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의 악당”, 우울함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한 코미디





<이층의 악당>은 손재곤 감독의 세번째 장편이다. 2000년에 이미 <너무 많이 본 사나이>라는 105분짜리 장편을 필모그래피에 올려놓고 있었으니 손재곤 감독의 존재를 널리 알려준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은 두번째 장편이었던 거다.

특별히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았으면서도 내실 있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달콤, 살벌한 연인>은 그에 걸맞는 관객 호응을 얻어 10억 안팎의 중저가 실속 브랜드 한국영화 제작의 붐을 잠시나마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손재곤 감독의 후속작 <이층의 악당>은 전작과 유사한 코믹 컨셉의 영화로 좀 더 업그레이드된 만듦새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 라고 나는 지금 과거형으로 쓰고 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층의 악당>은 특별히 흠잡을만한 구석을 찾기 힘들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영 마뜩찮은 것이다. 재미있게 봤다, 이 영화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다 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겠으니 마치 사흘째 변비에 시달리는 기분마저 들기 시작한다.

영화를 봤던 당일에는 미스캐스팅, 또는 오버캐스팅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연기야 손색 없이 훌륭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 줄거리의 영화에서 코믹 연기를 펼쳐보이기에는 이들의 존재감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김혜수가 연기하는 삼십대 중반의 과부 캐릭터는 기가 너무 쎄다. 그 드센 기세에 한석규가 밀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골동품 밀매업자에게 사랑방 월세를 내준 어머니와 중학생 외동딸치고는 고양이 앞에 맡겨진 생선 모녀 같은 느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건 분명 애초에 의도된 캐스팅이고 연기였으며 연출이었던 것 같다. <이층의 악당>은 분명 손재곤 감독이 의도했던 바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하자 없는’ 완성품이 분명하다.



<이층의 악당>이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지금은 작품의 완성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손재곤 감독의 전작, <달콤, 살벌한 연인>에 비해 현실의 무게감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삶의 고단함이랄까, 때로는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의 괴로운 심정이 그냥 우스개로만 보고 넘길 수가 없었고 또 영화 자체도 이런 부분에 대해 그닥 개운하게 마무리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얘기다.

골동품 밀매업자인 중년의 창인(한석규)는 나름 전문가인척 하고 있지만 연주(김혜수)의 집 이층에 월세를 얻어 들어간 이후 일에 진척이 없고 갈수록 무력감만 느낄 뿐이다. 우울증과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연주는 더 늦기 전에 제대로된 열정이라도 한번 불살라 보겠다고 이층의 소설가 선생님에게 몸과 마음을 다 쏟아보지만 그건 애초에 번지 수가 잘못된 연애 편지일 뿐이다.

심지어 어릴적 우유 광고에 출연했던 연주의 딸 성아(최지우)는 마침내 자살을 시도하고야 마는데 당연히 진짜 죽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고 그토록 소원했던 성형 수술까지 하게 되지만 – 왜 또 하필 얘는 강혜정을 닮아가지고 – 그렇다고 사춘기 시절에 깊게 상처받은 내면이 충분히 치유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 따름이다.







<이층의 악당>은 한술 더 떠서 영화의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조연급 배우들까지 총동원해 삶의 고단함과 각자의 괴로움에 대해 피력하는 시간을 할애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마지막 대소동으로 넘어가기 전, 폭풍 전야와 같은 시간에 주요 출연진들의 모습을  일일이 비춰주며 – 심지어 이웃집 할머니까지! – 그들 모두의 삶을 한번씩 비춰주었던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이 편견을 갖고 보게되는 재벌 2세와 그의 깡패 실장에 대한 권선징악도 이뤄지고 20억짜리 골동품도 찾아 새 아파트와 승용차도 갖게 되지만 <이층의 악당>에서 들쑤셔진 우리 삶의 우울증은 결국 영화를 통해 완전하게 해소가 되지 못한 채 끝나버리고 만다는게 문제다.

누군가 <다크 나이트>를 보고 내가 원했던 배트맨은 이런게 아니었다고 말했듯이 나 역시 손재곤 감독의 신작에서 원했던 건 이런게 아니었다. 등장 인물들은 좀 더 경망스럽게 꼴깝을 떨어야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고통이 내게 전염되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연주의 새 아파트에서 이튿날 – 영화의 마지막 장면 다음 날 – 잠에서 깬 창인은 과연 연주와 ‘가족의 탄생’을 이루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그건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열린 결말을 만들어놓은 손재곤 감독의 의도는 분명 전작과는 다른 작품을 의도했다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외관상 전작과 다름 없는 엽기발랄 코믹 멜러처럼 해놓고선 사실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의 영화를 내놓은 것이 이번 <이층의 악당>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구석구석 잔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놓고 있어 박장대소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낄낄거리며 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인 것은 맞다.

그럼에도 그냥 웃기만 하고 개운하게 넘기기에는 현실의 무게감이 너무 무겁게 자리를 잡았고 또 깔끔하게 해소되지도 않는 작품이 <이층의 악당>이다.



영진공 신어지


 

황금연휴 추천영화, “계몽영화”



9월16일 개봉을 앞둔 <계몽영화>의 한 장면


추석 황금연휴를 맞아 개봉될 영화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질 예정이다.
그 중에 9월 16일 개봉하는 우리 영화  <계몽영화>(박동훈 감독)는 영화의 힘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어버린다는 전략으로 얼마 전에 일반 시사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계몽영화>는 120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거나 쳐지는 기운 없이 정학송의 가족사를 3대에 걸쳐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가족의 삶을 보노라면 정교하고 촘촘한 박동훈 감독의 유려한 연출 솜씨에 깜빡 놀라고 만다.
사회의 주류로 살고자 애쓰는 모두를 향한 통쾌한 똥침이자, 동시에 잔잔한 자기 성찰을 반영한 <계몽영화>는 추석영화로 특히 가족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로 탁월한 선택일 될듯하다.




2010.9.9. 계몽영화 시사회 현장, 감독 및 주연 배우분들의 무대인사 

어제 열린 일반시사회에서는 영화만큼이나 속 깊은 이벤트가 열려 관객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영화 속 소품을 모티브 삼은, 분홍색 보자기 안에 정성껏 포장한 라면 두 봉지와 <계몽영화>의 아이디어가 된 박동훈 감독의 단편 <전쟁영화> DVD를 고이 담은 선물 보따리를 관객 100명에게 나눠준 것.
이 모든 정성이 빛을 발하면 좋으련만.

<계몽영화>는 9/16일 CGV무비꼴라쥬 강변,구로,상암,인천,오리,서면 그리고 롯데시나마 건대입구, 필름포럼, 시네마상상마당(9/23), 대전아트시네마(9/19)에서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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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애플

“구하라”, 당신이 알고있는 그녀가 아니다.







  
독립영화계의 신 장르,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의 쇼케이스가 지난 주 카페 ‘가화’에서 열렸다. 100% 온라인으로 유통 중인, 한번 보면 무조건 중독된다는 윤성호 표 5분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를 소개하고 알리는 자리.

원래대로라면 미니 언론시사회 정도로 제법 근엄하게 진행됐을텐데, 신선한 프로젝트인 만큼 딱딱한 것들 떼어놓고 캐주얼한 분위기로 수다도 떨고 공연도 즐길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하루의 끝에서도 여전히 끼와 재치로 똘똘 뭉친 감독과 배우들의 어색해서 더욱 유쾌했던 입담이 귓전에 맴돌았다.

쉬이 잠들지 않아 한번더 인디시트콤 에피소드를 훑고도 갈증이 나 자매품까지 보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덕분에 꿈자리는 요란한 발랄함의 연속이오, 웃으며 눈뜨는 아침은 한결 가뿐했다.

이토록 설레게 만드는 ‘구하라’씨를 아직 모르신다면 여기를 바로 클릭해 주세요.




영진공 애플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1편 ‘두근두근 오디션’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1 두근두근 오디션 from indiesitcom on Vimeo.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2편 ‘두근두근 김하나’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2 두근두근 김하나 from indiesitcom on Vimeo.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3편 ‘두근두근 홍어드립’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3 두근두근 홍어드립 from indiesitcom on Vimeo.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