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께 드리는 질문


위의 동영상은 미국의 어느 스탠딩업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꼭지이다.  내용은 기독교, 아니 일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독설과 비난이다.

이 동영상을 [영진공]이 게재하는 이유는 그 내용을 지지해서도 아니고 기독교를 비판하고자 함도 아니다.

단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이다.

1) 기독교 성경 어느 구절에 성전을 높고 빛나게 지어서 오로지 해당 교회의 교인 수와 세력을 확장하는데 힘쓰며 목회자와 그 가족들이 호의호식하라는 내용이 나오는가?

2)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 하나님과 그 분의 가르침을 섬기고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소속 교회와 목회자를 섬기고 따라야 하는가?

영진공 수뇌부 대장
이규훈 (http://nowhereman.co.kr)

도쿄도지사 후보 토야마 코우이치


토쿄 도지사 후보
무소속, 토야마 코우이치, 36세
반 관리교육 운동으로 시작하여 2년 투옥 후 현재에 이른 반체제 지식인.
그의 정견 발표를 들어보겠습니다.

유권자 제군(諸君), 내가 토야마 코우이치다.
제군, 이 나라는 최악이다.
정치개혁이나 뭔 개혁이나 나는 그딴 거에 일체 흥미 없다.
이것저것 개혁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이젠 그런 널럴한 단계가 아니다.
이런 나라는 이제 내다 버릴 수 밖에 없다. 이런 나라는 쫄딱 망해버려라.
나에겐 건설적인 제안 따윈 하나도 없다.
지금은 다만 SCRAP & SCRAP, 모조리 때려부수는 거다.
제군, 나는 제군을 경멸하고 있다.
이 쓰잘떼기 없는 나라를, 그 시스템을 끌어가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제군이기 때문이다.
적확하게 말하면, 제군 중 다수파는 나의 적이다.
나는 제군 중 소수파에게 말을 걸고 있다.
소수파 제군, 지금이야말로 단결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다수파 놈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대로다.
우리 소수파가 점점 힘들어지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소수파 제군, 선거로 뭔가 바뀌리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애초 선거 따윈 다수파의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소수파에게 선거처럼 바보짓은 없다.
다수결로 정하면 다수파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은가.
자, 어떻게 할 건가.
그 이야기는 길어지니까, 게시판의 포스트를 봐다오.
포스터는 두 가지니까 하나라도 놓치지 말도록.
나는 이 나라의 소수파에 대한 학대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소수파 제군, 다수파에 대한 설득 따윈 할 수 없다.
다수파 놈들은 우리 소수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다수파 놈들이 지배하는 이 쓰잘떼기 없는 나라는 이제 쫄딱 망할 수 밖에 없다.
개혁이고 뭐고 필요없다!
지금 해대는 이런저런 개혁이란 게 어차피 모조리 전부 다 다수파 놈들만을 위한 것이잖은가!
우리 소수파는 그딴 것에 기대하지 않으며, 물론 협력도 하지 않는다!
우리 소수파도 이딴 나라에 뭑 하나 바라지 않는다.
우리 소수파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이딴 나라를 이제 쫄딱 망치는 것다!!!
굳이 말하자면 이젠 정부 전복 외엔 없다!!!
소수파 제군, 이를 기회로 정부전복이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함께 하지 않으련가.
포스터에 연락처가 적혀 있으니 선거 중이건 끝난 뒤건 관계없다.
나한테 전화 한 통 해다오.
물론 선거권 없는 미성년 제군이나 도쿄도 이외 제군도 상관없다.
우리 소수파에겐 선거따윈 원래부터 전혀 관계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다.
내가 당선되면 놈들은 쫀다. 나도 쫀다.
토야마 코우이치에게 악의의 한 표를! 토야마 코우이치에게 자포자기의 한 표를!
아니면 투표따위 하지마라! 어차피 선거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단 말이다!!! (f●ck You 제스처)


무소속, 토야마 코우이치의 정견 발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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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존감도 없는 허경영 따위!!

이런걸 보고 배우란 말이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인력관리부 그럴껄(http://titop.co.kr)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대를 만나서 정말 행복 했습니다

사랑은 항상 의외의 순간에 찾아 옵니다.
사랑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행복은 암흑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사랑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아 보입니다.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었다고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대가 몹시 그리울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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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소설이 원작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흥행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가슴 찡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요즘 코드라고 할 수 있는 불륜도 아니고, 신세대들의 즉흥적인 사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현실의 사랑은 더욱더 아닌 사형수와 원치 않은 자원 봉사자가 된 습관적 자살 시도인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는 데서 관객의 흥미를 가져다 줍니다.

과격하지 않고 잔잔한 사랑을 그리는 공지영의 스타일이 반영되었겠지만 특별한 만남 그리고 이미 기결수가 되어 사형을 기다리는 옥중의 남자에게 면회를 가면서 이루어지는 대사가 전부인 한정적인 공간을 아름다운 사랑의 공간으로 바꾸어 집니다. 파괴된 가정환경으로 단순히 살아남기를 원해서 꼬여가는 인생으로 결국은 범죄자가 되어버리고 사형수가 되어버린 남자와 사춘기 시절의 아픈 과거로 치료 받지 못하고 꼭꼭 마음을 닫아버려 세상을 등지고 싶은 여인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 일주일에 한번 면회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 받고, 치유가 동병 상련이 되어 사랑이 되어버리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막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이별로 이루어지는 그러나 만남과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들이 우수 젖은 반항아 강동원과 아름다운 우울증 이나영을 통해 과격하지도 숨막히는 절정은 없지만 잔잔하고 순백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집니다. 강동원의 회한과 이나영의 눈물방울은 어느덧 제 눈에도 물방울이 맺히게 합니다.

공지영의 소설의 감칠맛이 나는 대사 및 주인공의 심리 및 시간의 제약으로 인한 여러 내용의 생략들이 영화 및 사랑의 구도를 평범하게 만드는 점도 있고, 얼짱 남녀들의 이유 있는 미모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식의 이야기와 자살 미수의 당위성들이 억지처럼 보여질 수 있어도 말도 안되고 상식이지 않는 이야기도 사랑이라는 동화의 대 주제에서 조용히 용서되어집니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그 둘의 사랑보다는 사랑이 치유 할 수 있는 상처에 대해서 입니다. 사형수 윤수는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받고 역시 자실 미수자 유정 역시 사랑으로 자신의 씻을 수 없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료 합니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사랑은 만병통치약이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지닌다고 합니다. 어떠한 아픔도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우울함도 때로는 사랑이란 한 마디도 마법과도 같이 간단히 치료 되기도 합니다. 물론 금단의 증세와도 같이 그 사랑이 깨지면 그보다 심한 나락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아픔 때문에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판도라의 상자를 처음부터 열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게 인간인 듯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른이 되어 갈수록 혼자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일도 많아집니다. 힘들 때는 기대고 싶은 사람이 필요 한 듯 합니다. 아님 기대고 싶은 사랑일 수도 있겠지요. 사랑은 영혼을 치유합니다. 아플지도 모른다고 사랑에 문을 닫을 필요는 없겠지요. 사랑은 대략 의외의 상황에서 오는 경우도 많은 듯 합니다. 아직 사랑이 없으시면 마음을 열고 사랑을 기다려 보실까요.

시와 함께 느껴보는 영화 이야기
클린트(http://blog.cine21.com/clintmin)

잭 스나이더, <300> :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00>이 그려내는 관점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바를 적절히 조합해 보면,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는 결국 (제국주의화한) 문명과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이루어진) 야만의 충돌이다. 주인공이 스파르타의 전사들이었던 이상 영화가 갖게 되는 입장은 일면 거시기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용맹무쌍한 전사들의 장렬하고 비장하며 아름다운 죽음을 형상화하는 척하며 폼을 잡는다 할지라도 이 영화의 정체는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서 실험하고 제시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붉은 망토를 두른 스파르타 전사들은 투구를 쓰고 무릎보호대를 하고 창과 방패를 휘두르면서도 정작 갑옷은 입지 않은 채 삼각팬티 바람에 빨래판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에 반해 페르시아의 군대는 극도의 문명화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신구와 화장과 가면을 쓰고 온몸을 갑옷으로 휘감는다.


가만, 페르시아가 문명의 상징으로 그려졌다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많은 이들이 페르시아 왕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졌다고 하길래 스스로의 미감을 좀 의심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나에게 페르시아 왕 크셰르크세스는 9척 장신에 지독히 위엄있고 압도적인 제국의 왕, 스스로를 신 중의 신, 왕 중의 왕 혹은 God-King으로 자처하는 데에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채를 가진 위압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페르시아 왕의 외모를 기괴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화장한 남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감이 전제되어 있는 듯한데, 실제 역사에서 페르시아 왕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집트의 왕비뿐 아니라 왕들도 짙은 눈화장을 한 것은 미용의 ‘화장’ 목적이라기보다는 상징을 육체로 구현해내는 ‘분장’의 의미가 더 짙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며 얼굴 위에 마스크와도 같은 화장을 썼을 때 그 화장이 어디 미용 목적이던가? 그것은 ‘그저 한 명의 여왕’이 아니라 대영제국 그 자체를 몸으로 구현한 것이었고,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구체적인 인간을 그 자체로 상징과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행위였다. 나는 페르시아 왕의 화장 아닌 ‘분장’ 역시 그런 의미로 파악한다. 크셰르크세스 역시 극도의 문명을 이룩한 대제국 그 자체의 상징으로서 얼굴에 분장을 썼고 온몸을 황금으로 휘감고 피어싱을 하며 수백의 노예들이 떠받치는 (이동하는) 거대한 왕좌 위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다. 왕의 최정예 부대인 임모탈은 또 어떤가? 개체성을 지운 위에 ‘집단의 정체성’으로서 가면을 씀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인 전체’로서 상징화한다. 고도의 상징을 사용하는 사회, 그리고 부를 드러내며 보석과 치장으로 예술적 심미안을 드러내는 사회. 페르시아는 진정 고작 살상병기 외에는 존재의 가치를 알지 못하던 야만적인 스파르타 전사에 비하면 확실히 문명의 첨단을 누리는 세계였고, 탐욕으로 제국을 넓히고 있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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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세붑 숭배를 상징화한 저 왕좌까지... 황제님 멋쟁이셈


반면 이들과 맞서 싸우는 스파르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영화 서두에 길게 설명이 됐듯 아무리 자유를 외치고 숭고한 이상을 갖고있는 척한들 어릴 적부터 철두철미하게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길러지고 삶의 풍성한 의미와 아름다움과 학문과 문명과 예술이 뭔지도 모른 채 오직 전쟁과 전투기술밖에 아는 바 없으며 그렇기에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며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죽는(소멸하는) 것’ 하나에 목숨을 거는 골빈 머슬들(집단 가미가제 전투조?!)이 아닌가. 이들이 아테네 인들을 ‘호모들(boy-lovers)에 나약한 철학자’라고 비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전장에서 갖는 전우애(!)와 특별한 우정(!)이 동성애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 못한 채 열심히 머슬만 움직이는 가련한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에 이르면, ‘생각’이라는 걸 멈춘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야수를 자처하는) 잘 길들여진 (말하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초-짐승들의 유치찬란한 유희놀음이 화면 가득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들이야 나름대로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겠지. 그러나 인문학적 교양이 결여된 이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무리 문명세계의 것들을 모방하고 얼기설기 주워모아 내뱉는들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될까. (아니 스파르타가 언제부터 그렇게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였어? 아테네 인들은 나약한 철학자들이라며?) 그렇기에 레오나이다스 왕은 문명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페르시아 왕 앞에서 쫄 수밖에 없고, 그러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페르시아 왕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고작 ‘당신의 피를 봬주겠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오나이다스는 크셰르크세스를 죽일 수 없다, 고작 상처를 낼 뿐이다. 물론, 극도로 상징화된 존재는 굳이 숨통을 끊어놓지 않아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살짝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존재 기반이 무너지긴 하지만.

외교 사절을 죽이고는 의회를 무시하고 국법을 어긴 채 전쟁을 감행하는 왕과,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한들) 의회에서 심지어  의원을 공개적으로 찔러죽이는 왕비라니 이런 개망나니 야만의 국가 수준에서 자기들이 싸우는 목적이 ‘자유와 숭고한 이상’이라고 착각한들 그게 어디 만인의 자유와 이상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 300명 빨래판의 자유와 이상(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그게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잘 몰랐으리라 확신한다.)을 위한 거였겠지. 그나마 이 왕이 조금이나마 양심적이라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직접 전장으로 달려나갔다는 사실 단 하나 때문이리라. (노무현, 니가 가라 이라크!)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에 정치적 공정성을 들이대고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진지하게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우려를 표한다. ‘서사’ 장르가 매력적인 것은 설사 창작자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든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표피에 내세우는 상징체계가 아닌 대안적 체계를 전제할 경우 완전히 다른 의미, 심지어 전복적인 정반대의 의미를 추출해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미국의 말도 안 되는 속좁은 자국중심주의와 호전성을 읽어내며 우려를 표하고 분노를 하지만, 골빈 머슬들의 멍청함을 그대로 폭로하며 엔터테이닝을 제공해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공들인 페르시아 군 묘사에서 그걸 봤다면 내가 지나치게 아전인수 격으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욕심이 너무 없는 것일까. 아니 나는 그런 진지한 분노가 웬지 ‘내 딸래미는 얼굴도 이쁘고 돈도 잘 벌고 머리도 좋아야 하거든요’ 하는 거 같아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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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있어보이는 척 해봤자 야만인인데, 어째 로마시대 장교들을 좀 닮은 듯도.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비록 그가 지적이고 통찰력있는 감독이 아니라 해도 요즘엔 그렇게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만 밀어부쳐 일정 정도의 성취를 거두는 감독도 드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 충분히 ‘훌륭한’ 정도를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새벽의 저주>를 보고 찍었던 내 눈짐작이 틀리지 않아서 더욱 즐겁기도 하고. 전통적인 좀비영화 팬들은 <새벽의 저주>의 ‘존나빠른’ 좀비들을 저주스러워 했지만, <새벽의 저주>가 ‘액션-호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자신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훌륭하게 완수해냈는지는 분명히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는가. <300> 역시 그렇다. 18세 이상 관람가인 이 영화를 보며 역사적 사실을 ‘새로 알고 공부’했다고 여길 이들은 어차피 얼간이일 테고, 영화 속의 바보들이 얼기설기 내뱉는 그럴 듯한 말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봐주자. 그래봤자 이들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출렁이는 머슬이 만들어내는 곡선들이 어필하는 시각적 즐거움이리니. 육체의 스펙터클과 인간의 몸을 감싼 각종 문명의 상징들의 스펙터클의 대비,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자의 가장 바보같은 짓 중 하나인 ‘전쟁’이라는 것이 극도의 방식으로 재구성됐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스펙터클.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그 화면, 움직이는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같은 프랭크 밀러의 원작이라도 잭 스나이더의 화면은 (<새벽의 저주> 때도 그랬지만) 묵직하고 깊이가 있는 <씬 시티> 로드리게즈의 화면과 달리 특유의 가볍고 좀더 화사하며 얄팍한 쌈마이 감성이 일관성과 뚝심으로 밀어부쳐질 때 느껴지는 맛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아주 기능적이고 말초적으로 제공되는 시각적 즐거움. 전체적인 톤과 화면과 앵글과 구도와 질감뿐 아니라, 각 육체가 전시하는,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300개의 빨래판”이 전시하는 육체 그 자체의 스펙타클, 그 육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동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이 300개의 빨래판이 모여 구조를 만들며 만들어내는 진과 동선이 주는 쾌감까지, 적어도 잭 스나이더는 그림을 꽤 잘 뽑아내는 감독이다. <300>을 볼거리가 풍부한 진지한 코미디 영화로 즐기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마치 WWF 프로레슬링 경기 관전에서 얻는 즐거움처럼.


ps1. 제러드 버틀러를 처음 눈여겨 보게 된 건 케이블에서 2부작으로 해준 TV영화 <훈족의 아틸라>인데 근육이 좋더라고. 근데 이 아저씨 완전히 이쪽 까라 – 멍청한 머슬 – 로 자리잡으시는구만.

ps2. 데이빗 윈햄도 빨래판 배를 드러내고 나왔을 때 생각했다. “윈햄 너마저…” 파라미르로 출연했을 때 부드럽고 사연 있어뵈는 얼굴에 인상이 깊었는데, 정말 좋아하게 된 건 <반 헬싱>에서 그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선 ‘어리버리 푼수 수도사’로 나오는 걸 보고서. 이 친구 눈이 정말 좋다.


ps3. 근데, 황제님 멋쟁이를 외치는 나, 정말 미감이 이상한 거야…?


산업인력관리공단 특등사수
노바리(http://darthvedder.com/ved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