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진정한 챔피언으로 우뚝 서다.

우리에게 있어 김연아 선수는 오래 전부터 이미 챔피언이었습니만,
그녀는 오늘 있었던 세계선수권을 통해 이를 당당하고 월등하게 증명해 냈지요.

오늘 하루종일 괜히 좋아서 히히 웃다가 그냥 아무 이유없이 과연 세계의 시선은 어떨가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미국의 중계방송을 찾아서 보았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미국 NBC에서 중계한 피겨스케이팅 월드 챔피언십 김연아 경기입니다.
여성 해설자가 예전에 5회 우승에 빛나는 미셸 콴 (Michelle Kwan)이고 남자 해설자는 Dick이라는 분인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Dick은 연아 연기를 보면서 거의 숨이 넘어갑니다.
글고 미셸도 연아에 대해서 매우 놀라워하지요.


[ 출처: Youtube.com, http://www.youtube.com/watch?v=_-xwx-Z3ijc ]

중간에 나오는 미셸 콴의 코멘트입니다.

“She is doning so much more than she even needs to.”
“(챔피언)이 되기에 필요한 것 이상을 보여주네요 …” 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미에 나오는 코멘트 …

“To perform like that, knowing you don’t really have to, knowing you have an incredible lead, but still giving the audience … the performance.”
(미셸 콴) “저렇게 멋진 연기를 한다는 건 …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되는 걸 알면서, 엄청난 점수 차로 앞서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에게 최고의 연기를 제공하는 (연아입니다.)”

“Well, That’s the definiton of the champion, isn’t it?”
(캐스터) “그게 바로 진정한 챔피언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적어도 미국에서 연아의 입지는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챔피언으로서 자리잡겠네요.

그리고 오늘 경기 중계 하기 직전에 해설하는 걸 보면,
“Many of you may not seen or heard from us about Kim Yuna …”라고 소개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경기 이전에는 윤아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풍기죠.

그러면서 윤아에 대해 평가를 하는데,

미셸 콴에 따르면 윤아는 세 개의 Wow-Factor(놀라운 재능)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1. Speed(속도) 2. Drop(점프) 3. Musical Interpretation(음악 해석력)



그리고 Dick 아저씨는 미국의 어린 스케이터들이 윤아의 점프를 보고 배워야 한다네요.

이후 모든 경기가 끝나고 결과가 나왔을 때, 현장 캐스터의 코멘트 …

“Nobody is ever seen one better …”

뭐 최상의 칭찬이죠.

그 화면도 보시죠 ^.^


[ 출처: Youtube.com, http://www.youtube.com/watch?v=f-Ear77bTOY ]
영진공 이규훈

초난감 기업의 조건, “폭소 속에도 교훈은 있다.”

주변의 서평이 하도 좋아서 사본 책이다.

이 책, 확실히 재미있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멋지게 몰락한 사례를 열거하며 후련하게 까는 맛은 일품이다. 하지만 재미와 사실은 좀 별개의 문제다. 이를테면 여기서 언급한 ‘오즈본 효과 (주 1)‘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게리 킬달에 관한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주 2).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선 되도록 좋은 얘기만 쓰고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 협력사였던 Canyon Company에서 제공받은 애플 퀵타임 코드를 이용해 Video for Windows를 개발했다는 얘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이건 MS의 반독점 재판의 이슈 중 하나였다). 인터넷 거품기업 중 하나로 언급된 아마존에 관해선, 글쎄, 지금 아마존이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를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아무튼간에 이거, 첫장부터 ‘초우량 기업의 조건’이 데이터를 조작했다면서 신랄하게 까댄 사람이 할 짓은 아니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류의 책을 쓰다 보면 어떨 때는 주관이 개입할수도 있고, 어떨 때는 잘 다듬어진 데이터를 인용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읽는 사람 입장에선 상관없는 일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사 보는 주된 목적은 잘 나가던 애덜이 보기좋게 망해 자빠지는 이야기를 보면서 열광하기 위해서다! 한 기업의 몰락을 보면서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자극적인 폭소를 터뜨리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구라도 좀 치고, 과장도 할 수 있는 거지, 뭐…… 요컨대 여기 언급한 사례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지, 그리고 저자가 과연 기업들의 실패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한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 가깝다. 덤으로 책 말미의 결론도 무척이나 밋밋하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소니 침몰]처럼 진지하게 회사를 걱정하며 써내린 것도 아니고, 뭔가 교훈을 줘야 하는 도덕책도 아니고, 지식을 선사해 줘야 하는 경제학 서적도 아니니까.

그러니 이 책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법을 배울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편이 좋다. 그건 과도한 기대다. 그보다는 갑갑하고 지루한 출퇴근 시간을 낄낄대며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읽을거리로써의 가치를 추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18,000원이란 값어치는 하고도 남는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영진공 DJ Han

[주 1] 80년대 오즈본 컴퓨터는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휴대용 컴퓨터를 개발해 엄청난 급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업그레이드된 제품이 나올 거란 사실을 너무 일찍 발표하는 바람에 현재 제품이 팔리지 않게 되어 매출이 극적으로 급감, 결국 회사가 도산하게 됐다는 데서 ‘오즈본 효과’란 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2005년, 80년대 당시 오즈본에서 근무했던 마이크 맥카시는 오즈본 컴퓨터의 몰락 원인이 경쟁사인 케이프로의 신제품에게 가격 및 성능에서 철저하게 밀렸기 때문이란 사실을 밝혔다. 여기 대해선 영문 위키피디아의 글 (http://en.wikipedia.org/wiki/Osborne_effect )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물론 오즈본 효과란 말은 일반명사화되었기 때문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주 2] 게리 킬달이 비행기를 타러 가느라 IBM협상단을 화나게 해서 협상이 파토났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오후에 돌아와 게리 킬달이 직접 협상을 진행했지만 이런저런이유로 결렬됐을 뿐이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IBM에게 제공한 MS-DOS는 CP/M의 특허권을 침해한 제품이었다. 하지만 게리 킬달의 고문변호사가 소프트웨어의 지적재산권 침해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조언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사실은 이거야말로 정말 엄청난 실수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슬럼독 밀리어네어> 단상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봤다.
영화야 뭐… 충분히 익숙하면서도 참신하고, 현실감 있으면서도 로맨틱하며, 동화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친다.

한마디로 말하면, 재미있다.
영화가 꽤 긴데, 그렇게 긴 줄 몰랐을 정도니까.
게다가 해피엔딩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이 영화, 얼토당토않은 설정을 밀고나가는 영화답지 않게 아슬아슬하고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정말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다. 심지어 나는 엔딩을 보며 좀 울컥했을 정도다.

보통 이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다크 나이트>나 <벤자민 버튼> 같은 수준작들을 제치고 작품상을 포함한 알짜배기 상을 8개나 탔다는 사실을 놓고 미국 주류영화계가 인도를 받아들였다고들 말한다. 물론 그 수상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이 영화가 재미야 있지만, 그리고 나름 새롭지만 아주아주 대단한 작품은 아니거든. 따라서 이 영화의 성공이 바로 ‘인도’ 라는 나라의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영향받은 것에 대해서는 아마 거의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보고 넘길 일이 아니다.
문화에 대해 우리가 익숙한 말 중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표어가 있다. 어찌보면 이 영화도 바로 위의 표어를 증빙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인다.

그렇다. 이 영화도 인도적인 것을 다루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거는 맞다.
하지만 그것을 “가장 인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국에 헐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에는 발리우드가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미국의 주류 상업영화를 대표하듯, 발리우드 영화 역시 인도의 주류 상업영화를 대표한다. 따라서 가장 인도적인 것이라면 보통은 이 발리우드 영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 영화 <슬럼독>은 발리우드 영화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발리우드 영화에는 액션과 로맨스와 환타지가 넘치지만 진짜 인도 빈민들의 진짜 어두운 삶은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이 <슬럼독>의 소재는 바로 그 진짜 빈민들이다.
심지어 영화에 등장하는 아역배우 3 명 중 2 명은 실제로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는 애들이다. ‘살림’ 역을 맡은 애가 사는 집은 아직도 아래와 같은 꼬라지이며,
라티카’ 역을 맡은 애가 영화 촬영에 대해서 회고하며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아서 참 좋았다”는 말을 남길 정도다.

그 아이들의 삶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살림’役 꼬마가 사는 “집” …

주인공들의 생김새도 주류배우들과는 많이 다르다.
남자배우도, 여자배우도 인도영화계 기준으로는 미남미녀라고 하기에 한끗 혹은 두끗 부족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인도주류 영화였다면 기껏해야 단역수준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아무리 이 영화가 성공했어도 주연 배우들은 인도 발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지막의 발리우드 풍 군무조차도, 진짜 발리우드 영화의 기준으로는 참 싱겁고 뻣뻣한 군무라는 것은 아마 발리우드 영화를 한편이라도 보신 분이라면 누구든 동의하실 것이다.


발리우드의 대표 영화배우들이시다.

* 진짜 발리우드 군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
http://www.youtube.com/watch?v=waEXlvat5GA&hl=ko

실제로 인도 본토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발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지나치게 구중중하고 심각하고 게다가 흥겹지도 못하니
당연하지 않겠나.

게다가 인도를 무슨 거지소굴마냥 그렸다고 화를 낸다던데,
입장을 바꿔놓고 봐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나라에도 빈민가가 여전히 있지만 주류 영화계에서
더 이상 그런 곳을 소재로 하지는 않으니…

말이 길어졌지만 요약하면, 이 영화에 담긴 인도는 인도인들이 아는 인도가 아니다.
지극히 비주류의, 지극히 예외적인 시공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것 중에서 소위 한류를 일으킨 것들도 어떻게 보면 그렇다.
한류들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우리나라 것이 외국에서 인기를 얻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외국에서 뜻밖의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한류의 불꽃이 되었던 <겨울연가>, 그 이전에 한국 영화를 알렸던 <8월의 크리스마스>, 모두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지던 모습과 일본에서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겨울연가>는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아니라 기성품 드라마 중 하나였고, <8월의 크리스마스> 역시 규모에 비해서 알찬 흥행성적을 올린 작은 영화였다. 그것은 <내 머릿속의 지우개>도 마찬가지인데, 이들 모두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뜻밖의 대박을 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핑클이나 SES를 넘어서지 못하던 걸그룹 <베이비복스>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정말 모두의 주목을 받은 진짜배기 주류는 의외로 외국에서 그만한 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영화 흥행 1,2,3위를 차지하는 <괴물>,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중에서 외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평을 받은 작품은 <괴물> 뿐이다.

게다가 <괴물>은 외국영화제에서의 호평 소문의 힘을 입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예외적인 경우라 해도 무방하다 치면, 우리나라에서 잘나간 영화들이 외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원칙이 통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미미한 주목을 받았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한국영화의 대표로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얼마 전까지 한국영화 흥행 1위작이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에서도 인기를 얻은 국민드라마 <대장금>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그 반대들이다.


물론 이런 현상의 원인이 우리나라 문화 자체가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화계에서는 언제나 조금은 독특한 것이 인정받는다. 우리나라에서 김태희가 미인인 이유는 이 동네에 김태희 같은 미모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심부에서 주변부를 볼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주변부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독특하거든. 그때문에 그 주변부 동네에서는 보편적인 것이 중심부에 가면 더 잘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 높이 치는 한국 미인은 김태희가 아니라 순이나 장윤주 같은 무던한 한국 얼굴이 되는 거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팝송이나 외국 소설이 반드시 그 동네에서 인기있으리란 법은 없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도 우리나라에서만 성공했다. 예수님도 “선지자는 밖에 나가서는 인정을 받는데, 자기 고향에서는 업신여김을 당한다” 고 말했다는 걸 보면 이건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결국 위의 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이렇게 보완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르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뭐가 세계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것이 빈민들의 험악하고 슬픈 삶일 수도 있고 사소한 취미일 수도 있으며 우리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다.

스케일을 조금 줄여놓고 보면 이것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획자나 감독이 스스로 “이거야 말로 대박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 그들 마음의 밖에 나갔을 때도 대박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성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워낭소리>도 그렇지 않던가. 아무리 봐도 거기에 무슨 3백만명 동원 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 <과속스캔들>도 마찬가지고 <추격자>도 그렇다. 누군들 그런 소박하거나 잔혹한 영화가 그해 최고 흥행작이 되리라 예상했겠나.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내가 보는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이 다르고,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없다. 그저 가끔씩 던져지는 단서들을 만지작거리며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끔은 세상이 던진 단서가 우리가 준비한 무엇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마치 <슬럼독->의 자말에게 벌어진 일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말 자신도 퀴즈쇼에 나가기 전까지는 그때의 그 경험이 바로 퀴즈의 정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린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늘 맞추기보다는 틀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이솝도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던가.

사슴 한 마리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뿔을 보니 너무 아름답고 늠름해 보였데, 가냘픈 다리를 보니 괜히 짜증이 났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사냥개 짖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슴은 숲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사냥개가 사슴의 빠른 발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뿔이 나뭇가지 사이에 얽혀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사냥개가 사슴의 코앞까지 달려왔습니다.
“아, 내가 구박했던 가냘픈 다리가 나를 살렸는데, 나의 사랑을 받던 뿔이 나를 죽이는구나

영진공 짱가

추가1.  아 참 근데, 어떤 나라의 문화부에서는 될 영화만 골라 밀어주겠다며?
도대체 어떻게 될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구분하겠다는 건가? 사람이 그걸 어캐 안다고 … 아무래도 그 나라 문화부장관은 무슨 신령님의 점지를 받은 모양이다.

추가2.  아카데미상 받은 거는 축하하는데, 영화 시작할 때 꼭 그렇게 자랑질 해야 하나 싶더구만 … 그건 좀 깨는 마케팅 아닌가?

추가3. 대니보일은 앞으로도 영화 성공하고 싶으면 화장실 투신 장면을 넣을지 모르겠다. <트레인스포팅>에 이어 이번에도 아주 쎈 화장실 투신 장면이 나온다. 맥락은 둘이 똑같다. 여튼 그 장면이 쎈만큼 더 영화가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동영 혹시 트라우마?

트라우마라고 하지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러니까 큰 사고를 당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라는데 정동영이 아마도 이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네요. 사고를 당했지요, 정동영도. 지난 대선후보 경선 때 선거인단 박스떼기라는 창의력을 발휘했으나 이명박 가카께 500만표로 지고 말았지요. 충격 좀 받았겠죠. 몇 개월 후 총선 때는 정몽준한테도 발리고 말았지요.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국회의원도 못 된 겁니다. 그러니 선거만 생각하면 얼마나 손발이 오그라들겠어요.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죠. 무섭고 두렵겠죠. 이번에 또 떨어지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나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가겠죠. 하지만 해결책을 마련한 것 같네요. 이번엔 최대한 안전빵으로 자기 집 안마당에서 출마한답니다. 전주 덕진을.



모양새도 재밌습니다. 지난 대선, 총선 끝나고 정동영, 창피해서인지 아니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해서인지 그냥 해외로 나갔습니다. 나가서 민주당에 어떤 도움을 줬는지는 찾아볼 수 없네요. 비슷하게 물 먹었던 김근태는 작년 촛불 정국 때 길바닥에서 초라도 들었지요. 대체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게 지내더니 보궐선거 기간에 딱 나타나서 한 마디 합니다. “나 전주 덕진을에 나갈래.” 정당이라면 선거구에 후보를 내놓을 때 누구를 내놓을지 논의를 하기 마련인데 그런 논의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나 국회의원 배지 줘”라고 한 거죠.  


듣자하니 민주당이 공천을 안 주려고 했던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대신 땅 짚고 헤엄치며 텔미 출 수 있는 전주 말고 부평 같은 데 나가라는 것이죠. 당대표를 두 번이나 했고, 당의 대선후보였던 사람입니다. 체급에 맞게 노는 게 맞지요. 게다가 지금 한나라당이 아무리 삽질한다고 해도 민주당 지지율 오르지 않고 있거든요. 당대표를 두 번이나 했고, 대선후보였던 정동영에게 그 책임이 없을까요? 그리고 그 책임이 1 년 해외에 나가 있으면 사라지나요? 희생이나 양보하는 모습도 보여줘야죠. 그리고 그것이 자기 정치경력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정동영은 사실 컨텐츠가 없어 보입니다. 지난 대선 때도 실용이니 거시기니 한참 떠들었죠. 이명박이 선점한 단어였던 ‘실용’. 이명박 당선되고 그 맛을 보니 알맹이가 있던가요? 알맹이도 없는 실용을 정동영도 떠들었던 이유는 그렇습니다.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다 나한테 표 주세요. 우걱우걱’이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죠. 그러니 알맹이가 있을 리 있나. 대신 대통령 혹은 금배지와 같이 ‘권력자’가 되는 데에는 집중력을 발휘하네요.
 


예측컨대 앞으로 정동영이 컨텐츠를 채우지 않는 이상 정동영의 봄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컨텐츠 없는 이명박도 가카가 됐는데 나라고 못 될쏘냐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다르거든요. 한나라당이야 공허한 컨텐츠를 포장할 포장지와 데코레이션이 여기저기 널려있지만 민주당은 있는 컨텐츠도 빨간 칠 당하잖아요. 그러니 민주당에서 정치 계속하려면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하기보다는 컨텐츠 개발해야 해요.

또 하나. 한국 정치, 엄청나게 드라마틱합니다. 유시민 보세요. 지금 드라마 제작하고 있잖아요. 시나리오도 괜찮고 연기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정동영은 드라마가 없어요. 양지만 좇았으니 드라마가 있을 리 없죠. 어쩌면 지금이 부족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너무 커다란 요구같지만 말이죠.

”]

민주당은 그래서 전주 덕진을에 전략공천 방침을 정했습니다. 정동영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인데 상향식 공천을 포기하고 전략공천을 하는 것은 당원과 지지자를 배반하는 일이라는 비판이 있네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동안 민주당이 얼마나 철저히 상향식 공천을 지켜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진공 철구






21세기에 부활한 레슬러라는 이름의 슈퍼히어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더 레슬러>에 대해서는 많은 좋은 글이 있지만 한 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어 첨언할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들었던 의문인데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왜 <더 레슬러>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냐 하는 점이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파이>(1998)와 <레퀴엠>(2000)을 비롯하여 <천년을 흐르는 사랑>(2006)에 이르기까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가장 현대적인 소재를 기교에 매몰되지 않는 스타일리쉬한 영상으로 연출해 첨단영화의 선두에 섰던 감독이었다. 그런데 <더 레슬러>는 그런 감독의 취향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영화로 보인다. 한물간 레슬러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구닥다리 소재에, 80년대 향수에 기댄 스타일, 결정적으로! 가슴과 눈물에 호소하는 휴먼드라마라니. 벤자민 버튼처럼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시간은 거꾸로 가기 시작한 건가.

잘 알려졌듯, 아로노프스키에게는 <레퀴엠>과 <천년을 흐르는 사랑> 사이 무려 6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배트맨 이어 원>과 <왓치맨> 연출권을 따내려고 무진장 용을 썼는데 각각의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잭 스나이더에게 돌아가며 그는 장기간 슬럼프에 빠졌더랬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만든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흥행에서 재앙을 맞이했고 절치부심하며 선택한 영화가 바로 <더 레슬러>다. 그런 과정 때문일까, 개인적으로는 그가 히어로 영화에 대한 욕망을 <더 레슬러>를 통해 대리만족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것도 ‘예수’라는 텍스트를 빗대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로노프스키는 극중 인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입을 빌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를 언급하며 레슬러 랜디(미키 루크)를 현대판 예수에 빗댄다. 예수가 유대인에게 모함당해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 병사에게 수난 당하는 순간의 자기희생적 면모가 링 안에서의 처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연출과 연기가 필요한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상 관중을 자극하기 위해 자해에 가까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랜디의 이름 램(ram)이 희생양을 뜻하는 양(lamb)과 발음이 흡사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면도날로 이마를 그어 피를 내거나 온 몸에 스테이플을 박아 넣는 등 몸을 학대해 관중의 환호성을 불러내는 순간의 이미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의 고난 장면과 닮았다.

다만 예수의 희생이 쇼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듯 랜디를 링 위에 서게 만드는 현실 역시 쇼가 아니다. 1980년대 한 때 미국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그의 삶은 녹록치 않다. 집세를 내지 못해 차에서 잠을 청하고 외로움을 참지 못해 찾아간 딸은 문전박대하기 일쑤다. (유일하게 랜디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캐시디인데 직업이 스트리퍼라는 사실에 비춰 막달아 마리아와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 그래서 랜디가 탈출구로 삼는 공간은, 쇼로 이뤄진 허구의 세계이지만 챔피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랜디에게서 슈퍼히어로의 면모를 본다. 평상시엔 어수룩한 신문기자이지만 지구가 위험에 빠지면 빨간 망토를 휘두르는 슈퍼맨처럼, 현실에선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에 변변한 일거리도 얻지 못하는 백수신세지만 더 큰 책임감을 위해 거미줄을 쏘아대는 스파이더맨처럼, 랜디 역시 링 밖에선 보잘 것 없는 루저에 불과하지만 자신을 통제하고 무대를 휘어잡을 수 있는 링 위에서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며 존재의미를 찾는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WWE’로 상징되는 프로레슬링이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소재인 만큼 레슬러 랜디는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라캉은 욕망이론에서 인간의 존재는 결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결핍을 메우려는 인간의 욕망은 환영을 쫓는다고 보았다. 미국에서 슈퍼히어로가 나오게 된 배경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슈퍼히어로의 출현 자체가 힘의 결핍을 담보하는데 미국은 그 대상에 욕망을 투사한다. 슈퍼히어로가 미국의 힘에 대한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들의 욕망이 9.11을 통해 산산조각 났다는 것. 바로 이때부터 할리우드는 예수를 소환해(?) 슈퍼히어로 장르에 환영을 덧씌운다. 9.11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경찰국가로 군림하고 싶은 욕망은 힘의 부활이라는 예수 재림의 상징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브라이언 싱어의 <수퍼맨 리턴즈>(2006) 이 영화에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활약했던 수퍼맨은 21세기에 부활한 예수가 된다. (극중에서 수퍼맨은 렉스 루터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시 살아난다!)

<더 레슬러> 역시 수퍼맨 텍스트와 궤를 함께 한다. 프로레슬링과 헤비메탈, 즉 하드 바디의 시대였던 1980년대는 랜디의 전성기였다. 빨간 망토를 두르지 않았지만 쫄쫄이 유니폼을 입고 링 위를 날아다니며 아랍의 기수 아야톨라(어네스트 밀러)를 무찌른 그는 미국 대중이 열광하는 프로레슬링계의 수퍼맨이었다. 코믹스의 수퍼맨이 부활했으니 랜디 역시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흥미롭게도 랜디의 주무기는 일명 ‘랜디 럼’ 두 팔을 벌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상대방을 가격하는 기술이다. 흡사 십자가에 몸을 매단 듯한 이 동작은 부활 모티브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랜디 럼을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랜디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미를 장식한다. 그것은 1980년대 스타 랜디가 2008년 다시금 히어로의 위치에 올라서는 영광의 순간이자 동시에 <레퀴엠>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이력이 부활하는 도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이 영화로 2008년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더 레슬러>는 이야기만 봐서는 구식의 스포츠 영화지만 이면에 깔린 의미를 이해하면 굉장히 현대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선택할만한 소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배트맨>과 <왓치맨>에 대한 아쉬움을 <더 레슬러>를 통해 달랜 아로노프스키는 차기작으로 <로보캅> 리메이크를 선택했다. <로보캅> 또한 예수 부활 코드가 포함된 작품인데 <더 레슬러>로 예열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번만큼은 정통 슈퍼히어로물로 제대로 다룰 생각인가 보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