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 존스와 홍콩무협영화의 관계를 알아보자!

많은 이들에게 좋아하는 홍콩 영화를 꼽으라 물으면 첫 번째로 드는게 “정무문”이다. 그런데 같은 1972년에 개봉했고 제작은 약간 더 빨랐던 영화가 있는데 그게  “철인”(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 두 영화는 영화 속에 퀸시 존스 음악을 그냥 가져다 썼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그 시절이라 그랬다고 생각된다. 사실 저작권이라는게 이슈가 된 건 요 몇 년 전이라는 걸 유념하자.

여튼, 이야기의 시작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NBC에서는 “아이언사이드”라는 제목을 단, 꽤 흥미로운 설정의 TV 드라마 시리즈가 시작된다.(2013년에 리메이크 되었다가 바로 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20년 베테랑 형사, Robert T. Ironside가 악당이 고용한 스나이퍼의 총에 맞아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악을 처단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불굴의 의지로 악을 처단하는 … 뭐 수많은 미국식 히어로물 영화와 코믹스에서 뻔하게 나오는 얘기이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1975년까지 시리즈가 지속되었으니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테마 음악을 거장 퀸시 존스가 맡았다. Quincy Jones는 뭐 설명할 필요도 없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고도 넘치는 아프리카계 미국음악인의 진정한 큰 형님이라 할 수 있겠다. 1933년 생이신 형님은, 재즈 음악가로 특히 뛰어난 트럼펫터 이기도 하고, 팝 음반 프로듀서 / 작곡가 / 편곡자, 영화음악 작곡가 등등 팔방미인 그 자체다.

“아이언 사이드” 테마뮤직, 영화 “킬빌”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전설적인 비브라폰 연주자인 Lionel Hampton의 밴드에서 19살에 데뷔했고, 23살 무렵부터 Dizzy Gillespie 밴드에서 연주자겸 편곡자로 활약을 시작한다. 1964년부터는 할리우드 영화의 스코어 작곡을 시작했고, Sarah Vaughan, Frank Sinatra, Ella Fitzgerald, Dinah Washington 등의 앨범에서 편곡자로 맹활약 했다. 소울과 훵크를 재빨리 흡수하면서 트랜드 리더로 부상했고, Michael Jackson의 “Off the Wall”, “Thriller”, “Bad”와 ‘We Are the World’의 프로듀서로 더 할 나위 없는 명성을 누린다.

그렇다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활약이 없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퓨전 재즈의 한 장을 장식한 The Dude, 재즈 힙합이라는 장르를 연 Back On the Block, Q’s Jook Joint 로 재즈의 한계를 확장하였다. 작곡파트너 Bob Russell과 함께 아카데미 영화 주제가와 스코어 부분에 후보가 되면서 아카데미 영화 음악 관련 최초의 흑인 후보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퀸시는 재즈로 경력을 시작, 훵크와 소울, 팝, 힙합을 아우르는 음악 장르에 라이브 무대와 음반, 스크린을 오가며 매체를 가리지 않고 흑인 음악을 설파해 온 분이다.

중요한 건, 도대체 퀸시 존스 형이 맡은 미국 드라마의 음악이 왜 동시다발적으로 홍콩영화에 차용되었는가하는데 있다. 그 열쇠는 이소룡이라는 존재에게 있다. “그린 호넷”에 1년간 출연하면서 드라마의 인기와 상관없이 Bruce Lee라는 배우는 무술의 대가로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런 그가 가라데 선생으로 “Ironside” 1시즌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다. 출연 시간도 3분여뿐이었다. 그런데 부르스 리의 인기는 바다 건너 그의 출신지 홍콩에서 메가톤 급으로 불어갔던 것이다.

이소룡은 미국서 단역 혹은 조연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홍콩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는데, 바로 “당산대형”이다. 대박인 것은 물론이고, 덤으로 그가 미국서 출연한 작품들도 홍콩을 휩쓴다. 그 중에 “아이언사이드”도 있었다. 일본 무술 선생이긴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쿵푸, 가라데 등등의 무술은 다 그냥 동양 거였다. 그래서 브루스 리는 진지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한 무술 사범으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중국인의 도시지만, 영국의 소유였던 홍콩에서 미국 TV에 신비로운 무도인으로 등장한 브루스 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덕분에 “아이언사이드”도 함께 떴다. 그냥 뜬 정도가 아니라 주제가까지 떴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키는 신디사이저와 관악기와 타악으로 만들어진 박진감 넘치는 곡 전개까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1981년 일본 부도칸 공연 실황

재즈 뮤지션 시절 퀸시 존스는 브라질 음악에 빠졌었고, 덕분에 다양한 라틴 타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했다. 동시에 선구적으로 신디사이저를 받아들였던 덕분에 그의 음악에는 기존 클래식 중심의 스코어 작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정무문”에서 긴박감 넘치는 이소룡의 모습이 나올때면 퍼커션을 사용한 ‘Ironside’ 테마 음악의 일부가 수시로 등장한다. 나아가 정창화 감독이 홍콩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으로 활동하며 만들었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 (Five Fingers of Death)”에도 그 음악은 수시로 등장한다. “Five Fingers of Death”는 “King Boxer”라는 제목으로도 상영되었고,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쿵푸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철사장을 다룬다.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아시아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지금 봐도 그냥 재밌다. 다수 잔인한 장면이 있으나, 이 장면은 당시 분장력의 한계로 오히려 재밌기까지 하다. 거칠지만 그래서 힘이 느껴지는 풀샷-클로즈업 샷을 오가는 몽타주 기법은 꽤 박진감 넘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조지호가 철사장을 시전 할 때, 손가락이 벌개지면 등장하는 음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Kill Bill”에서 우마 서먼이 위험에 맞닥뜨리거나, 중요한 기억이 스칠 때 등장하는 “삐이뾰옹 삐이뾰옹” 하는 음악이 바로 조지호 – 나열이 철사장을 시전하기 시작할 때 등장하는 음악이다. 물론 원곡은 퀸시 존스가 만든 “Ironside’다. 그런데 재밌는 건 영화 “킬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음악을 삽입하며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은 미국 드라마 “아이언사이드”가 아니라 홍콩 영화이자 한국 감독 정창화가 연출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었다.

그 이유는 영화 “킬 빌”이 시작할 때, 배급사 로고에 미라맥스 다음으로 신기한 회사 로고가 뜨는 걸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그 유명한 “SHAW SCOPE” 로고가 영화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쇼브라더스는 “킬 빌”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준 쇼브라더스의 1960,7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의 표시로 영화 앞에 쇼브라더스의 로고를 넣은 것이죠. “정무문”은 골든 하베스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입니다. 같은 음악이 “아이언사이드”, “정무문”,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모두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의 오마주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게로 향합니다. 또 한 가지,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이 꼽은 10편의 영화 중 하나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듭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2005년 무려 칸 영화제에서 칸 클래식으로 선정되어,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재상영되었고 정창화 감독의 무대 인사 및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퀸시 존스는 자신의 곡을 무단으로 퍼간 1972년 작품 두 편 어디로부터도 저작권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죠.

퀸시횽아는 쿨 가이!

실은 두 작품 모두 퀸시 존스가 드라마 “아이언 사이드”에 넣었던 스코어 트랙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닙니다. 당시로선 그 음원을 구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겠죠. 그래서 홍콩에서 재녹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화끈한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퀸시 존스는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대로 한 곡에서도 내지르기만 하지 않거든요. “Ironside”도 초장에 사이렌 소리를 필두로 냅다 내지른 후, 바로 전자 피아노와 플루겔 혼, 스네어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관악이 터지며 완급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이 곡을 연주하는 홍콩 연주자들은 다릅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오프닝 시퀀스 1분이 모두 퀸시 존스의 곡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요, 처음부터 관악과 심벌 소리로 끝까지 내지릅니다. 사실 1970년대 류복성 아저씨의 “류복성과 신호등”을 포함해서 몇 장 없는 한국 재즈 음반을 들어봐도 비슷한 현상이 보입니다. 미국 재즈의 스탠더드를 연주하고 있는데, 원곡에서 들을 수 있던 풍부한 소리는 다 사라지고,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음악이 되는거죠. 이건 연주자와 편곡자가 달라서이기도 하고, 녹음 기술의 한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향숙이의 추억!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경우에도 원곡이 가진 풍부한 전자악기와 베이스 사운드를 살리기에는 홍콩의 녹음 기술이 그닥 뛰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덕분에 좀 더 화끈한 음악이 된 장점이 있었다고 봐야죠.  퀸시 존스는 훗날,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오마주를 바친 타란티노 덕분에 “Kill Bill”의 OST에 “Ironside”를 실으며 저작권료를 챙길 수 있었답니다. ^^

그러니까 세줄로 요약하자면,

  1. 퀸시 존스는 전혀 의도치 않게 홍콩무협영화에 자신의 음악을  증정(?)
  2. 그 결과 이소룡이라는 시대의 맹주가 보여주는 멋진 액션을 음악으로 뒷받침하고,
  3.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아시아 영화 최초 미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쿵푸 액션 영화의 뒷배를 확실히 봐준 셈이 되었다.

끝.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80년도에 하나 챙겨볼 만한 작품은 홍금보의 “인자무적”이다. 성룡에겐 대사형급 선배이고 영화계에도 더 오래 몸 담고 있었지만 좀 늦게야 빛을 보게된 그인데 이 작품 역시 취권스타일의 영화로 여기에서 홍금보는  그 나름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어쨌든 성룡의 역사는 계속된다. 매년 대표작들이 나오고 더불어 홍콩영화도 번성해 간다. 82년에 “용소야” 83년에 “프로젝트 A”가 나오는데 이 작품은 홍콩 액션영화의 역량이 모두 합쳐진 영화로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가 나오고, 그 규모가 당시까지 최대 최고 수준이라고 하겠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고, 한장면 한장면 버릴게 없다.



사실 저 트리오가 합으로 맞춘 복성시리즈가 있지만 거기서는 비중이 대사형 홍금보가 중심이었다면 “프로젝트 A”나 이어지는 “쾌찬차”는 성룡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챙겨볼 배우는 역시 해적대장 롤을 맡았던 적위다. 액션 그자체로만 본다면 견자단이란 배우가 나오기전까지는 당연히 적위가 최고였다. 이 영화에서는 트리오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여유있게 제압하기도 한다.


 


 





 


이 배우가 확실히 각인된 건 2년 뒤에 나오는 양자경의 “예스마담”에서 악당사장의 보디가드로 나와서 멋진 발차기를 보여줄 때이다. 검은 교복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내지르던 그 발차기. 냉혹한 인상으로 악역으로만 다수의 배역을 맡지만 그 존재감은 대단했다.


 


82년에는 최강의 콤비라는 뜻의 영화 “최가박당”도 나오는데, 미스터부 시리즈 허관문의 동생인 허관걸이 나오고 영화 자체는 전형적인 홍콩 액션 모험인데,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다 좋아한다. 물론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데이비드 주커나 웨이언스 형제들의 영화보다 이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패러디의 당혹스러움과 여유있는 비꼼이 훨씬 더 매력있다. 또 82년에는 이연걸의 “소림사”가 나오고, 83년에는 저주받은 걸작인 무협환타지 “서극의 촉산”이 탄생한다.


 


좋은 액션 배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사람 더 이야기하자면 84년작 “쾌찬차”의 베니 유키테즈가 있다. 킥복싱 챔피온이였던 배우 베니 유키테즈는 이 영화와 “비룡맹장”에서 성룡의 카운터파트로 나오는데 격투장면만 따지고 본다면 성룡과 가장 합이 잘 어울리고 파이팅으로 화려한 상대역이였고 본다.


 


85년으로 넘어가면 성룡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폴리스 스토리”가 나온다. 성룡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성룡의 개성이랄수도 있는 건 바로 ‘올바름과 책임감’인데 영화 속의 성룡은 언제나 선하고 착하고 남에게 최선을 다해 배려한다. 악당조차 쉽게 용서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다른이들에게 민폐없이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고군분투 스타일이다.



그리더가 배신이 끝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더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한다. 바로 그런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경찰이겠다. 물론 올바른 의미에서의 경찰인지라 그는 승진이나 권력이나 재물에 관심이 없다. 가족을 사랑하고 여자친구나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가난한 서민이나 어린이, 여성들에게 더 없이 친절하다.


 


 




 



그런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폴리스 스토리”이고 작품자체의 품위도 높다. 또한 다대일 격투씬의 정수를 보여준 쇼핑몰 장면이나, 폴리스 스토리2에서 어린이 놀이터 장면은 성룡의 열정과 투쟁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최고의 격투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세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86년에는 성룡의 행보를 주춤하게 만든 무협걸작이 또 하나 나오는데, 바로 하늘도 총애한다는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다. 흘러간 스타 적룡 그리고 차세대 스타 장국영과 함께 주윤발이 타이틀롤을 맡은 “영웅본색”은 다시 설명이 필요없는 20세기 신무협의 총아다.



칼과 창 대신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나타난 이 영웅은, 무협 영웅들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리고 협객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오우삼의 연출테크닉은 홍콩 영화의 연출제작 스타일을 일거에 변혁시켰고, 총격신들의 장면은 이전 영화들이 사람의 몸동작을 넓게 그대로 담아낸 것과는 달리 카메라 앵글과 방향, 움직임에서 무협적 박진감과 극적 긴장감이 현대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떻게 어우러 지는가를 결정지어 버렸다.



사실 물량과 화력이 아닌 총격장면의 구성 그 자체만으로는 난 아직도 서구영화들이 홍콩영화들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본다. 바바리코트와 권총, 그리고 성냥개비로 기억하는 이 영화의 잔영은 80년 후반을 살던 남성들의 혼을 흔들어 버렸다.



이 영화는 우정과 의리라는, 박물관에나 있을 것같은 인간의 죽어버린 감성에 다시한번 성냥불을 붙혔다. 그리고 그 작은 불은 진정 멋졌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본색”을 네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19금 폭력장면 주의

 


 


그러면 우리 성룡은 놀고 있었나? 당연히 아니다.


그해 성룡은 “용형호제”를 내놓는다. 그야말로 글로벌 프로젝트 “용형호제”는 대규모 로케이션과 지나칠 정도의 위험한 스턴트 장면들로 가득한데, 성룡이 이 영화에서 죽을뻔 했던 사고 내용은 유명한 일화이고 “프로젝트 A”에서의 부상과 이 영화의 부상 충격으로 이후 성룡의 영화 제작현장에서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소음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도 성룡이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보물을 Get하러 다니는 모험가라는 영화 소재가 매우 좋아서 이후 수많은 시리즈 프로젝트 계획안들이 나왔는데 천하의 성룡도 용형호제 시리즈 연작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2편은 한참 뒤인 90년에야 제작이 됐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성룡은 시작 전에는 조심스러워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미쳐버리는 구나
라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해 또 재밌는 영화 한 편이 나오는데 홍금보의 “부귀열차”다. 내용은 부자들을 태운 기차를, 자기 고향의 발전을 위해 철로를 폭발시켜 멈추게 하고 그 부자들이 며칠동안 고향마을에 머물게 하려는 홍금보와 마을사람, 기차승객 그리고 그 열차의 부자들의 재물을 노리는 떼강도들이 어우러져 버리는 해프닝인데,


 


재미도 재미지만, 성룡과 성가반을 제외한 당대의 기라성같은 액션배우들과 코믹배우들이 거의 모두 다 나온다. 홍금보, 원표는 물론이고 전설의 스타 왕우가 황비홍의 아버지 황기영으로 나오는 걸 비롯해,


 


 




 


 


적위나 “강시선생”의 임정영, “천녀유혼”의 우마, 한국 출신의 황정리씨, 쿠라타 야스아키 (창천보소), 오오시마 유카리 (대도유가리) , 신시아 로즈록 (나부락), 수많은 악역 고수를 맡았던 종발, 원화 (용쟁호투 격투디자인), 고비, 양사, 맹해 등이 나오고 증지위나 오요한같은 한가락 하는 코미디 배우도 쏟아져 나온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금보의 영향력과 역량을 고스란히 볼 수 있기도 하다.


 


 




 


 


*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1부]


 

 


 


 



 


 



70년대를 기점으로 9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한국은 경제적 대격변기였고 폭발적 성장기였다. 88올릭픽과 OECD 가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성장은 소위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뒤안길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저임금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구조속에서 우리 아버지,어머니, 형님, 언니들에게 필요했던건 실현 불가능한 커다란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위로가 되는 즐길거리가 아니었을까.




명절을 맞아 어렵사리 마련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시골집에 가면 어린 조카들이 삼촌과 이모에게 들러 붙었고, 명절 차례 후에는 그놈들을 몰고 읍내 영화관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알현할 수 있었던 짜짱면 한 그릇과 식후의 사이다 한 잔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먹고 살기 바빠 이번에는 못 내려간다고 전화통에 대고 울먹이던 작은 형들도 명절 오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단성사 대한극장을 향하곤 했다. 대지나 화양극장도 좋았고, 부산의 태화극장도 좋았다.



 


그 시절의 명절에는 특히나 홍콩영화가 대세 중 대세였다. 그리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의 명절을 관통한 홍콩영화의 역사에서 정수리에 우뚝 선 영화는 역시 “취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취권”을 통한 성룡의 출현은 이소룡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이소룡 역시 50 ~ 60년대 쇼브라더스의 무협영웅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팔이”시리즈의 왕우, “금영자”의 정패패, “돌아온 외팔이”와 “13인의 무사”의 적룡 등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몇날 몇밤이 지나도 모자랄터이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어 그들의 진면목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간에는 그저 그 시절의 작품들을 한 번 훑어, 아니 핥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름 핵심이랄 수 있는 무협무비를 골라보도록 하자.


 


 


 



 



 


 



70-90년대를 관통하는 대명사는 역시 성룡이다. “성룡이영화”라는 말로 대별되는 홍콩 영화의 최대 번성기는 그 이전 쇼브라더스시대의 왕우,정패패,강대위,적룡에서 시작되어 이소룡으로 이어진다.



이소룡의 역사적 출현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인종적 자부심마저 심어주기도 했다 -.-


 


1971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아직 서양제국의 힘에 눌려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살 때, 삼국지의 관우나 조자룡에 비유할 수 있을 진짜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소룡”이었다.



용쟁호투의 첫장면에서 이소룡에 쥐어 터지는 대련 상대자로 나온 홍금보나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해 나가 떨어지던 성룡에게 이소룡은 거대한 영웅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그는 패배를 몰랐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의 기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촌동네의 허름한 공장을 배경으로 당산출신의 이 멋진 형님이 악당들을 모두 제압해 버리는 장면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이소룡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동작이 나오고 어찌 저리도 아름답게 힘과 에너지를 표현낼 수 있는지, 보는 이들 모두에게 그건 황홀경이였고 예술이었다.


 


단역이나 tv시리즈를 제외한다면 그가 남긴 단 4편의 전설적 작품 중에서 딱 한 작품만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단연 “정무문”이어야 할 것이다. 화면 땟깔 좋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높고, 액션 촬영이 튀지않고 안정적인 편이라 액션을 못 따라가는 분들에게도
보기좋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 비장미 …… 영화 말미의 그, 영화 역사상 최강의 비장미. 그래서 이 72년도 작품을 우선 강추하는 바이다.


 


73년 이소룡 사망후 홍콩영화계는 아노미와 패닉 그 자체를 보인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영화판은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거룡, 당룡,소룡, 대룡 등등 용용용브라더스를 쏟아낸다.


 


 


 



 


 


 


허나 무수히 나섰던 그의 후배들과 아류작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였다. 그런 시절이 어언 지나고 70년대 말이 되었을 때 하나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비어진채로 주인을 기다리던 왕좌에 다가섰던 건 바로 78년 “취권”과 “사형도수”의 성룡이었다.


 


79년 추석 서울바닥을 비롯한 전국은 코 큰 중국청년에게 홀랑 빠져든다. 영화 “취권”은 당시 아시아 전체 모든 흥행기록을 다 깼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92만 명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단일 개봉관 체제에서 한 극장에서만 90여만 명을 동원했던 것이니 이건 그냥 계산상으로봐도 6개월이 넘게 내리 매일 매진행진을 벌인 것이리라. 게다가 지방극장의 기록은 남아있지도 않으니 그 흥행의 역사만으로도 그냥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상으로는 “사형도수” 또는 “사형조수”가 먼저 홍콩현지에서 개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쨌든 78년에 제작된 두 영화는 상호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성장드라마란 점, 코믹한 설정과 액션을 감미했다는 점, 그리고 두 작품의 내용적 규모가 기존의 비장미 가득한 그런 대의명분보다는 작은 정의, 한사람으로서의 바른 삶 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도 제작과정상 서로 보완하고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형도수”의 경우, 그 나름의 진지한 의미는 바로 강자의 영화가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 서민의 영화라는 거다. 주인공 자체가 그런 배경과 계급을 가지고 수모도 받고 서러움도 받는데, 기존의 강인한 무협 주인공들에 비해 성룡은 그런 연기를 소화해 낼 수 있엇따. 따지고보면 취권에 비해서도 사형도수는 그런 의미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래도 성룡 대역사의 시작은 취권으로 봐야하고, 그래서 이 작품을 두번째로 강추하는 바이다.


 



 





 


 



“성룡영화”가 새롭게 기초해내고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다시 모방한 스토리 라인과 특징들은 철없지만 선량한 주인공, 그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노숙자풍의 신비로운 사부,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실현해내는 작은 정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룡의 작품들은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전의 홍콩영화 작품들이 엄청난 대의명분과 역사적 승부, 부모님의 복수등 무거운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성룡의 영화들은 다소 가벼웠고 내용도 코믹하고 액션도 전통적인 무술들이 아니라 변형되고 가볍고 코믹한 것들이다.


 


사실 무협 액션들은 당연하게도 폭력이 미화되고, 심지어 공공의 동의 없이 자력구제로 악당을 처단한다. 이건 모두 불법이고 이런 면에서 거의 모든 무협물들은 환타지다. 그래서 무협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은 이 환타지를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의 무협과 액션은 전통적인 무협의 강하고 빠른 액션보다 기기묘묘하고 신기한 동작과 자세들을 선보였고, 혹자는 아크로바틱 쿵후라고도 부르는 그런 가볍고 경쾌한 무술들은 오히려 나름 신체단련과 자기방어라는 무술 본연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도 성룡 본인이 그런 무술경향을 체계화할 욕심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당시 이런 무술과 무술영화는 일대의 혁신이었는데 사실 성룡이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룡은 이어서 79년에 “소권괴초”, 1980년에 “사제출마”들을 줄줄이 발표하며 계속 이전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대히트를 연속시킨다. 그리고 그 무렵 미국에서 “배틀 크리크”, “캐논볼”에 출연하였다.



특히 “배틀 크리크”는 미국식 제작시스템을 통해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고 재밌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액션도 훨씬 쉽고 간단하지만 선이 분명하게 짜여져 세계를 무대로 하는 액션배우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여담이지만 “배틀 크리크”의 극 중 주인공은 1930년대 미국에 온 한국인으로 설정되어있기도 하다. 특히 종반부에 칼잽이 상대역과의 대결장면은 서양액션배우들과의 합을 어떻게 보여줄 지에 대한 완성된 답이라고 평가하고싶다.


 


 


 





배틀 크리크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포르노의 진짜 폐해


[편집자 註]
이 기사에는 글의 전개를 위해 불가피하게 미성년자의 성인영화 시청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만, “영진공”은 미성년자의 성인영화 시청과 불법영상물 전반의 유통 및 시청행위를 강력히 반대합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 포르노를 향한 기나긴 순간의 여정이여”

1985년 뽈노를 처음 보다

신대방 사거리에 있었던 한 만화가게(가게명 없음…그냥 만화책, 무협 대본소였음)는 세 명이 400원 네 명이 300원을 주인아저씨에게 헌납하면 책받침에 색연필(그래야 리스트 업이 될 때마다 지울 수 있다)로 적어 놓은 수종의 삐끕 비디오를 보여주던 곳이었다. 물론 근처의 다른 만화가게에서도 비디오를 볼 수는 있었으나 다른 만화가게의 경우 무조건 선불에 정해진 비디오를 정해진 시간에 상영하는 이른바 순번제 형태였기 때문에 나의 날카로운 안목과 분초를 나누어 생활하는 칼 같은 시간관념 상 별 메리트가 없었다.

나의 단골이 된 이 만화가게의 더욱 큰 매력은 50원 내고 만화를 볼 제, 재수만 좋으면 딴넘들이 보는 비디오를 꼽사리로 볼 요행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난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가 종횡무진하는 복성(『오복성』, 『칠복성』, 『복성고조』, 『복성고조 2』 등)시리즈와 『취권』, 『용쟁호투』, 『소림사』시리즈 등을 섭렵해가는 13살이었다.

그런 어느날 친구와 나, 둘은 뜻한바 있어 500원을 들고 새로운 성룡시리즈를 탐닉하러 잡입 했는데 … (당시용돈 500원) 이미 그곳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가게 주인과 흥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자씨 : 아이, 씨바…..그건 봤다니까요….다른 것 좀 없어요?
주인 : (우리를 보곤) 어…어여와, 둘이야? 둘은 500원씩이야….
(아저씨를 보고) 그래요? 그럼 진작 말하지….30분이나 지나서 말씀하시면..
아자씨 : 그게 다 거기서 거기 같아서 헷갈리잖아요….
주인 : 아니 그래도…..
아자씨 : 아무튼…바꿔주세요…
주인 : 에잇….(우리를 보며) 근데 니늘 영화 볼라구?
아자씨 : 어…얘네들도 같이 보면 되겠네…
나 : 아저씨, 성룡꺼예요?
아자씨 : 아냐, 죽이는 거야….
주인 : 얘들 아직 어린데…
아자씨 : 니들 몇 학년이냐?
(눈치 졸라 빠른)나 : 중학생 되요…..(씨바…이 놀라운 순발력에서 나오는 미래형 가정법을 보라)
아자씨 : 에잇~ 그럼 어른 다 됐네….알 껀 다 아는 나인데요. 뭐…
주인 : 그래도…..아직은….
친구 : 뭔데요?
아자씨 : 너 뽀르노가 뭔지 아냐?
(딱 감잡은)나 : 에이, 그거 집에도 몇 번 봤어요….
아자씨 : 그럼 봐도 되겠네?
(졸라 흐뭇한)나 : 그럼 400원 드리면 되요? (당시 하루용돈 100원 내외) (속으로) 졸라 계산 중…
주인 : 아냐….이건 구하기 힘든 거야…..500원씩 내야 돼…
나, 친구 : (2초간 고민 후 동시에)에잇, 여기요


– 그리하여 나의 첫 뽈노 감상이 시작되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한 집에 미스테리한 사건이 벌어진다.
일단,
여자 둘이서 한판 뜬다.
남자가 들어오고
여자 하나가 죽는다.
블루스크린에 합성한 차에서 죽은 여자를 버린 남녀가 도망친다.
여자가 죽은 집에 남녀가 들어온다.
한판 뜬다.
여자 잠든다.
죽은 여자 나타난다.
남자 깨운다.
한판 뜬다.
남자 전후사정 듣는다.
자던 여자 깬다.
셋이 한판 뜬다.
유령과 뜬 둘이 빙의 된다.
도망친 남녀 찾는다.
넷이 한판 뜬다.
빙의된 남녀 죽인 남녀 죽인다.
유령 나타난다.
보은의 한판 뜬다.
유령 셋이 모인다.
한판 뜬다.


나는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본 뽈로 덕분에 한동안 정신 못 차리게 된다. 그리고 첫 사정은 3년 뒤에 일어났다.

두 번째 뽈로는 중학교 2학년 때 감상되어진다.
정확하게 감상되어졌다.
뽈로의 정확한 용법을 모른 채 감상하였던 뽈로는 나에게 궁금함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털이 곤두서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뽈로의 강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이다.

신길동 삼성아파트에 거주하던 모군의 손에 이끌려 감상되어진 뽈로는 다음날 첫 몽정의 결과를 도출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작위적 사정에 의한 정자배출법을 터득한 나는 작위적 정자배출을 위한 소도구로서 뽈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성된 카프(kapf)

고등학교 국어시간.
나와 고등학교 벗들은 조선 예술가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활약에 감동받아 1990년 새로운 의미의 카프결성을 모색한다. 이른바 Neo kapf(Korean American Porno Family)의 탄생이었다. 자료의 공유와 토론의 장을 열었던 우리 카프 회원들은 학교 내에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의 뽈노배급및 회수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에 학생들은 자진해서 우리 조직에게 자신의 컬렉션들을 대여 및 임대하게 되었다. 비영리 기관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금의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본 조직은 2반 체육부장이었던 내가자금관리를 하였고 종로, 청량리 일대의 거래선과 안면을 텄다.

포르노 배우 론 제레미

배급 후 관람이 어려운 시청집단을 위해서는 친히 장소선택임무도 진행하였는데 고등학교 1년 재수한 나의 친구(엄밀히 말해선 선배급)의 친구집이 주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일종의 사설극장이었던 셈인데 부모님이 정육점을 하는 관계로 저녁시간까지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하였고, 부식이 풍부했으며 자유로운 토론이 용이했다. 다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소니의 비디오 플레이어가 위에서 아래로 넣는 방식이어서 자주 씹히는 단점과 돌발상황 발생시 대처가 느리다는 점. 그리고 집에 계신 할머니의 돌발 점거농성이었다.(훗날 이러한 위에서 삽입하는 플레이어의 단점을 극복하며 나온게 프론트 로딩 방식의 금성 비디오 데크였다)

할머니는 약간 노인성 치매가 계신 관계로 우리가 안방을 점거 시청중일 경우 자신만 빼놓고 우리만 라면을 끓여 먹는 중이라고 판단, 문 열고 확인시켜 드릴 때까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셨다. 물론 1분여의 테입 제거 작업이 끝나고 안방문을 열고 보여드릴 때도 그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셨다.(참고로 나는 이집에서 처음으로 쇠고기가 들어간 쇠고기 라면을 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불같은 문화사업은 졸업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그리곤 나의 불같은 뽈로사랑도 식었다.
요컨대 성인이 되었단 소리다.
성인!!!!

포르노의 폐해를 알게되다

나, 변태가 아니다.
그렇다고 쓰레기 인생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만화가게 주인이냐?
그것도 아니다.
평범한 직장에서 범부의 일을 하며
융자 갚아나가기 바쁜 직장인이다.

어릴 때, 중엄한 칼날을 들고 범국민 도덕교과서화를 외치시던 수많은 어르신들의 너 나쁜 영화 보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린다며 핏대 높여 말씀하신 그런 병….걸려본 적 없다. 정말 죄송하다.

어쩌면 이러한 뽈로의 진상을 솔직 담백하게 담론화 했다면 나의 뽈로 체험기는 카프의 결성까지 안갔을지 모른다. 그때 뽈로는 나에게 신비한 세계로의 초대라기보다는 스릴 있는 작당쯤 이었으니까

그러나, 난 아직도 그들이 그렇게 부르짓던 죄악보다 더 큰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내가 걸린 진짜 병은 암암리에 나에게 전이된 여성비하와 하대였다. 그들이 머리에 핏대 올려 말했던 병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각인된 잘못된 인간에 대한 평가가 문제였던 거다.

어차피 너도 좋아질 거야,
봐, 너도 흥분하잖아,
어쭈, 당하면서 흥분하기는… 여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성을 강제하고 강제된 성을 매매하는 것을 당연한 필요악쯤으로 인식하는 사회.
여자는 참을 수 있지만 남자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그 무언가로 비화하는 그릇된 상식.
그리고 그게 성의 착취 버릇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걸 절대 이해 안하는 사람들….

포르노의 진짜 무서움은 유사범죄의 가능성에 있는 게 아니라 포르노에 내포된 은밀한 여성비하와 착취, 그리고 정당화된 성폭력에 있었다. 내가 훗날 머리 굵어지면서도 노력하고 노력하고 아직도 그 잔재를 씻기 위해 노력해도 힘든거다.

그리고 그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영진공 그럴껄

홍키의 시선으로 보는 “다찌마와리”와 “놈놈놈”


여름철 극장가를 열어제끼는 두 편의 우리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두 편 다 코믹을 가미한 액션작품이지만 서로 많이 다르다.  그래서 두 편을 억지로 연관지을 생각은 없으나 개인적으로 본인의 영화편력에 의미있는 부분이 있어 함께 언급해 본다.

1. 다찌마와리 그리고 류승완

류승완 이 친구, 참 공부 안한다.  예전부터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들었던 생각이지만 참 아쉽다.  이건 애정어린 아쉬움이다.  어린시절 홍키(홍콩영화 키드)의 삶을 살아왔던 본인의 입장에서 류감독은 홍콩액션 무비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좋은 친구같은 존재다.  하지만 조금 노력하면 훨씬 잘 해 낼수 있는 친군데 발전이 더디어 아쉽다는 것이다.  얼마전 그는, 자기 마눌과의 의리때문이라며 테레비젼 쇼프로까지 나왔다.  그 자리에서 곧 상영될 영화 ‘다찌마와리’홍보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정통코스로 영화공부를 한 것이 아니기에 많이 본다고.  하지만 영화에,예술에 정통, 정규 코스가 따로 있나?  단연코 없다.  억지로 이야기한다면 영화공부는 많이 보고 많이 찍어보는 게 정통이고 진짜 정규코스다.  류야 말로 정통코스를 밣고 있는 정통영화인이다. 그런데… 본인이 보기에 류감독은 자기영화만 본다.  자기장르의 영화만 공부한다.  국영수 중심으로 암기과목도 소홀히 하지 않는 공부와 학습의 덕목에서 한 30%가 부족하다.  게다가 자기만의 특장 분야에서조차 얼마나 정체되어가고 있나.  아주 많이 정체되고 있다. 영화 ‘짝패’. 아주 좋다.  80년대 홍금보,성룡의 복성시리즈에 못지 않다.  그냥 못지 않을뿐 전반적으로 내외가 약하다.  배우들 시간날 때마다 그냥 놀듯이 모여 찍던 복성시리즈에 비해, 가령 내 친구가 전력을 기울여 애써 만든 영화가 고만고만하다면, 난 기분이 안 좋을 밖에.  영화는 경직되어 있고, 액션은 천편일률로 이전 다 보아왔던 동작이다.

그러나 …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모든게 척박한 이땅에서 류승완만큼 자기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잘 할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이는 드물다.  아이덴티티? 이거 중요하다. 난 그런 아이덴티티를 우리영화계 주류중에선 봉준호에게서만 본다.  박찬욱을 많이 거명하겠지만, 그의 특징이 뚜렷하다고 아직 말 할 수없다.  송강호로 페르소나 되는 봉준호의 특징은 진정으로 싱싱하고,절묘하고, 재밌고,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박찬욱에게서는 거장의 냄새는 나지만, 거장으로 불리워질 뚜렷한 내용이나 구체적인 무언가가 없다. (아마도 좀더 다작을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칸느도 다녀온 분에게 너무 건방진가? …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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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강타"했던" 서울 인근 지역 올 로케 작품되겠다 -.-;;; ... 임원희, 류승범, 이윤성 등이 출연한다.

그래서 수 년 전 당시 딴지일보 한동원님의 글로 전해 읽었던, 류감독의 데뷔작 인터뷰는, 참으로 담백솔직막가는 멘트로 (그 말 그대로는 기억이 다 안나지만) 충분히 듣는이를 기쁘게 하고, 그와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기대케 했다.  이렇게 난 그를 좋아 할 수 밖에 없다. 크게 실망시키는 졸작도 없었고, 자기 심지는 멋지게 지키고 있다. (좀 시건방진건 아직도 여전하지만)  그리고 ‘오아시스’에서의 그의 연기는 내 눈물을 뺐다. (오아시스에서 눈물나는 게 그의 연기뿐이 아니지만 서두…)  정말 내 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배운 건 모자라도 혼신을 다해 세상의 풍파와 싸우며 사는 어린동생, 그래서 못난 형이 너무 미운 우리 동생.  정말 지금도 뭉클하다.  하여간 이렇게 좋은 친구가 더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조금 아쉽다는 거다.

다찌마와리 (이전 모처에서 스크린 걸어놓고 보았던, 그 따끈하고 짜릿한 b급의 정서는 이젠 포기해야겠지만) 극장판에 대해서, 난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찌마와리 첫 이야기의 즐거움을 전혀 모를 젊은 관객들에겐 확실히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고, 류감독 스스로에게도 또 한번의 자극과 충천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지금 보다 다음 작품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이번 다찌마와리가 되었음 한다.

2. 놈놈놈 그리고 김지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제목 참…거시기 어디서 많이 들었다.  한때 세상은 서부영화 전성시대였다.  그 비장하고 우울하면서도 통쾌한 정서는, 삼사십년전, 아니 아니 훨씬 더 이전부터 세상의 정의를 갈구하던 서민의 애환을 잠시나마 위로해주었다.  물론 미국의 원 주인을 짖이기던 외래총잡이와 군발이들의 악행을 미화한 작품도 적지 않았지만, 난 그런 개잡것들까지 다 이야기하는 건 아니구, 좀 덜 떨어지게 혼자 폼잡는 귀여운 총잡이들을 이야기하는 거다.  존웨인은 별로지만 세인이나 하이눈의 케인보안관과 장고와 우리 튜니티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김지운씨가 서부영화를 만든단다.  김지운감독, 내 생각에, 한국의 주류영화감독중 김현석감독 다음으로 깔끔하게(너무 깔끔해서 탈) 영화 만드는 사람이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이건 칭찬이기도 하고 비난이기도 하다.  더욱이 김지운감독 작품에서는 어느 다른 영화의 어딘지 모를 장면들이 자꾸 중첩이 된다.  표절도 패러디도 오마쥬도 차용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겹침이 이 감독의 작품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놈놈놈은 한국식 웨스턴, 또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변주, 또는 만주웨스턴이라고들 한다.  조금은 황당하고 족보없는 이야기가 아니랄 수 없다.  이 작품은 근자에 영화를 접하기 시작했던 젊은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장르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우리영화사에 코리안 웨스턴은 무척 심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60년대를 풍미한 코리안 웨스턴은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나 ‘6인의 난폭자’로 기억되는 정통극식의 서부극뿐아니라 ‘당나귀 무법자’같은 코미디 영화도 있었다.  한마디로 유구한 전통이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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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무법자 OST? -.-

게다가, 웨스턴무비 또는 서부영화로 통칭하는 장르는 세계 어느지역에서나 나름대로 그 문화와 융합해서 자생한 시절이 있었다.  바로 오늘 본인이 놈놈놈 티져를 보자마자 기억이 떠오른 게 홍콩영화 ‘부귀열차’다.  서부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함빡담고 열차를 통해 펼쳐지는 온갖 이전투구와 황당무계가 놈놈놈과 상당히 겹친다.  솔직하게 말하면, 홍키로 자부하는 본인은 놈놈놈의 기대보단, 예전에 너무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부귀열차’를 다시 보고 싶은 (홍콩배우들과 서부영화라…이 기기묘묘하고 희한한 조합) 충동에 사로잡혀, 며칠전에는 시간을 내서 비디오디비디 판매 사이트를 들락거렸지만, 물론 못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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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열차는 홍금보(놈놈놈에서 송강호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캐릭터라 하겠다. 좀 더 무게감이 있긴 하지만), 원표, 관지림을 비롯한 당시 홍콩을 주름잡던 대배우와 액션배우들이 총출동했던 당대 대작이었다.  이런 작품의 흥취야 각양각색의 배우들뿐 아니라, 그들의 다재다능 액션(배우들마다 가지고 있는 액션의 특징, 이걸 골고루 섞어 보는 그 재미란, 정말 아는 사람만 안다. ㅜ.ㅜ) 집단무를 보는 것이다.  위대한(이 단어를 어찌 쓰지 않을 수 있나, 서양의 기계적 액션에 비하면 이들의 동작은 예술이라 하겠다. 감히 …) 액션배우들의 종합선물세트로서 부귀열차는, 비슷한 흥취의 또 다른 무족보전투액션무비 ‘동방독응’과 더불어 본인의 기억속에 참으로 화려하게 자리하고 있다.

놈놈놈은 흥취가 과연 얼마일지 모르겠으나, 난 … 그냥 ‘부귀열차’와 ‘동방독응’을 다시 보고싶다. (그나마 동방독응은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아 더더욱 화려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부귀열차는 그냥 쪼마난 TV화면에 화질 구린 비디오로 봤는데도 그러하니, 극장에서 봤다면 얼마나 화려했을까 …)


그럼 20000


영진공 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