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소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내 주변에 조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릴 적에 집에서 닭 잡던 기억, 그 중에서도 목이 반쯤 잘린 닭이 뛰어다니던 모습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이후로 새 한 마리는 무섭지 않은데 떼로 나오면 무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조류공포증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한 친구의 이야기였다.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그녀는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그녀가 비둘기의 눈동자를 보며 “비둘기에게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비둘기가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게 두려움의 이유라면 그녀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인 자동차나 컴퓨터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말은 실제로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둘기라고 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자들은 ‘생각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뇌의 활동’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날고 걸어다니고 모이를 주워먹고 하는 비둘기의 행동은 결국 그 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느낌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새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새는 파충류에서 진화한 존재고, 우리는 포유류의 자손이다. 새의 조상은 공룡이나 뱀이고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인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영악한 괴물 벨로시랩터와 새는 동족이다. 실제로 벨로시랩터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 CG 애니매이터들은 타조나 독수리 같은 조류의 행동방식을 주로 참고했다.

상대방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나의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자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다. 앞서 얘기한 새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도 결국 그 종족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그 에일리언들이 겁나게 무서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놈들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놈들의 피가 황산이기 때문만도 아니며, 입이 이중 삼중이어서도 아니다. 그놈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긴 것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놈들에게는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에일리언은 애초부터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변태를 마치고는 숙주를 죽이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튀어나온 다음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죽이게 되어있다. 그들은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살육이 원래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다. 고로 그들과 우리는 정말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뭔가 대화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고로 남은 건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뿐이다.



『프레데터』도 그렇지 않느냐고? 프레데터도 에일리언과 같은 외계인이고, 인간을 사냥감으로 여긴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사냥감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대상은 나름대로 존중해주며 사냥한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사람이나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도 있고 나름대로 규범도 있고 도덕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이다. 사실 프레데터는 인간에 대한 은유라고 보면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프레데터, 즉 지구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포식자는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제이슨은? 그놈도 앞뒤 가리지 않는 살인마이긴 하다만, 제이슨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그놈은 인간 아닌가.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놈은 우리의 꿈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노는 존재다. 따라서 프레디가 무서운 이유는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와는 정 반대이다.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드라큘라들은? 사실 이들은 우리보다 한 수준 높은 존재, 즉 일종의 초월자라는 점에서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다. 드라큘라는 악마의 다른 모습인데, 악마는 땅에 저주 받은 천사이고 천사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어떨 때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디와 비슷한 이유로 두려운 존재이다. 하지만 블레이드에서처럼 꽤 멋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불멸 불사의 몸으로 모든 인간의 문명을 경험해왔으니 그 어떤 인간보다도 지적이고 고상할수도 있는 거다.



http://www.fred-katrin.de
에일리언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한 H.R.Gigger의 갤러리.
거기에서 가져온 이미지 두 개
 

같은 인간이라도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때, 소통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낄때, 우리는 그를 에일리언처럼 대하게 된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행태도 결국 그런 신념(유태인은 악함을 타고난 존재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말살밖에 없다는)의 결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종류의 적대감과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게 아닐까.

영진공 짱가

 

소통부재의 폐해와 공포, <도쿄 소나타>(トウキョウソナタ)

구로자와 기요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기성세대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도무지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사소한 분쟁이 생겨도 변호사에게 일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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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2008)는 기요시 감독이 그동안 느꼈던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가족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도쿄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다. 값싼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실직한 아버지, 미국을 세계 경찰의 선으로 알고 미군에 입대하는 첫째 아들,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집밖으로 나도는 둘째 아들, 이를 알고도 내색하지 못한 채 속병 앓는 어머니, 이렇게 몰락해가는 가족의 이면에는 소통부재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기요시의 감정은 공포 그 자체다.

이미 전작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등을 통해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도쿄 소나타>에서 그가 보여주는 공포는 색다른 면모가 있다. 기요시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작품 활동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런 의지는 <도쿄 소나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늘 소통 부재에 따른 일본인의 무의식에 입각한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큐어>는 최면에 걸린 채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의 행각을 통해 기요시의 테마가 뚜렷하게 수면 위에 떠오른 작품이었다. 다만 이들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의 실체가 일본사회의 불안정한 시대의 징후처럼 묘사된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소통 부재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더랬다.

<큐어(Cure)>의 DVD 표지

<도쿄 소나타>는 그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작품이다. <큐어>를 비롯한 전작들이 기요시가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풀숏의 공포를 보여줬다면 <도쿄 소나타>는 클로즈업의 공포를 보여준다. 바로 이점이야 말로 기요시가 새로운 영화경력을 마련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다시 말해, 기요시는 소통 부재의 출발점을 가족에서 찾는다. 그중에서도 가부장의 위기야 말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대두에 따른 가부장의 몰락은 전통적인 개념의 권위를 지키려는 가장의 일방적인 소통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기요시의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식사 장면은 가족의 갈등과 비극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이들은 대부분 혼자 밥을 먹거나 아니면 어머니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 할 뿐이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뻘쭘하니 있는 저녁 풍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방향적 소통의 폐해, 즉 기성세대에게 목격되는 소통부재의 에피소드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을 ‘안 돼!’ 한마디로 일축하는 아버지, 버릇없는 행동을 사과하러온 학생에게 서로 참견하지 말자며 소통을 회피하는 선생님, 이혼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변호사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이혼 당사자 등등. ‘모든 인간은 섬이다.’는 누군가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을 그어 놓고 대화를 허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 속에는 바람 소리가 전하는 비극의 전조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도쿄 소나타>라는 음악적인 작명이 품고 있는 역설적인 뉘앙스는 그래서 더욱 스산하다.

개인적으로 <도쿄 소나타>를 보면서 그동안 기요시 영화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영화에서 자주 목격했던 침묵의 실체 또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이를 ‘침묵의 반응숏’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목격한 극중 인물들이 얼마간 침묵으로 반응하는 장면을 일본의 적지 않은 수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부조리를, 사부(<포스트맨 블루스> <먼데이>)는 코믹함을, 기요시는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일본영화 특유의 스타일이라기보다 일본인의 소통부재에 대한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다.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이 여러 면에서 중의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받은 둘째 아들 켄지(이노와키 가이)는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한다. 다만 켄지의 피아노 소리를 빼면 주변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의 연주에 감화 받은 인상은 역력한데 누구하나 박수를 치거나 반응하는 이가 없다. 다만 완벽한 연주와 철저한 침묵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빚은 균열이 느껴진다. 물론 그 균열은 기요시가 품고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최소한의 희망일 터. 그 하나가 켄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요시의 기대감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침묵의 시퀀스로 상징되는 영화적 소통부재의 무의식에 파열을 가하려는 기요시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도쿄 소나타>의 결말부가 누군가의 꿈이거나 희망사항처럼 애매모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사회에 희망을 품어보려는 기요시의 시선? 아니면 꿈이나 환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비극? 무엇이 되었든 간에 구로자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