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당과 짬뽕당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한다면 설레발일까?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 중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60명,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이 40명이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에 따라 정당을 만든다. 짜장당과 짬뽕당.

투표를 하니 6:4로 짜장당 승리. 결국 이 나라의 음식은 짜장으로 통일된다. 짬뽕당 사람들은 5년을 눈물로 짜장만 먹는다. 5년 후 다시 투표. 역시 6:4로 짜장당 승리. 눈물의 짜장 천하. 계속 반복되는 역사. 결국 이 나라엔 짜장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짬뽕당 사람들은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 숫자를 늘려야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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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광장에서 짬뽕 퍼포먼스를 벌이고, ‘월간 짬뽕’을 창간하는가 하면, 국제 짬뽕 심포지엄도 개최한다. 짬뽕의 도와 짬뽕의 아젠다와 짬뽕의 미래를 설파하고 설득한다.

그런데 짜장당 사람들도 가만 있을 리가 없다. 그들도 짜장 이벤트를 열고 월간 ‘짜장과 사회’를 창간한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권당인 짜장당 사람들은 청계광장의 짬뽕 퍼포먼스를 도로를 점거한 불법시위라며 경찰을 동원해 ‘합법적’으로 막는다. ‘월간 짬뽕’ 사장을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로 ‘합법적’으로 교체한다. 짜장을 비방한 사람들은 명예훼손이라고 ‘합법적’으로 고소한다. 이뿐이 아니다.

짜장 전문 기업들은 그들이 후원하고 제작하는 CF, 영화, 음악 등에 짜장을 마구 집어넣는다. 영화 속 모든 연인은 이제 짜장면 집에서 데이트를 한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드라마 속 아빠. 애들아 간짜장 사왔다. 우리 아빠 최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간짜장으로 구현된다.

학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 갑자기 오토바이 여러대가 등장하더니 교실 안에 짜장을 풀어 넣는다. 마지막에 박히는 카피. 사랑을 배달합니다. 홍콩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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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짜장은 단순히 정당과 요리의 문제를 넘어 사람들이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자 행복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짬뽕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매번 투표할 때마다 짜장당을 찍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혹은 투표를 하건 말건 짜장 같은 세상에 변화가 있겠냐며 투표일 날 놀러간다. 그렇게 놀러가 봤자 끽해야 홍콩반점.

이런 사회를 과연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의 타칭 붉은 무리들도 민주주의를 누리고 산다. 거짓말 말라고? 그들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우리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믿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믿고 있다.

일당 독재 국가 북한. 그런데 민주주의라니? 그들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

노동자의 의사를 대신해주는 게 조선 노동당. 그런데 북한은 전국민이 노동자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은 전국민의 의사를 대신해준다. 조선 노동당의 일당 독재라기보다 조선 노동당을 통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거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들은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언론의 자유도 물론이다. 그래서 조선 노동당 이외의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분명 독재다.

하지만 짜장당과 짬뽕당 속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살리진 못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월간 짬뽕’ 사장에 짜장 매니아 김곱배기 씨가 임명되면서 부서졌고, 집회의 자유는 짬뽕 페스티발을 경찰이 막으면서 사라졌고, 표현의 자유는 인터넷에 떠도는 쥐짜장이란 말이 모욕죄라며 관계당국이 처벌을 강구하는 순간 증발했고, 출판의 자유는 국방부가 불온도서 목록을 공개하는 순간 날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합법’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있어서, 이곳의 집회, 출판, 언론, 결사, 표현의 자유는 ‘합법적’으로 아직 살아 있다.

짜장에, 짜장에 의한, 짜장을 위한 꼭두각시가 돼버린 유권자.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선택으로 투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투표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애들에게 외친다. 애들아. 아빠가 간짜장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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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들은 일당 독재 때문에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이곳 민주주의 속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다른 정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일까 아닐까? 이 역시 민주주의다. 그렇지만 짜장당 독재나 마찬가지인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사회. 그것은 제도가 있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완성해 가는 것이다.

원로 언론인 정경희 선생이 여의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여론을 과점하고 지배하는 언론 권력이 편파 언론으로 국민을 최면상태로 만들어 이기도록 한, 다시 말해 언론독재 하에 선출된 정권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요리가 있다. 짜장 뿐만이 아니다. 짬뽕, 라면, 떡볶이, 김밥, 튀김, 오돌뼈, 닭똥집, 꼼장어 등등등. 그것들을 찾거나 상상하는 노력없이 짜장 뿐인 세상이 싫다며 등 돌려 앉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우리의 잘못이다.


영진공 철구

<자비를 팔다>, “순수성이라는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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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수함을 꽤나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선의나 재능으로 알려진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거기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거의 사기꾼이나 악마인 것처럼 대하죠. 뭐 연예인들이 100% 순수한 자연산 외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예민한 것도 비슷한 경우고요.

그럼 이 세상에서 정말 비난할 거리가 없는 위인은 없을까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위대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더러운 속사정이 있는 인간들투성이죠. 저는 이 나라에서 그런 비난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딱 한명 이순신 장군 밖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특히 젊은 스타들에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그네들은 아직 충분히 더러워질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혀보면 어떨까요? 비난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인물이 이 세상에 적어도 한두 명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 중에는 마더 테레사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평생을 빈민과 병자들을 위해서 봉사만 하다가 떠난 사람. 인간이 어디까지 숭고해질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자비를 위해서 용감해질 수 있는지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가장 신에게 가까웠을 사람. 현대인들이 거의 유일하게 인정하는 성인(聖人). 테레사 수녀 말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요.

그리고 이 책은 불경스럽게도 바로 그 성인 테레사 수녀의 배후를 파헤칩니다.
대충 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죠.

그녀가 추구한 ‘봉사’라는 것이 결국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 가난한 병자들을 모아놓고 서서히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는 사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신앙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야 말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의 실천이었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자신은 그런 축복을 마다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장 비싼 의료진에게 몸을 맏겼으며 그 의료진을 만나러 다녀오기 위해서라면 특별전세기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런 그녀가 서구세계에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선정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미디어와의 만남 덕이었다는 사실. 그녀를 세상에 알린 사진들, 그 어두운 토굴같은 병원 건물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유난히 그녀의 흰 제복이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 사진들은 사실 당시 코닥Kodak에서 새로 개발한 초고감도 필름 덕분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이 코닥필름의 기술력의 개가가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성인의 징표로 광고되었다는 사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신의 교파를 확장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출처에는 상관없이 온갖 기부금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냈으며 그 돈들은 최소한으로만 병자들에게 사용되었다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이런 결론에 도달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엔 정말 존경할 인물은 하나도 없어. 젠장 인간은 원래 추잡한 존재야”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비합리적인 숭고함을 찾는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고요.
다시 말해 100% 순수한 어떤 것을 찾는, 혹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 정말 100% 순수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지 않으면 옳거나 정당하지 않다는 잣대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이고 누구를 위해서 기능할까요?

이런 100% 순수성의 잣대를 내세워 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게으르고 용기도 없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 실천을 하는 모두를 바로 그 잣대로 비난하죠. 정작 비난받아야 할 이들은 바로 자신들인데도, 어느새 그 100% 순수의 잣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간이 조금이라도 뭔가를 한 인간보다 오히려 더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그 게으른 겁쟁이들 뒤에 숨어서 모든 사람들이 더 게으르고 겁먹기를 바라는, 그 동안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거의 100% 욕심으로 가득찬 100% 쓰레기들이 바로 그런 100% 순수를 내세운다는 겁니다.

여튼, 이 책의 정보가치는 꽤나 높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달의 이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요.

사실 테레사 수녀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아주 당연한 사실을 다시 알려줄 뿐이죠. 비현실적인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맞는 허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당연한 사실 말입니다.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힘든 와중에도 남들에게 약간의 배려를 베푸는 사람들,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면서 진실을 알리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이 진짜 숭고한 것이죠.

 


영진공 짱가

* 이 책의 원제 The Missionary Position 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보통 더 많이 사용되는 의미는 “정상체위” 인데요.
바로 그 체위를 제3세계에 가르쳐준 이들이 선교사들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책의 내용과 적절히 어울리는 이중적 제목인 셈입니다.

마이애미 바이스 (Miami Vice, 2006), “몹씨나 액쑌적인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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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는 그 이름만으로 품질 보증수표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다. <라스트 모히칸>을 시작으로 <히트>, <인사이더>, <알리>, 첫번째 HD 영화였던 <콜래트럴>까지 일관된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준다. 스케일이 큰 액션 영화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리들리 & 토니 스콧 감독과 유사하지만 <인사이더>와 <알리>는 마이클 만 감독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차별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TV 연출자 시절 자신의 히트작의 영화 버전인 <마이애미 바이스>는 그러나 TV 시리즈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전히 마이애미가 중심이긴 하지만 사실상 ‘월드 와이드 바이스’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로케이션 스케일이 방대하면서도 돈 존슨의 하얀색 여름 양복과 여유 있는 미소 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마이클 만 감독이 정색을 하고 만든 ‘몹씨 액쑌 영화’가 <마이애미 바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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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액션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콜린 패럴과 공리의 멜러 부분이었는데, 이로 인해 마이클 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애미 바이스>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라스트 모히칸>과 <히트>를 꼽아야지 싶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애미 바이스>는 마이클 만의 가장 성공한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최대한 답습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우 환영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콜래트럴>과 마찬가지로 필름이 아닌 HD 영화라는 부분이다. HD 촬영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이클 만 영화의 전작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시각적 충일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는 동안 여러 장면에서 ‘저게 그림이 필름이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일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하다. 일부 대중적인 장르 영화의 컨벤션은 충분히 눈감아줄만 한 수준인데 딱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와 콜린 패럴을 바라보는 ‘질투의 눈물 글썽임’과 그것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했던 부분은 좀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공리는 <2046>에서 장즈이의 열연을 무색케 했던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마이애미 바이스>는 공리와 콜린 패럴의 케미스트리가 뿜는 설득력으로 인해 ‘몹씨 액쑌 멜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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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21”, 사학재벌을 위한 드림 컴 트루


감독_로버트 루게틱

출연_M.I.T 대학, M.I.T 대학생들, M.I.T 교수님


매년 돈이 없네 어쩌내 징징대며 등록금 올리다가 몇 백억의 이월금을 남긴 사실이 언론에 딱들킨 H대는 예능으로 돈 버는 대학답게 몇 년간 터만 닦던 신축예정 건물을 반 개월 만에 후딱 올려버리며 로마도 하루 아침에 만들어버릴 것만 같은 기염을 토해내었다.


이렇게 돈놀이하기에 바쁜 사학재벌들은 매해 등록금을 인상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의 대학에 비해 등록금이 낮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다른 나라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학비를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들이니 시설은 여관인데 숙박료는 1급 호텔 수준으로 책정하려는 도둑놈 심보에 놀부도 대성통곡할 판국이다.


당 영화는 우리 재벌사학들이 그토록 꿈꾸는 비싼 학비를 자랑하는 나라의 비싼 대학을 배경으로 한다. 수업료와 생활비 30만 달러(약 3억원)의 푼돈이 없어 인생이 후달리게 생긴 명문대 얼짱의 카지노 앵벌이를 그리고 있는데 그가 보여주는 명석한 두뇌나 카지노를 상대로 벌이는 한판승부보다는 하버드 의대생 노릇하는데 무려 3억원이나 들어간다는 데에서 영화적인 스펙타클 함을 느낄 수 있다.

강원랜드도 긴장해라~
우리도 곧 머지 않았다.

영진공 self_fish

“놈놈놈”, 채 완성되지도 않은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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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 어처구니가 없어여.

씬과 씬 사이에 있어야 하는 그림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이에여.

마지막 대추격전 바로 다음 장면. 송강호만 혼자 사막을 달리고 있죠. 대추격전 상황에서 송강호가 어떻게 벗어났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어여. 액숑 영화 원투번 보나? 뻔한 거, 그냥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건가요?

그런가 했더니 또 그 다음 씬에서 이병헌이 갑자기 누군가를 죽이면서
“붙었으면 끝까지 해얄 거 아냐? 어쩌구 저쩌구 불라불라”거려요.

아. 이건 뭥미? 대체 누구랑 왜 싸우는 겅미? 거기 보니깐 처음 보는 가방이 등장하던데 그거 때문에 싸운 겅미? 글고 병헌이는 어떻게 이긴 겅미? 이 역시 ‘아 거참 액숑무비 원투번 보나? 나쁜 놈들이랑 싸웠겠지’하고 관객이 알아서 유추해야 하는 겅미?

아니요. 전 오히려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더군요.

붙지도 않은 그림,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그림들만 잔뜩 있는데 그것 갖고 어떻게든 편집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의 담배 세 갑 스트레이트 끽연 고뇌.

그러니 칸 공개 버전과 국내 버전 편집이 달라졌겠죠. 국내 버전이 더 높은 퀄리티라고 제작사 측에서 얘기한 것 같은데, 칸은 영화제 일정에 맞춰 시간에 쫓기며 편집했을 테고 국내 버전은 그보다 시간 여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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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처럼 버전이 다르다는 사실은, 시나리오대로 혹은 최초 콘티대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럼 왜 콘티대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대규모 인원과 가축이 나오는 각종 폭파 액션씬을 해외에서 찍어야 했으니 생각만큼 그림을 얻질 못했을 거예요.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리고 모든 영화가 꼭 콘티대로 가야 한다는 법칙도 없구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붙어야죠. 이 꺼끌하고 엉성한 편집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오토바이에 애들 태우고 달리던 송강호가 별 설명 장면 없이 혼자 달리고 있는가 하면, A급 가죽 케이스에 보관돼 품에 잘 있을 거라고 생각됐던 지도가 마지막엔 너덜 세트가 돼있고, 송강호랑 병헌이네 패거리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어느새 병춘이네 패거리가 끼어 들어 싸우고 있고. 기타등등등등등.

흔히 영화를 평할 때 완성도를 놓고 그걸 기준삼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르자면 이 영화는 정말 ‘완성도가 없는 영화’예요. 당연하죠. 아직 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있을 리가 있나요? 물론 마음이야 부족한 그림 다시 가서 찍고 싶었겠지만 여건상 그렇게는 안됐을 테고 말이죠. 그래도 결론은 그거예요. 이건 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럭저럭 졸지 않고 영화는 무난하게 봤어요. 하지만 이건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기본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중국집 가서 짱게를 시켰는데 바쁘다고 짜장에 양파 안 넣고 볶아내오는 경우란 말이죠.

요즘 영화 관람 생활을 많이 안해서 모르겠지만 예전 광시곡 이후로 그림 안 붙는 영화는 처음이네요. 물론 광시곡 만큼은 아닙니다. 광시곡은 전위영화였으니까요.

하지만 언니들 지갑 자동개봉 국내 최고 초호화 캐스팅으로 떡하니 내놓은 영화가 광시곡을 떠올리게 하다니.

솔직히 김지운 감독님 요즘 조낸 쪽팔려 하고 계시죠?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