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전율을 전해주는 문장과 디테일

 

김훈의 <강산무진>을 읽고 전율한다. 

이야기는 한가하지만 그의 문장은 웅숭깊고 치열하다. 그래서 이야기도 웅숭깊고 치열해진다. 비루하고 낙담한 인물들은 문장 덕분에 굳건하다. 그 한가한 이야기에 전율하는 것은 온전히 김훈의 문장 덕분이다.

몽상가 같은 소설가들을 김훈은 비웃는다. 그는 발로 글을 쓴다. 김훈은 소설 속에서 놀라운 디테일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발의 공로다. 그리고 발이 쫓아 포착한 현장을 그의 눈은 좀더 깊게 볼 줄 안다. 방 안에서 글을 쓰는 몽상가 같은 소설가들은 자신의 머릿속을 꺼내 놓으면 될 일이기에 발과 눈이 필요없을 테지만 김훈은 그 현장을 발로 쫓아 눈으로 보기에 그에게는 눈과 발이 펜이다. 하릴없는 불도저질을 하는 인물의 지난 회사가 어떻게 분식회계를 했으며, 어떻게 자산을 빼돌렸으며, 어떻게 파산신청을 했으며, 어떻게 체불임금을 정리했는지까지 들여다 보는 시선은 일반적인 소설가의 눈이 아니다. 그것은 기자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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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자의 눈이 전달하는 디테일은 묘사의 리얼리티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주로 직업 묘사에 디테일을 퍼붓는데, 생계를 위한 노동에 쏟아지는 디테일은 그래서 삶의 구체성이 된다. <강산무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놀지 않는다. 모두 단단한 생계의 연쇄에 잡혀있다. 그 단단하고 무참한 생계의 연쇄야말로 인물들이 존재하는 본질이다. 생계에 붙들린 채 벌어지는 죽음과 욕정과 인연과 유실 등은 그것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생계 때문에 견뎌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 죽고, 젊은 여인에게 맘이 동하고, 길을 잃어 헤매고, 삶이 뜻하지 않은 다른 곳에 가 있어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 살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

산다는 것은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 산다는 것의 간편한 본질. 김훈의 인물들은 그의 탁월한 디테일로, 이 산다는 것의 간편한 본질을 보여준다.

<남한산성> 또한 ‘산다는 것’의 문제였다. 살아야 한다는 주화파와 죽어야 산다는 주전파의 부딪힘 속에서 김훈은 참담하다. 역사는 살아야 한다를 택했지만 김훈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할 수 없었던 듯 보인다. 살기 위해 강요받은 두 가지 선택지는 그래서 김훈에게는 어떤 참담함이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강요받아야 하는 이 참담함을 ‘치욕’이라는 단어를 선택해 내놓는다. 삶의 치욕.  김훈 역시 어떤 면에서 이 치욕을 감내해야 했던 인물이다.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에 이른다. 2000년이었나? 당시 ‘한겨레21’이 연재하던 코너인 ‘쾌도난담’에서 그를 인터뷰한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야. 여자를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고. (웃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다 책임지고. 그게 가부장의 자존심이거든.”

“이걸 알아야 돼. 칼이 펜보다 강한 거야.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기를 평생 해가지고 이 모양이 된 거지. 세상에 펜이 어떻게 칼보다 강할 수 있어. 칼 쥔 놈들은 칼이 강하다고 말 안 해. 왜냐면 본래 강하니까.”

“(신군부에 대한 용비어천가 작성에 대해)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 테고… 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 놈한테 이런 얘기를 했지. 내가 이걸 쓸 테니까 끌려간 내 동료만 때리지 말아달라. 걔들이 맞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왔어. 진짜 치가 떨리고….”

“나는 <조선일보>를 아주 좋아해서 평생을 보는데, 가장 우수한 신문이더만. <조선일보> 사설 같은 걸 보면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소름이 쪽쪽 끼친다고. 우리 기자들보고 이것 좀 보고 배우라고 하지. 근래 들어 정권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게 <조선일보> 아니야?”

권력 앞에 비겁한 꼴마초 김훈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시사저널에는 항의가 잇달았다. 편집장이 권력에 비겁한 꼴마초였다고 당시 ‘시사저널’ 또한 권력에 비겁한 꼴마초였던 것은 아니다. ‘시사저널’은 당시에도 전통있는 정론 주간지로 평가받고 있었고, 김훈의 그런 사적인 생각이 ‘시사저널’이라는 공적인 매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김훈은 이 일을 계기로 ‘시사저널’을 나오게 된다. 그 몇 주 후 ‘한겨레21’의 ‘만리재에서’에는 김훈을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위무받고 왔다는 김종구 편집장의 글이 실린다.

그는 신군부 등장 시절 ‘용비어천가’를 쓴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은 데 대해 “나의 잘못을 제대로 질타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 부재를 이야기하려는 것”, ‘반통일 의혹’에 대해서는 “반통일적이던 사람들이 통일세력으로 바뀌는 시대 속에서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과 악이 혼돈되고 전도되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나로서는 거대담론을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그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쾌도난담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진심이 어렴풋이 이해가 됐지만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천적 남녀불평등론’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건 나의 어쩔 수 없는 어떤 심정적 무의식이야. 그것을 전달했을 뿐이지. 우월한 자의 도덕이라는 게 있어. 여성을 힘들게 하지 않고 고생시키지 않고…. 사실은 열등하고 싶어. 그런데 문명이 그렇게 강요해. 그러나 공인으로서 나는 잡지를 만들 때 여성문제나 페미니즘 기사 등에 대해 결코 그런 무의식을 따르지는 않았어.”

‘쾌도난마’에 말 그대로 난마했던 그의 얘기들은 어쩌면 ‘위악’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악은 ‘선’을 말할 수 없는 자의 자기보호일 수도 있었다. 시대로부터 마초로 길러졌고, 살아남기 위해 독재에 부역했던 기자 김훈은 그 죄과 때문에 ‘선’을 얘기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삶에 새겨진 치욕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 사건 이후 곧장 장편소설을 낸다. 그 이름도 유명한 ‘칼의 노래’다. 이 소설 속의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과 살짝 다르다. 후세가 기억하는 이순신은 영예롭고 찬란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지만, 당대의 이순신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김훈의 시선이다. 전쟁과 권력은 이순신의 의로운 뜻을 자꾸만 꺽으려 한다. 그에게 치욕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치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남지 않는다.

치욕을 받아들이고 살아남은 자가 쓴 소설이 치욕을 거부하고 살아남지 않은 자의 얘기다. 그렇게 살아남지 못한 이순신은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김훈이 ‘칼의 노래’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는 이순신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고, 그랬다면 ‘선’을 말할 수 있었겠다고 후회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김훈은 쉰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한겨레 신문’ 기자로 입사한다. 단지 기자로 입사한 게 아니라 ‘사스마리’까지 도는 바닥부터 새로 시작한다. 다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싶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가 한겨레에 썼던 칼럼의 한 토막이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M_더 보기 … |접어놓기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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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새로운 기자 생활은 채 1년을 가지 않았다. 그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데스크에 앉아 있어도 될 충분한 나이와 경력을 가진 기자가 다시 현장을 돌며 마주 봐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은 이랬다. 한겨레 기자가 술회한 당시 김훈의 얘기다.

“나는 의문사규명위 사무실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장준하 등 70년대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의 당시 사건기사를 내가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이들의 의문사에 대해 제대로 규명조차 않은 채 쓴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중앙정보부 직원, 경찰 등이 조사를 받고 피의자 신분이 되었는데, 그 피의자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때처럼 역시 그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의문사규명위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캡은 자꾸 나를 보고 의문사규명위에 가라고 한다. 그러니 꾸역꾸역 갈 수 밖에”

그는 한겨레를 마지막으로 27년 간 버텨온 기자라는 생계를 벗는다. 그리고 나온 소설이 ‘강산무진’이고 ‘남한산성’이다.

이 소설 속의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치욕 앞에 선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그리고 남한산성의 인조 임금은 이순신처럼 치욕을 거부하고 살아 남지 않는 게 아니라, 치욕을 받아들이고 살아 남는다.

그의 본심은 얼마 전 ‘KBS 단박인터뷰’를 통해 송곳처럼 명료하게 들어났다. 김훈은 자신의 기자생활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KBS 역시 실패했다고, KBS가 더 거대한 언론사니 더 거대하게 실패했다고 덧붙인다. 그는 독재에 부역한 치욕으로 살아 남았다는 사실에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치욕을 치욕으로 여기고 그 때문에 수십년을 아파하고 있는 노작가. 그가 문학을 위해 또는 역사를 위해 어떤 공헌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치욕을 알고 있고 수치를 알고 있다. 시대가 치욕을 모르다 보니, 그의 이런 내면은 너무나 순진해 보인다. 글쟁이는 글을 팔고, 정치인은 몸을 파는 시대다.

거대한 실패를 겪었다는 KBS는 그 실패에 대해 내놓고 반성한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 또 거대한 치욕 앞에 놓여 있지만, 그것이 치욕이라고 인식하는 사람 숫자는 KBS 사원행동이라는 고작 백명의 직원들 뿐이다.

아니다. 오로지 기자들만의 치욕이 아니다. 우리에게 치욕을 강요했던 전두환은 아직도 29만원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치욕을 강요했던 박정희는 그 딸을 통해 영원히 살아가고 있다. 치욕을 모르는 시대다. 김훈은 지금 소설이라는 몸살로 치욕을 앓고 있다.


영진공 철구

그대들의 양아치 자본주의

 

경쟁해야 된다며? 자유 경쟁해서 경쟁력을 키워야 된다며?

하다못해 초등학생들도 경쟁시켜야 된다고 애들 성적 만천하에 까고, 학교 등급 만천하에 나발부는 생지랄을 떤 게 누구니? 니들 아니니?

그런데 21일날 발표한 부동산 정책 보니깐 건설사는 예외더라? 전매제한 완화하고, 재건축 조합원 지위 양도 가능케 하고, 분양가 상한제 흔들고, 아파트 후분양제 사실상 없애고, 미분양 아파트는 정부가 매입해 주고. 왜 건설사는 경쟁 안 시키니?

지들이 존나게 만들어서 존나게 비싸게 내놓은 아파트 안 팔린 게 국민 탓이니? 그걸 왜 국민이 책임지니? 건설사는 경쟁 안 해도 경쟁력이 자동빵으로 생기니? 니들이 공구리 노가다 출신이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 거니? 아니면 니들이 정치인이 아니라 한국 다주택자 협의회라서 집값 떨어지면 골프장 회원권 줄여야 될 거 같아서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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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주인인 국민은 쎄빠지게 경쟁시켜서, 사교육비 팍팍 부어, 존나게 비싼 등록금 쳐내가며, 어렵사리 대학 졸업해도,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 하나 잡을까 말까인데 니들은 니들끼리 빨아주고 핥아주면서 배따지 두드리니? 국민들은 존나게 경쟁시켜 뒤쳐진 놈은 60일을 단식해도 돌아봐 주지도 않으면서, 농가 부채로 자살하는 농민들은 ‘지못미’ 한 번 달아주지 않으면서, 니들끼린 자빠지면 세워주고, 넘어지면 아까징끼 발라주고, 밥 굶으면 목구멍 안으로 밥숟가락 들이밀어 주니?
 
그래서 니들은 탈세하고, 뇌물 받아먹고, 위장전입해도 괜찮고, ‘니들 정책 싫어’라고 소리치는 국민은 ‘법과 원칙’이라고 다 잡아가니? 그 놈의 ‘법과 원칙’은 왜 니들만 비켜가니? 법원이랑 검찰이 니들 똘마니다 이거니?

그리고 니들 양아치니? 자유로운 자본주의 경제가 니들 원칙 아니었니? 재벌들 사면까지 해줬는데 투자 안 한다고 삐졌다며? 그런데 사면해주면 투자해야 하니? 법에 그렇게 나와 있니? 왜 재벌한테 시발시발거리니?

재벌이야 돈 될 일이 없으니까 투자 안 하겠지. 돈이 된다면 투자 안 할 바보가 어딨니? 니들의 임무는 자본한테 투자 안한다고 협박질하는 게 아니라 자본이 투자할 좋은 환경을 만드는 거 아니니? 그런데 니들이 경제 다 망가뜨려 놓고 투자 안 한다고 지랄대면 이게 자본주의니? 사면해주면 투자해야 된다는 법 조항이라도 있니?

법에도 없는 의무를 왜 재벌들한테 씌우니? 정부가 나서서 투자계획, 경제계획 다 세우고 관리감독하는 건 니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공산당 빨갱이들 수법 아니니? 니들 공산당이니? 니들 빨갱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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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가 입 돌아간다는 처서에 옵하 야마 확 돌아갈 일이 또 있드라?

대통령 비서실장, 청와대 대변인, 방송통신 위원장이 KBS 이사장이랑 KBS 후임 사장 유력 후보랑 시내 호텔에서 만났다며? 청와대는 KBS 사장 인선에 아무런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게 엊그제 아니니?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를 그렇게 뻔뻔히 씨부렸으면 들키지는 말아야지? 사람 꼭지 돌아가게 이 무슨 개지랄이니? KBS 사장에 관한 얘긴 없었다고? 그럼 왜 만났니? 그것도 호텔에서? 옛날 니네 당 대변인 말마따나 그냥 불륜으로 만난 거니? 남자들끼리? 유 스핀 미 롸잇 나우?

박지원 의원이 얘기하드라. 니들이 잃어버렸다는 10년. 그 10년 전 니들이 청와대에 앉아 있을 때는 KBS 보도국장이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나와 근무했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미치겠니? KBS가 9시 뉴스 시그널 땡 치자마자 정권 애널 서킹해주던 시절, 맨날 오르가즘에 질질 싸고 좋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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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니들도 대통령 기록물 압수수색한다드라? 비밀로 지정돼 있는 대통령 기록들 몰래 열어본 뒤 청와대에 달려가 보고하고 뼈다귀 하나 얻어 먹을 생각하니 좋니?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했을 때 불어올 파장 따윈 꼬리 살살 흔들고 뼈다귀 받아 먹는 재미에 빠져 요단강 저 너머 바이바이니? 아유 귀여워 디지겄네. 정권의 강아지들.

그런데 니들이 하나 등한시한 게 있는 건 아니? 니들 집권하던 시기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 바로 인터넷.

인터넷에는 모든 기록이 DB화돼 쌓여 있걸랑. 니들의 찬란한 과거 꼴통짓 찾는 일을 10년 전에는 관련 정보에 접근이 용이한 전문가들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초딩들도 할 수 있다는 얘기야.

더이상 예전처럼 쉽게 속일 순 없을 거라는 거 짐작은 하니? 내 장담하마. 4년 안에 니들을 이 나라에서 왕따 못시키면 내가 이 나라를 뜰란다. Zot 같아서 못살겠다. 정치인 때문에 국민이 Zot 같아서 못 살겠단 말이다.


영진공 철구

**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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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3주년 그리고 KBS

[편집자 註]
2008년 8월 15일은 광복 63주년을 기념하는 광복절이다.  그런데 현재 국민으로부터 5년간 권력을 위임받은 이와 그 주변을 맴도는 세력들은 굳이 이날을 “건국일”이라 주장하며 광복의 의미를 가리려 애쓰고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일”이 아니다.  이 날은 1919년 건국 이후 임시로 존재하였던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날이며 동시에 이승만 행정부가 출범한 날이다.  그리고 8월 15일을 정부수립일로 한 것은 다름 아닌 광복절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잘 살아있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치며 오히려 경제를 죽이고있는 그들은 이미 세워져있던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강변을 하고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걸 그들은 실용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용이 아니라 궤변이고 완장질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터져나온 KBS 사태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광복 63주년을 맞아 <영진공>이 나름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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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은 방송법 50조 2항에 따라 한국방송공사 이사회 재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임명’이다. 단순히 ‘임명’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해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법원장 역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법원장을 해임할 수 없다. 왜냐면 대법원장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에 의하지 아니 하고는 파면될 수 없다고 헌법 106조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KBS 사장 해임에 대해서는 법에 명시된 게 없다. 그러니까 해임을 시키지 못하는 직책이라면 대법원장처럼 ‘파면될 수 없다’고 법에 명시돼 있는데, KBS 사장의 경우는 법에 그처럼 명시된 게 없으니 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청와대 측 주장이다.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주장도 있다.

2000년 방송법 개정 전 구 한국방송공사법은 ‘대통령은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임면할 수 있다’고 해놨다. 그걸 개정하면서 ‘임명한다’고 지금처럼 바꾼 것이다.

‘임면’과 ‘임명’의 확실한 차이가 있다. ‘임면’은 임명 뿐 아니라 해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다시 말하자면 법 개정 전에는 대통령이 ‘임명’과 ‘해임’을 모두 할 수 있었지만 이걸 ‘임명’만 할 수 있게 법을 바꿨다는 게 청와대 주장에 반대하는 측의 해석이다.

무엇이 법적으로 타당한지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상식의 차원에서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감사원은 정연주 사장의 부실 경영을 이유로 KBS 이사회에 해임재청을 요청했고, KBS 이사회는 그걸 가결시켜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대통령은 거기에 사인했다. 그리고 정연주는 해임됐다.

하지만 법조항 어디에도 KBS 사장을 ‘해임재청’할 수 있는지 나와있지 않고, 위에서 살핀대로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한지는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감사원과 KBS 이사회와 대통령은 일사천리 처리해 버렸다.

이게 옳은 순서일까? 이처럼 법리 해석의 문제가 남아 있는 사안이라면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먼저 대통령에게 KBS 사장 해임권이 있는지 법무부나 법제처에 문의하는 게 먼저다.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이 이 나라 법 정신에 부합한지 따져보고 행동하는 게 순서인 거다.

하지만 감사원이나 청와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법 위반이 아닌지 선관위에 문의하게 만들었던 현 집권당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심각한 위법일 수도 있는 일을 자신들 뜻대로 처리한다.

MB 정부가 KBS 정연주 사장을 자르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백분 이해한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 KBS 정연주 사장을 잘랐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법에 의거하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는 게 문제이며 혹은 심각한 법적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실행해 버렸다는 게 문제다.

법은 권력자의 해석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것이 수십년 독재를 견뎌내고 빚어낸 지금 우리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
MB가 정연주를 해임했다. 정연주는 법정에 끌고 가겠다고 했다. 관측을 보니 법률적으로도 정연주가 이길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여러갈래다. 법률이야 어떻든 간에, 상식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사법부가 그간 내려온 법상식은 비상식이었다.

오마이뉴스에 KBS 기자가 쓴 글처럼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자를 수 있다면 KBS 사장의 모가지는 대통령에게 달려있다는 얘기다. 자기 모가지를 쥐고 있는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공영 방송은 관영 방송이 된다.

절차상으로는 KBS 이사회의 해임 청구에 대통령이 동의한 모양새다. KBS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이 정권이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장악한 KBS 이사회에게, KBS 사장을 자를 명분을 주기 위해 감사원이 또 어떤 짓을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감사원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검찰이 또 어떤 오바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가 감사원, 검찰에 덧붙여 KBS까지 자기 발 아래 나와바리 관리 들어가는 과정을, 타임머쉰 타고 우리는 구경하고 있는 중이다.

정연주 해임에 대해 찬성하거나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두 부류인데 하나는 좌파 빨갱이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는 ‘인민의 방송’을 하지 않은 정연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코드 인사답게 좌우 양쪽의 미움을 받는다.

빨갱이를 싫어하는 꼴수구든, 인민을 사랑하는 꼴진보든 간에 어차피 이 사회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 둘이 치고받고꺽고물며 싸우기 위해서는 공정한 경기장과 공정한 룰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지금 이 경기장과 룰 모두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꾸고 있다. 독립성이 생명인 검찰, 감사원, 공영 방송이 MB 아래 도열하는 중이다.

“훗, 우리 편 안 들어주더니 거참 고소하다”

고소함은 잠시. 이젠 경기마저 사라질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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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처음 그들(나치)이 공산당을 잡아들였을때,
난 공산당이 아니어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조원들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카톨릭을 잡아들였을 때도,
난 개신교였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그때는 저항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Martin Niemoeller


영진공 철구

아도니스의 견문발검 – 엿이나 먹으세요!!

2004년 12월 14일
언론중재위원회

언젠가 견문발검에다도 쓴 것 같은데, 지금껏 내가 만든 영화들은 단 한 번도 텔레비젼에 나간 적이 없다. 국내 방송 채널로는 KBS ‘독립영화관’이 가장 규모가 크다. 방송국이라서 그런지 상영료가 만만치 않다. 한 번 상영에 기백 만원을 주는 모양이다(-.-). 인디스토리 대표가 내게 자주 하는, ‘제발 좀 되는 영화 좀 만들어라’는 우스개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문제인 건지 요 빌어먹을 방송용 도덕 관념이 문제인 건지 헷갈려 하다가 슬몃 웃음과 함께 가벼운 욕찌기가. 엿 먹으세요.

단언하건대, 한 번도 내가 도덕을 파괴하거나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상상을 ‘일부러’ 한 적도 없지만 아직 그런 재밌는 일탈을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외려 난 소심한 편이다. 아마도 한국 방송의 도덕적 센서는 말초신경에 가까운 감각을 지니고 있어 아주 짧고, 예민한가 보다. 일종의 오르가즘 신경다발체인 걸까?

어제 얼핏 들으니 『동백꽃 프로젝트』도 또 KBS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모양이다. 야한 장면도 있고, 호모들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런가 보다. 예전에 『슈가힐』은 아예 몇 장면을 삭제하길 요구받았는데, 엿 맛있게 드세요, 라는 말을 되돌려 줄 수밖에는. 감독의 자존심도 없는가? 상업영화도 아니고 독립영화를 찍었다는 것들이 몇 장면 삭제해 텔레비젼에 올리는 일은 용서되지 않는 짓거리다. 일테면 나쁜 버릇은 잡들여야 하는 법.

가장 엽기적인 경우가 『굿 로맨스』 때였다. 당시 그 프로그램 피디는 이 영화에 대해 꽤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어 1년 동안 심의 데스크와 싸웠지만 결국 상영되지 못했었다. 그 심의 데스크의 도덕 센서에 걸린 것은 ‘교복’과 ‘원조교제’였다. 웃기는 이야기다. 성인 남성과 여자 고등학생에 관한 원조교제 영화들은 버젓이 상영했던 것. 존만한 마초 새끼들이 시민의 도덕을 들먹이며 가위질 하는 버르장미는 꼭 저기 의회 안에서 국민들이… 하고 어버버거리는 좀비들하고 닮아 있다.

나는 여자가 남편을 죽이고, 교복 입은 머슴애가 성인 여성과 사랑을 나누고, 호모들이 벌거벗고 남우새스럽게 나뒹구는 영화들을 계속 찍게 될 것이다. 아마 상업영화를 찍어도 저기 방송국 녀석들은 상영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엿 먹으세요.

습관

‘습관’은 이 세상의 그릇 안에 태어난 어느 주체가 ‘주체됨’을 받아들이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습관과 이의 제도적 구성물인 ‘관습’과의 관계맺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주체는 늘 변화하기 마련.

예를 들어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면 제각기 주관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136개의 눈이 있으면 136개의 영화가 소비되는 과정에서 다시 재창조된다. 136개의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천 만명이나 몰려 가서 보는 일련의 행위와 저예산 예술 영화를 보러 가는 극소수 행위의 차이는 136개의 우주의 불꽃놀이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정한 지형도가 쉽게 그려지며, 136개의 우주가 실은 그렇게 큰 차이도 없이 이미 구획된 경로를 통해 몇 개의 집합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당신은 왜 저 영화를 보러 가서 싸구려 감동을 매입하는 걸까? 당신의 자유의지? 너무도 뻔하고 상투적인 조립형 감동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난 가끔씩 공포를 느끼곤 한다. 습관의 힘, 습관적 감동, 습관의 눈, 습관의 우주에 대한 공포 말이다. 해서 사람들은 저예산 예술영화의 활성화, 독립영화관 등의 이야기를 떠벌리며 ‘다른 감동’을 제도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람들의 습관을 움직이게끔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 화려하다는 136개의 우주들은 기껏 제도의 산물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우주는, 당신의 습관은, 당신의 삶은, 그리고 당신의 눈과 귀의 감각은 기껏 제도의 힘에 따라 이곳으로 저곳으로 끌려다니는 객체의 몸짓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공포다. 당신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미 영화사 기획실에서 계산되고 측정된 대로 당신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의 인공. 때론 자신의 권능을 되찾기 위해선 눈깔을 파내고 귓속을 후벼파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공화국 언론중재위 차관보
아도니스(gondola21@gondol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