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 꽃포장 안에는 역시 코미디만 있었다.


김현석 감독의 전작 <스카우트>(2007) 의 탁월한 완성도와 함께 작품 속에 담긴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홍보 실패의 사례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새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트렌디 코믹 멜로로만 보이는 꽃분홍색 겉포장의 이면에 깜짝 놀랄 만한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 “내가 오늘 이 영화를 보러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 기대를 가졌을 법하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만큼은 김현석 감독의 재능이 다수 관객들에게도 널리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는게 병이라고, 김현석 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기대치를 높여놓았던 내 경우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영 마뜩찮은 작품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김현석이 누군지, 아예 감독 이름 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포스터에 나온 주연 배우들 얼굴과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서의 컨셉만 보고 입장권을 구입한 관객들이 영화를 훨씬 재미있게 감상하겠지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연애조작단의 활약상 또는 일하는 방식을 한 차례 소개해올리는 도입부였다. 그리고 본게임이라 할 수 있는 펀드매니저 상용(최다니엘)의 의뢰 건을 진행하기 시작하면서 연애조작단의 리더인 병훈(엄태웅)과 연애조작의 목표물 희중(이민정)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살짝 지루했던 것 같다.

희중을 대상으로 하는 연애조작이 한 차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심기일전해서 재도전을 하게 되는 후반부는 희곡에서와 같은 시라노의 역할에 충실하며 희중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병훈과 희중의 새로운 인연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벗어나 마침내 솔직한 자기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성공하는 상용의 활약이 교차하며 다시금 활력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희중이 연애조작의 대상으로만 머물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병훈을 얻기 위한 민영(박신혜)의 적극성이 그런대로 균형감을 살려주고 있다. 권해효가 연기한 사채업자들의 개입은 상용과 희중을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방패 역할을 자처하는 병훈의 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는 유효했지만 그럼에도 그다지 잘된 설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덕분에 이 영화가 순도 높은 멜로가 아닌 그저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수는 있었다.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도 때로는 연출이 필요한 분야이고 – 그 대상이 되는 입장에서도 상대방이 아주 싫지만 않다면 이것을 가상한 노력으로 봐주는 경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타고난 선수가 아닌 바에야 제 머리를 깎으려면 아무래도 서툴 수 밖에 없으니 연애조작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연애조작단의 활동이란 상당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사람의 진심을 전달하고 그것을 오랜 관계로 이끌어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영화의 주제는 진정한 사랑이 사람 간 신뢰의 문제도 덮을 수 있다는 것인듯 한데 이것이 제대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물론 젊은 날의 사랑과 연애를 소재로 삼는, 어디까지나 트렌디 코미디 영화에 불과한 것이니 그런 것까지 충족시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희중을 떠나보낸 병훈이 민영으로부터 연애조작 – 예전에는 작업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었던 – 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료인 철빈(박철민)의 의미심장한 윙크로 마무리가 되는데 아마도 이런 코믹 멜로물을 만드는 감독 자신의 역할 또한 시라노와 같은 것으로 인식해주길 바라는 의사표현처럼 보인다.

과연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본 덕분에 연애감정이 싹트는 계기가 될런지는 관객 각자의 믿음, 소망, 사랑에 달린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영진공 신어지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차우 … 와우!!!

영화 <차우>는 CG의 세밀성이나 연출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 속의 멧돼지는 상당히 어설프다.
나 CG야! 혹은 나 애니매트론이야! 라고 거의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들이닥칠때 충분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왜냐면, 그 멧돼지에게 깔려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 인간 캐릭터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생하니까 그 인간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도 생생해지는 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냐고?
아주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기법을 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캐릭터의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딱 하나.
뜬금없음. 혹은 기괴함 이다.
나도 예전에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실재감은 뜻밖의 어떤 것을 통해 발현된다는…
http://kr.blog.yahoo.com/psy_jjanga/468859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하게 바로 그 기법만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뜬금없고 괴상한 측면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하나씩 부여하는 것 만으로 그 각각의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 이 지점부터 스포일러 비스무리한게 출몰합니다.  주의 요망! *

여기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상하다.
이장에서부터 말단 순경까지, 심지어 천포수 할배까지 …
도무지 제대로 멀쩡한 인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다 그만한 개연성이 있다.

형사라고 손버릇 나쁘지 말란 법 있나?
행사가서 거기 나온 음료수나 과자 몇개 꼬불치기 …
나도 가끔 하는 짓이라 좀 뜨끔하더라.

은근히 꼰대스럽고 거만한,
근데 내실은 하나 없는 말단 순경도 그렇다.
정말 어디서 진짜 만났던 놈 같더라.

동네 광녀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엔 종종 그런 사람들 있다.
예전 농촌봉사활동가서 스쳐간 동네바보가 생각나더라.
보통 동네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그냥 당연한 존재로 대한다.
사람취급을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말 가족농장의 첫번째 희생자.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과 행태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멧돼지에게 물려가신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
각자의 독특한 결함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
그 결함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캐릭터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함들이 무지하게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묘사를 뜬금없이 툭툭 던진다.
개가 (핀란드)말을 하고, 순경의 소망 혹은 악몽이 현실과 뒤섞인다.
그러나 이것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결함있는 인간들이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

이 영화,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빈틈이 널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의 생동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핵심이다.
핵심만 놓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상황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감독의 개성이 철철넘친다.
신정원 감독은 봉준호 70%에 홍상수 30% 정도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종종 웃음이 터지는데, 그게 진땀을 동반하는 웃음이다.
이게 웃을 일인가? 근데 웃기긴 한데… 뭐 이런 느낌.

<미쓰 홍당무>를 볼때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웃었고 미국영화에서는 <미트페어런츠>가 그런 면이 있었다. 이 영화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여튼 참으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보고 황당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실망할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불쾌할 것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나 전개 등을 기대한다면 황당할 것이고,
생생한 멧돼지 괴수 CG를 기대했다면 참 실망하겠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관객들도 분명히 많겠다.

바로 나처럼…

영진공 짱가

순이가 월남으로 간 까닭은?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가 월남에 왜 갔는지 이해 안간다는 분들이 많던데 … 아니!! 이해 하고 말 것도 없잖아요?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그럼 순이가 월남 안가면 어딜 가? 하늘아래 발 디디고 서 있을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상황인데? 월남 안 가면 어디가? 죽으러 가란 얘긴가? 묵묵히 시어머니의 구박과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미개봉 반납 처녀로 늙어가며 산송장으로 살으란 말인가? 순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렇담 자기가 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한번 끝까지 캐 보고 싶을 겁니다. 그 끝에 남편이 있는거겠지요. 월남은 순이가 유일하게 ‘살아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월남은 ‘갈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가는 거고 당연히 가는 거지, 그러니까 너무 Natural해서 이유를 달고 말 것도 할게 없고,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월남으로 가는 겁니다.

2.순이가 남편을 때리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아니, 그럼 엔딩이 어떻게 되는게 나을 것 같으세요? 1. 남편 박상길이 죽어있다? 아웅.. 이건 절대 아니죠. 맘대로 죽어있다면 정말 죽이고 싶을 겁니다. 2. 순이가 상길에게 와락 안긴다? 캑캑. 상길은 그녀의 마음과 정성에 감읍하여 그녀를 받아들인다? 캑캑. 3. 상길이가 순이를 때린다? 이 독한 년, 어째 여기 까지 따라왔어!! 오홋. 1,2번 보다는 3번이 좀 낫다. 때리는 거는요. 딱 그 상황이 때릴 상황입니다. 이유는요 삼만팔천이백사십여섯가지 쯤 있습니다. 수도 없는 함의가 들어간 따귀입니다.직설법으로 얘기하자면 촌스러워지지만.


1) 전쟁터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정신 못 차리고 눈 까뒤집고 있었잖아요) 2) 니 인생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 (언제까지 도망만 갈꺼냐?) 3) 비겁함을 단죄하며 한대. 4) 생때같이 살아 있음이 고마워서 한대.(오면서 부상자, 사망자를 수도 없이 본 순이입니다.) 5)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존재의 이유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한대. 6) 술래잡기할 때 미션 클리어하면 “야도 판” 때리듯이 한대. 야도!


오히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 같은 건 없어보였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3.박상길은 찌질한 남자가 아니다. 아줌마가 되고 나니 이해심이 많아지나봅니다. 전 박상길도 너무너무 이해가 갔어요. 씨 받으러 온 수애 모습 보세요. 아우… 서슬이 퍼렇잖아요. 수애 무서워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데, 원치 않는 결혼. 그래서 군대로 도망. 한달에 한 번 씩 배란기에 맞춰 찾아오는 아내. 그 두려움 없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녀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그에게 곧 도망도 하지 못하고 ‘체념’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박상길이 월남까지 가는 것과 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것. 목적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인생 남의 뜻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고, 그 반대방향으로 한번 갈 데 까지 가보는 겁니다.

아마. 순이한테 맞고, 박상길은 시원했을 것 같아요. 안도가 되고 안심이 되었을 것 같아요. 순이 앞에 무릎 꿇은 상길의 모습은 용서를 비는 자의 모습이라기 보다 편안해 보입니다.

4.수애는 여신이 아니다. 매체에서 이준익이 ‘너는 여신이다’라는 말을 했단 말을 듣고 거부감이 심하게 일었어요. 저, 여인의 신격화를 여인의 창녀화 만큼이나 싫어하고 혐오하거든요. 여성의 이미지가 관음보살이나 마리아가 되는 순간 여성은 ‘구원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고’ , ‘남을 원망하는 법은 없고 그저 남의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안아주며’, ‘본인이 욕망하는 것은 전혀 없어야’합니다. 핵심은 ‘非人化”죠. 그게 처녀숭배의 핵심이에요. ‘여성은 위대하다’라는 명제에 궁극적으로 담고 싶어하는 뜻은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인거죠. 그래서 전 미야자끼 하야오 만화에 나오는 “나나”나 “나우시까”같은 여성영웅들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들은 영웅이고 여신이 됨으로써 결국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아아. 근데 왠걸. 수애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처음 부터 끝까지 본인의 욕망(남편 놈 찾아내고야 말겠다)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복무하지 않습니다. 어설픈 도덕관념이나 정조관념 같은 사회나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강한여자입니다.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는’ 강한여자가 아니지요.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해 보려는 여자입니다. 인간다운 강하고 젊은 여자입니다. (예전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의 ‘라라씨’와도 비슷하지요. 여기서도 순이였나?)

암튼 재미있었어요. 좋아요. 나는 Two thumbs up!


영진공 라이

<님은 먼 곳에>: “수애에 의한, 수애를 위한, 수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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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꽤 좋았습니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희노애락을 고루 담은 영화였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더군요. (남은 쥐를 마저 잡자…까지 ㅎㅎ)

수애(순이)가 왜 그 곳까지 기어코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이 많던데
순이의 동기는 적어도 <놈놈놈>에서 왜 걔네들이 그 지도 가지고 난리를 치는지 이해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아마 제가 순이였다고 해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요.
순이는 남편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친아버지에게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책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닌 일로 비난만 당했죠.
그렇지만 베트남에 가서 순이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주변 사람들로 부터의 인정, 도덕적인 정당성,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력까지…

쿠르트 레빈K.Lewin 이 이 상황을 봤어도 순이의 선택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평가했을겁니다. 순이에게 주어진 심리학적 장(field)에서 순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냥 도망가는 길도 있지 않았느냐고요?
아마 그건 순이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그 미군장교는? 글쎄요. 전 그게 일종의 자기 능력 실험처럼 보였습니다.
순이의 마지막 무대공연 때부터 계산하는게 보이거든요.
결국 그녀는 자기의 힘으로 거기까지 간겁니다.

덧붙여,
이준익 감독 영화가 계속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늘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의 변치않는 테마는 “공연” 입니다. (이 “공연”은 허접한 코미디 영화에 늘 등장하는 노래방 공연과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양측 병사들이 벌이는 욕 공연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엔 아예 대놓고 광대 주인공들만 내세우고 있죠.
그리고 이준익 감독은 이 공연을 묘사하는데 있어 꽤 능숙합니다.
덕분에 공연자들이 겪는 미묘한 순간들이 이 정도로 잘 묘사되는 영화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듭니다. 무대에서 느껴지는 공연자와 관객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그게 다른 감정으로 변화되는지… 이 영화에서도 그런 묘사가 가끔 나오는데 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수애 간지…d-_-b
<놈놈놈>의 정우성 간지만큼이나 확실합니다.

남자 배우들이 꼭 한번 해보고 싶었을 역할이 그 영화에서 정우성 역할인 것 처럼,
여자 배우라면 아마 이 역할 꼭 해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배우라고 아무나 정우성처럼 총을 돌리지 못하듯,
수애가 없는 <님은 먼곳에>도 상상하기 힘들죠.


영진공 짱가

*추가1: 덧붙여 정우성 간지

* 추가2: 크레딧을 보니 엄태웅은 자그마치 “특별출연” 이더군요.
원래 그거, 출연료 안받(거나 최소한도만 받)고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엄태웅의 비중이 특별출연 수준은 아니던데…
이준익, 참 무서운 감독입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