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소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내 주변에 조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릴 적에 집에서 닭 잡던 기억, 그 중에서도 목이 반쯤 잘린 닭이 뛰어다니던 모습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이후로 새 한 마리는 무섭지 않은데 떼로 나오면 무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조류공포증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한 친구의 이야기였다.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그녀는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그녀가 비둘기의 눈동자를 보며 “비둘기에게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비둘기가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게 두려움의 이유라면 그녀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인 자동차나 컴퓨터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말은 실제로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둘기라고 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자들은 ‘생각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뇌의 활동’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날고 걸어다니고 모이를 주워먹고 하는 비둘기의 행동은 결국 그 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느낌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새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새는 파충류에서 진화한 존재고, 우리는 포유류의 자손이다. 새의 조상은 공룡이나 뱀이고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인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영악한 괴물 벨로시랩터와 새는 동족이다. 실제로 벨로시랩터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 CG 애니매이터들은 타조나 독수리 같은 조류의 행동방식을 주로 참고했다.

상대방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나의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자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다. 앞서 얘기한 새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도 결국 그 종족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그 에일리언들이 겁나게 무서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놈들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놈들의 피가 황산이기 때문만도 아니며, 입이 이중 삼중이어서도 아니다. 그놈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긴 것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놈들에게는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에일리언은 애초부터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변태를 마치고는 숙주를 죽이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튀어나온 다음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죽이게 되어있다. 그들은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살육이 원래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다. 고로 그들과 우리는 정말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뭔가 대화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고로 남은 건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뿐이다.



『프레데터』도 그렇지 않느냐고? 프레데터도 에일리언과 같은 외계인이고, 인간을 사냥감으로 여긴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사냥감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대상은 나름대로 존중해주며 사냥한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사람이나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도 있고 나름대로 규범도 있고 도덕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이다. 사실 프레데터는 인간에 대한 은유라고 보면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프레데터, 즉 지구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포식자는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제이슨은? 그놈도 앞뒤 가리지 않는 살인마이긴 하다만, 제이슨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그놈은 인간 아닌가.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놈은 우리의 꿈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노는 존재다. 따라서 프레디가 무서운 이유는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와는 정 반대이다.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드라큘라들은? 사실 이들은 우리보다 한 수준 높은 존재, 즉 일종의 초월자라는 점에서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다. 드라큘라는 악마의 다른 모습인데, 악마는 땅에 저주 받은 천사이고 천사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어떨 때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디와 비슷한 이유로 두려운 존재이다. 하지만 블레이드에서처럼 꽤 멋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불멸 불사의 몸으로 모든 인간의 문명을 경험해왔으니 그 어떤 인간보다도 지적이고 고상할수도 있는 거다.



http://www.fred-katrin.de
에일리언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한 H.R.Gigger의 갤러리.
거기에서 가져온 이미지 두 개
 

같은 인간이라도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때, 소통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낄때, 우리는 그를 에일리언처럼 대하게 된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행태도 결국 그런 신념(유태인은 악함을 타고난 존재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말살밖에 없다는)의 결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종류의 적대감과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게 아닐까.

영진공 짱가

 

“내셔널 트레져”, 그게 왜 니네 나라 보물들이냐고




역사학에 있어 정사는 역사 흐름이 대강 이래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정식으로 통용된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공부하는 거고, 실질적으로 흥미로운 자료들은 각종 다양한 야사들과, <음모론>이다.

정사의 모든 역사 기술이 승자와 남성,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그들의 공적이 찬양되는 데에 반해, 야사는 이들 역사의 주인공들의 다양한 이면들을, 그리고 특정 역사씬에서 그들만큼이나 중요하나 그들의 그늘에 가려진 다양한 패자와 약자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서 매우 유용하다.

음모론은 그 특유의 재미와 호기심 충족은 물론이고 권력의 다양한 속성들을 엿볼 수 있으며, 때로 야사들도 의도적으로 삭제한 기록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음모론을 신봉함에 있어 한 가지 위험한 점이라 한다면 권력 위주의 사고방식인데, 말하자면 정사 중의 정사, 그것도 공식 기록을 왜곡할 정도의 승자 중심 역사관과, 정반대로 패자 중심의 화법을 통해 ‘실질적 권력집단’을 상정하는 것은, 승자 중심 역사관과 너무나 똑같이 소수권력 위주의 사고 패러다임을 공유한다는 것.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음모론이 통용되는 것은… 음모론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사가들의 재미와 호기심은 물론이고 상상력까지 만족시킨다는 점일 터. 나 역시 음모론 신봉자는 아니어도 음모론 enjoyer 정도는 된다.



서구에서 성당기사단, 프리메이슨, 카발라, 그노시즘을 비롯한 각종 은비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수구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개신교 하에서 지속적으로 ‘사탄숭배주의’로 지탄받는다는 사실(실제로 ‘프리메이슨’으로 구글링을 해보라. 제대로 된 자료들이 아닌, 보수 기독교도의 ‘비난을 위한’ 악의적 자료들이 가장 먼저 튀어나온다.)과, 이러한 소위 ‘이단’ 혹은 ‘사탄숭배주의’라 불리우는 것들에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점령’하면서 쫓겨나고 박해받을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고대 지식들과 민간전승 지식들이 기독교적 감수성과 일부 결합하면서 살아남은 것의 흔적, 그리하여 바야흐로 ‘기독교의 세계통일 기도’의 후유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또 한편으로 이런 은비학적 전통일 터이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 공히, 유럽의 마녀사냥과 미국 뉴잉글랜드에서의 마녀사냥이 여전히 ‘정말로 마녀가 존재했기에’ 벌어진 일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 꽤 남아있을 거라 자신있게 추측할 수 있다.)

은비학의 깊이와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자료들 중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는 아무래도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꼽을 수밖에 없다. 『내셔널 트레져』의 은비학?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쯤은 모두 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두루뭉실하게 알려져있는 은비학의 기본들 중 선정적 호기심의 가장 얄팍한 것들만 모으고 모아 이것저것 비빔잡탕을 해놓을 수밖에 없다.

성당기사단과 십자군전쟁, 프리메이슨 같은 거 하나도 몰라도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나도 모른다.) 이건, 그냥 액션 어드벤처 영화니까. 다만 어릴 적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천리안’이나 ‘피라미드’, ‘프리메이슨 기호’ 같은 것들이 모두 사탄숭배를 위한 것이라는 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받고 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더할 수 없는 “호러영화”가 될 수는 있겠다.

과거 인디애나 존스가 성가시기만 한 여자, 덜 성가시지만 그래도 보살펴줘야 하는 어린애를 달고 다니며 거의 모든 활약은 혼자 했던 것과 달리, 『내셔널 트레져』에서는 여자도 남자 동행도 나름대로 한몫 한다. 여자동행은 지적인, 역사에 대한 지식 부분을, 남자동행은 그 외의 컴퓨터, 운전, 전기/물리학적 지식 부분을.

아, 악당도 등장해 주셔야지. 이번 악당은 다른 문화권의 나름대로 수호자를 지독한 몰이해와 편견으로 뒤집어씌운 존재가 아닌, 보물에 욕심이 먼 <같은 미국인>이자 <부자>이다. 미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좋은 배우인 건 변함없는 숀 빈이 기꺼이 출연해 낭비당해 주신다. 비록 각본구조상 악당인 션 빈이 <보물을 볼 수 있는 눈>, 즉 <안경>의 존재에 대해 알래야 알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전화로 <안경도 꼭 갖고 오라>며 협박하는 신통력도 발휘해가면서 말이다.

션 빈이 맡은 ‘이안’이란 캐릭터는 멀리서도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의 소유자거나, 스크린 안과 밖,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대단히 실험적인 영화 캐릭터 창조방식이 아닌가.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물을 발견하고서 보니 맨 처음에 딱 눈에 띄이는 게 수많은 이집트 파라오의 미이라들이던데, 그게 왜 미국이라는 나라의 ‘내셔널 트레져'(국보급 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사를 통해 이 민망한 제목의 느끼함과 서구유럽의 오랜 역사에 걸친 <약탈>의 민망함을, 조금 걷어내려 노력해 주고 계신다. “세계 모든 사람들의 보물이에요, 세계 모든 박물관에 나눠줘야죠.” 참, 인심 한번 후하게 쓰신다.

화끈한 액션이나 숨죽일 만한 스릴/ 서스펜스도 없고, 추리의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배우들이 매력적이지도 않은 (라일리는 쫌 귀여웠다), 있는 매력도 없애버리는 느슨한 이 보물찾기 영화를 보자니, 제리 브룩하이머도 참 많이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존 터틀타웁은 역시 사람과 사람간 잔잔하고 소소한 감정흐름을 따뜻하게 엮어나가는 영화들이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위에서 내가 좀 비아냥대긴 했지만, 우리를 열광시켰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나 젊은 시절 셜록 홈즈를 등장시킨 『피라미드의 공포』 등의 기존 어드벤처물을 생각해볼 때, 분명 정치적으로 ‘나름대로 겸손해진’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 발전일 수도 있고, 미국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화적 만듦새와 재미는 분명 퇴보했다.

영진공 노바리

“인크레더블”, 재밌지만 비아냥 거리고 싶은 ……



맨!『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 옹께옵서 그리 저항하려 했던 매엔!

우린 미디어에 비해서 늘 부질 없는 존재다.
우리가 미디어에 등장할 때는 늘 ‘국도를 달리던 버스와 24톤 트럭이 충돌해 사망18명 부상 27명’에 일부가 될 때, 혹 운이 좋으면 능력없는 애비의 비애가 절절한 ‘아빠의 도전’ 따위에서 말도 안되는 곤봉 돌리기 단 1회로 ‘그나마 능력있는 애비’가 되거나 아니면 ‘그것조차 못하는 무능력한 아빠’에 줄타기 때. 혹 운이 더 좋다면 연말 불우이웃돕기 행사에 돈 만원 자선냄비에 넣을 때 느닷없는 카메라에 선건 맞으며 별 생각도 해본적 없는 ‘불우청소년의 미래’ 따위를 읊어줄 때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래, 도대체 얼마를 벌어오라는 거냐?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가뜩이나 연말 경기 심란한데 어따대고 약올려?

어리광도, 격려도 삐딱하게 볼 수 밖에 없는 처연한 세상에 부딪혀 살아가는 샐러리맨들, 자영업자들의 비애가 나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초능력자 집안의 알콩달콩한 살이를 마음편하게 못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제발 2등만 하라는 아빠, 미모에 아량에 아이들 뒷치락거리용으로 고무처럼 온몸이 늘어나는 초능력을 가사용으로 소모하는 엄마, 주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 90년대의 맨들이 자아에 대한 고독으로 몸부림을 잠시 쳐 주신 뒤 역시 ‘맨’은 맨이야를 외치며 치기어린 자기번민의 시간을 성장통처럼 가져온 맨님의 변화는 이제 인크레더블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재미있다. 엄청 웃긴다. 재치 있고 오, 당시의 그 놀라운 3D능력. 내가 3D 오퍼레이터가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거 뭐냐? 폴리곤이라고 하나? 놀랍도다.

근디 말이다. 저 모든게 나한테는 마치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부르며 비아냥 대는 처자식마냥 얄미워 보이냔 말이다. 그보다 차라리 잭블랙이 아이들에게 ‘니들은 맨을 쳐부셔야!”라고 외치던 자본주의 공교육 시스템에서는 절대 해서 안될 말들이 절절히 들리냔 말이다. 왜, 루저의 감정이 나에게 가슴 절절해 지는 거냔 말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하며 노가다 잡부에서 사시에 합격한 누구를 저주했던 고등학생들이나,
‘초능력이 미워요’를 남발하던 (배트,스파이더)맨들을 아니꼽게 보는 나나,
‘인크레더블’의 초능력 가족의 푸념에 절망해야 하는 이 땅의 샐러리맨들이나



어디 도.망.칠.데.가.없.다.

부대끼는 건 지금도 벅차고 낙타의 등이 부러지는 건 언제나 마지막 한 짐 때문이다.

이노래가 이럴 땐 딱이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스끼다시 내 인생


영진공 그럴껄

수학만 잘하면 장땡일까?


호모 사이언스- 수학이 당신의 손발을 평안케하리니 ……

에라토스테네스는 인공위성은 커녕 호랑이가 담배를 피고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던 시절, 기하학을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계산과정을 들여다 보면 에라토스테네스가 단지 기하학만을 잘했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귀신도 울고 갈 포토샵 실력을 가졌더라도 일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에라토스테네스는 뛰어난 기하학 실력과 더불어 그에 걸맞는 높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구가 구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1400년대 말 콜럼버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배를 몰고 수평선 너머로 가는 촌극을 벌이기 훨씬 이전,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둥글고 우주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가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작고 둥근 물체라면 우주의 다른 물체들, 가령 태양은 지구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빛은 언제나 서로 평행할 것이라 가정했다.



더불어 운도 따라줬다. 나일강의 잦은 범람은 이집트 정부로 하여금 매번 왕립 측량대를 파견하여 지형을 측량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는 거의 같은 자오선 상에 놓여 있다는 것과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천체에 관하여]에서,
지구가 구형이어야 하는 이유를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했다.
예를 들어 월식 때 지구가 달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모양이 언제나 굽어 있다거나,
여행자들이 북쪽을 여행할 때 보이는 별과,
남쪽을
여행할 때 보이는 별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지구가
둥글어야만 가능한 현상이다.


이렇듯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는 실험에는 우주를 바라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정확한 통찰이 없었다면 그가 아무리 기하학 대마왕이라 하더라도 그림자 길이를 잼으로써 지구 둘레를 계산하려는 시도 따위는 애초에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 예로 고대 중국에서 지도 제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회남자]라는 책을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한 시점에 두 장소(북쪽과 남쪽)에 동일한 높이의 해시계 바늘을 세우면 그림자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에라토스테네스와는 달리 지구가 틀림없이 편평하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바늘의 그림자가 짧은 쪽은 태양에 보다 가깝게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러므로 그림자 길이의 차이를 통해 하늘의 높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 참고 및 발췌:
   로버트 P. 크리즈 저, 김명남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지호, 2006


영진공 self_fish

“콜드 케이스”, 현대판 무당들


굳이 옛날 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들추어내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1970년대 미국의 한 고아원에서 원아 한 명이 죽은 사건이 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을 파헤치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대부분의 원아들은 체벌을 신조로 삼는 수녀에게 다양한 도구로 죽기 직전까지 맞았었고,
어떤 아이들은 병원에 가서 방사능 처리된 콘플레이크를 먹고 불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애는 입양되기에는 너무 나부댄다는 이유로 전기충격치료를 받다가 결국 죽었다.
게다가 그 애는 ……

『Cold Case』라는 미국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다.
『C.S.I 』와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 파헤치는 범죄의 진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최소한 10년 전 범죄, 어떤 경우엔 50년 전의 미해결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도 따끈따끈한 사건(Hot Case)이 아니라 이미 식어버린 사건(Cold Case)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릴리 러쉬’ 역을 맡은 “캐서린 모리스”



오래된 사건을 파헤치는데는 크게 세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그 사건의 기록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라지거나 이미 남아있는 기록도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관계자들의 증언도 그렇다. 50년이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변형되고 윤색되어도 여러 번 될 시간이다. 고로 한 증인의 증언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이 남아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증인들 대다수는 죽어버렸다. 증거들도 거의 해석불능이거나 어떤 것은 사라져버렸다.

이 첫 번째 이유가 현실적인 제약이라면, 두 번째는 보다 인식론적인 장벽이다. 그것은 그 당시 맥락에서 벌어진 사건을 지금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콜드케이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건이 일어났던 1970년대는 미국도 냉전이 한참이던 시기이다. 당시에 핵무기는 인류 이전에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무기였고, 그 무기의 대응책을 찾아내기 위한 실험은 (비록 그 실험에 아무것도 모르는 고아들을 데려다 썼다고 해도)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적어도 오늘 에피소드에 등장한 의사는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애국이었다고 ……

체벌도 그렇다. 당시에는 체벌이 당연한 훈육수단이었다. 닥터 스포크가 쓴 육아책이 전 미국에 퍼지기 전까지는 애들은 때려서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믿음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애들을 사랑한다면 때려야 했다.

마지막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제기다.
이미 지난 일을 끄집어내서 뭘 어쩌겠냐는 거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므로 처벌할 수도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그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뿌리부터 건드려야 한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 ……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그닥 유명하지도 않은 드라마 얘기를 푸는 건, 이 드라마에서 다루는 위의 두가지 문제가 우리나라의 과거사 규명에 제기되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허술한 기록시스템은 당시의 증거들도 오리무중으로 만들기 십상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두 번째의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이전까지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 계속 우리나라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30년이 넘게 지속되어왔다. 30년이면 한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 환경에서 태어나서 그 환경을 당연히 여기며 자라난 세대가 활동인구의 절반이 넘는 시점이란 뜻이다.

당시 일본의 위치는 마치 지금 우리에게 미국의 위치와도 같았다. 최소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피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고로 일부의 인간들은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행동들은 친일과 일상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다고 주장을 한다. 즉, 당시에 일어난 사건은 당시의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
시대가 달라져도 탓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체벌은 당시의 교육방식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때리다가 애가 죽으면 과실치사인 것은 변함없다. 핵무기에 대한 대응방법을 실험하는 거야 애국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불임으로 만들어버려야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과거사도 그렇다. 어쩔수 없었던 것도 있고, 당시엔 당연했던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걸 다 빼고나서도 남는 잘못도 있다.

내가 알기로 과거사 규명은 그때 치부해서 재벌이 된 사람의 재산을 뺏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신문을 처벌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단지 그때 그랬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경험이다. 굳이 지난 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인간이 매일같이 하는 게 바로 그거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를 곱씹기 ……
자기가 과거에 한 일, 과거 경험을 통해서 현재의 나를 정의하고 행동하기 ……

인간에게 과거는 없다. 최소한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한,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그의 현재를 정의하고 구속하는 틀이다.

『콜드케이스』에서 수사관들이 굳이 다 지나간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도 그거다. 그 사건의 해결은 이미 식어버린 사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일이다.

사건이 해결된 후,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사건의 당사자들)은 갑자기 20년전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사건이 해결된 후련함을 누린다. 이 장면은 마치 일본 만화에서 귀신이 성불하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은 그 해결되지 못한 시점에 묶여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면서 과거의 구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삶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현대판 무당들

이 드라마 『콜드케이스』는 수사드라마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치료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구원(舊怨)을 꺼내어 해결해주는 현대판 무당이다. 이들이 해결하는건 결국 정신건강의 문제이다.

뭐 아직도 우리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고 그걸 위해서 과거따위는 거들떠 볼 여유가 없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과거는 넘어가자.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났다면 과거를 현재에 비추어 계속 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웃긴 건 과거사를 규명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오히려 과거사를 걸핏하면 들먹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인간을 정의한다는 원칙은 사실 그들이 더 고지식하게 지킨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이 과거사 규명을 그렇게 싫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만, 그런 그들 때문이라도 과거사 규명은 필요하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