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스”, 동기부여가 덜 된 서바이벌 게임

애초에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만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마셰티>(2010)에 조연급 단역으로 출연한 님로드 앤탈 감독이 꽤 인상적인 코미디를 보여주는 바람에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프레데터스>는 님로드 앤탈 감각의 유머 감각이 반영된 작품은 아니더군요.

여기서 잠시 프레데터 시리즈의 연보를 살펴볼까요.


1987년 <프레데터>,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 / 존 맥티어난 감독 /
                             짐 토마스, 존 토마스 각본

1990년 <프레데터 2>, 대니 글로버 주연 / 스티븐 홉킨스 감독 /
                               짐 토마스, 존 토마스 각본

2004년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폴 W.S. 앤더슨 감독/공동 각본

2007년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2>, 콜린 & 그렉 스트로스 감독 /
                                                   셰인 살레르노 각본

2010년 <프레데터스>, 님로드 앤탈 감독 / 알렉스 리트박, 마이클 핀치 각본

1987년의 원작과 1990년의 평범했던 속편으로 사실상 종료되었던 프레데터 캐릭터를 14년만에 다시 소환했던 작품이 바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감독 겸 제작자인 폴 W.S. 앤더슨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시리즈의 외계인 캐릭터였던 에이리언과 프레데터를 한 작품에 출연시켜 대결 구도를 가져가겠다는 농담 같은 발상을 – 벰파이어와 늑대인간들도 자주 그러고 있는데 외계인들이라고 왜 만나면 안되는 거냐능 – 놀라운 실천력으로 현실화시켰던 것이죠.

엄청난 혹평에도 불구하고 시도되었던 두 외계인 종족의 만남은 다시 3년 뒤의 속편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를 통해 연출 데뷔를 하게된 3D 특수효과 전문가 콜린 & 그렉 스트로스 형제는 최신작 <스카이라인>을 후속작으로 내놓고 있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 수 위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에이리언과의 만남 덕분에 부활할 수 있었던 프레데터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일단 이 험상궂은 인간형 전투 외계인 종족을 기억하고 알아봐주는 관객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 리빌딩을 시도한 작품이 <프레데터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애드리안 브로디, 토퍼 그레이스, 로렌스 피쉬번, 앨리스 브라가와 같은 스타캐스팅이 가능했을 것이고 아울러 4천5백만불의 예산도 확보할 수 있었던 거였겠지요. 내용면에서 보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사 Troublemaker 의 로고가 보이고 이후로 시종일관 SF답지 않게 고풍스러운 배경 음악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니 트레조가 역시나 단역으로 출연해주고 있다는 점 정도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그늘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외엔 님로드 앤탈 감독에 의해 정성스럽게 복원된 프레데터 캐릭터들과 이들의 사냥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지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레데터들이 사냥 게임을 즐기기 위해 지구를 비롯한 각기 다른 행성에서 숙련된 사냥꾼들을 납치해오고, 이런 황당한 상황에 빠진 지구인들은 프레데터로부터 사냥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또 누군가는 심지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연히 누군가는 죽게 되고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오히려 프레데터를 해치우고 살아남게 되는 장르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납치되어 온 지구인들 대부분이 살인 전문가들인 와중에 직업이 의사인 에드윈(토퍼 그레이스)가 끼어있는 점이 나름대로 특색입니다. 지구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 의사에게 있었기 때문에 함께 불려오게 된 것이라는 사실은 물론 영화 막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살인 게임’류의 액션 영화이지만 님로드 앤탈 감독의 연출 역량 만큼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종신형과 같은 사랑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치고 크게 실망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믿음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스페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서까지 한국의 일개 영화관객이 미리 알고 참고할 만한 정보가 있을 리가 없으니 이런 경우 어디서 상을 받았다는 타이틀은 확실히 관람할 작품을 선택하는 데에 – 이런 사정은 수입/배급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 적잖이 도움이 된다.



오직 영미권 영화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외국어’ 영화상이란 것이 본래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비영어권 영화들 가운데에서 한 작품을 선정하여 수여하는 작품상에 값하는 상인 것이니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내용도 좋고 무엇보다 만듦새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만족스러운 수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우리 유료 관객들이 원하는 미지의 영화들이란 도대체 무슨 얘길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파악부터가 안되는 영화 역사 박물관 직행 영화가 아니라 조금은 색다른 스타일과 주제 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바로 이런 정도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는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격변기를 간접적인 배경으로 하는 회상체 미스테리 드라마다. 그러나 그 미스테리의 중심에는 인간의 남은 여생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는 강렬한 사랑의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한 마디로 러브 스토리를 가슴에 품은 미스테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의 실질적인 시작점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법부 검사보로 근무하던 벤자민(리카르도 다린)이 젊은 여성의 간강 살인 사건을 맡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상관인 해외 유학파 검사 이렌느(솔레다드 빌라밀)을 짝사랑하던 와중에 사건을 맡게된 벤자민은 이 사건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데 특히 죽은 여성의 남편 리카르도(파블로 라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면서 결국 스스로의 사랑과 인생마저 위험해지는 처지가 되고 만다.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에서 강간 살인범을 찾아내고 또 체포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주인공이 그 사건을 소설로 쓰게 되고 사건의 당사자들이 어떤 처지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그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등장인물들의 인생 전체를 정의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사랑이 영화 속 모든 미스테리의 열쇠 역할을 하게 된다.

말로는 잊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종신형과 같은 사랑을 부둥켜 안고 있는 영화가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영화와 TV 시리즈를 오가며 역량을 발휘해온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의 연출은 미스테리 자체나 스릴러의 창출 보다는 시종일관 관객들에게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자신의 열정(Passion) 만큼은 바꿀 수 없다”는 대사가 작품을 통해 각인된다.



영진공 신어지




 

“프랭키와 자니”, 달빛을 들으며 카푸치노 한 잔 어때요


이 영화는 그 동네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구전가요 속의 인물과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리고 1936년과 1966년에 이미 동명 타이틀의 영화가 만들어 진 바 있다. 1966년에 만들어진 그 영화의 주연이 누구였냐고?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Johnny Cash, Van Morrison, Duke Ellington 등 수 많은 가수와 연주자에 의해 불려졌던 그 구전가요는 그다지 아름다운 이야기도 아니고 가슴 시린 교훈을 남기는 노래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구전 가요에 나오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발병이 나라든가 서방이 바람을 피워 부인이 목을 맸다는 등의 이야기와 비슷한,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죽인 여자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1936년과 1966년의 영화는 그 구전가요의 내용을 그대로 극화한 것이지만, 1991년의 영화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노래가 아니라 테렌스 맥날리가 쓴 연극 “Frankie and Johnny in the Clair De Lune”을 영화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 영화는 죽도록 사랑하다가 누군가의 배신으로 엄청난 비극을 맞는 내용이 아니라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참으로 고단한 삶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다가 원작 극본의 제목처럼 “달빛(Claire De Lune)”의 도움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달빛? 그렇다. 영화 『오션스 일레븐』에도 삽입됐던 드뷔시의 그 피아노 곡, “Claire De Lune”의 도움을 받아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되겠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 근데 로맨틱 코미디 영화 치고는 좀 독특하기는 하다. 우선 나이가 마흔 둘, 아니 마흔 다섯, 아니 실은 마흔 여섯의 사내와 그리고 나이가 서른 둘, 아니 서른 셋, 아니 실은 서른 여섯 먹은 여자의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사랑할 때 당신이 버려야 할 것”이나 “더 이상 좋을 순 없다” 등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도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이 영화가 독특하다고 할 게 뭐 있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 사내는 전과자이고 여자는 매맞고 살다 헤어진 이혼녀 되겠다. 로맨틱이나 코믹할 건덕지가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헐리우드 특유의 솜씨로 엮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알 파치노”가 누구인가? 카리스마하면 국제 경기에서 챔피언 먹어도 될 만큼 빵빵한 우리의 대부(“God Father”)요, 우리의 상채기 얼굴(“Scarface”)이 아니던가. 또한 “미셸 파이퍼”가 누구인가? 온갖 미인대회는 다 말아먹고도 남을 소위 만인의 연인 아니시던가. 그런 두 사람이 망가지고 상처 받은 삶을 힘겹게 이어가다가 어렵사리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역할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그런데 “알 파치노”와 “미셸 파이퍼”가 공연을 한 건 이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실은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카페이스』(Scarface)에서 “알 파치노”는 마약 조직 보스의 자리를 노리는 악바리 건달로, “미셸 파이퍼”는 그 보스의 쭉쭉빵빵 어린 애인으로 나와 결국엔 “알 파치노”의 품에 안기는 역할로 만났었던 것이다.

암튼간에 아침, 저녁으로 밖에 나서면 아직은 겨울의 기운이 코 끝에 느껴지는 요맘때, 가슴 한 켠을 슬며시 따뜻하게 해 주거나 자연스럽게 미소 한 자락 짓게 하는 드라마 땡기는 분들은 이 영화가 괜찮을 듯 하여 권하는 바이다.


영진공 이규훈

“이층의 악당”, 우울함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한 코미디





<이층의 악당>은 손재곤 감독의 세번째 장편이다. 2000년에 이미 <너무 많이 본 사나이>라는 105분짜리 장편을 필모그래피에 올려놓고 있었으니 손재곤 감독의 존재를 널리 알려준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은 두번째 장편이었던 거다.

특별히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았으면서도 내실 있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달콤, 살벌한 연인>은 그에 걸맞는 관객 호응을 얻어 10억 안팎의 중저가 실속 브랜드 한국영화 제작의 붐을 잠시나마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손재곤 감독의 후속작 <이층의 악당>은 전작과 유사한 코믹 컨셉의 영화로 좀 더 업그레이드된 만듦새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 라고 나는 지금 과거형으로 쓰고 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층의 악당>은 특별히 흠잡을만한 구석을 찾기 힘들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영 마뜩찮은 것이다. 재미있게 봤다, 이 영화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다 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겠으니 마치 사흘째 변비에 시달리는 기분마저 들기 시작한다.

영화를 봤던 당일에는 미스캐스팅, 또는 오버캐스팅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연기야 손색 없이 훌륭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 줄거리의 영화에서 코믹 연기를 펼쳐보이기에는 이들의 존재감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김혜수가 연기하는 삼십대 중반의 과부 캐릭터는 기가 너무 쎄다. 그 드센 기세에 한석규가 밀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골동품 밀매업자에게 사랑방 월세를 내준 어머니와 중학생 외동딸치고는 고양이 앞에 맡겨진 생선 모녀 같은 느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건 분명 애초에 의도된 캐스팅이고 연기였으며 연출이었던 것 같다. <이층의 악당>은 분명 손재곤 감독이 의도했던 바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하자 없는’ 완성품이 분명하다.



<이층의 악당>이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지금은 작품의 완성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손재곤 감독의 전작, <달콤, 살벌한 연인>에 비해 현실의 무게감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삶의 고단함이랄까, 때로는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심정이 그냥 우스개로만 보고 넘길 수가 없었고 또 영화 자체도 이런 부분에 대해 그닥 개운하게 마무리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얘기다.

골동품 밀매업자인 중년의 창인(한석규)는 나름 전문가인척 하고 있지만 연주(김혜수)의 집 이층에 월세를 얻어 들어간 이후 일에 진척이 없고 갈수록 무력감만 느낄 뿐이다. 우울증과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연주는 더 늦기 전에 제대로된 열정이라도 한번 불살라 보겠다고 이층의 소설가 선생님에게 몸과 마음을 다 쏟아보지만 그건 애초에 번지 수가 잘못된 연애 편지일 뿐이다.

심지어 어릴적 우유 광고에 출연했던 연주의 딸 성아(최지우)는 마침내 자살을 시도하고야 마는데 당연히 진짜 죽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고 그토록 소원했던 성형 수술까지 하게 되지만 – 왜 또 하필 얘는 강혜정을 닮아가지고 – 그렇다고 사춘기 시절에 깊게 상처받은 내면이 충분히 치유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 따름이다.







<이층의 악당>은 한술 더 떠서 영화의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조연급 배우들까지 총동원해 삶의 고단함과 각자의 괴로움에 대해 피력하는 시간을 할애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마지막 대소동으로 넘어가기 전, 폭풍 전야와 같은 시간에 주요 출연진들의 모습을  일일이 비춰주며 – 심지어 이웃집 할머니까지! – 그들 모두의 삶을 한번씩 비춰주었던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이 편견을 갖고 보게되는 재벌 2세와 그의 깡패 실장에 대한 권선징악도 이뤄지고 20억짜리 골동품도 찾아 새 아파트와 승용차도 갖게 되지만 <이층의 악당>에서 들쑤셔진 우리 삶의 우울증은 결국 영화를 통해 완전하게 해소가 되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만다는게 문제다.

누군가 <다크 나이트>를 보고 내가 원했던 배트맨은 이런게 아니었다고 말했듯이 나 역시 손재곤 감독의 신작에서 원했던 건 이런게 아니었다. 등장 인물들은 좀 더 경망스럽게 꼴깝을 떨어야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고통이 내게 전염되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연주의 새 아파트에서 이튿날 –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음 날 – 잠에서 깬 창인은 과연 연주와 ‘가족의 탄생’을 이루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그건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열린 결말을 만들어놓은 손재곤 감독의 의도는 분명 전작과는 다른 작품을 의도했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외관상 전작과 다름 없는 엽기발랄 코믹 멜러처럼 해놓고선 사실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의 영화를 내놓은 것이 이번 <이층의 악당>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구석구석 잔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놓고 있어 박장대소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낄낄거리며 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인 것은 맞다.

그럼에도 그냥 웃기만 하고 개운하게 넘기기에는 현실의 무게감이 너무 무겁게 자리를 잡았고 또 깔끔하게 해소되지도 않는 작품이 <이층의 악당>이다.



영진공 신어지


 

“대지진”, 스펙타클 보다는 재난 이후의 드라마





<야연>(2006), <집결호>(2007), <쉬즈 더 원>(2008)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어느 정도 친숙해진 펑 샤오강 감독의 신작입니다. 1976년 24만 명의 희생자를 낸 중국 당산에서의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 얼핏 우리가 흔히 보는 재난 영화의 일종 – 2시간 동안 대지진의 참사 속에서 귀중한 생명을 구해내면서 감동을 주거나 하는 – 처럼 보일 수가 있겠습니다만 전체 136분의 러닝 타임 중에서 당산 지진을 재현한 장면은 영화 초반의 불과 10 여 분 정도 밖에 안되더군요.

<대지진>은 당산 지진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어느 가족의 30 여 년 간의 이야기입니다. 영어 제목인 <After Shock>에 32 Years를 덧붙여 <32 Years After Shock>이라고 하면 영화의 실제 내용과 가장 부합하는 제목이 만들어지는 셈이 되겠네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당산 지진으로 인해 죽은 인명의 숫자는 어마어마하지만 <대지진>은 그 아픔의 깊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지진으로 남편을 읽고 이란성 남녀 쌍둥이가 건물 잔해에 깔린 상태에서 남매의 어머니는 둘 중에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남편과 시댁 식구들 때문이었는지 전반적인 남아선호 사상 때문이었는지 어찌되었든 어머니는 남자 아이를 선택하게 되죠.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그 버림받은 여자 아이가 자신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고 게다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더군요. 남편과 딸이 죽은 줄로만 알고 어머니와 사내 아이는 피난 행렬에 오르게 되고, 여자 아이는 난민 캠프에 들어갔다가 아이가 없는 군인 부부에게 입양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대지진>은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게 된 어느 가족의 30년 사를 잔잔한 톤으로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지진으로 죽은 남편과 딸의 영정을 모시고 당산을 떠나지 않으며 속죄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머니와 한 팔을 잃었지만 젊은 사업가로 성공하게 되는 아들, 그리고 의과대학에 입학했다가 미혼모가 되어 전문의 과정을 포기한 채 캐나다인과 결혼하여 밴쿠버로 이민을 가게 되는 딸의 이야기가 교차로 보여집니다.

그러던 이들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지진 구호 현장에서 – 연도상 2008년의 쓰촨성 대지진인 듯 – 이루어지게 되는데 예상과 달리 펑 샤오강 감독의 연출은 이 순간 마저도 그닥 극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32년 간 가족들과의 재회를 외면해온 딸과 어머니의 재회는 대참사의 상흔 만큼이나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대지진>은 의외로 최근 중국 대중영화들의 경향에서 상당히 벗어나있는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웃 영화 못지 않은 큰 스케일과 기술력으로 영화를 만들되 중국 정부 당국자들이나 좋아할 – 물론 다수 관객들 역시 선호하는 – 대국굴기의 이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시각에서는 다소 지루하게 보여지곤 했던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대지진>은 그 보다 훨씬 순수한 휴머니즘에 충실한 연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6년 대지진의 생존자 가족들 가운데에서 발굴한 이 기막힌 스토리 자체가 가진 힘이 좋아서 구태여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임순례 감독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서 취했던 것과 같이 재연된 드라마에서 벗어나 실제 당산에 건립된 대규모 위령비와 그 앞에선 생존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 됩니다. 대지진의 스펙타클과 2시간 동안의 짜임새 있는 스릴러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다소 기가 막힌 내용과 결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적인 연출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대지진>의 내용 자체가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흔한 가족주의를 강조하기 보다는 재난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이나 인체의 일부를 잃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아픔을 감싸안아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대지진>입니다. 국내에 잘 알려진 배우들은 거의 없지만 연기가 상당히 좋은 편이고 다같이 가난하게 살던 모택동 시절로부터 2008년의 구호 현장에 헬기와 BMW의 SUV가 대거 등장하는 중국 사회의 현대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던 것 같네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