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2009), 메시지와 주제 사이의 균형감이 아쉬운 영화

반두비

뚱한 표정이 민서의 매력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영진공 노바리

차우 … 와우!!!

영화 <차우>는 CG의 세밀성이나 연출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 속의 멧돼지는 상당히 어설프다.
나 CG야! 혹은 나 애니매트론이야! 라고 거의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들이닥칠때 충분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왜냐면, 그 멧돼지에게 깔려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 인간 캐릭터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생하니까 그 인간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도 생생해지는 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냐고?
아주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기법을 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캐릭터의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딱 하나.
뜬금없음. 혹은 기괴함 이다.
나도 예전에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실재감은 뜻밖의 어떤 것을 통해 발현된다는…
http://kr.blog.yahoo.com/psy_jjanga/468859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하게 바로 그 기법만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뜬금없고 괴상한 측면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하나씩 부여하는 것 만으로 그 각각의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 이 지점부터 스포일러 비스무리한게 출몰합니다.  주의 요망! *

여기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상하다.
이장에서부터 말단 순경까지, 심지어 천포수 할배까지 …
도무지 제대로 멀쩡한 인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다 그만한 개연성이 있다.

형사라고 손버릇 나쁘지 말란 법 있나?
행사가서 거기 나온 음료수나 과자 몇개 꼬불치기 …
나도 가끔 하는 짓이라 좀 뜨끔하더라.

은근히 꼰대스럽고 거만한,
근데 내실은 하나 없는 말단 순경도 그렇다.
정말 어디서 진짜 만났던 놈 같더라.

동네 광녀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엔 종종 그런 사람들 있다.
예전 농촌봉사활동가서 스쳐간 동네바보가 생각나더라.
보통 동네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그냥 당연한 존재로 대한다.
사람취급을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말 가족농장의 첫번째 희생자.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과 행태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멧돼지에게 물려가신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
각자의 독특한 결함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
그 결함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캐릭터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함들이 무지하게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묘사를 뜬금없이 툭툭 던진다.
개가 (핀란드)말을 하고, 순경의 소망 혹은 악몽이 현실과 뒤섞인다.
그러나 이것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결함있는 인간들이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

이 영화,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빈틈이 널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의 생동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핵심이다.
핵심만 놓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상황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감독의 개성이 철철넘친다.
신정원 감독은 봉준호 70%에 홍상수 30% 정도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종종 웃음이 터지는데, 그게 진땀을 동반하는 웃음이다.
이게 웃을 일인가? 근데 웃기긴 한데… 뭐 이런 느낌.

<미쓰 홍당무>를 볼때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웃었고 미국영화에서는 <미트페어런츠>가 그런 면이 있었다. 이 영화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여튼 참으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보고 황당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실망할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불쾌할 것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나 전개 등을 기대한다면 황당할 것이고,
생생한 멧돼지 괴수 CG를 기대했다면 참 실망하겠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관객들도 분명히 많겠다.

바로 나처럼…

영진공 짱가

까뜨린느 드뇌브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시네 프랑스’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매주 화요일마다 프랑스 고전, 예술 영화를 소개하는 하이퍼텍 나다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마지막 지하철>을 상영하던 날.

 

평일 늦은 저녁시간임에도 무려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관객들로 극장 로비가 들썩였다.  크지 않은 극장이지만 좌석은 금새 가득 찼고
내 앞의 앞 좌석에는
<은하해방전선>윤성호 감독도 자리해 있었다.

그날은 트뤼포의 작품을 스크린을 통해 보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 지하철>두 번 세 번 더 보고 싶을만큼 강렬한 영화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 그럴싸한 하루로 남을 거다.


* 까뜨린느 드뇌브의 매력


뭐니뭐니해도 영화의  시작부터 줄곧 한눈을 팔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까뜨린느 드뇌브 때문이었다.

워낙 유명한 배우니까 진작부터 모습과 이름 정도는 매치시킬 수 있었지만
예전부터 얼음처럼 차갑고 귀족적인 이미지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미인’이긴 하지만 금발의 마론인형처럼 인공적인 분위기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그녀의 출연작 역시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배우로서의 재능도 알아채기 힘들었다.  이미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으로 인정받은 그녀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날엔 이상하게도 까뜨린느의 결벽에 가까운 완벽한 정갈함이, 어찌보면 과장되게 정돈된 깔끔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다가 온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군살 없는 몸매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정성스럽게 손질한 듯한 깔끔한 헤어스타일.  거기에 티끌 한 점 없이 투명하고 맑은 피부가 그랬다.  그녀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는 손짓도, 황급히 계단 위를 걸어 오르는 걸음걸이도, 남편을 위해 스튜를 젖는 동작도 모두 우아했다.




첫 공연을 성황리에 바치고
기쁨에 겨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소녀같은 천진함도 엿보였다.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건 그저 깊은 눈, 무게있게 흔들리는 두 눈동자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거울 속 스스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으려면 안을 채우고 겉을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  깊은 눈동자와 정갈함으로 무장한 중년의 까뜨린느가 뇌리에 콕 박힌 까닭은 아마도 내외면의 조화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쉽게도 <마지막 지하철>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몇몇 장면을 찾을래야 찾을 수 가 없다. 모든 이미지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어서인지 이미지 검색창이 소극적으로 탈바꿈 돼있다.

영화 이야기를 할래도 음악 이야기를 할래도 아무튼 어려워졌다.  그래서 내가 반해버린 까뜨린느의 모습은 기억 안에서만 훨훨 자유로울 뿐이다.

영진공 애플

시리즈 최악의 작품, ‘여고괴담 5: 동반자살 (2009)’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하 ‘동반자살’)이 시리즈 중 최악의 작품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출도 이야기도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딸리고, 심지어는 배우들의 외모도 딸린다. 영화 얘기를 하며 배우의 외모를 트집잡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간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능성있는 젊은 신인 여배우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외모 트집잡기’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강조법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게 최악이니 하다못해 배우의
외모라도 좋았다면 뭔가 변명해줄 거리라도 찾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1편이야 원래 활동하고 있던 배우들을 캐스팅한
거였으니 넘어가고,) 2편에서 시크한 이영진과 귀엽고 깜찍한 공효진, 3편에서 인형같은 외모의 박한별과 묘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송지효, 4편에서 정말 예쁘다 싶은 김옥빈과 서늘한 매력이 있는 차예련이 발굴됐다. 그렇다면 5편에서는?

소재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고생들의 ‘우정’(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우정’이 종종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차치하고,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국에서 ‘여고’라는 신비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고생’이라는 신비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들, 종종 끔찍한 결말과 비극을 맞고 마는 이야기들을
다뤄왔다.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어른들보다도 또래의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나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로
형성 중인 각자의 정체성마저도 함께 공유하려 들고, 그래서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들어간다는” 여고생이다. 그러니 ‘죽음도 함께
맞자’는 약속을 우직하게 실행해 버리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여고괴담 시리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이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동반자살’은 그 자체로 이야기 하나를 다 풀 만한 소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더 깊은 얘기를 하기 위한 표면적
‘가이드’로서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이 굳이 ‘동반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굳이 이유랄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나이 또래에는 사회적이고 현명한 해결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회피책일 수도 있고, 죽음, 나아가 자살로서의
죽음 자체가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동반자살>에서 다뤄지는 자살, 특히나 동반자살은 매우
나이브하다. 이것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형식적으로 잇기 위해 별 고민없이 대충, 선택된 감이 있다.

그 결과 첫
오프닝에서의 죽음 뒤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지부진하다. 미학적인 측면으로도 <동반자살>은 별 매력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 시리즈 고어 중 장면이 가장 세고 많다는데도, 영화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슬픔’이야말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고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여고괴담>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애틋함도 섹슈얼한 텐션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단순하고 고지식한 캐릭터들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올 정도다. 여고생의 특징이라고 보통 얘기되는
불안감과 모호함 따위, 이 영화엔 없다. 소이(손은서)가 느끼는 죄책감도 평면적이고, 유진(오연서)의 탐욕이나 집착 역시
일차원적일 뿐 모종의 절실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한 줄 짜리 ‘설정’만 받았을 뿐, 디테일한 캐릭터의 다면성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단서 하나를 알려주는 데에 오만 년, 다음 단서까지 또 오만 년, 그렇게 지리하게 질질끌며 가다가, 알고
보니 (스포일러라서 가린다) 동생에게 빙의해 있던 언니란다.

지루함을 겨우
견디며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도 나오지 않는 수밖에. 절절한 연인들의 흉내를 내면서도 굳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노라, 강조하는 폼새도 좀 우습다. 언주와 소이 사이에는 어떠한 텐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이 시작돼 그토록 큰 인기를 누리며 5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한국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억압, 그 중에서도 여고생들에게 가하는 이중적이고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가하는 억압 및 통제와,
사회의 주류인 남성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여고생들 특유의 불안과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를 더욱 첨예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건 입시지옥과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은밀히 감춰진,
그리고 이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과는 살짝 빗겨나 있는 특유의 룰이 존재하는 여고라는 특유의 공간배경이다. 그런데 이제껏
<여고괴담>을 만들어온 주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을 어떻게든
본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법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특정한 부분은 ‘더욱 이해 못할
부분’으로 남겨두며 신비화 해왔다.

관객들 역시 (그들 자신이 여고생이건 아니건간에) <여고괴담> 시리즈의 여고생들을
타자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 결과 <여고괴담> 시리즈의 인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인, 절대적인 ‘타자’로서, 그리고
‘거울’과 같은 존재로 스크린을 누볐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노력과 결과의 엇나감’이 오히려 <여고괴담>의
인물들을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으로
지목한 ‘무서움’과 ‘슬픔’이 발생하는 지점, 나아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이 기적적으로 성취해낸 ‘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나온 지 벌써 10년, 그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성년’의 기간을 보내는 여고의 공간의 특성이 많이 변한 만큼, 이제 어떻게든 그런 현실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시리즈의 변화도
반영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앞선 이야기들 역시 언제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여고괴담>의 세계를
진화시켰던 게 사실이다.

1편에서 ‘어떻게든 여고라는 지긋지긋한 공간을 빨리 떠나는 게’ 아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면(그래서
귀신은 학교에 계속 남는다), 3편인 <여우계단>에선 ‘예고’라는 공간이 주는 특혜와 이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려는, 사회적으로 크게 진출하려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간 <고사 : 피의
중간고사>처럼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차용했으나 <여고괴담>의 직계는 될 수 없었던
영화들도 등장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이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동반자살>에서 시리즈 내 최초의 ‘순수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미국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로 등장했던 ‘여왕과 시녀’로 구성된 패거리가 나오고,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와
임신 문제까지 다루는 걸 보면, 새로운 변화에의 강박이 꽤 컸던 듯하다.

그럼에도 <동반자살>의 감독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여고괴담>의 여고생들에게 매혹되는지, 왜 이 시리즈를 그토록 좋아했는지는 감도 잡지 못한 것같다. 전편들에서
각각 인기있었던 설정을 하나씩 따와 잡탕을 만들어 버리지만, 그 설정들이 왜 그 편에서 그토록 인기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시리즈의 질긴 목숨을 꼭 유지해야만 하나 … <동반자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전히 매력있고 할 얘기도 많은 시리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시리즈다.

이전에 눈앞에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던 억압이 덜해졌을 뿐, 우리의 10대 여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더 은밀해진 억압과 통제과 경쟁에의 강요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반자살>의 애초의 운명은, 앞엣
시리즈를 정리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리즈로 도약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함으로써 강력한 변명과 근거를 제공해준 듯하여 보는 기분이 그닥 좋지는 않다.

영진공 노바리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올해는 뭔 마가 끼었나 …


나는  <아즈카반의 죄수> 이후 해리포터 원작을 읽지 않았다.
그리하여 …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원작과는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소위 “무지한 관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무지한 관객의 관점에서 말하는 건데, 이 영화 잘 만들었다.
뭘 보고 잘만들었다고 우기냐고?

-= IMAGE 1 =-

첫 번째 이유,
영화가 길다는데 그리 긴줄 모르겠더라는 점 … (반대로 트랜스포머는 정말 길고 지루하더라…)

많은 원작팬들이 투덜거리는 이유가 원작에서 중요한 내용을 잘라내고 삼총사의 연애담만 키웠다는 건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고? 난 뭐가 잘렸는지 모르거든.

제한된 시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넘치는 것보다는 몇가지 이야기라도 제대로 끌고가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 아닌가.  과유불급 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두 번째 이유,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한 “원작을 읽은 이”들 대다수의 평은 이야기가 너무 축약되어서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원작 소설이 우리나라에서는 상하권으로 나왔을 정도로 긴데 그것을 몇가지 핵심 스토리로 정리한 덕분에 혼란도 거의 없다.   단 그 와중에 전체 이야기의 규모가 좀 줄어들고 오히려 너무 단촐하게 느껴지긴 하더라.

세 번째 이유,
나름 놀랄 거리도 있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누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게 그거였어?” 류의 놀라움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혼혈왕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더라 … 음 … 놀라웠다
(원작을 읽은 관객들이 속터져할지도 모르겠으나…내가 그렇다는데 뭐)
그리고 드는 생각, 아 … 불쌍한 사람. 재능도 많았구나 …




그나저나 …
이번 편을 보고서 확실히 느낀 것은,

덤블도어 마법사님은 그냥 인자한 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양반은 차라리 개과천선한 어둠의 보스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어디선가 불싸지르는 마법 한탕 벌린 다음에 해리를 찾아와서 검게 그슬린 손을 대수롭지 않게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 풀풀난다.

젊었을 때 분명히 무서운 짓도 많이 했을 법한 그 어두운 카리스마 …
처음에 마이클 갬본이 이 역할을 물려받았던 <불의 잔> 때만 해도 “무슨 덤블도어가 저렇게 불안정하고 경박해?”라며 돌아가신 분을 아쉬워했다만,
지금 보니 그에게 딱 맞는 역할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올해는 뭐랄까 …
<제국의 역습>이라 할 수 있는 한 해인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마가 낀건지
중요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

그렇다면 제다이는 언제 귀환할 것이냐 …
이것이 문제가 되겠구나.

부디, 제다이가 돌아오실 때까지
어둠의 무리들에게 먹히지 않고 버틸수 있는 힘을 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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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