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 잃어버렸던 인간병기의 꿈

 

 


 


 


 



 


 


 


1.  인간병기의 꿈


 


무협영화 팬이었던 내게 남다른 소녀시절의 꿈이 있다면 그건 인간병기가 되는 거였다.


 


주윤발처럼 총 두자루를 들고 건물에 들어가 부대 하나를 박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거나, 성룡처럼 맘만 먹으면 백화점 꼭대기에서 장식용 알전구가 매달린 전기줄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온다거나, 상대방에게 얼굴을 한방 맞고 뒤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다시 허리와 다리의 힘으로 벌쩍 일어나서 방심하는 상대의 뒤통수를 가격한다든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여기서 ‘꿈’이라는 건 말 그대로 ‘꿈’이어서 현실에서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환상. ‘꿈 깰’필요 없는 그런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체력장 4급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고, 100미터는 20초 이하로 뛰어본 적이 없고, 줄넘기를 100회 이상 해 본적이 없고, 쌩쌩이는 평생 해본적이 없고, 농구 골대에 공을 10번 던지면 10번 모두 노골 시키는. 정말 다시 없을 몸치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천재’물도 참 좋아했는데, 천재들이 탁월한 정보 종합수집 능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천재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현실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 몰래 발가락을 이용해 덧뺄셈을 하던 천하의 어벙이였지만.


 


그래도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며 포와로, 미스 마플, 홈즈 같은 천재들에 열광했고, 명절마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액션 영화 챙겨보고 아무도 없는 뒤켠에서 남 몰래 발차기를 해보기도 했다. 나중에 다 큰 후에, 모든 대한민국의 정규교과과정을 마치고, 회사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후에야 나는 나의 ‘인간병기’의 꿈과 ‘천재’의 꿈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간병기의 꿈이란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에 다름 아니었으며, 천재의 꿈이란 나의 지적 능력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하지를 않기 바라는 희망이었다는 것을.


 


 


 



 


 


 


2. 전설의 주먹



아이들이 태어나고 회사 일이 바빠지고 영화관에 가보지 못한것이 이년째인지 삼년째인지도 모르던 어느 날, 회사에서 단체 영화라는 것을 보러갔다. 단체영화란 본디 중고생의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문화의 결핍시대에 선심처럼 베풀어지던 것이라 알고 있다. 아침 10시 영화관에 모인 회사 사람들도 다 그래보였다. 오랜만에 이 낯선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초대된 어색함. 들뜸.


 


그렇게 신입사원, 부장님 차장님 상무님 과장 대리가 순서없이 앉아 본 영화는 “전설의 주먹”이었다. 60년대~70년대생이 대부분인 차부장 이상 급들은 주먹질 하는 자기와 같은 세대의 주인공에게 열광을 했다. 이 뻔한 신파극에 아저씨들은 울고 울었고 나는 그들과는 약간 다를 어떤 감상으로 우울했다. 주먹질의 석연찮음. 그러니까 내가 액션영화를 볼 때의 욕망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과는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열광하던 액션영화에서 그들에게 액션을 강요하는 자들은 없었다. 성룡은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에 3층에서 떨어지며 차양을 붙들고 착륙하는 액션을 하지만 3층에서 성룡을 미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의 주먹”에 자기 몸을 쓰려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받고 싸움판의 투계가 되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오락을 위해 맞고 때리는, 시키는 자에 대한 분노.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해서 하는 액션, 나의 정의를 위한 폭력’을 본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마지막으로 본게 옹박이었던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아저씨들은 ‘자신의 전설’을 설파해댔지만, 나는 ‘강요된 폭력’에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끝까지 변명하는 주인공들이(그리고 내가) 가슴에 걸리며 맘에 안 들었다. 그리고 ‘친구와는 싸우지 않습니다’라는 거부가 너무 소박하고 현실적이어서 유쾌하지 않았다.


 


 


 



 


 


 


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내가 보는 거라곤 일요일 오전에 하는 ‘영화 스포일러’프로그램들 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요새 무슨 영화가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좀 처럼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기 힘든 내가 굳이 “화이”를 본 것은 강렬한 예고편의 대사 때문이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바로 강요된 폭력! “우리는 다 하는데 왜 너는 못해? 너는 다른 것 같아”라는 영화 대사는 슬프게도 내가 직장생활, 일상생활 속에서 상사에게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어쩌면 10년 좀 넘어가는 직장생활에서 늘 강요받아온 것.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순응하다보니 망가져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것.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 것. 그리고 더 흉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몸부림을 치다 다시 밟히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화이”가 좋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강요된 폭력을 용감히 거부했다는 것.


 


폭력을 강요했던 다섯 아빠를 모두 죽이고(한명은 예의상 사고사 처리), 그 다섯아빠에게 폭력을 강요했던 건설사 사장까지 죽여버린다. 타협은 없다. 괴물은 괴물일 뿐 이해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는 징징거리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킨다.



괴물이 됨으로써 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죽여야 괴물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실천해버린다. (그래서 괴물이 된 아이가 아니라 괴물을 삼킨 아이인 것 같다.) ‘저를 왜 기르셨나요?’를 의문하긴 하지만 그 질문에 천착하지 않고, 어떻게든 폭력 강요자들을 이해하여 그 강요를 내재화 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영화 초입에 멧돼지 머리를 쏘던 화이의 총과 마지막 기타가방에 들어있는 화이의 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들일지라도 단호히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화이 덕분에 나는 다시 인간병기의 꿈을 꾸게 되었다.


 


 


 


영진공 라이


 


 


 


 


 


 


 


 


 


 


 


 


 


 


 


 


 


 


 


 


 


 


 


 


 


 


 


 


 


 


 


 


 


 


 

“전우치”, 도술의 정신을 살리다

최동훈 감독이 새로 내놓은 영화 <전우치>에 대해 실망이라거나 혼란스럽다는 평이 많던데 … 물론 영화가 좀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 지점도 있다.

감독의 전작인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의 대사빨과 치밀한 구성을 기대한 이들이
그래서 실망을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실은 <전우치>도 대사빨 좀 살리는 영화다.
이번에는 시대극 대사빨을 시도한 건데 … 일단 관객들이 적응하는데 버퍼링이 필요하지만 뭐 그럭저럭 먹히는 농담들 있다.
그 중 몇 개는 관객들이 자지러지기도 하던데 … 특히 유해진의 역할이 컸다.

“턱주가리”, “장사치들에게 나라를 맡긴다니, 우환이…” 등등의 대사는 어긋나는 두 시대를 관통하는 대사빨이 아니던가. 물론 그것이 대사빨로 끝난 것이 좀 아쉽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는 대사빨이나 구성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도술의 기본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컨셉으로 비교되는  <아라한 장풍대작전>보다 낫다. <아라한>은 도의 한 부분인 마음을 비우고 꾸준히 수련한 자의 경지를 슬쩍 보여주긴 했지만, 도의 나머지 부분은 아쉽게도 놓쳤다.

그것이 뭐냐하면 … “세상 뭐 있어?” 정신이다.
도술은 기본적으로 해킹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한 것도 바로 도술이다.
세상에 대한 고정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을 주어진 대로 보지 않고 관점을 바꾸는 것.

그렇기에 그림 속으로 도망칠 수도 있고,
그림 속에 암자를 지어놓고 살 수도 있으며,
그림 속에 갇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술은 진지함 보다는 경쾌함의 미학이다.
<전우치>는 휘적휘적 액션을 펼치는 강동원을 내세워 이 경쾌한 도술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그리고 하나 더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복선이다.
역시 이 영화와 비교되는 <화산고>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이거다.
화산고에는 액션만 있고 이해가 없었다. 관객들은 그냥 끝없이 커져가는 액션의 자가폭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전우치>에는 미친 무당의 예언과 스승님(백윤식)의 예언 같은
몇가지 복선이 이야기의 맥을 잡아준다.

그 결과, 관객들이 “아하! 그렇구나” 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배우들은 물론 좋다.
영화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배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오히려 배우들이 낭비되었다고 투덜거리는 경우는 있지만.

강동원은 무엇보다도 “기럭지!”의 힘이 좋다.(미안하다. 대사는 좀 약했다.)
그 기럭지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화면빨을 발휘하는 배우는 정우성 이후 첨봤다.

임수정은 예쁘고 엉뚱하면서도 생생하고 … 도사들, 특히 김윤석의 카리스마가 좋다.

그래도 아쉬운 것 하나는 조금 더 동시대성을 살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동시대성이 사라지다보니, 요괴들이 불쌍하더라. 걔네들 그냥 내비뒀으면 환자들 치료하며 잘 지냈을 애들 아닌가.

게다가 “쥐 요괴” !!!
걔는 사실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거 많은 분들이 알고 있지 않던가?
만약 그렇게만 만들었다면 진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을 터인데 …
그게 가장 아쉽다.

물론 그랬다면 아예 개봉을 못했을 것이고 영화사와 감독은 세무조사 받았으리란 상상을 해보면 지금 이거라도 어디냐 싶다.

하 수상한 시절에 이 정도면 감동이지 뭘 더 바라느냔 생각이다.

영진공 짱가

강동원 흥행의 법칙과 영화 “전우치”


무조건 예쁘게 나오면 흥행 성공한다 …

… 라고 강동원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그래도 컬트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반면<M>이 그러지 못한 것은 강동원의 모습에서 대머리 기가 보였기 때문 …
이라고들 하죠.

물론 정말로 그에게서 대머리 기가 보인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 짧은 M자 머리가 보기에 살짝 부담스러웠던
거겠죠. 아직 꽃다운 ‘소년'(잘해봤자 ‘청년’)을 ‘어른 남자’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라 해야 할까. 이 면에 대해선
이명세 감독님이 조금 “성격이 급하셨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몇 년만 참으셔도 됐을 것을, 얜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다고요.

군대 갔다오기 전에 되도록 샤방하고 예쁜 모습을 많이, 라는 게 누나팬들의 공통된 심정이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난 듯,
어쨌든 공익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전우치>에선 강동원이 아주 예쁘게 나올 듯하니 다행입니다만.

전우치

아이고 저 표정 봐라, 우째 저래 이쁘노.

강동원이 예뻐서 <늑대의 유혹>도 앉은 자리에서 DVD 코멘터리로 보는 것 포함 두 번 정주행하고 장면
발췌보기로 또 돌려본 저라고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이 처음에 강동원 데리고 <전우치> 찍겠다고 그랬을 땐 아니
감독님하 뭐 잘못 드셨나요, 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한 또래들 중에선 그래도 강동원이 의외로
연기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같은 영화에선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작의
주연으로서는 아직 검증 안 된 것도 사실이죠. 거기에, 사실 최동훈 감독의 이전 두 작품도 보면 매우 능숙한 배우들에게 기댄
면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제자리에서 제 몫 알아서 똑소리나게
해먹는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지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박신양도 그랬고, 조승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백윤식 선생이나
김윤석, 이문식, 천호진, 주진모 …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에선 너무 잘하시는 백윤식의 연기를 오히려 살짝
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살짝 삑사리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촬영이 끝난지 한참 지나서도 좀처럼 개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영 안 나왔단 소문이
파다하기 돌았습니다. 물론 CG를 잔뜩 사용하는 영화들은 원래 후반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긴 합니다만, 대체로 후반작업이
길어지고 개봉이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본 촬영분이 나빠서 배급사에서 개봉을 미루며 덧손질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십상입니다. 이건 많은 영화들의 케이스에서 일정부분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했었으니, 100억이 넘게 들어갔다는
<전우치>에 대해 무성한 뒷말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기대를 갖게 된 건 지난 번 제작발표회에 다녀와서(새 창으로 열기)
니다. 맛뵈기 동영상 속에서 강동원의 전우치는 매우 이쁠 뿐 아니라 발랄하고 유쾌했고, 임수정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뻤으며,
염정아는 얄팍해서 웃기지만 밉지는 않은,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석의 카리스마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감독이나 배우들의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자신감은 봉준호 감독과는 또 다른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에요. 봉오빠가 등장할 때 제가 같이 들떴던 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영화를 갖고 노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거였는데, 최오빠 역시 그렇습니다. 상영된 메이킹 장면들에서, 물론 힘들고 고민하거나 심지어 험악한 때도 많았겠고 그건 모두
잘라냈겠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만들면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CG인데요. 맛뵈기 동영상에선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CG의 수준이 약간 조잡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본편에서
색보정과 기타 다른 보정을 거치면 달라지겠으나, 예고편에서 드러나는 밤의 추격씬 화질도 다소 조악했고요. 물론 그런 거 보정하는
것도 후반작업 중 일부이고 제작발표 할 때에도 한참 CG 작업중이라고 했었으니, 본편에선 보다 나은 화면을 볼 수 있겠지요.

영화 <전우치>의 촬영현장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본 전우치와 서화담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우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
같군요. 생몰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대 여러 기록에서 전우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장난기와 유머가 가득한 선행의 기록도
있지만 치기와 악동의 기록도 꽤 됩니다. 남 골려주고 소소하게 복수해주고 상사병 걸린 친구 돕겠다며 정절 지키고 있던 과부
보쌈하는 행태까지 …

전우치가 “발라버리겠다”고 자신만만 찾아갔으나 오히려 된통 깨지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서화담이, 우리가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알고 있는 그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맞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지요. ‘리’는 개무시하고 철저한 주기론을
펼쳤다는 이 양반이 한편으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신비술이나 동양적인 은비학,
도술에 관심이 컸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양반이 영화 <전우치>에선 악당으로 나온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전우치>가, <타짜>때 쩍 벌렸던 제 입을 두 배로 더 쩍 벌리게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최동훈 화이팅!

영진공 노바리

<추격자>는 좋은 영화인가?





 


<스포일러가 있어요.>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영진공 노바리

<천하장사 마돈나> – 꼼꼼하게, 잔잔하게

상벌위원회
2006년 9월 13일


조용조용. 킥킥. 약간 글썽. 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다.
모두 다 짚고 지나가면서 절대 얕지는 않되, 오바도 안하는 영화라고나 할까.
그냥 몇 가지 단면적인 내 감상들만.

리얼리즘영화다.
정말 우리네 삶의 언저리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 아니 언저리가 아니라 중심부의 이야기에 대한 직격탄일 수 있겠지.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얘기하며 프로파간다로 흐르거나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담담하게. 그래서 더 리얼하다. 아들과 다소 우스꽝스러운 근무복장을 입고 심각한 얘기를 나누다가도 일터에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무릎을 인형처럼 굽혀 보이며 꼬마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이상아”의 모습. 진짜 리얼리티란 딱 그만큼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다소 코믹하기도 한 것 같다.

인천영화다.
내가 기억하는 첫 인천영화는 <고양이를 부탁해>인 것 같다. 서울 바로 옆이라는 공간, 분명 수도권이면서도 주류에서 살짝 비껴 간.. 어찌 보면 또 많이 비껴간 듯한. 그 상징적인 공간. 97년 IMF때 부터 닥친 불황의 광풍은 서울보다 그 도시를 훨씬 더 맵게 할퀴었다지. <고양이를 부탁해>도, <천하장사 마돈나>도 그런 인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성장영화다.
성장영화라고 대 놓고 촌스럽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었던 소년은 이러저러하게 세상을 알게 되고,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러저러하게 성장하였습니다.’라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명 대사를 인용해 보자면 ‘무엇이 되고 싶은 소년이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소년의 모습을 그렸달까.’ 그래서 그 잔잔한 녀석의 행동이 더 절절한 거겠고.

퀴어영화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안에서의 퀴어에 대한 인식문제라든지 그들의 어려움과 안타까움이라든지를 대놓고 다루지 않는다. 그냥 동구의 고민은 삶의 여러가지 고민들 중에 한가지 고민으로 받아들여진다.아빠가 복직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거나, 엄마가 가출한 거나, 동구가 여자가 되고 싶은 거나, 동구 친구가 맨날 무엇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거나 다 똑같은 고민인 것이다. 그래서 퀴어영화이면서 전혀 이상한(queer) 구석이 없다.

코메디영화다.
“초난강”, 어찌나 귀여워 주시고, 못난이 삼형제들 어찌나 귀여워 주시던지.

그래서 제일 좋았던 걸 요약해서 말 하자면 서로가 별난 사람들인 그들이 서로를 별나지 않게 대한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대하면서 서로를 타자화하지 않는 다는 것. 그래서 관객들도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두 ‘타자’로 생각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좋았던 점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잡담. 사람들 다 연기 잘 하더라.
“백윤식”- 영화에서 별 역할 없는데, 그냥 그 표정 한번 지어 주는 걸로 먹어주더라.
못난이삼형제 – 아주 지대로 콤비들이다. 저런 디테일한 설정을 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중간 중간 양념으로 너무 훌륭하게 써먹는다는 거 (아니, 오히려 양념이 아니라 이 영화의 핵심일 수도 있다.) 정말 작가로써의 역량인 것 같다.
“김윤석” – “유호정” 남편으로 나올 때 부터 참 안되어 보였었는데, 왜 미중년인 이 남자가 맨날 망가진 역할로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 ‘피도 눈물도 없이’의 독불 캐릭터 이후로 폭력을 쓰는데도 미워할 수 없었던 캐릭터. 그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해 낸다. 멋져.
“이상아” – 엄마 연기를 어쩜 글케 잘하니. 진짜 엄마가 애 걱정하는 게 어찌나 짠해 보이던지. 애 둘 엄마인 우리 언니, 이상아랑 같이 울더라.
“류덕환” – 얘 연기잘하는 거야. 그냥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pass~

상벌위원회 선임차장
라이(ley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