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하는 젊고 풋풋한 연인들이니까.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라는 카피가(원래 미국에서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였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기존 호러 관객뿐 아니라 광범위한 관객층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가 가진 안전함과 가벼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상당수 포함돼 있으니 이를 피하고 싶은 분들은 이쯤에서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고 …


 


 


 



다분히 낚시성의 포스터 이미지


 


 


자, 나는 지금 ‘안전함’과 ‘가벼움’이라는, 언뜻 이 영화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단어들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컨저링>은 호러영화 중에서도 전형적인 폴터가이스트 혹은 ‘귀신들린 집’ 장르이다. 이사온 날부터 집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있고 다섯이나 되는 딸들 중 예민한 아이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헛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집에 귀신들만 있느냐. 그렇지 않다. 이 귀신들은 실은 귀신 중에서도 대빵, 무려 ‘세일럼의 마녀’ 배스시바의 귀신에 희생된 이들이다.


 


세일럼의 마녀는 사타니즘에 심취해 제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고, 이후 귀신이 되어 집에 거주하면서 이 집에 이사오는 엄마들을 조종해 제 아이를 살해하게 하고, 그렇게 새끼 귀신들을 파생시킨다. 그리하여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엑소시즘이 벌어지는데, 여기에서 슬쩍 크리스찬 호러(이른바 <오멘>, <엑소시스트> 등으로 대표되는)의 특징들이 얹힌다.


 


그런데 이 영화의 첫 시작은,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취했던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 에피소드는 또 ‘저주받은 인형’ 이야기다. 이쯤 되면 폴터가이스트에 ‘귀신’과 관련된 거의 모든 호러의 서브장르들이 이것저것 짬뽕됐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제임스 완 감독은 슬래셔와 스플래터만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는, 신체 훼손 장면은 꺼리지만 호러영화에는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카피를 전면에 내걸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전함’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무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는다는 데서 완성된다.


 


 


 



직캠 공포영화의 원조, “블레어 위치”(1999)


 


 


 


마녀의 조종을 받아 제 아이를 죽일 뻔한 어머니는 엑소시즘 후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품에 안는다. 위험한 시험대에 올랐던 모성 역시 결국 악령의 저주를 이겨내고, 이러한 모성의 승리는 페론 가족뿐 아니라 워렌 가족에게도 성취된다. 실존인물인 미국의 유명한 퇴마사 부부 에드와 로레인 워렌 부부가 가장 사악한 케이스라고 밝혔음에도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무사히 사건이 해결된다. 더욱이, 이런저런 서브장르의 특징들을 별 고민 없이 마구 가져와 뒤섞음으로써 전혀 웃기거나 가볍지 않음에도 메타-장르적 특성을 띄며 특유의 ‘가벼움’의 특징을 획득한다.


 


메타-호러로서의 특징 외에, <컨저링>은 일반적으로 호러영화들이 저예산에서 기인하는 ‘무명배우의 기용’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예외적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베라 파미가는 우리에게 하정우와 함께 출연한 <두 번째 사랑> 외에도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디파티드>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익숙한 배우이며, 제임스 완 감독과 <인시디어스>에서 작업한 바 있는 패트릭 윌슨 역시 연극 무대에서부터 실력을 다져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리틀 칠드런>에서 케이트 윈슬렛과의 공연, <왓치맨>에서의 나이트 아울 역으로 인지도가 있는 배우이다. 무엇보다도 배스시바의 귀신이 빙의된 페론 가족의 엄마 역을 맡은 릴리 테일러는 메리 해런(<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아벨 페라라(<어딕션>), 로버트 알트먼(<숏 컷>) 등과 함께 작업한 바 있으며 전세계 작가-감독들과 독립영화 감독이 탐을 내는 실력파 배우이다.


 


‘귀신들린 집’ 장르 특성상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대신, 집 내부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전반적으로 꽉 찬 느낌을 주는 것도 <컨저링>이 가진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우들이 집 안에 숨겨진 비밀통로 등을 통해 수직으로 낙하하거나 굴러떨어질 때의 추락감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불현듯한 속도감을 주며 주위를 환기시키곤 한다.


 


 


 



엑소시즘이 등장한다면 이런 장면이 필수죠!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 일행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본, 정통 호러영화였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더욱이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스트레스가 덜했다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메타-호러를 오히려 ‘정통적’이라 느꼈던 것도 재미있지만, 이는 아마도 <블레어 윗치> 시리즈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이후로 조류가 크게 바뀐 듯한 호러영화 씬에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옛 장르들의 혼성이 주는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컨저링>이 주는 폴터가이스트 장르의 공포가, 한국에서 얼마 전 흥행했던 <숨바꼭질>이 주는 공포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배급운을 잘 탄 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가장 안전해야 할 보금자리가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고, 아이들의 보호자여야 할 부모(중 한 명)이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며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는 지금 우리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다.


 


 



ps1. 우리나라 극장판 자막에서 ‘배스시바’로 표기한 그 이름은, 서구에서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되는 예를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경에서 바로 다윗 왕이 목욕하는 모습에 홀려 원래 남편이던 부하를 사지에 내몰아 죽게 하고 뺏었다는 그 ‘밧세바’이다. 보통 밧세바는 다윗왕과의 이 에피소드로 유명하지만, 다윗왕 말년에 보면 반역 의지가 있었던 넷째 아들을 남편에게 일러바쳐 반역을 막고, 둘째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본인이 직접 건의하여 넷째를 처형시켰다고 한다. 왕비 – 대비마마의 입장에서는 할 만한 처신이지만 ‘아들을 죽인 어미’인 것도 사실이다.


 


ps2. ‘세일럼의 마녀’는 ‘마녀사냥’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리키는 대명사지만 이 영화에선 세일럼에 진짜 마녀가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마녀사냥의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어느 새 마녀의 고향이 돼 버린 세일럼에 애도를 …


 


ps3. 배스시바 역으로 나오는 이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조셉 비샤라인데, 그는 제임스 완과 함께 한 전작 <인시디어스>에서도 귀신으로 출연한 바 있다.


 


 


 


 


영진공 노바리


 


 


 


 


 


 


 


 


 


 


 


 


 


 


 


 


 


 


 


 


 


 


 


 


 


 


 


 


 


 

[그 영화 그 노래] “레옹”, Shape of My Heart

 

 


 


 



 


 


요즘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1994년에 나는 무슨 일을 하곤 했었나 곱씹어다가 문득 그때 개봉한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그 영화의 제목은 바로 “레옹”. 뤽 베송 감독, 장 르노, 게리 올드만, 그리고 어린 시절 나탈리 포트만이 열연한 영화로 똥기마이 가득한 낭만 킬러가 주인공이다. 


 


말하자면 순정마초 킬러와 소녀 수제자(?)라는 마치 무협지와도 흡사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전 세계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얻었고 흥행성적도 아주 좋았다. 그리고 홍콩협객총격물의 묘한 향내가 함께 겹쳐있는 이유로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었다.


 


이후 레옹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고, 수많은 아류작이 뒤를 이었고, 지난 4월에는 개봉 20주년을 맞아 디렉터스 컷이 HD로 다시 개봉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에 삽입되어 영화 못지않게 큰 히트를 한 곡이 바로 스팅(Sting)의 “Shape of My Heart”. 실은 그 이전에 발표되어 많은 인기를 모았던 곡이지만 영화에 삽입되면서 스팅을 모르던 이들에게 까지 스팅을 널리 알리기도 한 곡이다.


 


마음이 스산할 때 들으면 딱 좋은 이 노래. 마침 눈도 오고 날씨도 그러해서 준비해 보았으니 함께 감상해 보시죠.


 



 



공동 작곡자인 도미니크 밀러와 함께 …


He deals the cards as a meditation
And those he plays never suspect
He doesn’t play for the money he wins
He doesn’t play for the respect
He deals the cards to find the answer
The sacred geometry of chance
The hidden law of probable outcome
The numbers lead a dance

그는 명상을 위해 카드를 돌리지,
그는 상대방을 전혀 의심하지 않지,
그는 돈을 따기 위해 게임을 하지는 않아,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하지는 않아,
그는 해답을 찾기 위해 카드를 돌리지,
이길 수 있는 기회의 신성한 기하학,
나올 수 있는 결과의 숨겨진 법칙,
숫자들이 춤을 추네,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스페이드는 병사의 칼을 의미하지,
클로버는 전쟁 병기를 의미하지,
다이아몬드는 이 게임에서 돈을 의미하지,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하트)의 모양은 아니야,

He may play the jack of diamonds
He may lay the queen of spades
He may conceal a king in his hand
While the memory of it fades

그는 다이아몬드 잭으로 플레이하기도 하지,
그는 스페이드 퀸을 내놓기도 하지,
그는 손 안에 킹을 들고있기도 한다네,
그 기억들이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And if I told you that I loved you
You’d maybe think there’s something wrong
I’m not a man of too many faces
The mask I wear is one
Those who speak know nothing
And find out to their cost
Like those who curse their luck in too many places
And those who smile are lost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 말하면,
그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겠지,
난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난 단 하나의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드는 사람은,
반드시 댓가를 치르게되지,
너무 많은 곳에서 자신의 행운을 바라는 이들,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이들,

I know that the spades are the swords of a soldier
I know that the clubs are weapons of war
I know that diamonds mean money for this art
Bu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That’s not the shape of my heart

스페이드는 병사의 칼을 의미하지,
클로버는 전쟁 병기를 의미하지,
다이아몬드는 이 게임에서 돈을 의미하지,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하트)의 모양은 아니야,
그건 내 마음의 모양이 아니야,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하는 좀 다른 버전


노래 하나로는 좀 섭섭할 듯 하여 준비한,

Lute 연주가 곁들여진 “Fields of Gold”.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 삽입곡이다.

 


영진공 이규훈


 


 


 


 


 


 


 


 


 


 


 


 


 


 


 


 


 


 


 


 


 


 


 


 


 


 


 


 


 


 


 

“토르: 다크 월드”, 왜 토르를 그저 그런 영웅의 틀에 넣었을까?

 

 


 


 



 


 


<토르: 다크 월드>(이하 <토르 2>)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1편의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아닌, ‘드라마’ 감독인 앨런 테일러가 연출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드라마와 영화는 엄연히 매체가 다르고 문법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언론시사회가 있었던 날로 짐작되는데, 트위터에 속속 “1편보다 재밌고 유머도 깨알 같다”는 기자들의 한줄평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개봉 전 <토르 : 천둥의 신>(이하 ‘<토르 1>’)과 <어벤져스>까지 복습하고서, 수요일에 개봉한 영화를 바로 그 다음 날 보고 왔다. 허나 적어도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다 “더 재밌다”는 <토르 2>가 내게는 왜 실망스럽거나 재미없는 게 아닌 ‘당혹스러웠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 강력한 포일러가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다크엘프족들의 우주선이 아스가드를 공격할 때 가장 당황했다. 고대 신화세계를 기반으로 장구한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그 중심축에 놓고 현대와 타임슬립물을 변주하는 것 같았던 <토르>가, 2편에 와서는 <스타워즈> 뉴 트릴로지와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우리가 익히 본 우주선들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일종의 우주활극 장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벤져스>에서 이미 공중전을 벌이는 우주인들이 등장했던 이상, 그리고 그 종족을 로키가 끌고 온 이상 <토르 2>에서 ‘날아다니는’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건 논리적으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르 2>에서도 아스가드인들은 여전히 육중한 갑옷을 입고 지상에서 칼과 창 혹은 도끼와 방패를 들고 주로 지상전, 육박전을 벌이며 싸운다. 그러나 ‘토르’가 아스가드에서 특별한 존재였던 건 그가 묠니르의 힘을 통해 거의 유일하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발을 꽉 붙였던 아스가드인들, 바이프로스트에서 떨어지면 추락해 죽는 신들을 보았는데, 우주선이라니 … 어쩌면 이 우주 활극이 진짜 <토르> 시리즈에 예정돼 있던 길이었고 1편의 고대 영웅신화적 서사가 오히려 예외적으로 선택된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의 ‘토르’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어벤져스의 영웅 중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토르 1>의 매력, 그리고 <토르> 시리즈의 세계를 처음 세팅하며 제시했던 그 아스가드의 세계의 매력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의 변화는 다소 ‘뒷통수’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비단 장르나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토르>의 주인공은, 아무리 로키가 활약한대도 결국은 ‘토르’이다. 우리는 이 ‘아버지 힘과 자신의 직위를 믿고 까불던’ 혈기방장하고 천둥벌거숭이던 작자가 어떻게 책임감을 배우고 통치군주의 진짜 조건을 익히며 ‘자기 희생’의 의미를 알게 되며 진지하게 성장하는지 1편을 통해 지켜봤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은 토르는 그저 멍청하고 힘 잘 쓰는 바보 마초영웅이 아니다. 애초 최고의 전사이기도 했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헌신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이는 여러 차례 자신을 배반하고 (물리적으로, 말 그대로) 자신에게 칼을 꽂은 로키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도 토르는 로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어벤져스>에 가서도 속 썩이는 동생 때문에 괴로워할지언정 여전히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 토르가 <토르 2>의 로키에게는 불신을 넘어 증오도 내비치는 것 같다. 이건 우리가 알고 사랑하던 토르가 아니다. 그가 로키에게 번번이 속고 당했던 것은 그가 멍청하고 로키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속아’주었’고, 어느 정도는 로키의 선한 본성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하고 순진한 믿음이 바로 내가 사랑한 토르였다.


 


 


 



 


 


 


반면 로키는, 형 못지 않는 허세작렬에 과시적인 성격, 그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며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지, <토르 2>에서의 모습처럼 시종일관 깐죽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원래의 로키가 아닌, 아이언맨의 성격이 이식된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로키가 아무리 매력적인 악당이고 주인공 중 하나인들, <토르 1>의 인기가 로키 한 사람만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르 2>를 보면, 마블 스튜디오는 높아져간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예상하지 못한) 로키의 인기가 <토르 2>를 구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확실히 <토르 1>에서 형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심하게 형을 모함했던 로키는 <어벤져스>를 거치면서 어벤져스의 영웅 모두를 상대한 전 우주적인 악당으로 우뚝 섰다. 토르와 크리스 헴스워스 못지 않게 로키와 톰 히들스턴을 좋아하기에 로키의 분량이 늘어난 것도 그에게 강력한 드라마를 부여해준 것도,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형 토르와 손을 잡는다는 설정도 좋다. 그러나 토르와 로키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 디테일은 턱없이 부족하고 얄팍하다.


 


<토르 1>이 ‘토르 시리즈를 런칭시켜 <어벤져스>에 토르와 로키를 합류시키는 가교가 된다’는 임무를 띄고 고대 영웅신화 전략을 택하면서도 그 둘의 관계를 비교적 밀도있게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에서 이 둘이 협력관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얄팍하게 그려진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토르 1> 개봉 당시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그닥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안 했는데, 역설적으로 <토르 2>를 보고 <토르 1>이 얼마나 좋은 연출이었던가 새삼 상기하게 된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토르>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해 보는 거야!” <어벤져스>의 영웅들 중 토르는 이 지상이 아닌 우주에서 날아온 (반)신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고대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전사였고, 그럼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지구뿐 아니라 우주의 아홉 세계를 보호하는 막강한 존재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왕국을 위해 그 사람과의 이별을 스스로 선택한 남자였다. 헐크나 아이언맨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역사와 사연과 힘과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토르 2>로 인해, 그는 이제 <어벤져스>에 복무하고자 하는 한낱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가 아무리 말 그대로 ‘우주적 스케일’의 재난영화로서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한들, 그 스펙터클의 쾌감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영진공 노바리


 


 


 


 


 


 


 


 


 


 


 


 


 


 


 


 


 


 


 


 


 


 


 


 


 


 


 


 


 


 


 


 

퀸시 존스와 홍콩무협영화의 관계를 알아보자!

 

 


 


 



 


 


 


많은 이들에게 좋아하는 홍콩 영화를 꼽으라 물으면 첫 번째로 드는게 “정무문”이다. 그런데 같은 1972년에 개봉했고 제작은 약간 더 빨랐던 영화가 있는데 그게  “철인”(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 두 영화는 영화 속에 퀸시 존스 음악을 그냥 가져다 썼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그 시절이라 그랬다고 생각된다. 사실 저작권이라는게 이슈가 된 건 요 몇 년 전이라는 걸 유념하자.


 


여튼, 이야기의 시작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NBC에서는 “아이언사이드”라는 제목을 단, 꽤 흥미로운 설정의 TV 드라마 시리즈가 시작된다.(2013년에 리메이크 되었다가 바로 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20년 베테랑 형사, Robert T. Ironside가 악당이 고용한 스나이퍼의 총에 맞아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악을 처단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불굴의 의지로 악을 처단하는 … 뭐 수많은 미국식 히어로물 영화와 코믹스에서 뻔하게 나오는 얘기이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1975년까지 시리즈가 지속되었으니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테마 음악을 거장 퀸시 존스가 맡았다. Quincy Jones는 뭐 설명할 필요도 없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고도 넘치는 아프리카계 미국음악인의 진정한 큰 형님이라 할 수 있겠다. 1933년 생이신 형님은, 재즈 음악가로 특히 뛰어난 트럼펫터 이기도 하고, 팝 음반 프로듀서 / 작곡가 / 편곡자, 영화음악 작곡가 등등 팔방미인 그 자체다.


 


 



“아이언 사이드” 테마뮤직, 영화 “킬빌”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전설적인 비브라폰 연주자인 Lionel Hampton의 밴드에서 19살에 데뷔했고, 23살 무렵부터 Dizzy Gillespie 밴드에서 연주자겸 편곡자로 활약을 시작한다. 1964년부터는 할리우드 영화의 스코어 작곡을 시작했고, Sarah Vaughan, Frank Sinatra, Ella Fitzgerald, Dinah Washington 등의 앨범에서 편곡자로 맹활약 했다. 소울과 훵크를 재빨리 흡수하면서 트랜드 리더로 부상했고, Michael Jackson의 “Off the Wall”, “Thriller”, “Bad”와 ‘We Are the World’의 프로듀서로 더 할 나위 없는 명성을 누린다.


 


그렇다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활약이 없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퓨전 재즈의 한 장을 장식한 The Dude, 재즈 힙합이라는 장르를 연 Back On the Block, Q’s Jook Joint로 재즈의 한계를 확장하였다. 작곡파트너 Bob Russell과 함께 아카데미 영화 주제가와 스코어 부분에 후보가 되면서 아카데미 영화 음악 관련 최초의 흑인 후보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퀸시는 재즈로 경력을 시작, 훵크와 소울, 팝, 힙합을 아우르는 음악 장르에 라이브 무대와 음반, 스크린을 오가며 매체를 가리지 않고 흑인 음악을 설파해 온 분이다.


 


중요한 건, 도대체 퀸시 존스 형이 맡은 미국 드라마의 음악이 왜 동시다발적으로 홍콩영화에 차용되었는가하는데 있다. 그 열쇠는 이소룡이라는 존재에게 있다. “그린 호넷”에 1년간 출연하면서 드라마의 인기와 상관없이 Bruce Lee라는 배우는 무술의 대가로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런 그가 가라데 선생으로 “Ironside” 1시즌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다. 출연 시간도 3분여뿐이었다. 그런데 부르스 리의 인기는 바다 건너 그의 출신지 홍콩에서 메가톤 급으로 불어갔던 것이다.


 


이소룡은 미국서 단역 혹은 조연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홍콩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는데, 바로 “당산대형”이다. 대박인 것은 물론이고, 덤으로 그가 미국서 출연한 작품들도 홍콩을 휩쓴다. 그 중에 “아이언사이드”도 있었다. 일본 무술 선생이긴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쿵푸, 가라데 등등의 무술은 다 그냥 동양 거였다. 그래서 브루스 리는 진지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한 무술 사범으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중국인의 도시지만, 영국의 소유였던 홍콩에서 미국 TV에 신비로운 무도인으로 등장한 브루스 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덕분에 “아이언사이드”도 함께 떴다. 그냥 뜬 정도가 아니라 주제가까지 떴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키는 신디사이저와 관악기와 타악으로 만들어진 박진감 넘치는 곡 전개까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1981년 일본 부도칸 공연 실황

 


 


 


재즈 뮤지션 시절 퀸시 존스는 브라질 음악에 빠졌었고, 덕분에 다양한 라틴 타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했다. 동시에 선구적으로 신디사이저를 받아들였던 덕분에 그의 음악에는 기존 클래식 중심의 스코어 작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정무문”에서 긴박감 넘치는 이소룡의 모습이 나올때면 퍼커션을 사용한 ‘Ironside’ 테마 음악의 일부가 수시로 등장한다. 나아가 정창화 감독이 홍콩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으로 활동하며 만들었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 (Five Fingers of Death)”에도 그 음악은 수시로 등장한다. “Five Fingers of Death”는 “King Boxer”라는 제목으로도 상영되었고,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쿵푸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철사장을 다룬다.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아시아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지금 봐도 그냥 재밌다. 다수 잔인한 장면이 있으나, 이 장면은 당시 분장력의 한계로 오히려 재밌기까지 하다. 거칠지만 그래서 힘이 느껴지는 풀샷-클로즈업 샷을 오가는 몽타주 기법은 꽤 박진감 넘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조지호가 철사장을 시전 할 때, 손가락이 벌개지면 등장하는 음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Kill Bill”에서 우마 서먼이 위험에 맞닥뜨리거나, 중요한 기억이 스칠 때 등장하는 “삐이뾰옹 삐이뾰옹” 하는 음악이 바로 조지호 – 나열이 철사장을 시전하기 시작할 때 등장하는 음악이다. 물론 원곡은 퀸시 존스가 만든 “Ironside’다. 그런데 재밌는 건 영화 “킬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음악을 삽입하며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은 미국 드라마 “아이언사이드”가 아니라 홍콩 영화이자 한국 감독 정창화가 연출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었다.


 


그 이유는 영화 “킬 빌”이 시작할 때, 배급사 로고에 미라맥스 다음으로 신기한 회사 로고가 뜨는 걸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그 유명한 “SHAW SCOPE” 로고가 영화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쇼브라더스는 “킬 빌”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준 쇼브라더스의 1960,7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의 표시로 영화 앞에 쇼브라더스의 로고를 넣은 것이죠. “정무문”은 골든 하베스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입니다. 같은 음악이 “아이언사이드”, “정무문”,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모두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의 오마주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게로 향합니다. 또 한 가지,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이 꼽은 10편의 영화 중 하나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듭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2005년 무려 칸 영화제에서 칸 클래식으로 선정되어,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재상영되었고 정창화 감독의 무대 인사 및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퀸시 존스는 자신의 곡을 무단으로 퍼간 1972년 작품 두 편 어디로부터도 저작권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죠.


 


 



퀸시횽아는 쿨 가이!

 


 


실은 두 작품 모두 퀸시 존스가 드라마 “아이언 사이드”에 넣었던 스코어 트랙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닙니다. 당시로선 그 음원을 구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겠죠. 그래서 홍콩에서 재녹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화끈한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퀸시 존스는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대로 한 곡에서도 내지르기만 하지 않거든요. “Ironside”도 초장에 사이렌 소리를 필두로 냅다 내지른 후, 바로 전자 피아노와 플루겔 혼, 스네어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관악이 터지며 완급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이 곡을 연주하는 홍콩 연주자들은 다릅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오프닝 시퀀스 1분이 모두 퀸시 존스의 곡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요, 처음부터 관악과 심벌 소리로 끝까지 내지릅니다. 사실 1970년대 류복성 아저씨의 “류복성과 신호등”을 포함해서 몇 장 없는 한국 재즈 음반을 들어봐도 비슷한 현상이 보입니다. 미국 재즈의 스탠더드를 연주하고 있는데, 원곡에서 들을 수 있던 풍부한 소리는 다 사라지고,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음악이 되는거죠. 이건 연주자와 편곡자가 달라서이기도 하고, 녹음 기술의 한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향숙이의 추억!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경우에도 원곡이 가진 풍부한 전자악기와 베이스 사운드를 살리기에는 홍콩의 녹음 기술이 그닥 뛰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덕분에 좀 더 화끈한 음악이 된 장점이 있었다고 봐야죠.  퀸시 존스는 훗날,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오마주를 바친 타란티노 덕분에 “Kill Bill”의 OST에 “Ironside”를 실으며 저작권료를 챙길 수 있었답니다. ^^


 


그러니까 세줄로 요약하자면,


1. 퀸시 존스는 전혀 의도치 않게 홍콩무협영화에 자신의 음악을  증정(?)


2. 그 결과 이소룡이라는 시대의 맹주가 보여주는 멋진 액션을 음악으로


   뒷받침하고,


3.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아시아 영화 최초 미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쿵푸 액션 영화의 뒷배를 확실히 봐준 셈이 되었다.


 


끝.


 


 


 


영진공 헤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