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의 진짜 폐해


[편집자 註]
이 기사에는 글의 전개를 위해 불가피하게 미성년자의 성인영화 시청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만, “영진공”은 미성년자의 성인영화 시청과 불법영상물 전반의 유통 및 시청행위를 강력히 반대합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 포르노를 향한 기나긴 순간의 여정이여”

1985년 뽈노를 처음 보다

신대방 사거리에 있었던 한 만화가게(가게명 없음…그냥 만화책, 무협 대본소였음)는 세 명이 400원 네 명이 300원을 주인아저씨에게 헌납하면 책받침에 색연필(그래야 리스트 업이 될 때마다 지울 수 있다)로 적어 놓은 수종의 삐끕 비디오를 보여주던 곳이었다. 물론 근처의 다른 만화가게에서도 비디오를 볼 수는 있었으나 다른 만화가게의 경우 무조건 선불에 정해진 비디오를 정해진 시간에 상영하는 이른바 순번제 형태였기 때문에 나의 날카로운 안목과 분초를 나누어 생활하는 칼 같은 시간관념 상 별 메리트가 없었다.

나의 단골이 된 이 만화가게의 더욱 큰 매력은 50원 내고 만화를 볼 제, 재수만 좋으면 딴넘들이 보는 비디오를 꼽사리로 볼 요행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난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가 종횡무진하는 복성(『오복성』, 『칠복성』, 『복성고조』, 『복성고조 2』 등)시리즈와 『취권』, 『용쟁호투』, 『소림사』시리즈 등을 섭렵해가는 13살이었다.

그런 어느날 친구와 나, 둘은 뜻한바 있어 500원을 들고 새로운 성룡시리즈를 탐닉하러 잡입 했는데 … (당시용돈 500원) 이미 그곳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가게 주인과 흥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자씨 : 아이, 씨바…..그건 봤다니까요….다른 것 좀 없어요?
주인 : (우리를 보곤) 어…어여와, 둘이야? 둘은 500원씩이야….
(아저씨를 보고) 그래요? 그럼 진작 말하지….30분이나 지나서 말씀하시면..
아자씨 : 그게 다 거기서 거기 같아서 헷갈리잖아요….
주인 : 아니 그래도…..
아자씨 : 아무튼…바꿔주세요…
주인 : 에잇….(우리를 보며) 근데 니늘 영화 볼라구?
아자씨 : 어…얘네들도 같이 보면 되겠네…
나 : 아저씨, 성룡꺼예요?
아자씨 : 아냐, 죽이는 거야….
주인 : 얘들 아직 어린데…
아자씨 : 니들 몇 학년이냐?
(눈치 졸라 빠른)나 : 중학생 되요…..(씨바…이 놀라운 순발력에서 나오는 미래형 가정법을 보라)
아자씨 : 에잇~ 그럼 어른 다 됐네….알 껀 다 아는 나인데요. 뭐…
주인 : 그래도…..아직은….
친구 : 뭔데요?
아자씨 : 너 뽀르노가 뭔지 아냐?
(딱 감잡은)나 : 에이, 그거 집에도 몇 번 봤어요….
아자씨 : 그럼 봐도 되겠네?
(졸라 흐뭇한)나 : 그럼 400원 드리면 되요? (당시 하루용돈 100원 내외) (속으로) 졸라 계산 중…
주인 : 아냐….이건 구하기 힘든 거야…..500원씩 내야 돼…
나, 친구 : (2초간 고민 후 동시에)에잇, 여기요


– 그리하여 나의 첫 뽈노 감상이 시작되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한 집에 미스테리한 사건이 벌어진다.
일단,
여자 둘이서 한판 뜬다.
남자가 들어오고
여자 하나가 죽는다.
블루스크린에 합성한 차에서 죽은 여자를 버린 남녀가 도망친다.
여자가 죽은 집에 남녀가 들어온다.
한판 뜬다.
여자 잠든다.
죽은 여자 나타난다.
남자 깨운다.
한판 뜬다.
남자 전후사정 듣는다.
자던 여자 깬다.
셋이 한판 뜬다.
유령과 뜬 둘이 빙의 된다.
도망친 남녀 찾는다.
넷이 한판 뜬다.
빙의된 남녀 죽인 남녀 죽인다.
유령 나타난다.
보은의 한판 뜬다.
유령 셋이 모인다.
한판 뜬다.


나는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본 뽈로 덕분에 한동안 정신 못 차리게 된다. 그리고 첫 사정은 3년 뒤에 일어났다.

두 번째 뽈로는 중학교 2학년 때 감상되어진다.
정확하게 감상되어졌다.
뽈로의 정확한 용법을 모른 채 감상하였던 뽈로는 나에게 궁금함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털이 곤두서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뽈로의 강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이다.

신길동 삼성아파트에 거주하던 모군의 손에 이끌려 감상되어진 뽈로는 다음날 첫 몽정의 결과를 도출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작위적 사정에 의한 정자배출법을 터득한 나는 작위적 정자배출을 위한 소도구로서 뽈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성된 카프(kapf)

고등학교 국어시간.
나와 고등학교 벗들은 조선 예술가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활약에 감동받아 1990년 새로운 의미의 카프결성을 모색한다. 이른바 Neo kapf(Korean American Porno Family)의 탄생이었다. 자료의 공유와 토론의 장을 열었던 우리 카프 회원들은 학교 내에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의 뽈노배급및 회수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에 학생들은 자진해서 우리 조직에게 자신의 컬렉션들을 대여 및 임대하게 되었다. 비영리 기관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자금의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본 조직은 2반 체육부장이었던 내가자금관리를 하였고 종로, 청량리 일대의 거래선과 안면을 텄다.

포르노 배우 론 제레미

배급 후 관람이 어려운 시청집단을 위해서는 친히 장소선택임무도 진행하였는데 고등학교 1년 재수한 나의 친구(엄밀히 말해선 선배급)의 친구집이 주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일종의 사설극장이었던 셈인데 부모님이 정육점을 하는 관계로 저녁시간까지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하였고, 부식이 풍부했으며 자유로운 토론이 용이했다. 다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소니의 비디오 플레이어가 위에서 아래로 넣는 방식이어서 자주 씹히는 단점과 돌발상황 발생시 대처가 느리다는 점. 그리고 집에 계신 할머니의 돌발 점거농성이었다.(훗날 이러한 위에서 삽입하는 플레이어의 단점을 극복하며 나온게 프론트 로딩 방식의 금성 비디오 데크였다)

할머니는 약간 노인성 치매가 계신 관계로 우리가 안방을 점거 시청중일 경우 자신만 빼놓고 우리만 라면을 끓여 먹는 중이라고 판단, 문 열고 확인시켜 드릴 때까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셨다. 물론 1분여의 테입 제거 작업이 끝나고 안방문을 열고 보여드릴 때도 그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셨다.(참고로 나는 이집에서 처음으로 쇠고기가 들어간 쇠고기 라면을 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불같은 문화사업은 졸업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그리곤 나의 불같은 뽈로사랑도 식었다.
요컨대 성인이 되었단 소리다.
성인!!!!

포르노의 폐해를 알게되다

나, 변태가 아니다.
그렇다고 쓰레기 인생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만화가게 주인이냐?
그것도 아니다.
평범한 직장에서 범부의 일을 하며
융자 갚아나가기 바쁜 직장인이다.

어릴 때, 중엄한 칼날을 들고 범국민 도덕교과서화를 외치시던 수많은 어르신들의 너 나쁜 영화 보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린다며 핏대 높여 말씀하신 그런 병….걸려본 적 없다. 정말 죄송하다.

어쩌면 이러한 뽈로의 진상을 솔직 담백하게 담론화 했다면 나의 뽈로 체험기는 카프의 결성까지 안갔을지 모른다. 그때 뽈로는 나에게 신비한 세계로의 초대라기보다는 스릴 있는 작당쯤 이었으니까

그러나, 난 아직도 그들이 그렇게 부르짓던 죄악보다 더 큰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내가 걸린 진짜 병은 암암리에 나에게 전이된 여성비하와 하대였다. 그들이 머리에 핏대 올려 말했던 병이 아니었다. 뼛속까지 각인된 잘못된 인간에 대한 평가가 문제였던 거다.

어차피 너도 좋아질 거야,
봐, 너도 흥분하잖아,
어쭈, 당하면서 흥분하기는… 여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성을 강제하고 강제된 성을 매매하는 것을 당연한 필요악쯤으로 인식하는 사회.
여자는 참을 수 있지만 남자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그 무언가로 비화하는 그릇된 상식.
그리고 그게 성의 착취 버릇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걸 절대 이해 안하는 사람들….

포르노의 진짜 무서움은 유사범죄의 가능성에 있는 게 아니라 포르노에 내포된 은밀한 여성비하와 착취, 그리고 정당화된 성폭력에 있었다. 내가 훗날 머리 굵어지면서도 노력하고 노력하고 아직도 그 잔재를 씻기 위해 노력해도 힘든거다.

그리고 그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영진공 그럴껄

현실과 포르노


머리에 뇌라는 것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 남자라면 포르노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노를 안 본 남자를 찾지 못해 연구를 접어야 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 연구팀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여성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포르노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것은 슈퍼맨 영화를 보고서 스판바지를 입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짓과 같으며 우린 이런 부류를 일컬어 변태라고 일컫는데에 남녀모두 사회적 합의를 보고있다. 그래서 누구도 바바리맨이나 강간범, 성추행범을 향해 나의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라고 만세 삼창하지 않으며, 그 놈을 호되게 처벌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나이 80을 먹어도 야동에 끌리는건 어쩔 수 없다지만 …
포르노는 포르노일 뿐 환타지에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의 격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했다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깨고 바바리맨을 상상력의 총아로 덧칠하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광화문 중앙분리대에서 펼쳐진 스노보드 경기를 놓고선 자신의 좁디좁았던 상상력을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일이다.

난 그런 거 상상도 못했다능, 그래서 내심 걱정했지만 해놓고 보니 내 졸렬했던 상상력이 부끄러웠다능,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편견을 버리자능 … 등등 …

아 … 정말 상상력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국영수만 열심히 들고파야만 했던 주입식 교육의 병폐가 뼈져리게 느껴진다. 고작 그런 상상조차 못하고 살았다니. 지금도 애들 상상력을 홍어 거시기 마냥 만들어놓는 교육부는 정말 줄빠따 맞아야 쓰겠다.


광장의 의미가 무언가. 요즘 언제 광장이 ‘광장’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촛불시위 이후 광화문에 급조되어 광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중앙분리대가 실은 시민의 의사표현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광장도 아닌 곳에 스노보드 대회를 하든 스키 대회를 하든 물을 채워서 요트 경기를 하든 놀랄 일은 아니다. 저 곳은 그렇게 쓸려고 만든 거니까.
 
그런데 그 곳이 정말 광장이라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인시위조차 강제연행 하면서 카드회사의 마케팅에는 얼씨구나 통째로 내주는 건 상상력이 아니라 그냥 횡포일 뿐이다.

게다가 저 저렴한 상상력은 이미 아랍의 졸부들이 두바이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사막 위의 스키장? 인공섬? … 그 막대한 에너지들은 그 졸부들 만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안 그래도 피곤한 지구를 쥐어짜서 한다는 짓이 고작 사막에서 스키를 타기 위함이라니 이건 재앙에 가깝다.

 

사막에선 낙타를 타고 스키는 스키장 가서 타라.

근데 그런 아랍 졸부를 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잔다. 그러니  4대강에 콘크리트 부어서 유람선 띄우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머릿 속에서 끝내야 할 일과 현실로 끌고 나와도 될 일들을 구분을 못하고 있다.

포르노는 그냥 포르노에서 끝내야 하는데 현실로 가져와 재현을 하려고 하면 변태가 되듯 두바이에서 벌어지는 저 돈지랄이나 4대강 살리기나, 펌프로 물 끌어다가 수도물 쏟아붙는 ‘하천’ 을 만든 것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게 아니라 현실을 재앙으로 만드는 행위다. 이래선 남극대륙에 사파리를 건설하겠다는 놈이 나와도 하등 이상할게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 지경이다.

이대통령은 그의 변태스런 삽질 정책을 녹색성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녹색 삽으로 삽질할 건지 녹색 시멘트를 바를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녹색성장’ 만큼이나 모순적인 제목이 붙은 ‘그린 포르노(Green Porno)’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이 단편영화는 여배우 출신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각본, 감독, 출연한 영화다. 자연보호와 생태를 주제로 담고 있는 이 짧막한 영상들은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직접 곤충이나 생물들로 분장하여 교미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짝짓기 행위는 정확한 고증을 통해 묘사하였다고 한다.

선댄스 영화제 측의 지원으로 모바일 동영상 플레이어 포맷으로 제작되었으며 링크를 따라가면 전편을 볼 수 있다. 재밌으니 한번 보시길.

이런게 포르노와 그린이라는 모순적인 단어를 접목시켜 만들어낸 ‘상상력’이란거다. 녹색 삽으로 삽질하는게 녹색 성장이 아니라.

각설하고, 상상력타령 따위의 설레발은 서울 시장이 광화문 광장에 제대로 된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차량 통행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개선할 때나 경기도 의회에서 당론에 개의치않고 상큼한 모습으로 초등생 전원 무료급식을 통과시키거나 할 때에 쳐주시기 바란다.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걸 상상력이라든가 신념이라든가라는 말로 포장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의 모든 패륜이 용납되어지고, 모든 횡포와 배신에 대한 비판이 편견으로 인한 오해로 해석되고 말터이니.

영진공 self_fish 

영화의 반전(反轉)에도 원칙이 있다.

    

1. 제대로 된 반전의 조건

요즘에는 반전 없는 영화는 앙꼬없는 찐빵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개나 소나 반전을 집어넣는다고 난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많은 자칭 반전 영화 중에 쓸만한 반전의 짜릿함을 건네주는 넘을 찾기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 이건 아마도 영화 만드는 이들이 반전 원칙을 숙지하지 못한 탓이리라 사료된다.
 
이에 이러한 작태를 짜증스레 여겨 제대로 된 반전의 기본 조건을 풀어놓으니 모든 영화제작자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제발 반전 같지도 아니한 반전을 만든다고 삽질 좀 그만 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반전의 기본 구성은 아래와 같다. 이건 제멋대로 만든 게 아니라 Incongruity-Resolution Theory (번역하면 ‘부조화 해소 이론’쯤 된다)의 기본 도해이다.
 

이 도식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우선 모든 이야기(혹은 사건)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초기설정이 존재한다.
② 관객들은 이 초기설정을 근거로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예측한다.
③ 만약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객은 그 이야기에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보통 말하는 “뻔한 스토리”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④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이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다면 관객은 우선 놀라움을 경험한다.
⑤ 그리고 관객은 이야기의 초기설정에서 어떻게 그런 결말이 도출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탐색해 본다.
⑥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지 못한다면, 역시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 이야기는 “황당한 스토리”가 된다.
⑦ 그러나 만약 관객이 초기설정 속에서 문제의 예측 밖의 결말의 근거나 규칙을 찾아낸다면, 관객은 비로소 제대로 된 즐거움을 경험한다.

예상외의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유주얼 서스펙트』를 처음 보았던 관객이 이 영화의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폭삭 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은 관객의 예측을 벗어난 결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말이 뜻밖이었다 하더라도, 영화 속에 절름발이가 무서운 악당일 개연성이 전혀 심어져 있지 않았다면, 역시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객들은 뜻밖의 결말에 놀랐지만, 돌이켜보니 그거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결말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재미를 느낀 것이다.

이는 영화 『식스센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결말의 단서는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에 시치미를 떼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따라간다. 왜 주인공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구는지, 처음에는 그냥 이 넘 충격이 컸었구나 정도로 생각하던 관객들은 영화 마지막의 반전을 통해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외로운 심리치료사의 설정’ 정도로 봐주기에는 2% 부족하던 사소한 사건들(왜 마누라는 주인공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지, 왜 주인공은 애 말고 다른 사람과는 한마디도 대화를 하지 않았는지, 왜 이 인간은 맨날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지…)도 완전히 설명된다. 이게 반전의 파괴력이다.

여러분도 다들 알 듯이 이런 단서들을 복선이라고 부른다. 복선이 얼마나 치밀하게 반전과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황당한 영화와 짜릿한 영화의 갈림길이 나눠지는 것이다.

물론 어디에나 개인차는 있다. 『식스센스』를 보면서 영화 초반부터 무슨 반전이 있을지 예측해버린 관객이 있는가 하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을 못하는 관객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어쩔 수 없다고 치고(이건 지능의 문제니까), 첫 번째 같은 영악한 관객들을 위한 대책은 있다. 이들은 애초부터 기막힌 반전을 기대하지 않고 영화관에 들어선다. 대부분 영화의 기본 공식에 빠삭하기 때문에 앞에 돌아가는 몇몇 에피소드만 봐도 다음에 예상되는 수준이라 별로 짜릿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반전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지 않고 영화 기본 공식을 지켜가되 보다 창의적인 변주를 하는 장르 영화다. 사실상 영화의 기본은 “말이 되는 이야기”다. 그게 갖추어진 다음에야 반전이고 뭐고 찾을 수 있는 것이다.

2. 반전과 속임수의 차이

이렇게 반전 얘기를 푸는 이유는 사실, 영화 『연인』을 보면서 경험했던 충격 때문이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서, 그놈의 어줍쟎은 반전 집착이 영화를 얼마나 쒯스럽게 만들고, 관객을 도탄에 빠트리는지를 뼈속 깊이 느끼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소위 반전이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모조리 관객을 허탈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다.

스포일러 있다능 …  주의하라능 …

첫 번째 반전, “”장쯔이”가 사실은 장님이 아니다”를 보자.
이 반전이 제대로 먹히려면, 얘가 장님 같지만 장님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콩따라 북치기’ 가 그런 거였다고? 무협영화의 공식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그 퍼포먼스는 장쯔이가 얼마나 대단한 장님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 결코 두 눈 멀쩡한 애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 눈 멀쩡하고 팔다리 멀쩡해도 고수가 아니면 결코 그런 고난도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장면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던 목욕탕 결투 장면에서도 장쯔이는 초지일관 소리에만 집중한다.  장님이 아니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다.  이렇게 아무런 단서도 없다가 갑자기 또릿또릿 바라보며 말하는 장쯔이를 보는 관객들의 심정은 금성무보다 더 허탈하다.  이게 도대체 뭐다냐… 반전이 주는 짜릿함은커녕, 전반부에 쌓아왔던 모든 이야기의 무게가 그냥 날아가 버리는 거다.

두 번째 반전, “”유덕화”가 사실은 첩자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협판 “무간도4″다)도 마찬가지다.

역시 문제의 목욕탕 결투. 여기에서 유덕화는 장쯔이를 정말로 작살내버린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말이다.  둘이 애인이고 같은 편이라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감독이 이 둘의 결투를 아주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는 게 문제다. 그 느린 화면 어디에도 이 둘이 짜고 친다는 단서는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둘이 같은편이었네~ 하면 반전이 되나?  관객들이 느끼는 건 배신감 뿐이다.

이 같쟎은 반전의 행진을 보며 갑자기 장예모는 혹시 반전을 속임수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여기서 반전은 그냥 속임수다. “장쯔이”의 속임수, “유덕화”의 속임수, 그리고 감독의 속임수… 뭐 유주얼서스펙트 같은 영화에서야 속임수가 반전이었지만, 식스센스의 서늘한 반전은 속임수가 아니었는데…

3. 말이 되는 이야기

그러면 이야기 자체는 말이 되느냐 … 솔직히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하였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리 이성의 세기인 20세기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왜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영화가 흥했했던 것일까? 예전 영화들 중에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성공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는 않은거 같은데 … 갑자기 관객들이 비이성적이 되기로 결심한건가? 아니면 사람들은 애초부터 논리 같은건 따지지 않았던 걸까?

그래 뭐 “유덕화”는 무간도에서 처럼 완벽한 내부첩자였다고 치자. 그리고 “장쯔이”는 아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서로 뻔히 아는 “유덕화”와 싸울 때 조차도 장님행세쇼를 했다고 치자. (뭐 주변에 관객들도 있었나부지) 중국의 기후가 워낙 개떡같아서 한가을 날씨가 순식간에 한겨울로 바뀔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거 까지는 말 된다고 믿어주자…

아무리 그래도 “비도문” 진영까지 와서 벌어진 일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비도문 두목은 새대가린가? “유덕화”가 왜 그동안 비도문에 충성해왔는지 두목은 진정 몰랐단 말인가? 둘의 대화는 듣지 못하고 몸싸움만 봤냐?
“장쯔이”의 배신을 비참하게 인정하고 돌아가게 만들면 “유덕화”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지 두목은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장쯔이”가 “금성무”에게 어떤 감정인지 대강이라도 짐작 못했나? 그걸 알면서도 “장쯔이”에게 “금성무” 처치를 맡겨놓고 둘이 들판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수 있도록 내비둔거냐? 혹시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내비뒀나? 둘이 같이 도망가라고?

그렇게 부하들의 마음을 모르고서도 두목 행세 할 수 있냐?

“금성무”, “장쯔이” 너네들도 그렇다. 아무리 서로 눈빛만 마주쳐도 불타오를 단계라지만 그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있던가?


아아… 이런거 따져서 무엇하리…

아무래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포르노 비디오와 동일한 구조였던 모양이다.
포르노 영화에서 모든 사건은 결국 섹스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하듯, 이 영화에서도 모든 사건이나 모든 반전이나 모든 이야기(그렇게 불러줄 만한게 혹시라도 있다면)는 결국 뽀대나는 고속촬영장면을 위한 곁다리에 불과했던거다. 그래서 감독도, 관객도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끄고 장쯔이의 우아한 춤사위나 몸놀림, 칼이나 화살의 비행을 고속촬영으로 감상하는 거에만 집중하기로 약속된 영화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약속이 있다는걸 관객에게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본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영진공 짱가

[영진공 61호]포르노를 허가하라!

구국의 소리
2006년 10월 16일

처음엔 믿지 않았다. 500명이 나와서 섹스를 하는 포르노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포르노에 출연할 500명을 모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일본이라지만 영세한 업계 사정상, 포르노 배우 500명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메이저 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 500명을 데리고 영화를 찍겠다는 기획을 했다고 쳐도, 설마 일반 사람들이 몇 푼 받겠다며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얼굴 봐가며 섹스를 하겠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보기 전까지. -.-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500명이란다..

경악이었다. 정말 500명이 모여서 한꺼번에 떡을 쳐댔다. (화면을 보면 섹스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저들은 지금 떡을 치는구나’라는 비속어가 입 밖으로 신음소리마냥 새어 나올 뿐이다.) 앞에서 지휘자가 구령하면, 줄 맞춰서 서있던 남성들이 자기 파트너의 여성의 가슴을 애무하고, 지휘자가 깃발 한번 올리면, 앞치기를 하고, 뒷치기를 하고, 여성상위를 해댔다. 놀라운 장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아니라면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는 과감한 기획! 일본이 아니라면 모일 수 없는 엄청난 인파!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군대의 제식훈련에서처럼, 일사분란하게 떡을 치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장엄한 스펙타클함에 어이가 막혀 웃음부터 나왔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그 스팩타클한 영상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뜬금없는 이야기겠지만, 하나 묻자. 당신은 포르노를 본 적이 있는가?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대한민국에서 포르노 상영을 허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1. 포르노 영화의 상영을 허가해야 하는가?

20세 이상의 성인 중, 95%가 포르노를 관람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대부분 봤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포르노 상영을 허가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채 40%가 되지 않는다. 놀랄 일은 아니다. 클릭 몇 번으로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다운 받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털 보이는 장면에 대한 가위질이 만연한 환경에서 이 정도의 이중적인 사회적 잣대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계속 가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지만 반대 이론도 만만치 않다. 어차피 누구나 다 보는 포르노, 구태여 모든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는 의견은 일리가 있다. 또 몰래 카메라, 미성년자 포르노와 같은 범죄적 포르노가 몰래 나도는 상황에서 차라리 법적 테두리 안에서 관리하자는 의견도 타당성을 갖는다. 외국에 서버를 둔 한국의 포르노 업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현재는 단속으로 많이 닫혔지만) 지금처럼 포르노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외화낭비라는 이야기도 – 조금 억지 논리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 포르노 상영을 허가해야 한다는 근거로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비디오 방 몰래 카메라.. 이런 거 볼때마다 뜨끔할 분도 계시리라 설마 내가 나온 것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포르노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이 만들어지는 것은 법이 너무 약하기 때문인걸까?


2. 포르노 상영에 대한 논쟁

사실, 포르노를 허가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논쟁은 진부한 논쟁거리다. 예술적 창작 행위인 에로스 (혹은 에로티카)를 법으로, 그리고 권력으로 규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허가론자들의 주장이다. 포르노의 폭력성과 여성비하적인 메시지는 사회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하도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이어서, 주장과 반대로 이어지는 그 스토리를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꿰고 있을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 예술적 가치를 존중하는 찬성론자와 포르노의 유해함을 강조하는 반대론자의 주장은 서로 대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쪽이 예술을 떠들면, 다른 쪽은 포르노의 유해함을 주장하는 식이다. 오랫동안 치고 받고 싸워왔지만, 서로 자기 말만 하며,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3. 포르노가 정말 사람에게 유해한가?

포르노가 유해하다고 믿는 것은, 포르노가 사람에게 악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것일까? 포르노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포르노에서 봤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사회학습 차원의 모방 (modeling)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를 통해 억압된 성적 욕구를 해소시켜, 오히려 반사회적 성행위가 줄어들게 된다는 정화(catharsis)이론이다. 마지막 이론은 포르노를 보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무 효과이론(null theory)이다.

모방 이론과 정화이론은 모두 근거가 있다. 사람들에게 포르노를 보여주고 실험한 결과 “보다 폭력적인 성적 판타지”를 가지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며,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포르노를 자주 노출시키다 보면 “성적 충동이 무디어지게 된다.”라는 정화이론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결과를 얻기 위해 미국에서는 60년대, 이름도 무지하게 긴 “폭력의 원인 및 예방에 대한 자문위원회”와 “외설물과 포르노에 대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200만 달러를 쏟아 붇는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이론 모두가 어느 정도 인정되는 결과가 나와, 예산낭비라는 비난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세 번째 이론은 내가 동의하는 이론이다. 여배우의 이름과 프로필까지 꿰고 다니는 매니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 이상으로 봤다. 구워놓은 DVD만 계란 한판이다. (괜찮은 것들만 모았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봤지만, 남들 보다 폭력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게 되지도 않았고, 더더군다나 정화되지도 않았다. 영향을 끼쳤다면, 기껏해야 휴지 소비량을 증가시킨 정도랄까? -.-;

모방 이론과 정화 이론의 근거가 되는 실험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포르노를 본 대학생들이 보다 더 폭력적인 성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수 십 개고, 포르노의 합법화 이후 성범죄가 오히려 줄었다는 스웨덴 정부의 공식 보고서도 있다.

결론은 그거다. 포르노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는 것. 혹은 아무런 기능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해, 포르노는 인간에게 나쁜 영향과 좋은 영향을 모두 미치지만, 그 결과의 합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포르노가 정말 유해한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페이스의 남자 배우가 출연하는 이런 포르노는 정신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해할 수 있다. -.-

4. 포르노는 예술인건가?

포르노가 예술인가? 질문 자체가 코미디다. 사람들의 90% 이상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자. “예술(에로스)과 외설(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기준에 맞춰 포르노가 예술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아. 갑자기 어려워진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 이건 포르노의 합법화 보다 더 흔한 논쟁거리이지만, 깊게 들어가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논쟁의 주제가 된다. 혹자는 “꼴리면 외설이며, 안 꼴리면 예술이다.”라는 말을 한다. 명답이지만, 정답일리 없다. 꼴리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오이와 가지만 봐도 꼴리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미스코리아 단체 누드를 봐도 안 꼴리는 남성이 있다. 게다가 발가락만 봐도 꼴려야 한다고 믿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팬티만 입고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문화권도 있다. 꼴리는 기준은 정말 “지 꼴리는 대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과 외설을 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미 수 백 번은 돌고 돈 논쟁일뿐더러, 명확한 답도 없는 논쟁이다. 게다가 재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낼 수 있다. 그것은 “예술과 외설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기준”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런 기준이 마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외설과 예술의 대착점인 고대 그리스의 신 에로스 ( 그림 : 에로스와 푸쉬케)

5.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성과 상업성이다.

사실, 포르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폭력성과 상업성이다. 내가 아는 일본어 중에 “키라이~”라는 단어가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일본 AV (Adult Video)에서 배운 단어다. 한국말로 하면 “싫어요~” 정도가 되는데..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 단어일지는 대강 짐작하시리라. 비위도 약하고, 폭력도 좋아하지 않아 나름대로 건전한 것만 보는 편인데도, 키라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혀 버린 것은 그만큼 포르노가 폭력성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강간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그 속에서 성적인 만족을 얻는 포르노 영화의 문제점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다.

상업성 문제 역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인간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점은 인간을 화폐단위로 평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는 점에서 경계해야하는 논리임에 분명하다. 포르노는 이런 인간의 상품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포르노가 돈을 벌 목적으로 인간의 몸을 팔아 만드는 영화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로 줄기차게 포르노를 탄압해 왔음에도 줄기차게 버티며,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가의 고된 예술 혼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자본가의 장삿속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섹스 산업은 돈이 많이 남는다. ( 성인용품은 빼고. -.-)


6. 포르노에만 죄가 있는 것인가?

상업성과 폭력성에 대한 비난에서 포르노가 자유로울 수 없다고는 하지만, 상업성과 폭력성을 팔아먹는 영화가 오직 포르노만일리는 없다. 많은 영화가 폭력을 팔아 장사를 하며, 인간의 몸을 상품화해서 돈을 번다. 어디 영화뿐이겠는가? TV 드라마나 CF는 말 할 것도 없고, 소설과 연극도 그러할뿐더러, 심지어는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에서조차 폭력과 상업성은 일상화된 요소일 따름이다.

참고 1 : 마광수 교수님의 섹스스토리
참고 2 :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노에만 폭력과 상업성의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은 무언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물론 포르노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다른 영상물 보다 훨씬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기에, 오히려 “미성년자와의 섹스”나 “몰래 카메라”와 같은 포르노가 더욱 힘차게 생산되어지게 된다. 금단의 열매는 언제나 달콤한 법이니까.

수 많은 가위질 끝에 개봉된 감각의 제국.. 무삭제판을 보며.. 포르노와 영화의 구분히 모호해졌었더랬다.

4. 포르노를 허가하라.

포르노가 교육적인 영상물이거나 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해악이 있으며, 비판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런 문제가 포르노의 상영을 반대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포르노에 대한 과도한 금지는 다른 매체에 비해 형평성이 맞지 않으며, (포르노에 자체적인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포르노 자체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악 영향을 미친다는 것 역시 증명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암묵적으로 유통되는 포르노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여들여 적절한 비판과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점차 음습해지는 포르노의 퀄리티를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 비법일 수 있다. 게다가 포르노의 순기능에 대한 여러 연구와 보고서가 말하듯이,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사회의 성범죄 감소와 불법 성행위의 감소에 큰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다. 또한, 포르노 상영을 허가 하는 일은 이중적인 성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솔직하고 건강한 성문화를 지향하는 사회로 가는 작은 발 디딤이 되는 일이라 믿는다.


5. 500명이 나오는 포르노

포르노 상영과 제작은 다른 문제다. 상영을 허가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작까지 가능해지려면, 아마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보기 힘들 듯하다. 아님 말고.. -.- ( 늙어서 힘 다 빠진 상황에서 한국 포르노가 제작되면 무엇 하겠는가? 어차피 봐도 지금 같은 재미가 없을 텐데. 고로 제작을 허가하라는 주장은 후손의 몫으로 남겨두련다. 후손들이여 꼭 쟁취하여 그대들의 대에서는 즐거운 세상을 이룩하시길. )

설령 우리나라에서 포르노 제작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500명이 나오는 포르노가 제작될 수 있으려면 아마도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많이 까졌다고 생각하는 내 입에서도 500명이 나오는 포르노를 보며 “미친.. ”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을 정도였으니, 아마 이런 영화 찍겠다며 달려드는 사람들이 500명이 되려면 대한민국이 몇 번 뒤집어 져야 할 것이다. (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해 마시라. )

500명이 나오는 포르노의 마지막 장면.. 다 끝나고 누워있다. -.-

사회마다 받아들이는 포르노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일본에서는 500명이 모여서 단체로 떡을 쳐도 용서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포르노가 허용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왕과 왕비가 나와 일본 황궁에서 섹스를 하는 비디오가 제작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더 흥행할 듯), 일본에서 그런 걸 만들었다가는 만든 사람들 밤길 조심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나라마다, 사회마다 관습적으로 허용하는 기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포르노 상영이 가능하도록 법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벗어나는 폭력적인 포르노는 상영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포르노가 제작될 리도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영상물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아예 보지도 못하게 해 놓고 뒤에서 훔쳐보는 것보다, 보여주고 앞에서 비판을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포르노의 악영향에 대한 걱정과 혹은 반사회적인 포르노에 대한 근심은 그저 기우가 되지 않을까?

잠시 구국의 소리로 마실 나온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