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리처”, 행동하는 보수의 표상

 

 


 


 



 


 


포스터 카피 보소.


‘법은 한계가 있다. 그에게는 (한계가) 없다.’


이런 Fox TV 잭 바우어 같으니라고 … 모든 히어로 ‘잭’은 다 이런가 싶기도 하다.


 


이번 대선에 표창원 전 교수께서 상당한 ‘히트’를 치시고, 그 뒤로도 계속 인기(?)를 지속중이신데, ‘참다운 보수’가 무엇인지 표방하는 모습이 참 좋아보인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고수하려는 참다운 보수를 보기 어려운 것일까?


 


어릴 때 나는 마치 홈쇼핑 운동기구 광고에 나오는 듯한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배웠다. ‘불의를 못 참으십니까? 정의를 위해 한 몸 불사르실 겁니까? 여러분에게 판검사 또는 경찰을 추천합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사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 ‘돈’ 많이 번다고 의사를 자식에게 강권하는 현재의 아비, 어미들 말이다.


 


뭐 사실 언론에 연일 보도되는 것들을 보면 그게 그리 틀린 얘기도 아니다, 헌재소장 후보자랍시고 나온 인물이 권력을 얼마나 남용해댔으면 그렇게 돈파리가 꼬이는지, 언제부터 명예가 타락과 동의어인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어린 내게 가르쳐준 세상의 숭고한 가치들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법’이 가진 제한.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법이란 게 잘못 되었는데도 그걸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이건 진보가 아니라 건전한 ‘보수주의자’가 해야될 가치덕목인데도 말이다.


 


잭 리처는 군 수사관 출신의 ‘자유주의자’다.


법적으로 제재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고 있다. 운전면허증, 거주지 등록 등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보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련다. 자신이 가진 ‘정의’의 원칙에 따라 합리적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군인’은 보수와 닿아 있을수밖에 없다. 애국과 명예, 정의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the well-trained soldier 는 그런 사람들이다. 잘못된 명령에 항거하고, 비도덕적인 전술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우리는 가스통을 들고 협박을 일삼는 불한당 같은 퇴역군인들이 판치는 나라에 살고있다. 허나 어쩌겠는가 … ‘비정상적’인 보수 세력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이 영화의 Best Shot 을 꼽자면 이 장면을 들고 싶다.


정의로운 보수의 결집이라고나 할까? 해병대 출신 저격수와 한 세대 아래의 육군 출신 미끼. 특히 로버트 듀발이 한 쪽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야간 저격 훈련을 해본 사람이면 익히 아시리라.


 


요약하자면,


정의를 위해 법이 무시되는 것도 웃기지만,


법이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더 무섭다.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1. 톰 크루즈 마니아
2. 무기 전문가
3. 미 육군과 미 해군(해병대)의 기싸움 좋아하는 사람


 


그나저나 톰 크루즈 영화 중에 기억나는 것들은 대부분이 군영화 뿐이다.


7월 4일생, 탑건, 어퓨굿맨 ……


 


 


 


영진공 함장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는 지금의 한국과 싱크로율이 99.9%



경제학자가 쓴데다가 제목이 “미래를 말하다”여서 경제 관련 내용일 줄 알았건만 오히려 미국 정치 분석에 가깝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의 연구는 이 책의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다.)

크루그먼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중산층과 서민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 세금 감면과 복지 혜택 축소를 주장하는 공화당. 그들은 왜 매번 선거에서 이기는가?”  여기서 공화당을 한나라당으로 대체하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싱크로율 99.9%다.

이 의문에 답을 제시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대공황 이전 시절부터 얘기를 시작한다.

대공황 시절 이전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심각했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뉴딜을 실시한 이후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레이건 출현 이후부터 소득 불균형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현재는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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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시절의 미국

뉴딜정책 이후 소득의 재분배가 골고루 이어지는 중산층의 황금기이자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왔었다는 얘긴데, 그 이유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적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연합이 그랬고 과도기적 대통령인 공화당 닉슨조차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책에서 좌우 스펙트럼이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전국민 의료보험은 후에 클린턴이 관철시키고자 했으나 당시 공화당 하원의장인 깅리치에 의해 좌절된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이만큼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두 정당의 노선 차이가 벌어진 이유는 70년대 들어서면서 공화당이 다시 세금감면과 복지 축소와 자유 시장을 내세우며 극우화됐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그 이유를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도 우리와 싱크로율 99.9%다. 우리도 있다. 뉴라이트.

이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은 사실 민주주의자들인지도 의심스럽다는 게 크루그먼의 얘기다. 그들은 프랑코 정권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또한 그들은 정부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과 세금 감면을 원하는 기업의 든든한 후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또한 공화당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그러니까 공화당 당대회에서 “정교일치를 하면 왜 안되느냐”고 연설하는 자들의 지지까지 얻는다. 이 역시 우리와 싱크로율이 높다.

게다가 미국은 원초적인 인종 문제가 결부돼 있다. 복지 혜택을 늘렸을 때 그 이득이 유색인종에게 돌아가는 것을 질색하는 남부 여러 주의 인종적 혐오를 공화당은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또한 우리와 싱크한다. 우리도 있다. ‘흑인’ 대신 ‘빨갱이’. 민주당이 싫은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북한에 퍼주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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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뉴라이트라 할 수 있는 "Compassionate Conservatism(인정 많은 보수)"를 비꼰 카툰 - 뉴올리언즈의 재해복구에는 예산배정을 안 하고 이스라엘의 군비지원에는 3백억달러를 책정했다는 내용.

이들의 지지를 얻은 골드워터는 하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똑같이 이들의 지지를 받는 레이건은 정권 획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레이건이 이같은 ‘새로운 보수주의의 정서’를 포장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레이건은 유세 중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복지 혜택만으로 여왕처럼 사는 어떤 여성, 그것도 유색 인종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어떤 여성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세금을 악용하는 것에 반감을 갖게 만드고, 더불어 높은 세금과 큰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레이건이 약속하는 세금 감면과 작은 정부에 동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주의 어떤 여성이 ‘복지의 여왕’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복지의 여왕’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레이건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이런 언어는 이명박 대통령도 사용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톨게이트. 대체 어떤 톨게이트가 하루 200대가 통과하는데 직원이 20명인지 정부조차 찾지 못했다. 그도 그저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데 존재하지 않는 톨게이트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명박의 출현은 레이건의 출현과 비견된다. 그는 뉴라이트의 지지를 받았고 세금 감면과 민영화를 통한 작은 정부, 자유 시장을 내걸고 있으며 기독교 장로이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아직도 ‘빨갱이’를 대신해 ‘좌파’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좌파’라는 단어는 ‘좌파 정책’, ‘좌파 코드’와 같이 대상이 굉장히 모호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성적인 단어가 아니라 감성적인 단어라는 증명이고, 논리가 아닌 감정에 불과하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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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을 벤치마킹했음이 분명하다. 레이건처럼 이명박이 집권했으니 그들은 장기 집권을 꿈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노령화로 자신들의 지지층이 많아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어린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이다. 그들에게 투표권이 생기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쳐야 한다. 무엇을? 교과서를.

역사 교과서 개정 논란은 그래서 나오는 것일 게다.

젊은 대학생들도 문제다.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대학 공화당 연합회를 조직했듯이 뉴라이트 또한 대학 학생회를 조직해 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방송. 아마도 방송, 그것도 예능/오락 쪽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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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뉴라이트의 시각

레이건이 집권한 게 1980년. 거의 30년이 지나서야 미국은 오바마를 당선시키며 레이거노믹스를 걷어치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야 이명박을 갖게 됐다. 이것을 걷어치우려면 우리에게도 30년이 필요한 것일까?

끝으로 폴 크루그먼은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때 한 가지 커다란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들이 공화당에게 속았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은 어떻게 해서 유권자들을 속일 수 있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좀 더 원초적인 의문을 가져보자. 유권자는 왜 속을까?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내놓을 뿐 아니라, 국정원을 과거 안기부로 되돌리려고 하고, 언론장악을 획책하고, 검찰과 감사원 심지어 ‘헌재까지 접촉’하고 다니는 정권에게 왜 속으며, 아직도 모든 당 중에 압도적 1등으로 왜 지지할까?

김근태 씨야 정치인이니까 이 말 해놓고 무지 욕먹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같다.
국민이 노망났다. 그것도 단단히 노망났다.


영진공 철구

다크나이트 =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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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크나이트>에 대해 특별히 더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향한 수많은 칭찬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죠. 특히 이 영화에서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만화 속의 인물을 “실사화” 한다는 말의 의미를 한 수준 높여놓았습니다. 앞으로 만화원작 영화 주인공을 맡는 배우들, 모두 고민 좀 할 겁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히스 레저가 조커로 이루어낸 것은 대단합니다.

여기서는 히스레저의 연기를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조커가 차지하는 의미를 한번 살펴볼 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조커가 지나친 능력자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렇죠. 조커는 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이 어떤 수를 내 놓을지 예측하고 거기에 한방 뒤통수를 때리는 멋진 수를 준비해놓습니다. 조커의 예상대로 되지 않은 일은 그 2척의 페리보트 건 정도에 불과하죠. 게다가 조커의 부하들조차 모두 대단해서 조커의 의도를 언제나 100% 실현합니다. 그러니 이거 비판할 만하지 않습니까?


리모콘이 잠깐 작동 안되기도 …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비록 <다크나이트>가 상당한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절대로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커만 실수가 없나요? 배트맨도 그렇죠. 아무리 돈과 첨단기술로 처발랐다고 해도 매일같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데 무고한 희생자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혼자서 뛰 댕기다가 한번이라도 범죄자나 경찰들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비덴트는 또 어떻습니까? 얼굴반쪽이 그 꼴이 되어서도 돌아다닌다는 건 말이 되나요? 그렇게 피부가 없으면 금새 감염되어 골로 갈텐데 말이죠. 이 영화가 사실적이라는 건 이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 각각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일 뿐입니다. 이 영화도 역시 수퍼히어로물 맞습니다.

이 영화에는 애초부터 실수란 없어요. 즉 영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의외성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누군가의 의도와 계획이 깔려 있어요. 원래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이야기는 그게 현실이든 영화든 재미가 없기 마련입니다. 의외성이 없으면 긴장도 없고, 긴장이 없으면 재미도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와 긴장으로 가득하죠. 도대체 어떻게? 한 캐릭터가 의외성의 역할을 해주고 있거든요. 그게 바로 조커입니다.


그래, 바로 나!!!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의 조커야 말로 진정 ‘조커’의 존재의미에 충실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커는 애초부터 의외성의 화신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의외성은 트럼프 게임에서 조커 카드가 맡은 역할이기도 하죠. 조커 카드가 등장하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트럼프 게임의 규칙이 일시적으로 뒤흔들립니다. 즉 조커로 인해 게임의 규칙에 의외성이 추가되는거죠. 게다가 이 의외성은 재미와도 직결됩니다. 어떤 이야기가 관객의 기대대로만 흘러갈 때 그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관객의 기대와는 다른 의외의 결말일 때 관객들은 놀라고 비로소 재미를 느낄 준비가 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게 조커죠. 그렇게 보면 이 영화의 조커는 <마스크>의 짐캐리가 맡은 역할과 결국 같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마스크>에서 악당들에게 마스크를 쓴 짐캐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자기들이 공들여 준비한 은행털이를 순식간에 파토 내버리고, 총을 아무리 쏴도 안 죽는 괴물 아닙니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마스크>에서는 악당이 당하니까 관객들은 편하게 웃으며 그걸 즐겼지만,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관객들이 감정이입해놓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대상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기지 못하고 관객들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내가 바로 조커라고 …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일은, 이 영화속 세계관이 현실과는 엄청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일이 누군가의 계획이나 의도로 이루어지는 이 영화에서는 덕분에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전부 조커 탓이 되어버립니다. 네, 이 영화에서는 이게 다 조커 때문입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배트맨은 마침내 범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애꿎은 희생자들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하비덴트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커만 없었더라면 배트맨은 정의의 수호자로 계속 남아있었을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닙니까?

누군가 그러더군요. 순수한 사람들을 좌파 빨갱이들이 오염시킨다고요. 원래 촛불집회는 순수했을지 모르지만 그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좌파 탓에 결국 과격해졌다고요. 지금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것도 결국 10년간 곳곳에 뿌리내린 좌파들 탓이고 말이죠.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이 좌파 탓”이라는 주장.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며칠 전에는 심지어 5개 공중파 방송국이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을 방송 하던데,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 나라가 정말 빨갱이 나라인 줄 알았을 겁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다크나이트>의 세계관과 딱 맞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조커는 바로 좌파이고 빨갱이들입니다.

이 세계관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세계관은 현실을 왜곡하고 원인과 결과를 착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배트맨이 진정한 현실세계에서 비슷한 짓을 했다면, 조커가 없었더라도 결국 사고를 쳤을 겁니다. 그 무식한 텀블러로 길거리를 폭주하거나, 심지어는 기관포로 주차된 차들을 박살내며 달리는데 사람이 안 다칠 수 있겠어요? 하비덴트도 그래요. 아무리 청렴 강직한 검사도 고담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권력에 심취하다 보면 언젠가는 타락했을 겁니다. 현실의 ‘모래시계 검사’가 그런 것 처럼요. 꽤나 경력을 쌓은 형사라도 병원에 입원한 자기 어머니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복지시스템 밖에 없는 동네라면 경찰이 타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조직이라는 게 그렇게 발본색원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죠. 팔코니 조직을 죽이면 다른 조직이 등장했겠죠. 결국 배트맨의 전쟁은 끝없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배트맨은 민폐를 끼치다가 공적이 되는 건 거의 당연한 수순이겠죠. 다시 말해 의외성은 조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자체의 특성이라고요. 즉, 현실에서는 이 세상 그 자체가 바로 조커입니다.


미안해, 하비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세계관을 믿는 자들에게는 공포와 억압에의 욕구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다크나이트>의 세상에서는 배트맨은 바로 자기 곁에 있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경찰청장(청수?), 자기 형제와도 같은 집사(똥과니? 아니면 상드기?), 그리고 경제와 기술 시스템을 담당하는 또 다른 집사(만수? 이거 써놓고 보니 정말 비슷하다는…) 이렇게 믿을 놈이 적다 보니 배트맨의 일들은 애초에 밀실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지요. 게다가 요소요소에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어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연히 가능하다면 모든 인사는 낙하산 시스템이 되겠죠. 배트맨은 시민을 위해 노력하지만 절대 고독에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민들 속에 바로 그가 싸워야 하는 조커의 하수인들이 암약하고 있거든요. 온순한 시민들은 믿어도 됩니다. 하지만 그 시민이 나에게 반항하는 순간, 배트맨은 의심에 빠집니다. 저 인간이 진정 자기의지로 나를 공격하는 거냐, 아니면 조커의 부하라 나를 공격하는 거냐… 의심스러우면 일단 때려잡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시스템을 보호하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능하다면 모두의 뒷조사를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하고 사상검증까지 해야겠죠. 이러다 보면 ‘5호 담당제’ 같은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시스템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권력자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와 불신이 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마지막 선은 … 차마 .. 그을 수 없었다능 …

그나마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은 선을 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부르스 웨인 뿐만 아니라 그 동료들도 모두 원칙과 상식의 선이 뚜렷하기 때문에 서로를 규제하고 선을 지키죠. 하지만, 스크린 밖의 세상에서는 그런 이상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다크해지는 것이고요.


영진공 짱가

“다크 나이트”, 변두리 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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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람은 누구나 칭찬하고 저도 손가락 아프게 칭찬을 해서 더 덧붙일 게 없는 <다크나이트>, 그러나 이 영화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레이첼이 별로 예쁘지 않다’는 둥의 시비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약간 아슬아슬하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전편부터 좀 지나치게 사실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전체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의 괴상함이 갈수록 눈에 띄게 되지요.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지극히 만화적인 주인공 배트맨과 전혀 만화 같지 않은 상황설정 사이의 긴장이 흐릅니다. 지금까지는 놀란 감독의 놀란 연출력으로 그 부조화가 적절히 통제되어 왔지만 앞으로 영화가 사실적이 되면 될수록 배트맨은 더욱 더 이 세계에 안 어울리게 될 겁니다.

요즘 웹에서는 배트맨의 그 낮게 깔아대는 목소리를 풍자한 동영상이 인기던데, 이것도 그 어색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시려면 여기로 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88538620080812161322&skinNum=1)

이번 영화에서도 초반부 배트맨의 등장과 액션을 돌이켜보면 “도대체 쟤는 왜 사서 저런 고생을 한다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혼자서 그 잔챙이 마약범죄자들과 자경단까지 상대하면서 투닥거려야 할까요. 아무리 힘이 세고 무술을 잘 하고 돈과 기술로 처발랐을지라도 결국 개인에 불과한 배트맨이 그 넓디넓은 고담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잔챙이 악당들도 “고담에서 배트맨을 만날 확률은 로또 당첨확률 수준”이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웨인 군은 굴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을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해결하려고 매달리죠. 홍콩에서의 액션은 그 백미입니다. 웨인 군은 자신의 놀라운 헹글라이딩 기술 + 최첨단 EMP 공격기술 + 냉전시대에 CIA가 개발했던 ‘스카이후크’ 까지 써가며 마피아의 돈세탁 업자를 홍콩에서 납치해 옵니다. 멋지긴 합니다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죠. 그 스카이후크 수송기 복원 및 운용비용이라면 아마 고담시의 마피아 조직 한 두개를 사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부르스 웨인의 재력이라면 팔코니 조직 전체를 사 버릴 수도 있겠고, 사회보장제도와 인프라를 확충해서 그런 범죄자들의 이익을 빼앗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마피아를 잡아먹는 것이 도시의 정의 구현에는 오히려 훨씬 효과적이겠죠. 하지만 배트맨은 늘 일인 자경단으로 나서는 고생을 사서 합니다. 왜? 그래야 하니까…


원래 내가 좀 그래…

게다가 이 배트맨의 돈지랄은 마음이 가난한 악당 조커의 등장으로 더욱 더 그 삽질스러움을 노출하고 맙니다. 배트맨과 조커는 말 그대로 대척점에 있습니다. 배트맨에게는 지킬 것만 잔뜩 있는데, 조커는 바로 그것을 모두 파괴하려고 하죠. 배트맨이 믿음에 매달린다면 조커는 불신을 키우려 헌신합니다. 그리고 배트맨이 결국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하이테크 무기로 전쟁을 벌일 때, 조커는 돈을 불태우며 지극히 로우테크 무기로 달려듭니다.


자~알 놀고 계십니다 …

이 하이테크 돈지랄 vs 로우테크 막장정신 대결의 대표적인 장면이 호송차량을 둘러싼 액션이죠. 배트맨의 수천만 달러짜리 배트모빌 텀블러에 대결하기 위해 조커가 내놓은 무기는 자그마치 RPG입니다. 2차 대전 막판에 막장까지 몰린 독일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전차무기, ‘판저파우스트’에 크게 데었던 소련이 이걸 충실히 계승, 발전시켜 만든 로켓발사기죠. 막장무기의 후예답게 값도 싸고, 만들기도 쉽기 때문에 이 RPG는 베트남에서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의 거의 모든 전쟁터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고, 늘 기대이상의 활약을 했습니다. 멀리는 1970년대 4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괴멸시켰고, 근래 들어와서는 아프간에서 러시아 기갑부대를 괴롭혔고, 최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블랙호크 헬기를 2대나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지금도 이라크 전쟁터에서 미국과 영국이 자랑하는 신형전차 M1A2 나 챌린저2 들에게 뜻밖의 일격을 가하고 있죠.


제 3세계 게릴라들의 2대 필수요소, RPG와 AK47


이것이 나의 무기라능 …

바로 그 RPG7과 텀블러, 이 대결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최신형 복합장갑으로 무장한 전차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RPG7인데 경장갑 장갑차에 불과한 텀블러가 뭐 어쩌겠습니까. 물론 텀블러 쪽이 좀 더 적극적인 공격을 했다면 승부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배트맨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키는 쪽이고 조커는 공격하는 쪽이거든요.

변두리 산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플래툰이라는 잡지에서 읽은 건데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싸구려 구식 라이플이나 구식 권총도 최신식 소총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확실히 쓰러뜨릴 수 있다.”
아무리 구식이고 낡은 총이라도 발사만 될 수 있다면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 상대가 수백만원짜리 무기로 무장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총에 맞으면 누구나 죽거든요.
로우테크면 어떻습니까? 장갑차를 부실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데요.


작동 불량인 리모컨이라도 결국 폭탄 터트리면 되는 거 아니냐능 …

이 영화에서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은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변두리 산술 + 막장 정신으로 무장한 조커가 장비나 기술이나 정보력 모두 우위에 서 있는 배트맨을 계속 골탕 먹입니다. 조커는 더 이상 빼앗길 것도 망가질 것도 없는 존재이고 배트맨은 모든 것이 손실의 대상이거든요. 세상이 원래 그렇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빼앗길 것이 많아 약점이 늘어나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잃을 것도 없기에 오히려 약점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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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패라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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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테면 쳐봐!!!


참고로 이때 들고 나온 총은 S&W에서 만든 M76이라는 싸구려 기관총인듯 …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도 결국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배트맨처럼)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들이 (조커의 드럼통 폭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원격조종폭발물에 끊임없이 죽거나 불구가 되고 있습니다. 침략자를 죽이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은(오히려 그렇게 죽으면 저승에 가서 신이 내리는 큰 상을 얻는다고 믿는) 그들 앞에 미군은 약점투성이의 배트맨일 뿐입니다. 작금의 사태를 유발한 911 테러부터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 경악스런 테러를 실현하기 위해 테러범들에게 필요했던 장비는 커터칼 몇 자루 뿐이었죠. 나머지 테러 장비는 미국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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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와 원격조종급조폭발물에 당한 미군의 비싼 탱크와 장갑차들 …


이건 아무래도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럽의 그 선진적인 사회보장제도나 소수자를 배려한 정치제도가 완성된 시기가 대부분 우파 정부 시절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우파정부는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들이 왜 좌파 정부가 할 법한 일을 했을까요. 그게 바로 부자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약점이 늘어나고, 인생 막장에 몰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신들이 위험해지거든요. 그래서 부자들이,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겁니다.


니 랑보르기니나, 내가 탈취해 타는 경찰차나 산쾌하기는 마찬가지고 …
속은 내가 더 편하다능 …


영진공 짱가

추신: 요즘 꼴을 보아하니 우리나라 부자들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더군요.
자기들이 먼저 막장테크를 타거나 아예 우리나라를 떠버리는 쪽을 선택하데요.
참 잘 하는 짓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커 패러디 광고 … 근데 나는 버거킹이 더 좋다능 …

광복 63주년 그리고 KBS

[편집자 註]
2008년 8월 15일은 광복 63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현재 국민으로부터 5년간 권력을 위임받은 이와 그 주변을 맴도는 세력들은 굳이 이날을 “건국일”이라 주장하며 광복의 의미를 가리려 애쓰고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일”이 아니다.  이 날은 1919년 건국 이후 임시로 존재하였던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날이며 동시에 이승만 행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그리고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광복절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잘 살아있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치며 오히려 경제를 죽이고있는 그들은 이미 세워져있던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강변을 하고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걸 그들은 실용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용이 아니라 궤변이고 완장질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터져나온 KBS 사태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광복 63주년을 맞아 <영진공>이 나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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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은 방송법 50조 2항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이사회 재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임명’이다. 단순히 ‘임명’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장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해임할 수 없다. 왜냐면 대법원장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에 의하지 아니 하고는 파면될 수 없다고 헌법 106조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S 사장 해임에 대해서는 법에 명시된 게 없다. 그러니까 해임을 시키지 못하는 직책이라면 대법원장처럼 ‘파면될 수 없다’고 법에 명시돼 있는데, KBS 사장의 경우는 법에 그처럼 명시된 게 없으니 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청와대 측 주장이다.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2000년 방송법 개정 전 구 한국방송공사법은 ‘대통령은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임면할 수 있다’고 해놨다. 그걸 개정하면서 ‘임명한다’고 지금처럼 바꾼 것이다.

‘임면’과 ‘임명’의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임면’은 임명 뿐 아니라 해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다시 말하자면 법 개정 전에는 대통령이 ‘임명’과 ‘해임’을 모두 할 수 있었지만 이걸 ‘임명’만 할 수 있게 법을 바꿨다는 게 청와대 주장에 반대하는 측의 해석이다.

무엇이 법적으로 타당한지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감사원은 정연주 사장의 부실 경영을 이유로 KBS 이사회에 해임재청을 요청했고, KBS 이사회는 그걸 가결시켜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대통령은 거기에 사인했다. 그리고 정연주는 해임됐다.

하지만 법조항 어디에도 KBS 사장을 ‘해임재청’할 수 있는지 나와있지 않고, 위에서 살핀대로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한지는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감사원과 KBS 이사회와 대통령은 일사천리 처리해 버렸다.

이게 옳은 순서일까? 이처럼 법리 해석의 문제가 남아 있는 사안이라면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먼저 대통령에게 KBS 사장 해임권이 있는지 법무부나 법제처에 문의하는 게 먼저다.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이 이 나라 법 정신에 부합한지 따져보고 행동하는 게 순서인 거다.

하지만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법 위반이 아닌지 선관위에 문의하게 만들었던 현 집권당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심각한 위법일 수도 있는 일을 자신들 뜻대로 처리한다.

MB 정부가 KBS 정연주 사장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백분 이해한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KBS 정연주 사장을 잘랐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법에 의거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는 게 문제이며 혹은 심각한 법적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실행해 버렸다는 게 문제다.

법은 권력자의 해석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것이 수십년 독재를 견뎌내고 빚어낸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
MB가 정연주를 해임했다. 정연주는 법정에 끌고 가겠다고 했다. 관측을 보니 법률적으로도 정연주가 이길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여러갈래다. 법률이야 어떻든 간에, 상식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사법부가 그간 내려온 법상식은 비상식이었다.

오마이뉴스에 KBS 기자가 쓴 글처럼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자를 수 있다면 KBS 사장의 모가지는 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얘기다. 자기 모가지를 쥐고 있는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공영 방송은 관영 방송이 된다.

절차상으로는 KBS 이사회의 해임 청구에 대통령이 동의한 모양새다. KBS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정권이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장악한 KBS 이사회에게, KBS 사장을 자를 명분을 주기 위해 감사원이 또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감사원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검찰이 또 어떤 오바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가 감사원, 검찰에 덧붙여 KBS까지 자기 발 아래 나와바리 관리 들어가는 과정을, 타임머쉰 타고 우리는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정연주 해임에 대해 찬성하거나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두 부류인데 하나는 좌파 빨갱이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는 ‘인민의 방송’을 하지 않은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코드 인사답게 좌우 양쪽의 미움을 받는다.

빨갱이를 싫어하는 꼴수구든, 인민을 사랑하는 꼴진보든 간에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 둘이 치고받고꺽고물며 싸우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기장과 공정한 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지금 이 경기장과 룰 모두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있다. 독립성이 생명인 검찰, 감사원, 공영 방송이 MB 아래 도열하는 중이다.

“훗, 우리 편 안 들어주더니 거참 고소하다”

고소함은 잠시. 이젠 경기마저 사라질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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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처음 그들(나치)이 공산당을 잡아들였을때,
난 공산당이 아니어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조원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카톨릭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개신교였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그때는 저항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Martin Niemoeller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