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 … 와우!!!

영화 <차우>는 CG의 세밀성이나 연출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 속의 멧돼지는 상당히 어설프다.
나 CG야! 혹은 나 애니매트론이야! 라고 거의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들이닥칠때 충분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왜냐면, 그 멧돼지에게 깔려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 인간 캐릭터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생하니까 그 인간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도 생생해지는 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냐고?
아주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기법을 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캐릭터의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딱 하나.
뜬금없음. 혹은 기괴함 이다.
나도 예전에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실재감은 뜻밖의 어떤 것을 통해 발현된다는…
http://kr.blog.yahoo.com/psy_jjanga/468859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하게 바로 그 기법만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뜬금없고 괴상한 측면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하나씩 부여하는 것 만으로 그 각각의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 이 지점부터 스포일러 비스무리한게 출몰합니다.  주의 요망! *

여기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상하다.
이장에서부터 말단 순경까지, 심지어 천포수 할배까지 …
도무지 제대로 멀쩡한 인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다 그만한 개연성이 있다.

형사라고 손버릇 나쁘지 말란 법 있나?
행사가서 거기 나온 음료수나 과자 몇개 꼬불치기 …
나도 가끔 하는 짓이라 좀 뜨끔하더라.

은근히 꼰대스럽고 거만한,
근데 내실은 하나 없는 말단 순경도 그렇다.
정말 어디서 진짜 만났던 놈 같더라.

동네 광녀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엔 종종 그런 사람들 있다.
예전 농촌봉사활동가서 스쳐간 동네바보가 생각나더라.
보통 동네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그냥 당연한 존재로 대한다.
사람취급을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말 가족농장의 첫번째 희생자.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과 행태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멧돼지에게 물려가신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
각자의 독특한 결함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
그 결함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캐릭터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함들이 무지하게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묘사를 뜬금없이 툭툭 던진다.
개가 (핀란드)말을 하고, 순경의 소망 혹은 악몽이 현실과 뒤섞인다.
그러나 이것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결함있는 인간들이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

이 영화,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빈틈이 널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의 생동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핵심이다.
핵심만 놓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상황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감독의 개성이 철철넘친다.
신정원 감독은 봉준호 70%에 홍상수 30% 정도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종종 웃음이 터지는데, 그게 진땀을 동반하는 웃음이다.
이게 웃을 일인가? 근데 웃기긴 한데… 뭐 이런 느낌.

<미쓰 홍당무>를 볼때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웃었고 미국영화에서는 <미트페어런츠>가 그런 면이 있었다. 이 영화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여튼 참으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보고 황당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실망할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불쾌할 것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나 전개 등을 기대한다면 황당할 것이고,
생생한 멧돼지 괴수 CG를 기대했다면 참 실망하겠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관객들도 분명히 많겠다.

바로 나처럼…

영진공 짱가

까뜨린느 드뇌브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시네 프랑스’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매주 화요일마다 프랑스 고전, 예술 영화를 소개하는 하이퍼텍 나다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마지막 지하철>을 상영하던 날.

 

평일 늦은 저녁시간임에도 무려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관객들로 극장 로비가 들썩였다.  크지 않은 극장이지만 좌석은 금새 가득 찼고
내 앞의 앞 좌석에는
<은하해방전선>윤성호 감독도 자리해 있었다.

그날은 트뤼포의 작품을 스크린을 통해 보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 지하철>두 번 세 번 더 보고 싶을만큼 강렬한 영화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 그럴싸한 하루로 남을 거다.


* 까뜨린느 드뇌브의 매력


뭐니뭐니해도 영화의  시작부터 줄곧 한눈을 팔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까뜨린느 드뇌브 때문이었다.

워낙 유명한 배우니까 진작부터 모습과 이름 정도는 매치시킬 수 있었지만
예전부터 얼음처럼 차갑고 귀족적인 이미지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미인’이긴 하지만 금발의 마론인형처럼 인공적인 분위기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그녀의 출연작 역시 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배우로서의 재능도 알아채기 힘들었다.  이미 세자르상 여우주연상으로 인정받은 그녀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날엔 이상하게도 까뜨린느의 결벽에 가까운 완벽한 정갈함이, 어찌보면 과장되게 정돈된 깔끔한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다가 온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군살 없는 몸매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정성스럽게 손질한 듯한 깔끔한 헤어스타일.  거기에 티끌 한 점 없이 투명하고 맑은 피부가 그랬다.  그녀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는 손짓도, 황급히 계단 위를 걸어 오르는 걸음걸이도, 남편을 위해 스튜를 젖는 동작도 모두 우아했다.




첫 공연을 성황리에 바치고
기쁨에 겨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소녀같은 천진함도 엿보였다.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건 그저 깊은 눈, 무게있게 흔들리는 두 눈동자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거울 속 스스로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으려면 안을 채우고 겉을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  깊은 눈동자와 정갈함으로 무장한 중년의 까뜨린느가 뇌리에 콕 박힌 까닭은 아마도 내외면의 조화가 탁월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쉽게도 <마지막 지하철>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몇몇 장면을 찾을래야 찾을 수 가 없다. 모든 이미지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고 있어서인지 이미지 검색창이 소극적으로 탈바꿈 돼있다.

영화 이야기를 할래도 음악 이야기를 할래도 아무튼 어려워졌다.  그래서 내가 반해버린 까뜨린느의 모습은 기억 안에서만 훨훨 자유로울 뿐이다.

영진공 애플

시리즈 최악의 작품, ‘여고괴담 5: 동반자살 (2009)’

<여고괴담 5 : 동반자살>(이하 ‘동반자살’)이 시리즈 중 최악의 작품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출도 이야기도 배우들의 연기도 가장 딸리고, 심지어는 배우들의 외모도 딸린다. 영화 얘기를 하며 배우의 외모를 트집잡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간 <여고괴담> 시리즈가 가능성있는 젊은 신인 여배우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외모 트집잡기’는 그러니까, 또 하나의 강조법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게 최악이니 하다못해 배우의
외모라도 좋았다면 뭔가 변명해줄 거리라도 찾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1편이야 원래 활동하고 있던 배우들을 캐스팅한
거였으니 넘어가고,) 2편에서 시크한 이영진과 귀엽고 깜찍한 공효진, 3편에서 인형같은 외모의 박한별과 묘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있는 송지효, 4편에서 정말 예쁘다 싶은 김옥빈과 서늘한 매력이 있는 차예련이 발굴됐다. 그렇다면 5편에서는?

소재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고생들의 ‘우정’(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우정’이 종종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 실제로 그런지 안 그런지는 차치하고, <여고괴담> 시리즈는 한국에서 ‘여고’라는 신비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여고생’이라는 신비화된 존재들에 대한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들, 종종 끔찍한 결말과 비극을 맞고 마는 이야기들을
다뤄왔다.

부모나 선생, 기타 다른 어른들보다도 또래의 친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나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로
형성 중인 각자의 정체성마저도 함께 공유하려 들고, 그래서 심지어 “화장실도 같이 들어간다는” 여고생이다. 그러니 ‘죽음도 함께
맞자’는 약속을 우직하게 실행해 버리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여고괴담 시리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이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동반자살’은 그 자체로 이야기 하나를 다 풀 만한 소재가 아니라, 말하자면 더 깊은 얘기를 하기 위한 표면적
‘가이드’로서의 소재로 가치가 있다. 아이들이 굳이 ‘동반자살’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 굳이 이유랄 건 없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나이 또래에는 사회적이고 현명한 해결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회피책일 수도 있고, 죽음, 나아가 자살로서의
죽음 자체가 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동반자살>에서 다뤄지는 자살, 특히나 동반자살은 매우
나이브하다. 이것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형식적으로 잇기 위해 별 고민없이 대충, 선택된 감이 있다.

그 결과 첫
오프닝에서의 죽음 뒤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지지부진하다. 미학적인 측면으로도 <동반자살>은 별 매력이 없다.
게다가 영화는 종종 지루하다. 시리즈 고어 중 장면이 가장 세고 많다는데도, 영화는 무섭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슬픔’이야말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여고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여고괴담>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고괴담 5 : 동반자살

애틋함도 섹슈얼한 텐션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단순하고 고지식한 캐릭터들이라니,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올 정도다. 여고생의 특징이라고 보통 얘기되는
불안감과 모호함 따위, 이 영화엔 없다. 소이(손은서)가 느끼는 죄책감도 평면적이고, 유진(오연서)의 탐욕이나 집착 역시
일차원적일 뿐 모종의 절실함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각 캐릭터들은 한 줄 짜리 ‘설정’만 받았을 뿐, 디테일한 캐릭터의 다면성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단서 하나를 알려주는 데에 오만 년, 다음 단서까지 또 오만 년, 그렇게 지리하게 질질끌며 가다가, 알고
보니 (스포일러라서 가린다) 동생에게 빙의해 있던 언니란다.

지루함을 겨우
견디며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어이가 없어서 실소도 나오지 않는 수밖에. 절절한 연인들의 흉내를 내면서도 굳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노라, 강조하는 폼새도 좀 우습다. 언주와 소이 사이에는 어떠한 텐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고괴담>이 시작돼 그토록 큰 인기를 누리며 5편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한국이란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억압, 그 중에서도 여고생들에게 가하는 이중적이고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가하는 억압 및 통제와,
사회의 주류인 남성 성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여고생들 특유의 불안과 들끓는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이를 더욱 첨예하고 강렬하게 만드는 건 입시지옥과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은밀히 감춰진,
그리고 이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과는 살짝 빗겨나 있는 특유의 룰이 존재하는 여고라는 특유의 공간배경이다. 그런데 이제껏
<여고괴담>을 만들어온 주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들이다. 그들은 <여고괴담>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을 어떻게든
본인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법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주력하면서도, 특정한 부분은 ‘더욱 이해 못할
부분’으로 남겨두며 신비화 해왔다.

관객들 역시 (그들 자신이 여고생이건 아니건간에) <여고괴담> 시리즈의 여고생들을
타자로 보는 데에 익숙하다. 그 결과 <여고괴담> 시리즈의 인물들은 언제나 매혹적인, 절대적인 ‘타자’로서, 그리고
‘거울’과 같은 존재로 스크린을 누볐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의 ‘노력과 결과의 엇나감’이 오히려 <여고괴담>의
인물들을 더욱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여고괴담> 시리즈의 생명력의 원천으로
지목한 ‘무서움’과 ‘슬픔’이 발생하는 지점, 나아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이 기적적으로 성취해낸 ‘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나온 지 벌써 10년, 그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성년’의 기간을 보내는 여고의 공간의 특성이 많이 변한 만큼, 이제 어떻게든 그런 현실상의 변화와 그로 인한 시리즈의 변화도
반영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앞선 이야기들 역시 언제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여고괴담>의 세계를
진화시켰던 게 사실이다.

1편에서 ‘어떻게든 여고라는 지긋지긋한 공간을 빨리 떠나는 게’ 아이들의 목적으로 보인다면(그래서
귀신은 학교에 계속 남는다), 3편인 <여우계단>에선 ‘예고’라는 공간이 주는 특혜와 이점을 그 누구보다 잘
이용하려는, 사회적으로 크게 진출하려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그간 <고사 : 피의
중간고사>처럼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차용했으나 <여고괴담>의 직계는 될 수 없었던
영화들도 등장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이 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동반자살>에서 시리즈 내 최초의 ‘순수한 악당’
캐릭터가 등장한다거나 미국 틴에이저 영화에서 주로 등장했던 ‘여왕과 시녀’로 구성된 패거리가 나오고,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와
임신 문제까지 다루는 걸 보면, 새로운 변화에의 강박이 꽤 컸던 듯하다.

그럼에도 <동반자살>의 감독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여고괴담>의 여고생들에게 매혹되는지, 왜 이 시리즈를 그토록 좋아했는지는 감도 잡지 못한 것같다. 전편들에서
각각 인기있었던 설정을 하나씩 따와 잡탕을 만들어 버리지만, 그 설정들이 왜 그 편에서 그토록 인기였는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시리즈의 질긴 목숨을 꼭 유지해야만 하나 … <동반자살>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고괴담> 시리즈는 여전히 매력있고 할 얘기도 많은 시리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매력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나쁘지 않은 시리즈다.

이전에 눈앞에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던 억압이 덜해졌을 뿐, 우리의 10대 여성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더 은밀해진 억압과 통제과 경쟁에의 강요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반자살>의 애초의 운명은, 앞엣
시리즈를 정리하고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시리즈로 도약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에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패함으로써 강력한 변명과 근거를 제공해준 듯하여 보는 기분이 그닥 좋지는 않다.

영진공 노바리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올해는 뭔 마가 끼었나 …


나는  <아즈카반의 죄수> 이후 해리포터 원작을 읽지 않았다.
그리하여 …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원작과는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소위 “무지한 관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무지한 관객의 관점에서 말하는 건데, 이 영화 잘 만들었다.
뭘 보고 잘만들었다고 우기냐고?

-= IMAGE 1 =-

첫 번째 이유,
영화가 길다는데 그리 긴줄 모르겠더라는 점 … (반대로 트랜스포머는 정말 길고 지루하더라…)

많은 원작팬들이 투덜거리는 이유가 원작에서 중요한 내용을 잘라내고 삼총사의 연애담만 키웠다는 건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왜냐고? 난 뭐가 잘렸는지 모르거든.

제한된 시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넘치는 것보다는 몇가지 이야기라도 제대로 끌고가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 아닌가.  과유불급 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두 번째 이유,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한 “원작을 읽은 이”들 대다수의 평은 이야기가 너무 축약되어서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원작 소설이 우리나라에서는 상하권으로 나왔을 정도로 긴데 그것을 몇가지 핵심 스토리로 정리한 덕분에 혼란도 거의 없다.   단 그 와중에 전체 이야기의 규모가 좀 줄어들고 오히려 너무 단촐하게 느껴지긴 하더라.

세 번째 이유,
나름 놀랄 거리도 있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누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그게 그거였어?” 류의 놀라움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혼혈왕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더라 … 음 … 놀라웠다
(원작을 읽은 관객들이 속터져할지도 모르겠으나…내가 그렇다는데 뭐)
그리고 드는 생각, 아 … 불쌍한 사람. 재능도 많았구나 …




그나저나 …
이번 편을 보고서 확실히 느낀 것은,

덤블도어 마법사님은 그냥 인자한 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양반은 차라리 개과천선한 어둠의 보스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어디선가 불싸지르는 마법 한탕 벌린 다음에 해리를 찾아와서 검게 그슬린 손을 대수롭지 않게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 풀풀난다.

젊었을 때 분명히 무서운 짓도 많이 했을 법한 그 어두운 카리스마 …
처음에 마이클 갬본이 이 역할을 물려받았던 <불의 잔> 때만 해도 “무슨 덤블도어가 저렇게 불안정하고 경박해?”라며 돌아가신 분을 아쉬워했다만,
지금 보니 그에게 딱 맞는 역할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올해는 뭐랄까 …
<제국의 역습>이라 할 수 있는 한 해인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마가 낀건지
중요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간다.

그렇다면 제다이는 언제 귀환할 것이냐 …
이것이 문제가 되겠구나.

부디, 제다이가 돌아오실 때까지
어둠의 무리들에게 먹히지 않고 버틸수 있는 힘을 주시길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공 짱가

1952년 … 1954년 … 2009년 …

1952년 7월 7일 … 발췌개헌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중략)

이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이범석과 국회 내의 신라파가 중심이 되어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구속중이던 10명의 국회의원이 석방되고 피신중이던 국회의원들도 경찰의 연행에 의하여 동원되어 며칠씩
연금되는 테러 속에서, 7월 4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인용: 네이트 사전)] (자세히 보기)

1954년 11월 29일 … 사사오입 개헌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원내 압도적 다수(203석 가운데 114석)를 차지했지만,
당초 목표였던 개헌정족수 136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자유당 소속의원과 무소속의원 136명의 서명으로 9월 8일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의 주요내용을 보면 국민투표제 가미, 내각
책임제적 요소의 전면적 삭제에 의한 순수한 대통령 책임제,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제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제한 철폐, 일부 통제적인
경제조항의 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로의 수정 등이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되기까지 연 9일간 국회의사당 앞은 방청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여야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사건’을 조작, 민주국민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11월 27일 국회표결 결과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이틀 후인 29일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사사오입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일 뿐만 아니라,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평등의 원칙에마저 위배되는 헌법개정이었다.

[인용: 네이트 사전]

2009년 7월 22일 …

(전략)
또한 방송법 수정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사상 초유의 재투표도 이뤄졌다.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알지 못한 이윤석 부의장은
표결을 마감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1차 투표는 부결됐다.

이에 대해 야권이 환호성을 지르자 이윤성 부의장은 황급히 재투표를
선언해 의결 정족수를 채우며 법안을 통과시킨 것.
(후략)

[인용: 야권 ‘재투표’, ‘대리투표’… 본회의 표결 ‘원천무효’ 주장, 노컷뉴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