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원작의 무게에 눌려 범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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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의 제작과 홍보에는 원작의 유명세가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발목을 잡힐 수 밖에 없는, 즉 ‘문학 작품을 영화화’할 때 빠질 수 밖에 없는 흔한 딜레마를 반복합니다. 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도 그 중간 과정에서 인물들의 사고와 감정의 변화를 통해 충분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인지되는 내용들을 우선시하면서 적당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장르(그게 아니라면 충분한 감정적 이입이라도 필요하죠)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때문에 영화가 원작 소설 만큼 성공적이거나 그 이상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적지 않은 각색을 필요로 합니다. 때로는 에피소드의 생략과 추가, 주요 등장인물의 비중이나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하고 심지어 결말을 바꿔버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죠. 그렇게 과감한 각색을 했음에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작품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 또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원작은 캐스팅과 펀딩을 용이하게 해줍니다. 일단 판권 계약에 성공하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배우와 감독들은 생판 모르는 작가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들이 뛰어다니는 경우에 비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정작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돌입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과 영화 장르 간의 ‘화법 상의 괴리’ 때문에 연출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존 그리샴 등과 같이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는 대중 소설류는 상관 없겠지요) 원작을 그대로 따르자니 영화로 만들어져 보여졌을 때 아무래도 허전한 감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과감하게 뜯어고치자니 원작을 이미 읽은 관객들로부터의 맹비난이 두려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쪽입니다. 원작이 죽어야 영화가 산다고나 할까요. 원작과 조목조목 비교하며 ‘문학계의 걸작을 영화가 망쳤다’는 비난을 감수하며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는 더 많은 관객들을 위해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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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 좀 더 충실하기로 하는 길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다면?’이라는 간단한 아이디어와 거기에서 시작된 상상력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는 작품입니다. 문학에서는 이런 간단한 아이디어도 훌륭한 작품으로 발전될 수 있는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의 발생 원인과 인과관계 따위에 대한 좀 더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지극히 아름답고 긍정적인 결말은 이런 영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문학 작품과 달리 2시간 분량의 영화는 ‘결말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16부작 TV 미니시리즈라면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성공적인 영화라고 한다면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을 때에도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되어 ‘원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리하여 영화가 미처 다뤄주지 못한 디테일이나 원작과 다른 부분들을 발견하고 싶다’는 욕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걸작들의 반열에는 오르기 힘든 또 한번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한 돈 맥켈러(영화 초반에 차를 훔치다가 자신도 눈이 멀게 되는 인물로 직접 출연도 했더군요)의 각색을 기초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눈 앞에 하얗게 되는 현상과 그 감정적인 상태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역량을 집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극악의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 공동체의 광기와 절망, 그리고 희망을 남미 특유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언제나처럼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줄리엣 무어와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고 이제는 그다지 스펙타클한 광경도 아닌 것이 되었지만 ‘폐허가 된 대도시의 풍경’들 역시 충분한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역시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플롯으로 승부하는 ‘2시간의 문법과 미학’의 장르라는 생각을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관객들을 사로잡는 고유의 방법론에서 실패하고 있는 영화가 뒤늦게 나레이션 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등의 노력은 그저 안타깝게만 보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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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빅 리버 (Big River, 2005) “오다기리 죠 끼워팔기”


처음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 ‘오다기리 죠가 좀 팔리니까 끼워팔기 식으로 아무거나 들이미는구나’ 싶었다. 더군다나 미모와 성실함 외에는 배우로서 그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오다기리 죠의 영화라니, 오히려 더이상 보고 싶지가 않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소망은 한결 같아서, 이내 <빅 리버>를 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때 같은 주말 개봉작 중에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되는 건 정말 이거 하나 밖에는 없는 상황이었으니.

저예산 영화라고 해서 면죄부가 발급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게 유료 관객의 입장이다. <빅 리버>는 창의성이 결여된 기존 독립영화들의 답습이자 유사 예술영화다. 더군다나 길에서 우연히 만난 금발 백인 미녀와의 낯간지러운 사랑의 줄다리기라니.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의 팬터지는 충족되었을지 몰라도 관객들은 영화과 학생 졸업작품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실소를 연발해야만 한다. “모르겠다가 무슨 뜻이야”에 “내가 싫어진거지”라니, 제니퍼 제이슨 리나 쥴리엣 루이스 같은 배우로 설득력을 발휘하거나, 예를 들어 <메종 드 히미코>와 같이 전혀 다른 방식의 긴장 관계로 엮어나갔어야 했다. 중간에 <데드 맨> 오마쥬를 끼워넣는다고 해서 짐 자무쉬의 영화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빅 리버>와 <러브 토크>와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공통점은? 작가가 “저 여기서 유학했어요~”라고 자랑하는 영화들이다. 만듬새의 기본기는 <러브 토크>가 그나마 낫다. <빅 리버>는 영화 자체 보다 이런 영화를 베를린과 부산에 출품할 수 있었던 제작자들의 능력이 좀 더 놀랍게 느껴지는 영화다. 그러나 <클림트>를 보면서 존 말코비치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듯이 오다기리 죠가 출연한 100분짜리 영상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빅 리버>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진공 신어지

나도 레즈물이 보고 싶다!!!



쪽팔린 고백부터 해보자.
끓어넘치는 피를 감당하기 힘든 시절, 솔까말 나도 야동 엄청나게 봤다.  하루라도 안 보면 사타구니에 진정제를 맞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 야동은 나에게 단순한 욕구충족 + 대리만족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상황에서 필요 이상의 흥분을 해 버리는(버스에서 살짝 여성과 몸이 스친 것만으로도 발기가 된다든지 하는) 나의 왕성한 성욕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화성의 수분만큼은 있었다(…라고 변명한다.) 물론… 므흣한 목적이 화성의 수분을 제외한 다른 것들만큼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보는 야동의 장르는(-_-;;)다름아닌 레즈물이었다. 그렇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여성끼리의 성행위를 주로 다루는 레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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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도 싫어하진 않는다

호오… 사진 참으로 므흣하다.. 흠흠.

암튼, 당시 내가 위와 같은 이쁜 녀성들이 사랑을 나누는 레즈무비들을 즐겨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르노라는 장르적 특성상 최소한 두 사람이 홀랑 벗은 상태에서 영화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털이 수북한 남자 배우의 몸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것이 좀,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들이 천사같은 여성들의 몸을 유린하는 내용이 많은 메이드 인 저팬 필름들은 지금도 보기가 많이 괴롭다…그건 고문이지..) 물론 금기를 깨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보다 보면 여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금기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버리기 때문에 … (도대체 얼마나 본 거냐…)

암튼, 누구에게도 대 놓고 “제 이름은 없다구요. 취미생활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야동을 보는 것이구요. 그 중에서도 레즈물을 좋아라 합니다. 회사는 SOD를….”이라는 식으로 나의 이런 취향을 말함으로서 사회적 매장을 초래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내가 위와 같은 영상물을 보는 것을 즐기고, 므흣해하고, 심지어는 모으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죄라거나,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불법 공유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죄가 맞지만 …(지금도 모으냐구요 …? 슬프지만 지금 저는 그때처럼 펄떡펄떡하지는 않는군요. 그래도 가끔은 봅니다. 추석맞이 행사 정도로.)

나를 즐겁게 하는 행위가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머리가 미쳐 돌아가 길거리에서 손잡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을 죄다 레즈비언으로 본다거나 하는 식의 행동을 한 적도 없으니까. 이 대목에서 다시한번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고 싶어지지만 … 일단 본론으로 돌아가자.

올해들어 유난히 남성 동성애, 그러니까 게이에 관한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미 개봉해서 여성관객 점유율 86%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한 [앤티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 [쌍화점]등 스크린을 채우는 영화들과 10월에 막을 내린 [쓰릴 미]와 같은 뮤지컬도 그렇다.
[바람의 화원]이나 [커피프린스]처럼 남장여자와 남자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들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동성애 코드가 이미 일반 대중에게 별 거부감없이 먹혀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단편적으로나마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왜 남성 동성애 뿐인지.

세상은 넓고, 동성애자들은 많고, 그 중에 절반은 여성 동성애자일텐데. 왜 남성 동성애만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환영받는지에 대해선 참으로 궁금하다.


만드는 쪽에선 이 질문에 대해 이미 준비된 대답이 있을 듯하다.
“돈이 되니까 그렇지.”

[앤티크]를 보러 온 수많은 여성관객들이 전부 동성애자로서 동성간의 사랑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얻었다거나, 동성애자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현상을 직접 만들어냄으로써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인권 발현에의 참여의지를 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재미”와 “흥미”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만족을 느꼈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도 이미 대답은 나와 있는 듯 하다. 주변에서 [앤티크]를 보았다는 여성분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보라. 대충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꽃미남에 몸 좋은 애들이 넷이나 나오니까.”

아 물론, 좋은 원작이 있고 좋은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거기에 때마침 꽃돌이 네명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이야기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잘생긴 남자들이 넷이나 나와서 지들끼리 알콩달콩 사랑도 하고, 사랑하다보니 뽀뽀도 하고, 지켜보는것이 므흣해서, 그래서 극장을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흠이 될까? 매력적인 이성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감상의 목적이 된다 한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앤티크]는 본격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다. 가볍게 거부감이 없는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가벼운 동성애는 여성으로 하여금 여러 부분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된다. “꽃미남”이라는 거부하기 힘든 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누구도 이것을 남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남자끼리 키스하는 것을 보면 거북해지는 남자인 나 또한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남성들이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휘바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여성들을 변태로 몰아붙이거나 야유를 날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나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레즈물을 보았지만, 난 전혀 변태가 아니니까.

그렇담 꾸물꾸물 솟아나는 생각. 나도 욕망을 충족시켜보고 싶다. 코딱지만한 컴퓨터 화면에서 이름도 모르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포르노는 더 보고싶지 않다. 나도 당당하게 극장에서 김혜수와 손예진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생각만으로도 환상적이다…흠냐…) 레즈영화를 보고 싶다. 여성 동성애에 대한 깊은 고찰이나 고민을 함께할 능력은 안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의사는 있다.(그리고 DVD한정판을 사기위해 교보문고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새치기 하는 녀석이 있으면 허리를 반대로 접어버릴 용의도 있다.)

그러니까 좀, 만들어 줘!! 나도 당당하게 레즈영화 보고 싶단 말이다!!!

영진공 거의없다

[시] 오렌지, 껍질


오렌지, 껍질

오렌지를 사랑했어요

오렌지를먹을때껍질째먹는사람있나요오렌지를먹고싶으면단단한껍질을벗겨야하죠껍질도벗기지않고핥아보니맛없다고투덜거리면누구도이해하지않을거예요오렌지를날로삼키려든다는핀잔이나듣겠죠껍질이아무리두터워까다로워도손톱을꾹눌러박아벗기는수고를해야,

오렌지를 먹을 수 있는데

오렌지를만날때마다그짓을되풀이해야했던거예요이전에깐건아무소용없었죠까놓고돌아서면껍질은그새또고스란히재생되어있었어요발끈해도소용없는건껍질이있어야오렌지니까껍질을벗겨야오렌지니까연약한속살과향긋한내음을지켜주는껍질은어쩌면오렌지의모든것,

오렌지를, 그, 껍질까지, 사랑해야 했는데

오렌지를난자꾸벗기기만했어요넷으로다섯으로나누어손가는대로갈기갈기벗겼어요벗긴껍질은주저않고버렸죠그래도되냐고오렌지에게물어본적도없죠날욕해도상관없지만오렌지탓도있어요한번도말리지않았으니깐아무렇지않은듯다시단단한껍질을척두르고나왔으니깐,

오렌지를, 뼛속까지 오렌지가 아니라 껍질까지 오렌지였던 오렌지를, 그

오렌지를.

영진공 도대체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는 지금의 한국과 싱크로율이 99.9%



경제학자가 쓴데다가 제목이 “미래를 말하다”여서 경제 관련 내용일 줄 알았건만 오히려 미국 정치 분석에 가깝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의 연구는 이 책의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다.)

크루그먼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중산층과 서민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 세금 감면과 복지 혜택 축소를 주장하는 공화당. 그들은 왜 매번 선거에서 이기는가?”  여기서 공화당을 한나라당으로 대체하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싱크로율 99.9%다.

이 의문에 답을 제시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대공황 이전 시절부터 얘기를 시작한다.

대공황 시절 이전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심각했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뉴딜을 실시한 이후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레이건 출현 이후부터 소득 불균형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현재는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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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시절의 미국

뉴딜정책 이후 소득의 재분배가 골고루 이어지는 중산층의 황금기이자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왔었다는 얘긴데, 그 이유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적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연합이 그랬고 과도기적 대통령인 공화당 닉슨조차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책에서 좌우 스펙트럼이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전국민 의료보험은 후에 클린턴이 관철시키고자 했으나 당시 공화당 하원의장인 깅리치에 의해 좌절된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이만큼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두 정당의 노선 차이가 벌어진 이유는 70년대 들어서면서 공화당이 다시 세금감면과 복지 축소와 자유 시장을 내세우며 극우화됐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그 이유를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도 우리와 싱크로율 99.9%다. 우리도 있다. 뉴라이트.

이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은 사실 민주주의자들인지도 의심스럽다는 게 크루그먼의 얘기다. 그들은 프랑코 정권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또한 그들은 정부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과 세금 감면을 원하는 기업의 든든한 후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또한 공화당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그러니까 공화당 당대회에서 “정교일치를 하면 왜 안되느냐”고 연설하는 자들의 지지까지 얻는다. 이 역시 우리와 싱크로율이 높다.

게다가 미국은 원초적인 인종 문제가 결부돼 있다. 복지 혜택을 늘렸을 때 그 이득이 유색인종에게 돌아가는 것을 질색하는 남부 여러 주의 인종적 혐오를 공화당은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또한 우리와 싱크한다. 우리도 있다. ‘흑인’ 대신 ‘빨갱이’. 민주당이 싫은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북한에 퍼주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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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뉴라이트라 할 수 있는 "Compassionate Conservatism(인정 많은 보수)"를 비꼰 카툰 - 뉴올리언즈의 재해복구에는 예산배정을 안 하고 이스라엘의 군비지원에는 3백억달러를 책정했다는 내용.

이들의 지지를 얻은 골드워터는 하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똑같이 이들의 지지를 받는 레이건은 정권 획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레이건이 이같은 ‘새로운 보수주의의 정서’를 포장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레이건은 유세 중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복지 혜택만으로 여왕처럼 사는 어떤 여성, 그것도 유색 인종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어떤 여성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세금을 악용하는 것에 반감을 갖게 만드고, 더불어 높은 세금과 큰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레이건이 약속하는 세금 감면과 작은 정부에 동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주의 어떤 여성이 ‘복지의 여왕’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복지의 여왕’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레이건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이런 언어는 이명박 대통령도 사용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톨게이트. 대체 어떤 톨게이트가 하루 200대가 통과하는데 직원이 20명인지 정부조차 찾지 못했다. 그도 그저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데 존재하지 않는 톨게이트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명박의 출현은 레이건의 출현과 비견된다. 그는 뉴라이트의 지지를 받았고 세금 감면과 민영화를 통한 작은 정부, 자유 시장을 내걸고 있으며 기독교 장로이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아직도 ‘빨갱이’를 대신해 ‘좌파’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좌파’라는 단어는 ‘좌파 정책’, ‘좌파 코드’와 같이 대상이 굉장히 모호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성적인 단어가 아니라 감성적인 단어라는 증명이고, 논리가 아닌 감정에 불과하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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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을 벤치마킹했음이 분명하다. 레이건처럼 이명박이 집권했으니 그들은 장기 집권을 꿈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노령화로 자신들의 지지층이 많아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어린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이다. 그들에게 투표권이 생기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쳐야 한다. 무엇을? 교과서를.

역사 교과서 개정 논란은 그래서 나오는 것일 게다.

젊은 대학생들도 문제다.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대학 공화당 연합회를 조직했듯이 뉴라이트 또한 대학 학생회를 조직해 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방송. 아마도 방송, 그것도 예능/오락 쪽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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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뉴라이트의 시각

레이건이 집권한 게 1980년. 거의 30년이 지나서야 미국은 오바마를 당선시키며 레이거노믹스를 걷어치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야 이명박을 갖게 됐다. 이것을 걷어치우려면 우리에게도 30년이 필요한 것일까?

끝으로 폴 크루그먼은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때 한 가지 커다란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들이 공화당에게 속았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은 어떻게 해서 유권자들을 속일 수 있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좀 더 원초적인 의문을 가져보자. 유권자는 왜 속을까?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내놓을 뿐 아니라, 국정원을 과거 안기부로 되돌리려고 하고, 언론장악을 획책하고, 검찰과 감사원 심지어 ‘헌재까지 접촉’하고 다니는 정권에게 왜 속으며, 아직도 모든 당 중에 압도적 1등으로 왜 지지할까?

김근태 씨야 정치인이니까 이 말 해놓고 무지 욕먹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같다.
국민이 노망났다. 그것도 단단히 노망났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