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다크 월드”, 왜 토르를 그저 그런 영웅의 틀에 넣었을까?

 

<토르: 다크 월드>(이하 <토르 2>)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1편의 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아닌, ‘드라마’ 감독인 앨런 테일러가 연출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드라마와 영화는 엄연히 매체가 다르고 문법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언론시사회가 있었던 날로 짐작되는데, 트위터에 속속 “1편보다 재밌고 유머도 깨알 같다”는 기자들의 한줄평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개봉 전 <토르 : 천둥의 신>(이하 ‘<토르 1>’)과 <어벤져스>까지 복습하고서, 수요일에 개봉한 영화를 바로 그 다음 날 보고 왔다. 허나 적어도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다 “더 재밌다”는 <토르 2>가 내게는 왜 실망스럽거나 재미없는 게 아닌 ‘당혹스러웠는지’ 여전히 생각 중이다.

*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다크엘프족들의 우주선이 아스가드를 공격할 때 가장 당황했다. 고대 신화세계를 기반으로 장구한 영웅신화의 모티브를 그 중심축에 놓고 현대와 타임슬립물을 변주하는 것 같았던 <토르>가, 2편에 와서는 <스타워즈> 뉴 트릴로지와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우리가 익히 본 우주선들의 공격을 받고 우왕좌왕하는 일종의 우주활극 장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벤져스>에서 이미 공중전을 벌이는 우주인들이 등장했던 이상, 그리고 그 종족을 로키가 끌고 온 이상 <토르 2>에서 ‘날아다니는’ 우주인들이 등장하는 건 논리적으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르 2>에서도 아스가드인들은 여전히 육중한 갑옷을 입고 지상에서 칼과 창 혹은 도끼와 방패를 들고 주로 지상전, 육박전을 벌이며 싸운다. 그러나 ‘토르’가 아스가드에서 특별한 존재였던 건 그가 묠니르의 힘을 통해 거의 유일하게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발을 꽉 붙였던 아스가드인들, 바이프로스트에서 떨어지면 추락해 죽는 신들을 보았는데, 우주선이라니 … 어쩌면 이 우주 활극이 진짜 <토르> 시리즈에 예정돼 있던 길이었고 1편의 고대 영웅신화적 서사가 오히려 예외적으로 선택된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의 ‘토르’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어벤져스의 영웅 중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토르 1>의 매력, 그리고 <토르> 시리즈의 세계를 처음 세팅하며 제시했던 그 아스가드의 세계의 매력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의 변화는 다소 ‘뒷통수’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비단 장르나 스타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토르>의 주인공은, 아무리 로키가 활약한대도 결국은 ‘토르’이다. 우리는 이 ‘아버지 힘과 자신의 직위를 믿고 까불던’ 혈기방장하고 천둥벌거숭이던 작자가 어떻게 책임감을 배우고 통치군주의 진짜 조건을 익히며 ‘자기 희생’의 의미를 알게 되며 진지하게 성장하는지 1편을 통해 지켜봤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은 토르는 그저 멍청하고 힘 잘 쓰는 바보 마초영웅이 아니다. 애초 최고의 전사이기도 했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헌신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이는 여러 차례 자신을 배반하고 (물리적으로, 말 그대로) 자신에게 칼을 꽂은 로키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여인과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도 토르는 로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으며, <어벤져스>에 가서도 속 썩이는 동생 때문에 괴로워할지언정 여전히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 토르가 <토르 2>의 로키에게는 불신을 넘어 증오도 내비치는 것 같다. 이건 우리가 알고 사랑하던 토르가 아니다. 그가 로키에게 번번이 속고 당했던 것은 그가 멍청하고 로키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속아’주었’고, 어느 정도는 로키의 선한 본성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너무 컸던 탓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하고 순진한 믿음이 바로 내가 사랑한 토르였다.

반면 로키는, 형 못지 않는 허세작렬에 과시적인 성격, 그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며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지, <토르 2>에서의 모습처럼 시종일관 깐죽대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원래의 로키가 아닌, 아이언맨의 성격이 이식된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로키가 아무리 매력적인 악당이고 주인공 중 하나인들, <토르 1>의 인기가 로키 한 사람만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르 2>를 보면, 마블 스튜디오는 높아져간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예상하지 못한) 로키의 인기가 <토르 2>를 구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확실히 <토르 1>에서 형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심하게 형을 모함했던 로키는 <어벤져스>를 거치면서 어벤져스의 영웅 모두를 상대한 전 우주적인 악당으로 우뚝 섰다. 토르와 크리스 헴스워스 못지 않게 로키와 톰 히들스턴을 좋아하기에 로키의 분량이 늘어난 것도 그에게 강력한 드라마를 부여해준 것도,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형 토르와 손을 잡는다는 설정도 좋다. 그러나 토르와 로키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 있어 디테일은 턱없이 부족하고 얄팍하다.

<토르 1>이 ‘토르 시리즈를 런칭시켜 <어벤져스>에 토르와 로키를 합류시키는 가교가 된다’는 임무를 띄고 고대 영웅신화 전략을 택하면서도 그 둘의 관계를 비교적 밀도있게 그렸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토르 2>에서 이 둘이 협력관계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얄팍하게 그려진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토르 1> 개봉 당시엔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그닥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안 했는데, 역설적으로 <토르 2>를 보고 <토르 1>이 얼마나 좋은 연출이었던가 새삼 상기하게 된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토르>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해 보는 거야!” <어벤져스>의 영웅들 중 토르는 이 지상이 아닌 우주에서 날아온 (반)신이자,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가장 고대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전사였고, 그럼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지구뿐 아니라 우주의 아홉 세계를 보호하는 막강한 존재이고, 다른 세계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왕국을 위해 그 사람과의 이별을 스스로 선택한 남자였다. 헐크나 아이언맨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역사와 사연과 힘과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토르 2>로 인해, 그는 이제 <어벤져스>에 복무하고자 하는 한낱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가 아무리 말 그대로 ‘우주적 스케일’의 재난영화로서 거대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한들, 그 스펙터클의 쾌감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화이”, 잃어버렸던 인간병기의 꿈

 

 


 


 


 



 


 


 


1.  인간병기의 꿈


 


무협영화 팬이었던 내게 남다른 소녀시절의 꿈이 있다면 그건 인간병기가 되는 거였다.


 


주윤발처럼 총 두자루를 들고 건물에 들어가 부대 하나를 박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거나, 성룡처럼 맘만 먹으면 백화점 꼭대기에서 장식용 알전구가 매달린 전기줄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온다거나, 상대방에게 얼굴을 한방 맞고 뒤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다시 허리와 다리의 힘으로 벌쩍 일어나서 방심하는 상대의 뒤통수를 가격한다든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여기서 ‘꿈’이라는 건 말 그대로 ‘꿈’이어서 현실에서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환상. ‘꿈 깰’필요 없는 그런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체력장 4급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고, 100미터는 20초 이하로 뛰어본 적이 없고, 줄넘기를 100회 이상 해 본적이 없고, 쌩쌩이는 평생 해본적이 없고, 농구 골대에 공을 10번 던지면 10번 모두 노골 시키는. 정말 다시 없을 몸치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천재’물도 참 좋아했는데, 천재들이 탁월한 정보 종합수집 능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천재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현실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 몰래 발가락을 이용해 덧뺄셈을 하던 천하의 어벙이였지만.


 


그래도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며 포와로, 미스 마플, 홈즈 같은 천재들에 열광했고, 명절마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액션 영화 챙겨보고 아무도 없는 뒤켠에서 남 몰래 발차기를 해보기도 했다. 나중에 다 큰 후에, 모든 대한민국의 정규교과과정을 마치고, 회사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후에야 나는 나의 ‘인간병기’의 꿈과 ‘천재’의 꿈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간병기의 꿈이란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에 다름 아니었으며, 천재의 꿈이란 나의 지적 능력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하지를 않기 바라는 희망이었다는 것을.


 


 


 



 


 


 


2. 전설의 주먹



아이들이 태어나고 회사 일이 바빠지고 영화관에 가보지 못한것이 이년째인지 삼년째인지도 모르던 어느 날, 회사에서 단체 영화라는 것을 보러갔다. 단체영화란 본디 중고생의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문화의 결핍시대에 선심처럼 베풀어지던 것이라 알고 있다. 아침 10시 영화관에 모인 회사 사람들도 다 그래보였다. 오랜만에 이 낯선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초대된 어색함. 들뜸.


 


그렇게 신입사원, 부장님 차장님 상무님 과장 대리가 순서없이 앉아 본 영화는 “전설의 주먹”이었다. 60년대~70년대생이 대부분인 차부장 이상 급들은 주먹질 하는 자기와 같은 세대의 주인공에게 열광을 했다. 이 뻔한 신파극에 아저씨들은 울고 울었고 나는 그들과는 약간 다를 어떤 감상으로 우울했다. 주먹질의 석연찮음. 그러니까 내가 액션영화를 볼 때의 욕망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과는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열광하던 액션영화에서 그들에게 액션을 강요하는 자들은 없었다. 성룡은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에 3층에서 떨어지며 차양을 붙들고 착륙하는 액션을 하지만 3층에서 성룡을 미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의 주먹”에 자기 몸을 쓰려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받고 싸움판의 투계가 되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오락을 위해 맞고 때리는, 시키는 자에 대한 분노.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해서 하는 액션, 나의 정의를 위한 폭력’을 본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마지막으로 본게 옹박이었던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아저씨들은 ‘자신의 전설’을 설파해댔지만, 나는 ‘강요된 폭력’에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끝까지 변명하는 주인공들이(그리고 내가) 가슴에 걸리며 맘에 안 들었다. 그리고 ‘친구와는 싸우지 않습니다’라는 거부가 너무 소박하고 현실적이어서 유쾌하지 않았다.


 


 


 



 


 


 


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내가 보는 거라곤 일요일 오전에 하는 ‘영화 스포일러’프로그램들 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요새 무슨 영화가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좀 처럼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기 힘든 내가 굳이 “화이”를 본 것은 강렬한 예고편의 대사 때문이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바로 강요된 폭력! “우리는 다 하는데 왜 너는 못해? 너는 다른 것 같아”라는 영화 대사는 슬프게도 내가 직장생활, 일상생활 속에서 상사에게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어쩌면 10년 좀 넘어가는 직장생활에서 늘 강요받아온 것.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순응하다보니 망가져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것.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 것. 그리고 더 흉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몸부림을 치다 다시 밟히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화이”가 좋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강요된 폭력을 용감히 거부했다는 것.


 


폭력을 강요했던 다섯 아빠를 모두 죽이고(한명은 예의상 사고사 처리), 그 다섯아빠에게 폭력을 강요했던 건설사 사장까지 죽여버린다. 타협은 없다. 괴물은 괴물일 뿐 이해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는 징징거리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킨다.



괴물이 됨으로써 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죽여야 괴물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실천해버린다. (그래서 괴물이 된 아이가 아니라 괴물을 삼킨 아이인 것 같다.) ‘저를 왜 기르셨나요?’를 의문하긴 하지만 그 질문에 천착하지 않고, 어떻게든 폭력 강요자들을 이해하여 그 강요를 내재화 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영화 초입에 멧돼지 머리를 쏘던 화이의 총과 마지막 기타가방에 들어있는 화이의 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들일지라도 단호히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화이 덕분에 나는 다시 인간병기의 꿈을 꾸게 되었다.


 


 


 


영진공 라이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80년도에 하나 챙겨볼 만한 작품은 홍금보의 “인자무적”이다. 성룡에겐 대사형급 선배이고 영화계에도 더 오래 몸 담고 있었지만 좀 늦게야 빛을 보게된 그인데 이 작품 역시 취권스타일의 영화로 여기에서 홍금보는  그 나름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어쨌든 성룡의 역사는 계속된다. 매년 대표작들이 나오고 더불어 홍콩영화도 번성해 간다. 82년에 “용소야” 83년에 “프로젝트 A”가 나오는데 이 작품은 홍콩 액션영화의 역량이 모두 합쳐진 영화로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가 나오고, 그 규모가 당시까지 최대 최고 수준이라고 하겠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고, 한장면 한장면 버릴게 없다.



사실 저 트리오가 합으로 맞춘 복성시리즈가 있지만 거기서는 비중이 대사형 홍금보가 중심이었다면 “프로젝트 A”나 이어지는 “쾌찬차”는 성룡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챙겨볼 배우는 역시 해적대장 롤을 맡았던 적위다. 액션 그자체로만 본다면 견자단이란 배우가 나오기전까지는 당연히 적위가 최고였다. 이 영화에서는 트리오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여유있게 제압하기도 한다.


 


 





 


이 배우가 확실히 각인된 건 2년 뒤에 나오는 양자경의 “예스마담”에서 악당사장의 보디가드로 나와서 멋진 발차기를 보여줄 때이다. 검은 교복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내지르던 그 발차기. 냉혹한 인상으로 악역으로만 다수의 배역을 맡지만 그 존재감은 대단했다.


 


82년에는 최강의 콤비라는 뜻의 영화 “최가박당”도 나오는데, 미스터부 시리즈 허관문의 동생인 허관걸이 나오고 영화 자체는 전형적인 홍콩 액션 모험인데,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다 좋아한다. 물론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데이비드 주커나 웨이언스 형제들의 영화보다 이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패러디의 당혹스러움과 여유있는 비꼼이 훨씬 더 매력있다. 또 82년에는 이연걸의 “소림사”가 나오고, 83년에는 저주받은 걸작인 무협환타지 “서극의 촉산”이 탄생한다.


 


좋은 액션 배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사람 더 이야기하자면 84년작 “쾌찬차”의 베니 유키테즈가 있다. 킥복싱 챔피온이였던 배우 베니 유키테즈는 이 영화와 “비룡맹장”에서 성룡의 카운터파트로 나오는데 격투장면만 따지고 본다면 성룡과 가장 합이 잘 어울리고 파이팅으로 화려한 상대역이였고 본다.


 


85년으로 넘어가면 성룡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폴리스 스토리”가 나온다. 성룡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성룡의 개성이랄수도 있는 건 바로 ‘올바름과 책임감’인데 영화 속의 성룡은 언제나 선하고 착하고 남에게 최선을 다해 배려한다. 악당조차 쉽게 용서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다른이들에게 민폐없이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고군분투 스타일이다.



그리더가 배신이 끝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더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한다. 바로 그런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경찰이겠다. 물론 올바른 의미에서의 경찰인지라 그는 승진이나 권력이나 재물에 관심이 없다. 가족을 사랑하고 여자친구나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가난한 서민이나 어린이, 여성들에게 더 없이 친절하다.


 


 




 



그런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폴리스 스토리”이고 작품자체의 품위도 높다. 또한 다대일 격투씬의 정수를 보여준 쇼핑몰 장면이나, 폴리스 스토리2에서 어린이 놀이터 장면은 성룡의 열정과 투쟁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최고의 격투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세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86년에는 성룡의 행보를 주춤하게 만든 무협걸작이 또 하나 나오는데, 바로 하늘도 총애한다는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다. 흘러간 스타 적룡 그리고 차세대 스타 장국영과 함께 주윤발이 타이틀롤을 맡은 “영웅본색”은 다시 설명이 필요없는 20세기 신무협의 총아다.



칼과 창 대신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나타난 이 영웅은, 무협 영웅들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리고 협객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오우삼의 연출테크닉은 홍콩 영화의 연출제작 스타일을 일거에 변혁시켰고, 총격신들의 장면은 이전 영화들이 사람의 몸동작을 넓게 그대로 담아낸 것과는 달리 카메라 앵글과 방향, 움직임에서 무협적 박진감과 극적 긴장감이 현대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떻게 어우러 지는가를 결정지어 버렸다.



사실 물량과 화력이 아닌 총격장면의 구성 그 자체만으로는 난 아직도 서구영화들이 홍콩영화들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본다. 바바리코트와 권총, 그리고 성냥개비로 기억하는 이 영화의 잔영은 80년 후반을 살던 남성들의 혼을 흔들어 버렸다.



이 영화는 우정과 의리라는, 박물관에나 있을 것같은 인간의 죽어버린 감성에 다시한번 성냥불을 붙혔다. 그리고 그 작은 불은 진정 멋졌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본색”을 네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19금 폭력장면 주의

 


 


그러면 우리 성룡은 놀고 있었나? 당연히 아니다.


그해 성룡은 “용형호제”를 내놓는다. 그야말로 글로벌 프로젝트 “용형호제”는 대규모 로케이션과 지나칠 정도의 위험한 스턴트 장면들로 가득한데, 성룡이 이 영화에서 죽을뻔 했던 사고 내용은 유명한 일화이고 “프로젝트 A”에서의 부상과 이 영화의 부상 충격으로 이후 성룡의 영화 제작현장에서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소음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도 성룡이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보물을 Get하러 다니는 모험가라는 영화 소재가 매우 좋아서 이후 수많은 시리즈 프로젝트 계획안들이 나왔는데 천하의 성룡도 용형호제 시리즈 연작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2편은 한참 뒤인 90년에야 제작이 됐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성룡은 시작 전에는 조심스러워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미쳐버리는 구나
라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해 또 재밌는 영화 한 편이 나오는데 홍금보의 “부귀열차”다. 내용은 부자들을 태운 기차를, 자기 고향의 발전을 위해 철로를 폭발시켜 멈추게 하고 그 부자들이 며칠동안 고향마을에 머물게 하려는 홍금보와 마을사람, 기차승객 그리고 그 열차의 부자들의 재물을 노리는 떼강도들이 어우러져 버리는 해프닝인데,


 


재미도 재미지만, 성룡과 성가반을 제외한 당대의 기라성같은 액션배우들과 코믹배우들이 거의 모두 다 나온다. 홍금보, 원표는 물론이고 전설의 스타 왕우가 황비홍의 아버지 황기영으로 나오는 걸 비롯해,


 


 




 


 


적위나 “강시선생”의 임정영, “천녀유혼”의 우마, 한국 출신의 황정리씨, 쿠라타 야스아키 (창천보소), 오오시마 유카리 (대도유가리) , 신시아 로즈록 (나부락), 수많은 악역 고수를 맡았던 종발, 원화 (용쟁호투 격투디자인), 고비, 양사, 맹해 등이 나오고 증지위나 오요한같은 한가락 하는 코미디 배우도 쏟아져 나온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금보의 영향력과 역량을 고스란히 볼 수 있기도 하다.


 


 




 


 


*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1부]


 

 


 


 



 


 



70년대를 기점으로 9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한국은 경제적 대격변기였고 폭발적 성장기였다. 88올릭픽과 OECD 가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성장은 소위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뒤안길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저임금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구조속에서 우리 아버지,어머니, 형님, 언니들에게 필요했던건 실현 불가능한 커다란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위로가 되는 즐길거리가 아니었을까.




명절을 맞아 어렵사리 마련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시골집에 가면 어린 조카들이 삼촌과 이모에게 들러 붙었고, 명절 차례 후에는 그놈들을 몰고 읍내 영화관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알현할 수 있었던 짜짱면 한 그릇과 식후의 사이다 한 잔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먹고 살기 바빠 이번에는 못 내려간다고 전화통에 대고 울먹이던 작은 형들도 명절 오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단성사 대한극장을 향하곤 했다. 대지나 화양극장도 좋았고, 부산의 태화극장도 좋았다.



 


그 시절의 명절에는 특히나 홍콩영화가 대세 중 대세였다. 그리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의 명절을 관통한 홍콩영화의 역사에서 정수리에 우뚝 선 영화는 역시 “취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취권”을 통한 성룡의 출현은 이소룡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이소룡 역시 50 ~ 60년대 쇼브라더스의 무협영웅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팔이”시리즈의 왕우, “금영자”의 정패패, “돌아온 외팔이”와 “13인의 무사”의 적룡 등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몇날 몇밤이 지나도 모자랄터이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어 그들의 진면목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간에는 그저 그 시절의 작품들을 한 번 훑어, 아니 핥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름 핵심이랄 수 있는 무협무비를 골라보도록 하자.


 


 


 



 



 


 



70-90년대를 관통하는 대명사는 역시 성룡이다. “성룡이영화”라는 말로 대별되는 홍콩 영화의 최대 번성기는 그 이전 쇼브라더스시대의 왕우,정패패,강대위,적룡에서 시작되어 이소룡으로 이어진다.



이소룡의 역사적 출현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인종적 자부심마저 심어주기도 했다 -.-


 


1971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아직 서양제국의 힘에 눌려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살 때, 삼국지의 관우나 조자룡에 비유할 수 있을 진짜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소룡”이었다.



용쟁호투의 첫장면에서 이소룡에 쥐어 터지는 대련 상대자로 나온 홍금보나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해 나가 떨어지던 성룡에게 이소룡은 거대한 영웅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그는 패배를 몰랐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의 기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촌동네의 허름한 공장을 배경으로 당산출신의 이 멋진 형님이 악당들을 모두 제압해 버리는 장면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이소룡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동작이 나오고 어찌 저리도 아름답게 힘과 에너지를 표현낼 수 있는지, 보는 이들 모두에게 그건 황홀경이였고 예술이었다.


 


단역이나 tv시리즈를 제외한다면 그가 남긴 단 4편의 전설적 작품 중에서 딱 한 작품만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단연 “정무문”이어야 할 것이다. 화면 땟깔 좋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높고, 액션 촬영이 튀지않고 안정적인 편이라 액션을 못 따라가는 분들에게도
보기좋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 비장미 …… 영화 말미의 그, 영화 역사상 최강의 비장미. 그래서 이 72년도 작품을 우선 강추하는 바이다.


 


73년 이소룡 사망후 홍콩영화계는 아노미와 패닉 그 자체를 보인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영화판은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거룡, 당룡,소룡, 대룡 등등 용용용브라더스를 쏟아낸다.


 


 


 



 


 


 


허나 무수히 나섰던 그의 후배들과 아류작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였다. 그런 시절이 어언 지나고 70년대 말이 되었을 때 하나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비어진채로 주인을 기다리던 왕좌에 다가섰던 건 바로 78년 “취권”과 “사형도수”의 성룡이었다.


 


79년 추석 서울바닥을 비롯한 전국은 코 큰 중국청년에게 홀랑 빠져든다. 영화 “취권”은 당시 아시아 전체 모든 흥행기록을 다 깼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92만 명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단일 개봉관 체제에서 한 극장에서만 90여만 명을 동원했던 것이니 이건 그냥 계산상으로봐도 6개월이 넘게 내리 매일 매진행진을 벌인 것이리라. 게다가 지방극장의 기록은 남아있지도 않으니 그 흥행의 역사만으로도 그냥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상으로는 “사형도수” 또는 “사형조수”가 먼저 홍콩현지에서 개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쨌든 78년에 제작된 두 영화는 상호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성장드라마란 점, 코믹한 설정과 액션을 감미했다는 점, 그리고 두 작품의 내용적 규모가 기존의 비장미 가득한 그런 대의명분보다는 작은 정의, 한사람으로서의 바른 삶 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도 제작과정상 서로 보완하고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형도수”의 경우, 그 나름의 진지한 의미는 바로 강자의 영화가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 서민의 영화라는 거다. 주인공 자체가 그런 배경과 계급을 가지고 수모도 받고 서러움도 받는데, 기존의 강인한 무협 주인공들에 비해 성룡은 그런 연기를 소화해 낼 수 있엇따. 따지고보면 취권에 비해서도 사형도수는 그런 의미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래도 성룡 대역사의 시작은 취권으로 봐야하고, 그래서 이 작품을 두번째로 강추하는 바이다.


 



 





 


 



“성룡영화”가 새롭게 기초해내고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다시 모방한 스토리 라인과 특징들은 철없지만 선량한 주인공, 그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노숙자풍의 신비로운 사부,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실현해내는 작은 정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룡의 작품들은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전의 홍콩영화 작품들이 엄청난 대의명분과 역사적 승부, 부모님의 복수등 무거운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성룡의 영화들은 다소 가벼웠고 내용도 코믹하고 액션도 전통적인 무술들이 아니라 변형되고 가볍고 코믹한 것들이다.


 


사실 무협 액션들은 당연하게도 폭력이 미화되고, 심지어 공공의 동의 없이 자력구제로 악당을 처단한다. 이건 모두 불법이고 이런 면에서 거의 모든 무협물들은 환타지다. 그래서 무협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은 이 환타지를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의 무협과 액션은 전통적인 무협의 강하고 빠른 액션보다 기기묘묘하고 신기한 동작과 자세들을 선보였고, 혹자는 아크로바틱 쿵후라고도 부르는 그런 가볍고 경쾌한 무술들은 오히려 나름 신체단련과 자기방어라는 무술 본연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도 성룡 본인이 그런 무술경향을 체계화할 욕심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당시 이런 무술과 무술영화는 일대의 혁신이었는데 사실 성룡이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룡은 이어서 79년에 “소권괴초”, 1980년에 “사제출마”들을 줄줄이 발표하며 계속 이전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대히트를 연속시킨다. 그리고 그 무렵 미국에서 “배틀 크리크”, “캐논볼”에 출연하였다.



특히 “배틀 크리크”는 미국식 제작시스템을 통해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고 재밌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액션도 훨씬 쉽고 간단하지만 선이 분명하게 짜여져 세계를 무대로 하는 액션배우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여담이지만 “배틀 크리크”의 극 중 주인공은 1930년대 미국에 온 한국인으로 설정되어있기도 하다. 특히 종반부에 칼잽이 상대역과의 대결장면은 서양액션배우들과의 합을 어떻게 보여줄 지에 대한 완성된 답이라고 평가하고싶다.


 


 


 





배틀 크리크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퍼시픽 림”, 덕후가 아니어도 충분히 흥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영화

 

 


 


 


이거 조으다 ^.^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을 처음 보고 온 뒤에 트위터 계정에 이렇게 올렸다. “저는 덕이 아닌데 왜 <퍼시픽 림>이 재밌는 거죠?”


 


이후 3D 아이맥스로 한 번, 그리고 다시 2D로 한 번, 이렇게 총 세 번을 보았다. 그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건 베켓 형제가 집시 데인저를 타고 첫 출격하는 장면을 3D 아이맥스로 봤을 때다.


 


거대한 집시 데인저의 각 근육 부분과 이 기계 덩어리의 각 부분이 연결돼 있는 데크들, 심지어 베켓 형제가 입은 수트까지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기스와 흉터가 나 있다. 너무 반짝반짝 화려한 새 것이 아닌, 사용감과 시간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카이주가 처음 등장한 지 이미 십 년은 훨씬 넘었고, 예거 프로그램이 가동된 지도 몇 년은 지난 때니 당연한 거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내게 그 흠집들과 상처,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들이 이유 모를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 스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


 


 


 


그 와중 라민 자와디의 테마음악이 울리며 긴장감과 흥분을 점점 고조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물살을 가르며 발걸음을 떼는 집시 데인저의 모습은, 2D에서보다 3D에서 훨씬 더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락스타처럼 영광을 누리던’ 초기의 중후한 파일럿들이 이미 은퇴를 하고 베켓 형제처럼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기보다 ‘어린’) 파일럿들이 투입되었던 때. 내레이션에서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라는 서술은 “피로와 매너리즘이 쌓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는 건 바로 그 시점이고, 첫 4등급 카이주가 등장했던 이들의 첫 전투는 처절한 패배로 기록된다.


 


그리고 영화는 5년 뒤로 건너뛴다. 예거 프로그램의 잠정 폐지를 앞두고 알래스카 기지가 폐쇄되는 날이다. 주요 기지가 홍콩의 섀터돔으로 옮겨지고, 5년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마음을 닫아걸었던 우리의 주인공 롤리가 돌아오고, 여주인공이 비로소 등장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현재’ 시점이란, 이제 예거 프로그램이 이미 ‘민영화’된 후의 일이다. 서른 대도 넘던 예거는 이제 네 대가 남았을 뿐이고, 이들의 자금책 중 가장 큰 돈줄은 카이주 장기 밀매시장의 일인자이다. 대장인 스태커가 “우리는 레지스탕스”라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계 정부들은 ‘장벽’을 세우는 것으로 이미 전략을 전환한 후이다.


 


무수한 이들이 지적하듯 <월드워 Z>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도 ‘장벽’이 등장하되 주인공이 5년간 방황한 정처 정도로만 언급된다. 장벽은 방어막이자 ‘보호’를 위한 것이되, 한편으로 ‘고립’을 뜻하기도 한다. <월드워 Z>나 <퍼시픽 림> 모두 이러한 고립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러한 고립이 현대사회에선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혹은 가능할 리 없다는 믿음에 대한 공포가 어렴풋하게나마 동시에 읽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립이 어느 정도 얼개를 갖추고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면 바로 <설국열차>의 기차 안이다.)


 


 


 



장벽이라고? 풉!


 


 


그리고 좀비나 카이주 모두 ‘난공불락’이라던 장벽을 너무 쉽게 뚫는다. <퍼시픽 림>에서 형을 잃고 마음을 닫은 롤리가 하필이면 장벽 건설현장으로만 돌았던 것으로 설정된 건, 하루 벌어 하루를 살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노가다 일감이 주로 장벽 건설현장에 제일 많았기 때문이지 설마 방어태세 속에 고립을 자처하는 롤리의 심적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벽이 뚫린 바로 그 시점, 롤리가 예거로의 복귀를 결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장벽을 포기하고 예거로 돌아왔으니 또 너무 쉽게 마코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예거들은 주로 저 머나먼 바다 한가운데를 프론트라인으로 잡고 괴수들을 상대하지만, 이놈의 괴수들은 툭하면 도시로 난입해 도로며 건물이며 전선들을 부순다. 체르노 알파와 크림슨 타이푼이 안타깝게 사망한 홍콩 앞바다에서의 전투씬에서도, 두 녀석이 나타나서는 한 녀석이 힘겹게 예거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다른 한 놈은 기를 쓰고 도심을 향해 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지구상 ‘인간’이라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혹은 겁 없이 드리프트를 해온 인간 녀석을 찾기 위해서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또한 우리는 스토리 밖에서, 그것이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수는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예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시로, 시내 중심부로 향하는 괴수들의 몸짓에는, 그러한 장르 자체의 혹은 스토리 내외적 설정 외에도 내게는 어떤 기묘한 절박함이 보인다.


 


이 괴수들은 자신들을 조종하고 명령하는 식민주의자들의 명령과는 별개로, 그것이 설사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라는 수단일지언정 어떻게든 인간들에게 말을 걸고 접촉하려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들은 인간이 방어를 위해 쌓았으나 결과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게 될 ‘장벽’을 그렇게 손쉽게 뚫어버리는 것인가 … 는 개소리.


 


 


 



기운 센 천하장사아~ 무쇠로 만든 사라암~


 



 


하지만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퍼시픽 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의 상처와 흔적이 가득했던 예거들이 새단장과 중무기 보강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그 육중한 철골의 무게감을 자랑하며 괴수들과 싸우는 장면들 자체의 쾌감이다.


 


바위 재질처럼 단단하고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괴수의 피부를, 저 육중한 ‘무쇠팔 무쇠다리’가 주먹질하고 찢고 박살낸다. 괴수영화를 본 게 별로 없음에도 우주에서 나타난 괴수의 피부는 바로 저렇게 표현되는 게 정석일 것 같고, 메카닉물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저 타격감과 무게감은 메카닉물이 응당 갖추어야 할 미덕처럼 보인다.


 


아무리 로봇영화나 로봇만화에 별 흥미나 향수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징가제트와 태권브이를 보고 자랐고 그 주제가가 유전자에 박혀있으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로봇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나왔으며, 이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과 기계의 공명과 동기화를 전제한 에반게리온을 보며 20대를 보냈다. 그러니 <퍼시픽 림>에 스스로도 납득 못 할 흥분을 느끼며 어쩐지 “고맙습니다”를 읊조리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박해천 교수가 말하는 대로 70년대에 태어나 시간과 경제의 여유를 누린 중산층에서 자라 소년잡지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갖는 마지막 판타지인지 어쩐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것이 출산과 양육의 포기와 부동산 하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더욱.)


 


 


 



ps1. OST 쩐다! 음악 맡은 라민 자와디가 한스 짐머 사단 출신이라더만, 청출어람인듯.


 


ps2. 극장에서 3번밖에 못 봤는데 다 내리다니 덕 횽아들 좀 실망이었다능?! 내가, 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를, 어? 극장서 7번을 봤는데, 7번까지는 무리라도 5번 볼 동안 정도는 버텨줘야 하는 거 아니었냐능?!?!


 


ps3. 덕 중의 덕들은 역시 체르노 알파에 열광하는 게 내가 봐도 당연해 보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집시 데인저… 체인 소 달고 원자로 몸에 단 아날로그 구형에 제일 마징가 제트랑 닮았다. (흥, 체르노 알파는 깡통로봇 닮았다!)


 


ps4. 기쿠치 린코의 모리 마코는 볼수록 싫어지는 게, 일본 만화/애니에서 익히 봐왔던 소녀들, 그러니까 공부도 잘하고 명랑하고 뭐도 잘하고 막 그런데 좋아하는 오빠 앞에만 서면 얼굴 새빨개져서 들지도 못하고 어리버리하다 실수하고 당황하고 도망가는 그런 귀여운 캐릭터를 연기한답시고 연기하는 거 같은데 언니, 얼굴이 그런 귀여운 척하기에는 스스로 삭았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좋게 말하면, 포스 있게 생겼는데 귀여운 척을 해서 계속 당황스러웠음요.


 


ps5. 난 이드리스 엘바의 스태커 펜테코스트 대장님의 그 ‘연극하는 듯한’ 말투가 매우 좋은데 그거 거슬려하는 사람 많구나. 아주 정갈하신 발음과 인토네이션의 영어로 셰익스피어 고전극의 독백대사 읊듯 대사하시는 게 대장님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렸음요.


 


ps6. 뉴트가 한니발 차우네 본부 가서 “으악 여기가 천국일세! 여기 장기! 여기 뇌! 여기 기생충!”하며 꺅꺅거리는 장면에서 좀 웃었음. 아, 어쩜 덕의 마음을 저리도 잘 표현하는 씬인가.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