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나잇, 굿 럭



 


 


 


2006년 국내 개봉한 영화 중에,


“Good Night, and Good Luck.”이 있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영화, 조지 클루니가 감독, 각본에 직접 출연까지 한 영화, 흑백의 차분한 영상미에 다이안 리브즈(Dianne Reeves)의 멋드러진 Jazz가 찰랑대는 영화,

그런데 이 영화,


사실 국내에서는 개봉관도 제대로 못 잡았고 한 달도 못 돼 간판을 내렸다.


 


 



 


 


 


우선 이 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
1908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하여 1965년 뉴욕에서 숨을 거뒀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 미국 언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CBS 본사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놓여져있다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Hear It Now”를 TV로 옮긴 “See It Now”를 진행하며 소위 “PD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1961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해외공보처(USIA) 처장으로 임명되어 1964년까지 재직하였다.

* USIA는 1999년에 미 국무부에 편입되었는데, VOA 방송 담당부서이고 미국 F 비자 발급기준을 정하는 부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머로와 함께 “See It Now”를 제작했던 프레드 프렌들리(Fred W. Friendly).
CBS 뉴스국장을 지냈고 미국 내 공영방송인 PBS 설립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1966년에 그는 CBS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과 관련한 상원 청문회 대신에 “내 사랑 루시”를 방영하자 이에 항의하여 회사를 그만 둔다.



 


또 한 사람, 그의 동료로 나오는 뉴스 앵커 돈 할란벡(Don Hollenbeck).
2차 세계 대전 시 이탈리아 전선 종군 방송으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잘못을 지적하는 에드워드 머로의 방송 직후에 뉴스를 진행하면서 공개적으로 머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로 인해 할란벡은 잭 오브라이언(Jack O’brian) 등 매카시를 지지하는 우익 칼럼니스트들에 의해 공개적이고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비난이 계속되던 와중에 그는 1954년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한다.


 


 


이 영화는 위 인물들이,


1950년대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실을 왜곡/과장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미국 사회를 극도의 우경화로 몰고갔던,


 


후에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狂風을 주도했던 죠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비판하면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허풍이나 과장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2006년 개봉 당시 대한민국의 관객들에게 어떤 공감도, 분노도, 긴장도 전해주지 못했다. 그저 먼 옛날 남의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가 80~90년대의 우리 관객, 아니 개봉 이후 겨우 6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관객들에게 보여진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나 반향이 나올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 젊은 관객들에게 매카시즘이란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자신의 생각과 신념 때문에 인권이 침해되고 인신이 구속된다는 것.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단지 일부 기득권 층의 그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 위해를 당하고 그것이 당연시 되는 것.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권력의 이익에 반한다하여 감시당하고 견디기 힘든 불이익이 닥쳐드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과연 지금 그게 먼 옛날 남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


 


80, 90년대에 우리들은 이런 얘기를 하곤 했었다.
미국은 그나마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미국의 언론인들은 하고자 하는 말은 하고야 마는 언론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언론의 자유, 언론인의 자세를 원한다,



허나 그게 가능하기 위해 수많은 평범하고 성실한 미국인들이 당해야했던 희생과 눈물이 있었음을,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낸 교훈이 있었기에 더욱 치열하고 소중한 기본권이라는 건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던 그들이 2005년 즈음에 다시 그걸 꺼내 되돌아보며 탄식했었다. 조지 클루니는 당시 미국 사회에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고, 함께 메시지를 만들어 보자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우리들은 이런 영화에 좀체로 감정이입이 되질 않아 애써 졸음을 참으려 애쓰다가 기어이 잠이 들거나 끝까지 보더라도 누가 이런 영화를 보자고 그랬는지 일행과 다투거나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을 빌어본다.


 


Good Night, adn Good Luck.


 


 


 


영진공 이규훈


 


 


 


 


 


 


 


 


 


 


 


 


 


 


 


 


 


 


 


 


 


 


 


 


 


 


 


 


 


 


 


 

눈물의 마음


분향소에 향을 꽂는다. 겨울의 한기에 순식간에 얼어버린 향 냄새는 나에게 달하지 않는다. 향을 꽂는 그녀들의 곁에는 고인의 아내로 보이는 유족들이 함께 선다. 함께 묵념을 한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분향을 할, 혹은 헌화를 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덩그러니 먼 발치에 섰다.

나와 같이 지하철에서 내린 아가씨들이었다. 학생처럼 보였는데 수수한 차림이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용산 사고 현장 분향소는 우리나라 최고 회계 사무소라는 삼일 회계 법인 바로 몇 미터 뒤에 있었다. 그녀들과 나는 우연히 방향이 같았고, 화재의 흔적 보다 진압의 흔적이 완연한 그곳의 참혹함 앞에서도 나는 참혹해 하지 않았고, 서성거렸고, 그때 그녀들은 분향소에 들어섰다.

동지애를 표시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사고 건물 옆으로 붙어 있었다. 시를 이루지 못한 한 시인의 시도 큼직히 걸려 있었다. 전경 버스는 길을 봉쇄하고 있었고, 언론사 기자는 인도에 주차된 취재차량 안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요동치는 곳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내 귀를 부여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영하 십도, 매서운 날씨에 그곳을 종일 지켜야 하는 유족들은 눈만 빼고 온 몸을 다 가렸다. 고인의 영정 사진 뒤로, 살아남은 사람은 추위를 느끼는 법이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곳이 지긋지긋했고, 떠나고 싶었다. 그때 묵념을 하던 한 아가씨가 손을 눈가로 올리더니 눈물을 닦았다.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관계자도 아닌 게 분명한 그녀를 울리는 그 정서는 무엇일까 멀찍이 서서 생각했다.

사실은 너무나 간단하고 자명하다. 시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 보다 시 내곽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개발이익을 남긴다. 집주인들은 평균 5억의 보상을 받았고, 개발사들은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남길 테다. 그 이익의 떡고물 앞에 용역업체가, 구청이, 경찰이, 검찰이 머리를 조아린다. 사라지는 것은 평균 2천만원의 보상을 받고 갈 곳이 없어진 세입자들 뿐이었다. 자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은 개발이나 국익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그 과정을 지켜야 할 법은 이미 평등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역시 너무 늦은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자명한 원칙은 이미 깨졌고,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져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면화하고 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것’이 ‘만인 앞에 평등한 법’ 보다 사람들에게 가깝다. 그래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은 순간, 다시 말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약속이 깨어지는 순간을 목도한 사람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신념처럼 떠받든다. 법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니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부자가 되고 힘 센 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밖으로 내뱉진 않지만, 마음 속에서 붙들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이다. 하지만 분향소 안의 그녀는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쩌면 희망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불 붙기를 기다리는 방관자일 수도 있다. 촛불 집회를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연결하려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아우성이 내키지 않았고, 그래봐야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투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가난한 상상을 할 뿐이었다. ‘조국’이나 ‘민족’이란 단어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나는 수시로 이 땅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그녀는 눈물의 마음을 가졌고, 추하고 추한 나는 방관자의 마음을 가졌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는다면 그것은 저 눈물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될 것이었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길 바라면서도 그러나, 눈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나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마침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난 거야?”
“응, 그러니까 불조심해야 해.”

모자는 풍채 좋은 삼일 회계법인 빌딩의 그늘 아래로 멀어져 갔다. 지난 정권 시절 브리핑룸 통폐합이 언론탄압이라고 대통령에게 항의하던 용감한 기자들은 승용차 안에서 선잠을 잔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떤 언론도, 무허가 용역업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입했는지, 동의 없는 시신 부검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런 비극을 낳으며 추진한 재개발의 이익은 최종적으로 누가 가져가는지 말하지 않는다. 눈물 흘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나는 애꿎은 서울의 풍경만 기록한다.

2009년. 1월. 신용산 역 2번 출구 그곳.

영진공 철구

광복 63주년 그리고 KBS

[편집자 註]
2008년 8월 15일은 광복 63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현재 국민으로부터 5년간 권력을 위임받은 이와 그 주변을 맴도는 세력들은 굳이 이날을 “건국일”이라 주장하며 광복의 의미를 가리려 애쓰고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일”이 아니다.  이 날은 1919년 건국 이후 임시로 존재하였던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날이며 동시에 이승만 행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그리고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광복절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잘 살아있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치며 오히려 경제를 죽이고있는 그들은 이미 세워져있던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강변을 하고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걸 그들은 실용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용이 아니라 궤변이고 완장질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터져나온 KBS 사태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광복 63주년을 맞아 <영진공>이 나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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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은 방송법 50조 2항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이사회 재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임명’이다. 단순히 ‘임명’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장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해임할 수 없다. 왜냐면 대법원장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에 의하지 아니 하고는 파면될 수 없다고 헌법 106조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S 사장 해임에 대해서는 법에 명시된 게 없다. 그러니까 해임을 시키지 못하는 직책이라면 대법원장처럼 ‘파면될 수 없다’고 법에 명시돼 있는데, KBS 사장의 경우는 법에 그처럼 명시된 게 없으니 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청와대 측 주장이다.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2000년 방송법 개정 전 구 한국방송공사법은 ‘대통령은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임면할 수 있다’고 해놨다. 그걸 개정하면서 ‘임명한다’고 지금처럼 바꾼 것이다.

‘임면’과 ‘임명’의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임면’은 임명 뿐 아니라 해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다시 말하자면 법 개정 전에는 대통령이 ‘임명’과 ‘해임’을 모두 할 수 있었지만 이걸 ‘임명’만 할 수 있게 법을 바꿨다는 게 청와대 주장에 반대하는 측의 해석이다.

무엇이 법적으로 타당한지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감사원은 정연주 사장의 부실 경영을 이유로 KBS 이사회에 해임재청을 요청했고, KBS 이사회는 그걸 가결시켜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대통령은 거기에 사인했다. 그리고 정연주는 해임됐다.

하지만 법조항 어디에도 KBS 사장을 ‘해임재청’할 수 있는지 나와있지 않고, 위에서 살핀대로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한지는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감사원과 KBS 이사회와 대통령은 일사천리 처리해 버렸다.

이게 옳은 순서일까? 이처럼 법리 해석의 문제가 남아 있는 사안이라면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먼저 대통령에게 KBS 사장 해임권이 있는지 법무부나 법제처에 문의하는 게 먼저다.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이 이 나라 법 정신에 부합한지 따져보고 행동하는 게 순서인 거다.

하지만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법 위반이 아닌지 선관위에 문의하게 만들었던 현 집권당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심각한 위법일 수도 있는 일을 자신들 뜻대로 처리한다.

MB 정부가 KBS 정연주 사장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백분 이해한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KBS 정연주 사장을 잘랐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법에 의거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는 게 문제이며 혹은 심각한 법적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실행해 버렸다는 게 문제다.

법은 권력자의 해석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것이 수십년 독재를 견뎌내고 빚어낸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
MB가 정연주를 해임했다. 정연주는 법정에 끌고 가겠다고 했다. 관측을 보니 법률적으로도 정연주가 이길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여러갈래다. 법률이야 어떻든 간에, 상식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사법부가 그간 내려온 법상식은 비상식이었다.

오마이뉴스에 KBS 기자가 쓴 글처럼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자를 수 있다면 KBS 사장의 모가지는 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얘기다. 자기 모가지를 쥐고 있는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공영 방송은 관영 방송이 된다.

절차상으로는 KBS 이사회의 해임 청구에 대통령이 동의한 모양새다. KBS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정권이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장악한 KBS 이사회에게, KBS 사장을 자를 명분을 주기 위해 감사원이 또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감사원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검찰이 또 어떤 오바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가 감사원, 검찰에 덧붙여 KBS까지 자기 발 아래 나와바리 관리 들어가는 과정을, 타임머쉰 타고 우리는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정연주 해임에 대해 찬성하거나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두 부류인데 하나는 좌파 빨갱이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는 ‘인민의 방송’을 하지 않은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코드 인사답게 좌우 양쪽의 미움을 받는다.

빨갱이를 싫어하는 꼴수구든, 인민을 사랑하는 꼴진보든 간에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 둘이 치고받고꺽고물며 싸우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기장과 공정한 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지금 이 경기장과 룰 모두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있다. 독립성이 생명인 검찰, 감사원, 공영 방송이 MB 아래 도열하는 중이다.

“훗, 우리 편 안 들어주더니 거참 고소하다”

고소함은 잠시. 이젠 경기마저 사라질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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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처음 그들(나치)이 공산당을 잡아들였을때,
난 공산당이 아니어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조원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카톨릭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개신교였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그때는 저항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Martin Niemoeller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