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재미와 감동을 보장합니다.


평범한 택배 기사 아저씨가 하루아침에 일본 총리 암살범으로 몰리게 된다는 설정의 이야기다. 국가 권력 또는 그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는 세력에 의해 개인의 삶이 위협을 받거나 파괴된다는 식의 줄거리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지만 – 비단 영화 속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도 있고 – <골든 슬럼버>의 경우 암살이나 음모에 의한 스릴러 보다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도입부에 “인간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습관과 신뢰”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영화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주인공 아오야기(사카이 마사토)의 사례를 통해 입증하면서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감동을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습관과 신뢰”를 추억과 신뢰로 바꾸면 <골든 슬럼버>의 실제 분위기와 메시지에 좀 더 가까운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총리 암살범으로 몰린 아오야기의 현재 시점과 함께 대학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온 세상이 총리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아오야기를 지목하며 떠들썩한 상황에서도 아오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오야기가 총리 암살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점은 – 주인공을 암살범으로서 공증하기 위한 CCTV 영상이 방송을 통해 공개된 상황에서조차 – <골든 슬럼버>의 분위기를 서스펜스 스릴러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감동의 드라마로 만들어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는 주변 인물들의 존재가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심어주고 실제로 여러 차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감동의 포인트가 후반부의 어느 한 지점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 <타인의 삶>(2006)의 경우는 영화 마지막 시퀀스가 감동의 핵폭탄 – 영화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것이 매번 극적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코믹한 방식으로까지 표현되곤 하기 때문에 영화 전반적으로 극적인 긴장감의 수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확실히 <골든 슬럼버>는 엄청 심각하게만 보이는 포스터의 이미지와는 다른 영화다. 사지에 내몰린 도망자의 죽고 싶은 상황과 절박한 심정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기 보다는 코믹한 상황 전개와 과거의 추억담을 통해 부지런히 긴장을 이완시키며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와 방법론에 집중하는 편이다.

요즘 대중영화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수퍼히어로급 주인공의 활약이나 끔찍한 피칠갑 액션의 전시가 없다는 점은 <골든 슬럼버>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듯 하다.

어찌보면 일본 총리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는 설정 자체가 우리가 살면서 실제로 겸험할 수도 있는 ‘당장 죽고싶은 상황과 심정’을 대표하기 위한 비유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영화는 가공할 음모의 배후를 파헤치거나 국가 기관에 의한 도청 행위나 언론 조작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내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기 보다는 지인들이 주인공의 결백을 믿어주고 응원해줄 때마다 쏟아지는 눈물과 감동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는 디테일 하나까지 과거와 현재를 꼼꼼하게 이어주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사카 코타로의 원작은 아이디어의 탁월함을 넘어서 정성스러움이 한껏 묻어나는 느낌을 전해준다. 이사카 코타로 원작으로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이번 <골든 슬럼버> 이전에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2007)와 <피쉬 스토리>(2009)가 있는데 아직 보지 못한 <피쉬 스토리>를 챙겨볼 필요가 있겠다.

영화 속에서 많은 것들이 반복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미지다”라는 대사다. 모든 것이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바로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던 생 떽쥐베리의 소설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2009년작 <제너럴 루주의 개선>에 출연한 사카이 마사토의 모습을 보면 약간 마른 체구에 독불장군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데, <골든 슬럼버>에서는 갓중년의 평범남 아오야기를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꽤 늘린 것으로 보인다. 어리버리하던 쌍커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모습이라니.

<카모메 식당>(2006) 의 남자 버전이라 불리우는 <남극의 셰프>(2009)에서도 주연이었으니 다른 배우들처럼 화려한 20대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작년 한 해를 거치면서 주연급 배우로 부쩍 성장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나름 상대역이라 할 수 있는 하루코 역의 다케우치 유코도 30대가 되면서 더 나은 연기와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 듯.

영진공 신어지

소통부재의 폐해와 공포, <도쿄 소나타>(トウキョウソナタ)

구로자와 기요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기성세대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도무지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사소한 분쟁이 생겨도 변호사에게 일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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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소나타>(2008)는 기요시 감독이 그동안 느꼈던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가족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도쿄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다. 값싼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실직한 아버지, 미국을 세계 경찰의 선으로 알고 미군에 입대하는 첫째 아들,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집밖으로 나도는 둘째 아들, 이를 알고도 내색하지 못한 채 속병 앓는 어머니, 이렇게 몰락해가는 가족의 이면에는 소통부재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기요시의 감정은 공포 그 자체다.

이미 전작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등을 통해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도쿄 소나타>에서 그가 보여주는 공포는 색다른 면모가 있다. 기요시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작품 활동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런 의지는 <도쿄 소나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늘 소통 부재에 따른 일본인의 무의식에 입각한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큐어>는 최면에 걸린 채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의 행각을 통해 기요시의 테마가 뚜렷하게 수면 위에 떠오른 작품이었다. 다만 이들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의 실체가 일본사회의 불안정한 시대의 징후처럼 묘사된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소통 부재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더랬다.

<큐어(Cure)>의 DVD 표지

<도쿄 소나타>는 그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작품이다. <큐어>를 비롯한 전작들이 기요시가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풀숏의 공포를 보여줬다면 <도쿄 소나타>는 클로즈업의 공포를 보여준다. 바로 이점이야 말로 기요시가 새로운 영화경력을 마련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다시 말해, 기요시는 소통 부재의 출발점을 가족에서 찾는다. 그중에서도 가부장의 위기야 말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대두에 따른 가부장의 몰락은 전통적인 개념의 권위를 지키려는 가장의 일방적인 소통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기요시의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식사 장면은 가족의 갈등과 비극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이들은 대부분 혼자 밥을 먹거나 아니면 어머니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 할 뿐이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뻘쭘하니 있는 저녁 풍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방향적 소통의 폐해, 즉 기성세대에게 목격되는 소통부재의 에피소드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을 ‘안 돼!’ 한마디로 일축하는 아버지, 버릇없는 행동을 사과하러온 학생에게 서로 참견하지 말자며 소통을 회피하는 선생님, 이혼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변호사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이혼 당사자 등등. ‘모든 인간은 섬이다.’는 누군가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을 그어 놓고 대화를 허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 속에는 바람 소리가 전하는 비극의 전조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도쿄 소나타>라는 음악적인 작명이 품고 있는 역설적인 뉘앙스는 그래서 더욱 스산하다.

개인적으로 <도쿄 소나타>를 보면서 그동안 기요시 영화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영화에서 자주 목격했던 침묵의 실체 또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이를 ‘침묵의 반응숏’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목격한 극중 인물들이 얼마간 침묵으로 반응하는 장면을 일본의 적지 않은 수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부조리를, 사부(<포스트맨 블루스> <먼데이>)는 코믹함을, 기요시는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일본영화 특유의 스타일이라기보다 일본인의 소통부재에 대한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다.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이 여러 면에서 중의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받은 둘째 아들 켄지(이노와키 가이)는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한다. 다만 켄지의 피아노 소리를 빼면 주변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의 연주에 감화 받은 인상은 역력한데 누구하나 박수를 치거나 반응하는 이가 없다. 다만 완벽한 연주와 철저한 침묵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빚은 균열이 느껴진다. 물론 그 균열은 기요시가 품고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최소한의 희망일 터. 그 하나가 켄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요시의 기대감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침묵의 시퀀스로 상징되는 영화적 소통부재의 무의식에 파열을 가하려는 기요시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도쿄 소나타>의 결말부가 누군가의 꿈이거나 희망사항처럼 애매모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사회에 희망을 품어보려는 기요시의 시선? 아니면 꿈이나 환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비극? 무엇이 되었든 간에 구로자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