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작가의 명성에 기대어 책을 살 당시, 난 <오 하느님>이 종교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2차 대전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조상 한 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읽다보니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여러 부대를 전전하는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란 탄식을 해야 했고, 마지막 대목에선 ‘오!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여년 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 언론들은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민중의 삶이 가장 피폐했던 시기는 일제시대가 아닐까 싶다. 부도가 날 나라가 있는 것과 없는 건, 나름의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인에게 ‘단군 이래 최대 위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냐?’라고 물으니 6.25 때가 아니냔다. 그럴 법도 하다. 우리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것도 모자라 열강들의 대리전으로 우리나라가 붉게 물들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몽고가 쳐들어와 왕이 강화도로 피신한 사건이 떠오르고, 인조가 나름의 명분을 지킨답시고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머리를 아홉번 찧는 굴욕을 겪은 일도 떠오른다. 수년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임진왜란이 이 리스트에서 빠질 리 없고,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삼국이 땅 따먹기를 한다고 걸핏하면 싸웠던 시절도 결코 평안하진 않아 보인다. 그러니 우리 역사는 민중이 살기 가장 힘든 시기를 따지기가 어려울만큼 어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그럼 지금은 살기가 괜찮냐 하는 데 생각이 미치고, 결국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지극히 보수적인 걸로 내려진다. 외환위기 때 “이대로!”를 외쳤다던 특권층들이 6.25 때라고 해서 어려웠을 것 같진 않고, <아리랑>을 읽어보니 일제시대 때도 죽어나는 건 하층 계급뿐이었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한 양반들의 삶은 그래도 괜찮았던 듯하니 말이다.

늘 민중의 삶에 천착한 작품을 쓰는 조정래 선생의 작품답게 <오 하느님>의 주인공들도 가난한 소작인이다. 포로로 끌려간 그네들이 오전 작업을 마치고 든 것도 없는 국과 더불어 “흙 묻은 손에 빵을 받”고, “맨땅에 주저앉아 허겁지겁 국부터 마시기 시작했다”는 구절들을 읽노라면, 마음이 짠해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까? <오 하느님>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쿨함을 주창하는 소설들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인지라 조정래 선생의 가치가 더 빛나는 듯하다.


영진공 서민

<추격자>는 좋은 영화인가?





 


<스포일러가 있어요.>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영진공 노바리

아이언 맨! 나이롱 맨?


 

이 영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업그레이드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를 이야기하던데
저는 사실 … 계속 보면서 뭐하러 저러지? 라는 생각만 들더란 …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자그마치 반물질(이건 번역 오류일수도)로 미사일(그 이름도 제리코…)을 만드는 거대 회사인데
동시에 이 회사는 나이트 아마먼트사에서 만듦직한(아, 실제로 나이트사 제품이죠..) 평범한 소총도 만들더군요.
비유하자면 F22만드는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권총도 만드는… 그럼 나머지 업체는 뭐 먹고 살라고?
이 초 거대 문어발 무기 재벌 같으니..

물론 전자석으로 파편을 밀어내준다는 설정도 참으로 묘하다는…
원래 자석은 금속을 끌어 당길 수는 있어도 밀어내지는 못하는데 말입니다.
제 생각엔 가슴팍에 전자석을 장착했으니 몸에 박힌 쪼마난 파편들이 심장으로 모여들어서,
일주일만에 죽을 거 딱 10분만에 죽을거 같던데, 영화는 정 반대라 주장하니 뭐 그렇다 치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다가 아프간 오지에서야 파편을 못 찾아서 전자석을 장착하는 무지막지한 시술을 했다고 해도
그 최첨단 스타크 본사도 돌아와서도 계속 전자석이라니 … -_-;;;
그냥 수술해서 빼내지? 그것도 못하나?

그런 쇳덩이를 몸에 박아넣고 이리저리 몸을 굴리면
조직괴사와 온갖 합병증이 다발할텐데 말입니다.
영화 중간에 고름 어쩌고가 사실이 되겠죠.

사실 진짜 대단한거는 그 전자석에 달아놓은 소형 핵융합로입니다.
고만한 사이즈와 무게에 방사능도 없고 거의 반영구적인데다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뭐 여튼 엄청난 그런 장치라면
그의 적은 군산복합체가 아니라 전세계의 석유재벌들이 되겠지요.
그 융합로가 일반화되는 순간 석유재벌들은 폭삭 망할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 수트는 에너지 만으로 적에게 충격도 가하고
심지어 분사체도 만들어내더란 … 만약 그렇다면 로켓 과학도 이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거죠.
현재 로켓들은 일종의 아이러니에 빠져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을 대기권 돌파까지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연료가 필요한데,
그 연료까지 들어올리려니 더 엄청난 추진력이 필요하고, 그러면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해지고 …
하지만 아이언맨 같기만 하다면 뭐하러 그 거대한 연료탱크 달고 쇼를 하겠습니까.
핵융합로 하나만 있으면 그게 추진체도 만들어내고 에너지도 제공하는데 말입니다.

하긴 이 부분은 이 아이언맨 세계에서는 제리코미사일에서 실용화 된 셈이죠.
그 미사일은 내부에 연료탱크나 엔진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죄다 자탄들로 가득차 있었거든요.
통상 폭탄 수준의 간단한 구조로 미사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최첨단이죠.

어쨌거나, 이 장치들의 타당성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건
만화 세계에서는 일종의 반칙이니 그렇다고 치죠.

나머지 문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세상에 게릴라들이 최첨단 무기를 사모을 돈이 어디있냐는 …
기껏해야 한다는게 인신매매 정도인 것 같더만.  참 비싼 무기들을 아까운 줄 모르고 쓰더만요.
뭐 이건 나중에 약간 설명이 제공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방법도 너무 위험해요.
그런 첨단 무기는 개념무탑재 미국이라도 분명히 수출을 규제할 것이며,
고유번호만 추적하면 누가 언제 팔았는지 다 나오게 되어 있는게 상식입니다.
차라리 그냥 돈을 주고 알아서 무기 사라고 해도 영화에서 게릴라들이 하던 짓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게다가 험한 동네에서 정비 좀 덜 하고 쓰기엔,
스타크 인더스트리제 고급무기 보다는 걍 유고제 AK 소총과 RPG가 훨 낫다고요.
(지금 아프간에서 미군을 괴롭히는 것도 그런 로우테크 무기들이고요)
수천불 짜리 소총이나 백불짜리 총이나 맞으면 죽는건 마찬가지인데다,
그 게릴라 아재들은 고급무기를 고급스럽게 쓸 줄도 모르던데 거의 개발에 편자죠.

그리고, 직접 날아가 게릴라들 패대기치면 문제가 해결되냐는 …
초거대 문어발 무기재벌께서 고작 하신다는게 혼자서 쇼하고 미디어에 스타로 등장하시는 것이냐는 …
걔 살리려고 자기 한 몸 희생한 아프간의 의공학자(전공도 참 애매) 선생이 하늘에서 통곡하시겠다는 …
여튼 딱 하는 짓이 2MB 수준이더라는 …
소영웅주의나 소통령이나 …

여튼 저는 차라리 <테이큰>이 더 깔끔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행동에 걸맞게 목표도 아주 개인적이었고, 게다가 공평했거든요.
친구고 뭐고 가리지 않고 유통경로 모두를 싹쓸이 했으니 말이죠.

얘는 그렇게 무기니 전쟁이니 어쩌고 거창하게 굴면서
제일 친한 친구는 군바리,
하는 짓은 어린애….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