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수다떨기 (2), 잔인성에 대하여



Q. 지난 주에는 영화로 보는 ‘사랑’에 대한 심리, 다각도로 알아보면서 재미있는 시간 가졌는데요, 이번 주 주제는 ‘연쇄살인범의 초상’입니다. 그냥 살인범이 아니라 연쇄 살인범, 꼭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게 더 잔인한데요?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는 크게 대량살인과 연쇄살인이 있습니다.
대량살인은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같은 경우입니다. 단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죠. 이런 대량살인은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입니다. 자기감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살인이라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 감정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거죠. 대량살인은 대개 한번으로 끝납니다. 사건과 함께 범인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건 비록 끔찍한 살인 범죄지만 어느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도 가끔 확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가 있쟎아요.

근데 연쇄살인은 대량살인과는 전혀 달라요. 연쇄살인자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예요. 흡연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살인을 끊지 못하는 거죠. 살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초기에 잡지 못하면 은폐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능적인 연쇄살인자로 발전하죠. 물론 절대 자살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단서를 남겨두거나 자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Q. 참 끊임없이 매력적인 영화 소재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이 그 그물망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감과 함께 스릴도 있는, 그리고 주로 실화여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라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나..하는데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 뭐라고 보시나요?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겁도 많고 차분하고 조심스러운데 사람 죽일 때만 무자비하거나, 명랑하고 쾌활한데 바로 그런 쾌활함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 왜 <추격자>에서도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정과 망치를 들이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 이러면서 달래잖아요. 전혀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인거죠.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그래요. 그는 무자비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인기를 얻었죠. 실제로 테드번디라는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쇄살인자는 팬클럽까지 있었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Q. 연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떠오르는 건 <살인의 추억>과, <양들의 침묵>, <공공의 적> 등이 떠오르는데, 장박사님은 어떤 영화들 기억나나요?

저는 <행복했던 여자> 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91년도 영화인데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골디 혼과 <나홀로 집에>의 자상한 아버지로 익숙한 존 허드라는 배우가 주연인데, 처음에는 이 남자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좋은 남편으로 나와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죠. 그래서 전 이 영화를 행복했던 여자가 남편을 잃고 고생하는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줄 알았던 그 자상하던 남편이 사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병질자였던거예요. 그런 줄 모르고 봐서 더 무서웠어요.


골디혼만 보고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벌벌 떨며 봤던 영화, “행복했던 여자”

Q. 연쇄살인범, 악취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쇄살인자의 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존 더글라스 라고 프로파일링 기법을 창시한 FBI의 심리분석관이 쓴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연쇄살인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릴 적에 야뇨증, 동물학대, 방화 중 한 가지를 꼭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 경험이 있다고 전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분명해요.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연쇄살인자 에디 게인은 자기가 살해한 시신들을 마치 짐승 사냥한 것 처럼 해체해서 집안에 여기저기 걸어두었대요. 마치 사냥한 사슴이나 호랑이 머리를 벽에 걸어두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걸어둔 거죠. 근데 또 그 사람이 붙잡혀서 감옥에 있을 때는 아주 착한 모범수였다고 하더라구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인거죠.


더글러스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Q.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한데요, 이미 그들에겐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겠죠? 연쇄살인자의 동기도 그러고보면 딱히 원한이나 복수가 아닐 때가 많아요?

대부분의 상식적인 살인은 동기가 있죠. 원한이나 치정 같은 거요. 그래서 살인범죄의 7-80프로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해요. 이런 살인범은 정황증거나 원한관계를 뒤지다 보면 결국 잡혀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그러쟎아요. 대한민국은 땅이 좁아서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결국 잡힌다고. 근데 연쇄살인범은 달라요. 이 작자들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원한 같은 게 원인도 아니고요.

Q.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에 비롯된 난국 영화 <추격자>에서도 잘 나타나죠. 이미, 범인은 밝혀졌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이밍과 정확한 물증 확보 지연으로 피해자가 더 생겨요. 아주 안타까운 경우였어요.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설정이니까 영화가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초반에 딱 잡혀버리면 단편영화 되고 말쟎아요. 재미도 없고.

Q. 이런 류의 영화를 보다보면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 속 범인들,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나 운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쇄살인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기에 잡힐 겁니다. 덕분에 그들은 연쇄살인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잡혔으니까.

근데 가끔 초기에 안 잡히는 인간들이 나와요.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거나, 너무 외모가 멀끔해서 의심을 안 받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인간들이 범죄를 반복할수록 기술이 늘고, 그러다 보면 갈수록 더 잡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소질도 있고 기술도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라 상식에 의존한 수사로는 오히려 잡기가 힘들어요.

영화 <추격자>에서도 설마 집 마당에 시체를 파묻으랴 했지만, 정말로 집 마당에다 파 묻었잖아요.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가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니까 의도하지 않게 허를 찌르는 셈이죠.

Q. 영화 <추격자>의 독특함! 아마, 살인마 영민에게 관객의 연민을 부추길 만한 어떠한 살해동기도 부여하지 않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해요. 보통은 살인범에게도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들지 않더라구요?

그렇죠. 영화를 보면 이 영화 감독이 연쇄살인범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요. 영화에서 보면 경찰 조서에 범행동기가 없으니까 서장이 채워넣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연쇄살인자들은 특별히 동기랄 게 없거든요. 동기 없는 범죄에 동기를 묻는 불합리를 지적한 거죠.

이렇게 억지로 동기가 뭐냐고 묻다 보면 “컴퓨터 게임 때문 이예요 … 호환마마처럼 나쁜 영화를 봐서요 … 어린 시절의 심리적인 충격 어쩌고 하는 식의 변명들이 나오는 거죠. 그럼 괜히 게임회사 폭탄 맞고 … 사람 죽인 걸로도 모자라 두루두루 폐를 끼치죠.


프라이멀 피어 …

Q. 그리고 보통, 형사들이 더 험악하고, 이들은 참 꽃미남인 경우가 많아요.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씨나, <추격자>의 하정우 씨,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모두 전혀 험악한 인상이 아니죠?

영화에서야 대비효과나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캐스팅을 할테지만, 실제 세상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얼굴 험악한 사람들이 의외로 순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만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니까 성격까지 험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은 정 반대죠. 실제로도 연쇄살인자들이 순하고 연약해보이거나 잘생긴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경계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면 오히려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힘들쟎아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그러니까 표정에 구김살이 없어요. 그래서 모르고 보면 좋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 꽃미남을 조심하라 …

Q. 그러면 이런 연쇄살인자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뇌의 작동방식 부터 조금 다르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념이나 국가나 종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대량살인이 저질러져왔거든요. 즉,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살인자의 본능이 있는 셈입니다. 그 본능은 언제 눈을 뜨냐 하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때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자도 그렇잖아요. 연쇄살인자들은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사람도 짐승취급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공감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연쇄살인자와 크게 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공감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인간성 역시 확장될 겁니다.

불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죠. 즉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날벌레 한마리와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마음을 가지곤 해요. 집에서 키우는 개와도 공감하고, 고양이나 새와도 공감할 수 있죠. TV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인 겁니다.


이때 이야기를 기초로 쓴 추격자 평 -> 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60810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연쇄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기다려볼까요?

초능력이 어떨까요? 최근에 개봉한 <점퍼> 라는 영화나 <데스 노트> 시리즈도 모두 초능력에 대한 것들인데, 이것도 우리의 심리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주제거든요.



영진공 짱가

<추격자>는 좋은 영화인가?





 


<스포일러가 있어요.>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영진공 노바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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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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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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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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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화 <추격자>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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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가 장안의 화제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한 편이 높은 완성도의 한국영화를 갈망해온 국내 객석의 환호를 받고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에 대한 갈망은 곧 자국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갈망함에서 비롯된다.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사람들은 자기 소속 집단, 선택이 아닌 운명적으로 그 소속이 결정되어버린 공동체에 대해 자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국의 영화 뿐만 아니라 스포츠 행사나 기타 문화적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일들에 열광한다. 반면에 국보 1호를 불태워 먹는다거나 하는 일에는 무한한 쪽팔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심하라. 우리나라만 유난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한 두 건 올리는 경우는 여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쪽팔림과 자부심에 대한 갈망은 동전의 양면이요 같은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이 없다. 쪽팔린 일이 아직 많다보니 자부심에 대한 갈망이 약간 강할 뿐이다. 쪽을 팔 일이 적어지고 지난 일들을 상기할 일이 없어질 때 즈음 과도한 갈망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될 일이다.

물론 <추격자>는 애국주의 마케팅(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화다. <추격자>에 대한 지지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결과론일 뿐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조롱하고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냐고 질문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추격자>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 관객들은 한국영화 보는 걸 몹시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거품 경제를 토대로 피어났던 1996년의 르네상스와 이후 2003년 황금의 해를 통과하기까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이전 보다 많이 좋아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만들어지는 숫자에 비해 충분하게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추격자>는 완성도의 가뭄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잘 자란 묘목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묘목을 잘 키워서 2008년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키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추격자>가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훌륭한 성공 사례다. 엄청나게 고된 여건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한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투자나 얄팍한 컨셉에 스타 캐스팅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이들의 치열한 근성과 재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품이 <추격자>다. 그리고 <추격자>는 그렇게 기억되어야만 한다. 이번 기회에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들의 요구 수준이 이 정도라는 점을 한국 영화계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당한 기획으로 만들어 놓고 배급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돈 놓고 돈을 절대 먹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예산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추격자>는 이러저러한 점이 잘 되었다고 조목조목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만든 이들의 성실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장르나 내용, 주제가 좋고 나쁨을 떠나 관객이 영화를 통해 ‘정성들여 만든 느낌’을 얻는다는 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고, 이는 뛰어난 재능과 용기를 앞세우기 보다는 엄청나게 길고 고된 과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추격자>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감독을 또 하나의 선물로 안겨주었다. 데뷔작에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근성을 보여준 감독들은 많지만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 팬들은 <추격자> 한 편으로 한국영화계의 일약 유망주로 떠오른 나홍진 감독의 존재를 몹시 반가워한다. 그가 앞으로 선보일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그리하여 감상 자체가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줄만한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존재는(나아가 이 영화에 참여한 주요 스텝들의 존재는) 관객들 보다도 기존의 감독들이나 앞으로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 앞으로 나홍진 감독과 같은 신인 감독들이 더 많이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관객이 알 바는 아니다. 관객이 할 일은 기성 감독이든 신인 감독이든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에는 좋은 대로, 미흡한 작품은 미흡한 대로 직관적으로 반응해주는 일 뿐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값진 선물만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추격자>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한국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질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게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만 <추격자>는 개인적으로 마음 편히 환호해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모방 범죄가 걱정된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흥미롭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뒷덜미를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는데 이후로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감독 인터뷰 등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며 그 정체를 알고자 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추격자>와 유사한, 그러나 <추격자>와 같지 않았던 다른 영화 체험들을 기억해내고 또한 비교했다. 그리하여 <추격자>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논리에 근거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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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인 가스파 노에(Gaspar Noe)의 2002년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1998)을 통해 자신의 반사회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 바 있던 가스파 노에는 벵상 까셀과 모니카 벨루치를 꼬드겨 전무후무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과 같이 시간 흐름의 역순으로 배치된 롱테이크 씨퀀스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젊은 연인이 파티에 갔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집으로 가려던 여자(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보도에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애인의 처참한 몰골을 뒤늦게 발견한 남자(벨상 까셀)이 괴한을 추적하고, 마침내 지하 SM 클럽에서 발견한 괴한(이라고 생각한 남자)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 얘기다. 살인 장면은 일반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에서 허용되는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고 원테이크로 처리되는 성폭행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폭행 자체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특별한 폭행의 동기가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장면이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지하보도를 지나가려던 다른 행인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 또한 너무 사실적인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 촬영 후 모니카 벨루치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을 나는 2003년의 본 영화들 중 베스트 10의 하나로 꼽았다. 영화는 너무 힘들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과 이 영화를 통해 전달받은 정서적인 충격(끝까지 보면 역겨움과 두려움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 방식에서나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내용 자체에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가능/불가능과 호불호를 정하는 것은 만드는 이와 관객이지 정부 기관이나 평론 집단과 같은 제 3자가 미리 할 일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전달한 정서적 충격이 감내할만한 수준이었던 탓도 있었지만(아마도 어떤 관객들은, 특히 여성 관객들은 도저히 감내가 안될 수도 있다) 그것이 외국 영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장소에서 내가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연기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별의별 영상물이 다 있고, 심지어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이라는 것도 있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도 엽기지만 그걸 구해다 보는 수요층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상업적으로 유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끔찍한 장면을 감내하고 또한 어렵지 않게 잊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판타지로 인식되기 때문이고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영화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연출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하는 티가 나고 영화 찍은 티가 나는 허술한 영화가 좋을 리는 없다.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다. <돌이킬 수 없는>은 저것이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충분히 객관화가 가능하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묻어둘 수 있는 영화다.

<추격자>는 잘 만들어진 그 만큼의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영화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리고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다. 한국 영화가 한국적인 소재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주니 외국 영화 볼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얘기다. <추격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기존의 한국 영화로부터 진일보한 만듬새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끝내 미진(서영희)가 영민(하정우)의 장도리에 맞아죽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주인공 중호(김윤석)가 애타게 찾으러 다녔고 또한 어린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하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는 점 자체는 칭찬 받을만 하다. 하지만 <추격자>의 이 장면에서 받은 일부 관객들의 충격은 예상할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관객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대인기피증과 같은 노이로제 증세라도 얻게 된다면 그건 영화가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 지상주의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일부 여성 관객들의 과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들을 타자화해서 봐줄 수 있는 관객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추격자>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은 작품이다. 싸이코 패스 계열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 외에도 영화가 남겨주는 씁쓸한 패배감과 좌절감은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끔찍한 장면이 많기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이 훨씬 심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은 지킨다. 바로 굳이 안보여줘도 될 장면은 안보여주고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추격자>는 작품의 의도와 흐름 상 미진이 영민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맞다. <추격자>는 미진의 머리가 영민이 휘두르는 장도리에 찍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만 않을 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미니멀한 음악을 배경으로 영민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방 안의 사방 벽에 미진의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눈을 뜬 채 의식을 잃은 미진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장도리에 맞아 흔들리는 모습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어디까지나 연출된 장면이라는 걸 감안하여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장면을 계기로 영민과 중호의 짐승 같은 싸움에 활력이 붙었다는 사실과 영화 전체가 상업영화의 울타리에서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은근한 쾌감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르롤린(조쉬 브롤린)의 아내 칼리진(켈리 맥도날드)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건 다름 아닌 관객을 위한 최후의 배려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외국 영화로서 현실감마저 덜 하다. 영화를 통해 얻는 서스펜스와 몸이 아프고 후유증이 올 만큼의 정서적 충격은 분명 다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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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한국영화로서 끔찍하기로 이름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1)은 <추격자>가 또 다른 맹점을 지적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사실적인 묘사로 치면 <복수는 나의 것>이 몇 수는 위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관객이 납득할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류(신하균)는 죽은 누나에 대한 원한과 장기매매단과의 거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이유로 살인을 한다. 동진(송강호)는 죽은 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영미(배두나)와 류를 고문하고 살해한다. 끔찍하기로는 동진 앞에서 자신의 배를 칼로 긋는 팽 기사(기주봉)도 마찬가지지만 그 심정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원한과 복수의 굴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의 분명한 동기를 지닌 등장 인물들을 타자화하며(그런 끔찍한 사연이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의 복수를 고려할 일 조차 없을 것이므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연민은 챙기고 극장에서 목격한 악몽을 잊는 것이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은 국내 관객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작품이 되었다. 한국영화라서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데다가 개운하게 입가심도 시켜주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완한 작품이 <올드보이>(2003)였고 <친절한 금자씨>(2005)도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런 방식의 대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추격자>는 복수극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살인이니 길 가다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관객들은 그와 같은 일이 지금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사법 제도와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잡았던 범인들조차 유유히 다시 걸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감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고 그 분노를 영화 속에 잘 담아냈다. 그러나 여기에 공노하며 영화의 흐름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관객은 주로 남자 관객들이다. 다행히 여자 범죄자에 의해 남성들이 연쇄살인을 당한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는 아직 없기 때문에 영화 속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여성 관객의 경우 그런 장면에 공노만 할 수가 없다. 당장의 두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진을 살려둘 수는 없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영민이 구멍가게에서 나오고 이후에 경찰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만으로 미진이 죽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진은 영민이 불러 살해해온 창녀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철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직업적 편견을 접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출장 마사지 여인이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미진은 어린 딸 하나를 부양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중호의 협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갔다가 변을 당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은 미진을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 누이, 내 가족의 하나와 마찬가지인 현실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미진이 살아남기를 바라게 되고 마침내 죽었을 때에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추격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요소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너무 잘 되어서 탈이다. 유영철의 희생자들에 대해 ‘그럴만 한 부류’라고 생각하거나 김선일씨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너도나도 달려들었던 세간에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달리 바라보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김선일씨의 소식만 전해듣기만 했을 때에도 이미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추격자>는 성취를 담보로 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직접 느낀 부분은 아니었으나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던 중에 의외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을 언급하고자 한다. 나홍진 감독은 극중 영민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에 대해 “원래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극이 진행되면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중호까지도 영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종들을 키우고 방치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고 또 그것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얘기는 이런 류의 영화를 숱하게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성격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이제 지겹다. 차라리 <추격자>의 영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최민식)과 같이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유전적인 요소도 있다지 않는가. 굳이 두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라고 본다. 안톤 쉬거는 그 자체로 피도 눈물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백 선생 역시 재미삼아 유아들을 살해하는, 그리하여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는 말종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말종에 대한 복수에 대한 복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영민은 너무 현실적인 악몽이다. 그 역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영화 속 캐릭터로만 끝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김윤석의 카리스마를 압도하는 하정우의 연기로 인해 더 강한 잔상을 남겨주기까지 한다. <추격자>에서 시스템의 불완전함은 누구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주변 환경으로만 남게 되고 결국 강조되는 건 하정우가 연기한 영민의 극악한 캐릭터다. 나는 적어도 나홍진 감독이 이런 캐릭터를 사용할 때에는 나름의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있는 시각을 갖고 있기를 바랬다. 최소한 “원래 그렇다”는 식은 아니길 기대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 의도상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경찰 조직과 사법 제도의 결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각심을 일으키고 공론화를 하고자 했던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 분노의 힘으로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 한 편이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리고 이런 정로의 완성도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과 그걸 얻는 과정에서 무시된 ‘지켜주었으면 했던 어떤 것들’을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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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예전에 알던 어떤 분이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2003)을 호되게 비판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이제사 난다. 그 양반 얘기가 “영화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다고 믿는데 <낭만자객>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악당이 어린 아이를 활로 쏘아서 맞추고 아이는 공중을 붕 날아 뒷쪽의 나무에 박혀 죽더라”는 거였다. 나와는 영화 취향이 많이 다른 분이었고 <낭만자객>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꽤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영화의 표현 방식에 아무런 제약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부합되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관객에게 보여졌을 때에는 극장에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을 건드릴 수가 있겠구나 했다. 그러고 잊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