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전달과 공유




기업체와 프로젝트를 할 때 종종 듣는 조언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 사람들은 설명하는 걸 싫어한다는 거다. 왜 그런 결론을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지 말고 결론만 얘기해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다. 사실 나도 별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기업 사람들 앞에서 설명을 하다가 “그래서 결론이 뭐냐?” 는 반응을 받아보면서 느끼는 건 역시 나도 설명에 의존하는 쪽이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사람들이니 일일이 설명을 듣기 보다는 간단히 정리된 결론을 듣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은 빠른 의사결정을 생명으로 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서 특히 심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외국에서 컨설팅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설명을 줄이는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결론이 타당한지 판단하려면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딱 결론만 듣고 그걸 쓸지 말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애초부터 컨설팅 같은 건 맡길 필요가 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런 기업 문화는 ‘커뮤니케이션’ 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때 말하는 의사소통은 ‘정보의 교환’이다. 내가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이 가진 정보를 내가 받는 과정이 의사소통인 거다.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기대하는 의사소통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기업체에게 주고, 기업체는 그 대가로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보를 교환하는 게 목적이라면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전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교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걸 공유하는 과정 전체를 말한다. 이해하려면 설명을 들어야 한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결론뿐만 아니라 그런 결론을 도출한 사고의 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이해’다. 그리고 사고의 틀을 이해하게 되면 나중에는 주어진 결론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전혀 다른 문제해결방식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된다. 결론보다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는 거다.

결론만 듣다 보면 계속 누군가를 시켜서 결론을 내오게 하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틀을 이해하다 보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뭐 그래도 시간은 없고 돈은 많으니 계속 결론만 내려달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좋다. 하지만 결론만을 원하는 정보 교환적 의사소통의 문제는 단순히 사고력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부작용도 있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남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먼저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다. 이게 바로 일상적인 정보교환식 의사소통이다. 그런데 아무리 전달을 잘 해도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전달은 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전달도 메시지가 오가는 것이므로 전달받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 사이에 뭔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그건 힘에 의한 강제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보통 전달이라고 말하는 의사소통은 실제로는 ‘지시’와 ‘결과보고’다. 물론 가끔씩 ‘현황보고’도 있고 ‘불평’ 이나 ‘요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시와 복종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수직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서 팀 단위의 협업을 추구한다면 문제다. 팀 단위에서는 이전에 비해서 명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다. 팀장도 결국 팀원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은 자가 이런 일방적인 전달을 시도하자면 문제가 생긴다.

연산의 유일한 소통대상 녹수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의 직언에 오히려 폭군이 되는 것으로 반응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때까지 연산이 경험한 것은 일방적인 전달이었다. 선왕은 그에게 왕의 풍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신하들은 그에게 선왕을 본받으라는 메시지만을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신하가 아니라 왕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신하들의 ‘충언’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연산에게 열려진 유일한 소통의 창구는 장녹수 뿐이었다. 녹수와 연산은 최소한 서로의 욕구를 교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연산은 녹수에게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출구를 찾았고 그 대신에 녹수에겐 지위를 선사했다. 녹수는 연산이 필요로 했지만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공했고 그 대신 확고한 위치를 얻었다.

그러니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연대는 팀원들이 그나마 팀장보다는 같은 동료들끼리 친해지는 거나 마찬가지의 결과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정보의 교환 혹은 가치의 교환에 머무르는 의사소통이었다.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소통은 교환이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광대패는 청중과 놀이판을
공유한다. 그들은 상대에게 어떤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히 설교나 교훈도 없다. 그저 같이 느끼고 같이 즐길 뿐이다. 청중이 공연자들의 마음에 반응하고 공연을 함께 공유할 때, 그 공연의 힘은 점점 더 커진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마술이 그렇지 않던가. 공연장에서 서로 주고 받는 대사와 역할은 실제로는 서로가 공유하는 대본을 전제로 한다.


광대놀이 같은 즉흥극에도 어떤 대본이 있다. 그 대본은 글이라기 보다는 관객들이 마음 속 깊이 담고 있었지만 서로 공유하지 못했던 어떤 심정에 가깝다. 성공하는 공연은 그 정서적인 대본, 그 관객들의 공통된 심정을 건드리는 공연이다. 이럴 때 관객들은 공연에 함께 섞여 들어가서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맨날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는 그저 보여주는 공연만을 경험했던 연산은 즉흥적으로 서로의 합을 맞추는 광대들의 공연을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한다. 그게 얼마나 즐거웠던지 체통도 잊고 파안대소하고 만다.

파안 대소하더니 ...

심지어 연산은 무대로 들어와 놀랍게도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을 내놓으며 공연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연산에겐 일방적인 전달만이 오가는 임금 자리 보다는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광대패의 공연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춤도 같이 추고

북도 같이 치고 ...

왕이 공길을 불러 계속 졸라대던 ‘놀자’도 그 뒤엔 동성애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한번 공유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공유는 상대를 설득시키는데도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산이 자신의 외로움을 공길에게 전한 방식도 그림자놀이라는 공연이었고, 공길이 연산에게 장생의 무고함을 전달한 방식도 인형극이었다.

공길을 불러서도, 우리 놀자!!!


공유란 실제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소통방법이다. 성공하는 회사는 직원들이 회사의 비전을 공유하며, 화목한 커플은 연인과 서로의 생각과 각자의 역할을 공유한다. 이심전심은 상대방을 명확하게 파악해서 가능하다기 보다는 자기들이 어떤 판에서 놀고 있는지, 그 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뭐고 각자의 역할이 어떤 건지를 그 대본을 이해하고 공유하는데서 나온다. 

영화의 성공도 결국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공유에 더 크게 좌우된다. 이전에 영화인들이 헐리우드 영화에 경쟁이 안되는 이유로 내건 것들은 대체로 그 정보에 관한 변명이었다. 엄청난 물량, 놀라운 특수효과를 담은 헐리우드 영화의 정보량이 우리나라 영화의 그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딸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고작 내놓은 대안이 안으로는 출연배우의 숫자를 늘리거나 선정적인 장면의 수위를 높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공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다건너 미국에서 만든 영화보다는 같은 땅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가 훨씬 유리하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가 죽을 쑨 이유는 물량이 뒤져서라기보다는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예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동시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했던 데에 있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동시대의 감성으로 담아내는 영화가 연이어 나오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 영화가 ‘잘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진공 짱가

“님은 먼곳에”, 가까이 가도 왜 그리 멀기만 한지 …

 


이준익 감독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영화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왕의 남자도, 라디오스타도, 즐거운인생도 모두 제목과 포스터에서(사실, “왕의남자”라는 이름은 뭐랄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왕”과 “남자”의 속내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조금은 천박한 떡밥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제목을 결정한 사람이 강우석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말입니다.) 알수있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도없이 보아온 엄청나게 많은 서사구조 가운데, 마치 제목을 고르면 거기에 딱 맞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주크박스처럼 그 제목에 합당해 마지않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었구요.
제목은 좀더 은근하게, 좀더 당황스럽고 알쏭달쏭하게 지었다면 관객이 조금 더 들지 않았을까요?
제목만 보아도 알만한 영화는 아무래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덜 들지 않습니까.

-먼저 알면 영화감상에 방해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 “님은 먼곳에”는 놀랍게도 제목과는 영판 다른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님을 찾아 삼만리하는 주인공 순이(수애)에게 님(엉태웅)은, 형식적으로나 님일 뿐 사실상 님이라고 불러주기엔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그 점은 남편이 월남에 뛰쳐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이의 행동이나(시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야 이실직고를 합니다. 그 전에는 ‘그딴 놈, 뒤지든지 말든지’하는 심정까지는 아니었더라도 그닥 그립고 걱정되는 심정 또한 아니었다는 뜻이겠지요) 마침내 먼 곳까지 가서 만난 님에게 날리는 분노의 싸닥션 7단 콤보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한두대 철썩 때리고 덥석 안기는 것도 아니고, 품에 안겨 팔을 동동 구르며 앙탈을 부리는 것도 아니요, “너이새퀴 좀 쳐맞고 시작하자.”라는 식의 싸닥션 7연타는 아무리 보아도 짙은 애정을 담은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당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본 영화 제목에 대한 생각은,
“아아 내 님아 님은 먼곳에 있고 나는 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이사람아.”라기보단
“니뮈… 졸라 멀리 있네 그 새끼.”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당 영화, “사랑하는 님을 찾아 전쟁터 한 복판을 크로스하는 여인네의 애 끓는 사연” 따위를 담고 있다기보단 주인공 순이의 자아발견 여행에 동참하는 로드무비에 가깝습니다. 어찌보면 [반지의 제왕]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간계를 구할 막중한 임무를 띄고 세상에서 젤 뜨거운 용암(반지가 거기서만 녹으니까…)을 찾아 가는 프로도나,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 지들끼리만 막중한 임무를 띄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밀러 대위와는 달리 순이에게는 명확한 미션이 없습니다. 멀고 먼 월남까지 남편을 찾아가서 순이는 대체 뭘 할 작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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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가는데… 나 왜 가는거야?”

순이는 자기 뜻대로 자기 삶을 결정해 볼 기회를 몽창 박탈당한 우리 어머니, 혹은 그 윗 세대의 여성입니다.
원치않는 곳에 시집가서, 원치않는 남편의 씨를 얻기 위해 싫은 걸음을 어기적대며 부대를 찾아가는 동안 순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하며 얼굴에 떠올리던 그 평온한 미소를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일이니까요.
순이는 자신에게 억지로 주어진 삶을 거부할 만한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피할수 없으면 즐기겠다는 식의 해병대 마인드도 결코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통을 거부하지요. 재수없는 시어머니가 주는 핀잔에 변명을 하지도 않고, 대학물 먹은 애인에게 눈깔이 뒤집혀 남의 얼굴에 삽질하고 자기는 돌 보듯 하는(감히 수애를!!) 남편에게 애정을 구하지도, 돌아누운 등에 노크 한번 해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순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며, 반항이었을 터입니다. 나도 너 싫어 임마.

월남으로 찾아가는 길 역시 그녀의 의지가 아닙니다. 어중띄게 자신의 책임이 되어버린 일에 다시한번 그녀는 그냥 그렇게 순응도 아니고 반항도 아닌 그런 선택이겠지요. 하긴 하는데.. 나 진짜 내가 원해서 가는 거 아냐. 알겠냐? 뭐 이렇게 말입니다.

수애가 연기하는 순이는 처음부터 전형적인 순응형 여성도 아니고, 적극적인 개혁형 여성도 아닙니다.
아직 어떤 색깔이 칠해져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 색보다는 여백을 더 많이 가진 덜 자란 인간일 뿐입니다.

약간은 안 맞는 듯한 옷을 입은 것 같은 수애의 연기는, 돌이켜보니 이런 순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수애는 참 여러 모로 칭찬할 거리가 많은 배우입니다 그런 섬세함을 빼고도, 무대의상을 입고 수줍은 듯 그러나 과감하게 노래하는 수애는 순이라는 자칫 목적없는 캐릭터가 될 뻔한 주인공에게 훌륭하게 생명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관객 역할을 하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에게 본능적 욕구가 담긴 군인연기의 추진력을 실어 주고(공연하는 장면 보세요.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핑클의 등장에 절규하다 못해 표효하던 내 전우들의 모습과 1000%의 싱크로를 보여줍니다.) 더불어 영화를 보는 남성 관객들에게까지 울끈불끈을 선사합니다.
당분간 한국영화에서 순이만큼 사랑스런 여성 캐릭터가 나올 지 의문스럽습니다.
수애만세. 수애만세. 수애만세.
(만세 삼창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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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녀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림까지 만들어줍니다…!!

이준익 감독은 순박한 시골 아낙 순이에게 “노래”라는 막강한 소통능력을 부여하여, 그녀를 세상과 크로스오버 시킵니다. 노래를 통해 순이는 자신의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며, 본래 자신이 갖고있던 가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확실한 사회적 권력)를 깨닫고 그것을 즐깁니다.
밴드와 함께 한판의 놀음을 만들어내는 위문공연 장면은 그녀가 세상을 항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출시키는 유일한 수단이고, 애시당초 그녀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박수갈채를 이끌어내는 그녀의 한풀이입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이는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의 두 광대들을 통해 풀어내던 때부터 꾸준히 이야기하던 점입니다. 신분이라는 벽을 넘고, 한물 간 가수에 촌구석 DJ라는 현실을 넘고, 가장으로서 강요받아야 했던 육중한 책임의 짐더미를 벗어던지게 만드는 한풀이 장으로서의 음악 말입니다.
 
영화는 마침내 별로 살 의지도 없어보이는 주제에 끝까지 살아남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를 조우시키며 끝을 맺습니다.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좁았는지 깨달은 남편과,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선 순이는(다리를 후들거리지도, 무릎을 굽히지도 않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습니다) 그렇게 재회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동화같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순이가 그닥 걱정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너무 낙관적인 말이군요. 현실적으로 그녀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들은 앞으로 그녀의 삶에 커다란 암초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엔 말이지요.)


영진공 거의없다

사족 1) 소외된 자들이 만들어내는 한풀이 한마당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엔 무한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역시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한다니까요(…뭔말인지…)

사족 2) 영화 리뷰가 온통 수애(가 연기한 순이)의 이야기로만 꽉 찰 정도로, 영화 전편을 통해 그녀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좀 냉혹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냥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족3) 이준익 감독은 자기을 친미성향으로 오해할까봐 좀 걱정이 되었었나 봅니다. 정치적인 공정성의 획득을 위해 끼워넣은 장면들 중, 조금은 오바다 싶은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사족4) 분량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 한 전쟁 장면들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크게 살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개무시되던 전쟁신의 공간 구성이 무진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족5) 정진영과 주진모와 정경호는 훌륭합니다. 단 드럼 연주자였던 철식(신현탁)은 영화에의 몰입을 심하게 방해합니다. “즐거운 인생”에서 허세근석의 과다 후까시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사족6) 수애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듣는 데에는 약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한 느낌입니다. 기교없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노래하려고 노력한건 알겠는데, 그럴거면 조미령의 노래솜씨는 넣지 말았어야 했어요.

순이가 월남으로 간 까닭은?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가 월남에 왜 갔는지 이해 안간다는 분들이 많던데 … 아니!! 이해 하고 말 것도 없잖아요?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그럼 순이가 월남 안가면 어딜 가? 하늘아래 발 디디고 서 있을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상황인데? 월남 안 가면 어디가? 죽으러 가란 얘긴가? 묵묵히 시어머니의 구박과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미개봉 반납 처녀로 늙어가며 산송장으로 살으란 말인가? 순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렇담 자기가 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한번 끝까지 캐 보고 싶을 겁니다. 그 끝에 남편이 있는거겠지요. 월남은 순이가 유일하게 ‘살아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월남은 ‘갈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가는 거고 당연히 가는 거지, 그러니까 너무 Natural해서 이유를 달고 말 것도 할게 없고,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월남으로 가는 겁니다.

2.순이가 남편을 때리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아니, 그럼 엔딩이 어떻게 되는게 나을 것 같으세요? 1. 남편 박상길이 죽어있다? 아웅.. 이건 절대 아니죠. 맘대로 죽어있다면 정말 죽이고 싶을 겁니다. 2. 순이가 상길에게 와락 안긴다? 캑캑. 상길은 그녀의 마음과 정성에 감읍하여 그녀를 받아들인다? 캑캑. 3. 상길이가 순이를 때린다? 이 독한 년, 어째 여기 까지 따라왔어!! 오홋. 1,2번 보다는 3번이 좀 낫다. 때리는 거는요. 딱 그 상황이 때릴 상황입니다. 이유는요 삼만팔천이백사십여섯가지 쯤 있습니다. 수도 없는 함의가 들어간 따귀입니다.직설법으로 얘기하자면 촌스러워지지만.


1) 전쟁터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정신 못 차리고 눈 까뒤집고 있었잖아요) 2) 니 인생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 (언제까지 도망만 갈꺼냐?) 3) 비겁함을 단죄하며 한대. 4) 생때같이 살아 있음이 고마워서 한대.(오면서 부상자, 사망자를 수도 없이 본 순이입니다.) 5)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존재의 이유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한대. 6) 술래잡기할 때 미션 클리어하면 “야도 판” 때리듯이 한대. 야도!


오히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 같은 건 없어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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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상길은 찌질한 남자가 아니다. 아줌마가 되고 나니 이해심이 많아지나봅니다. 전 박상길도 너무너무 이해가 갔어요. 씨 받으러 온 수애 모습 보세요. 아우… 서슬이 퍼렇잖아요. 수애 무서워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데, 원치 않는 결혼. 그래서 군대로 도망. 한달에 한 번 씩 배란기에 맞춰 찾아오는 아내. 그 두려움 없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녀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그에게 곧 도망도 하지 못하고 ‘체념’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박상길이 월남까지 가는 것과 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것. 목적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인생 남의 뜻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고, 그 반대방향으로 한번 갈 데 까지 가보는 겁니다.

아마. 순이한테 맞고, 박상길은 시원했을 것 같아요. 안도가 되고 안심이 되었을 것 같아요. 순이 앞에 무릎 꿇은 상길의 모습은 용서를 비는 자의 모습이라기 보다 편안해 보입니다.

4.수애는 여신이 아니다. 매체에서 이준익이 ‘너는 여신이다’라는 말을 했단 말을 듣고 거부감이 심하게 일었어요. 저, 여인의 신격화를 여인의 창녀화 만큼이나 싫어하고 혐오하거든요. 여성의 이미지가 관음보살이나 마리아가 되는 순간 여성은 ‘구원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고’ , ‘남을 원망하는 법은 없고 그저 남의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안아주며’, ‘본인이 욕망하는 것은 전혀 없어야’합니다. 핵심은 ‘非人化”죠. 그게 처녀숭배의 핵심이에요. ‘여성은 위대하다’라는 명제에 궁극적으로 담고 싶어하는 뜻은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인거죠. 그래서 전 미야자끼 하야오 만화에 나오는 “나나”나 “나우시까”같은 여성영웅들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들은 영웅이고 여신이 됨으로써 결국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아아. 근데 왠걸. 수애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처음 부터 끝까지 본인의 욕망(남편 놈 찾아내고야 말겠다)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복무하지 않습니다. 어설픈 도덕관념이나 정조관념 같은 사회나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강한여자입니다.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는’ 강한여자가 아니지요.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해 보려는 여자입니다. 인간다운 강하고 젊은 여자입니다. (예전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의 ‘라라씨’와도 비슷하지요. 여기서도 순이였나?)

암튼 재미있었어요. 좋아요. 나는 Two thumbs up!


영진공 라이

<님은 먼 곳에>: “수애에 의한, 수애를 위한, 수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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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꽤 좋았습니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희노애락을 고루 담은 영화였는데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더군요. (남은 쥐를 마저 잡자…까지 ㅎㅎ)

수애(순이)가 왜 그 곳까지 기어코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이 많던데
순이의 동기는 적어도 <놈놈놈>에서 왜 걔네들이 그 지도 가지고 난리를 치는지 이해하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아마 제가 순이였다고 해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요.
순이는 남편에게도 시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친아버지에게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책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닌 일로 비난만 당했죠.
그렇지만 베트남에 가서 순이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주변 사람들로 부터의 인정, 도덕적인 정당성,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력까지…

쿠르트 레빈K.Lewin 이 이 상황을 봤어도 순이의 선택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평가했을겁니다. 순이에게 주어진 심리학적 장(field)에서 순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냥 도망가는 길도 있지 않았느냐고요?
아마 그건 순이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왜 그 미군장교는? 글쎄요. 전 그게 일종의 자기 능력 실험처럼 보였습니다.
순이의 마지막 무대공연 때부터 계산하는게 보이거든요.
결국 그녀는 자기의 힘으로 거기까지 간겁니다.

덧붙여,
이준익 감독 영화가 계속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늘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의 변치않는 테마는 “공연” 입니다. (이 “공연”은 허접한 코미디 영화에 늘 등장하는 노래방 공연과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양측 병사들이 벌이는 욕 공연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엔 아예 대놓고 광대 주인공들만 내세우고 있죠.
그리고 이준익 감독은 이 공연을 묘사하는데 있어 꽤 능숙합니다.
덕분에 공연자들이 겪는 미묘한 순간들이 이 정도로 잘 묘사되는 영화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듭니다. 무대에서 느껴지는 공연자와 관객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그게 다른 감정으로 변화되는지… 이 영화에서도 그런 묘사가 가끔 나오는데 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수애 간지…d-_-b
<놈놈놈>의 정우성 간지만큼이나 확실합니다.

남자 배우들이 꼭 한번 해보고 싶었을 역할이 그 영화에서 정우성 역할인 것 처럼,
여자 배우라면 아마 이 역할 꼭 해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자배우라고 아무나 정우성처럼 총을 돌리지 못하듯,
수애가 없는 <님은 먼곳에>도 상상하기 힘들죠.


영진공 짱가

*추가1: 덧붙여 정우성 간지

* 추가2: 크레딧을 보니 엄태웅은 자그마치 “특별출연” 이더군요.
원래 그거, 출연료 안받(거나 최소한도만 받)고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엄태웅의 비중이 특별출연 수준은 아니던데…
이준익, 참 무서운 감독입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