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신해철

신   해   철

1968. 5. 6. ~ 2014. 10. 27.

잘가오 친구

우리 서로 한 번 만난 적 없었지만

내게 그대는 짖궂은 친구같고 똑똑한 동생같은 이였오

그대의 노래가 있어 많이 행복했었다오

그대 잘 가오

편히 쉬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명량 해전 이후의 이순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이유

<허핑턴 포스트> 한국판의 8월 6일 기사, “‘명량’ 이전의 이순신 영화들 : 이순신 때문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배우는 누굴까?” 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순신 영화는

등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1977년 이후 제대로 된 이순신을 영화관에서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위에 천군같은 뭐 이상한 코메디 영화들 말고 …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에는 거의 하늘이 내린 기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이란 인물을 제대로 표현만 하면 대박이 난다.

김훈의 소설(2001년)이 “명량”의 원작인데 당시 얼마나 세상이 뜨거웠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13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명량”이 제작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아주 잘 만든 TV드라마가 이미 그 분위기를 다 가져가 버리기는 했다.

그러다보니 “명량”에서의 해전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해전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어찌됐든 이순신 영화를 제대로 만들면 대박이 난다는 것은 거의 잘 알려진 수학공식과 같다. 게다가 “칼의 노래”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도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명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해 보자면 그 원인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제작비: 굉장히 많이 든다. 게다가 어설프게 돈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써야 한다.

2. 배  우: 사실 이순신 장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김명민은 연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젊다.

3. 감  독: 마땅한 감독이 없었다. 사극을 잘 만든다는 감독이 있었지만 전쟁씬을 잘한다는 감독이 그동안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종병기 활”이라는 조선식 액션영화가 나오고, 게다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름의 역사관이 표출된다. “조선은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내 누이는 내가 구한다.” …

“명량”은 이 세 가지 측면이 해결되었을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에서 글로 보았던 이순신 장군을 영화관의 큰화면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게 만든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망은 실로 대단했다. “소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말과 함께 명량해전으로 사실상 나라를 구원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열망이 13년 만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최민식의 이순신 역할이었으니.

이건 이미 천 만 관객이 들 조건을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개봉 시 CGV가 상영관을 많이 깔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 만으로 천 만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순신은 거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 전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했던 짓은 절로 한숨 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조정은 정규군을 궤멸시키고 명나라 군대에게 나라를 되찾아 달라며 떼쓰는 것말고는 했거나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 와중에서 정규 군대가 왜를 물리친것은 이순신 장군의 전투 밖에는 없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실은 민초들이 힘겹게 싸워서 이긴 전공이고 말이다.

그러고도 조선은 과거의 잘못을 거울 삼아 발전은 커녕 극복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또 한 방에 한양이 털리게 되고, 나중에는 전쟁조차 하지 않고 종이에 싸인하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허망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그런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거대한 자존심이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인물이기에 우리는 비록 극장 안에서나마 그에게 열광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영화는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량 이후 정유재란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왜와 강화를 맺으려고만 하는 명나라와

임진왜란이 난지 7년이 다 되어서도 제대로 된 육군도 없는 조선이 명나라 뒤에서 찌질하게 구는 모습을 봐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적의 전투선 450여 척을 깨부순 노량해전이라지만 거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기적

샘플링(Sampling)이라고???

얼마 전에야 <원더걸즈>라는 소녀그룹의 “텔미”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전 국민 계층에 걸쳐 엄청나게 히트를 한 노래라는데, 이제야 일청한 난 뭐냐능 -_-;;;

그런데 이 노래가, 80년대에 반짝 히트했던 어느 디스코곡을 강하게 연상시키는지라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노래 혹시 그 노래 번안곡 아냐???”라고 …

역시나 이 곡의 작곡자가 그 곡을 샘플링했다고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흐음 … 글쿤 …

아니, 가만 … 샘플링이라고???
어머, 그럴리가 … 이건 샘플링이 아닌데 …

일단 두 노래를 직접 들어보자.


원더걸즈 테,테,테,테,테, 텔미히~


Stacy Q “Two Of Hearts” (1986)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서 샘플링이란 어느 곡의 몇 소절을 따오거나 연주기법을 차용하거나 또는 특정하게 반복되는 패턴(리프, Riff)을 모사하는 기법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위의 두 곡에서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샘플링인가.
이건 샘플링이 아니라 원곡의 창조적 재구성이라 해야 한다.

원곡의 분위기를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들어도 신나는 작품을 만들어 놓으시고선,
작곡자 그 분은 왜 굳이 샘플링이라고 겸양의 덕을 발휘하신 걸까???

그럼 여기서 샘플링이 뭔지 알아 보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다.
아래의 두 노래를 들어보자.

첫 곡은 <America>의 “Ventura Highway”라는 1972년 발표작이고,
두 번째 곡은 <Janet Jackson>의 “Someone To Call My Lover” (2001) 이다.



America “Ventura Highway”



Janet Jackson “Someone To Call My Lover”

America의 노래에서 계속 반복되는 기타 리프를 모사하여 Janet Jackson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한 걸 확인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샘플링이란 원곡의 특징적인 일부분을 제한적으로 따올 때 그 효과가 크다 할 것이다.

실례와 비교해 보니, 원더걸즈의 노래에 Stacy Q의 노래가 “샘플링” 된 게 없다는 나의 주장에 한껏 힘이 실리는 듯한 느낌은 혹시 나만 …

암튼 샘플링은 아니고 그럼 혹시 리믹스???

리믹스란 말 그대로 노래의 믹싱을 다시 하는 걸 일컫는다.
믹싱이란 따로 녹음된 노래의 요소들을 함께 엮어서 완성된 노래를 만드는 작업인데,
리믹스는 원곡의 분위기나 템포 등을 바꿔 새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다.

그래서 리믹스를 할 때는 새로운 악기파트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악기파트를 뺀다든지, 특정부분을 늘리거나 줄이든지, 빠르기나 비트를 바꾼다든지 하게 된다.
그리고 아예 서로 다른 곡들을 함께 섞어서 하나의 노래로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번에도 역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첫 곡은 Mariah Carey의 “Fantasy”(1995)이다.
이 곡의 중간 쯤에 Tom Tom Club의 노래를 샘플링한 부분이 있는데,
그 곡이 두 번째 동영상인 “Genius Of Love”(1981)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은 합쳐져서 리믹스 버젼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곡이 세 번째 동영상인 “Fantasy (ODB Remix)”이다.

확인해 보자.



Mariah Carey   “Fantasy”


Tom Tom Club   “Genius Of Love”


Mariah Carey   “Fantasy (Ol’ Dirty Bastard Remix)”


들었는가, 보았는가,
리믹스도 그렇고 샘플링도 그렇고 잘 만들어진 작품은 원곡과 대상곡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를 구성하면서도 각자의 특징이 잘 구분된다.

그런데 Stacy Q와 원더걸즈의 경우는 그런게 아니다.
원곡의 요소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각각 잘 분리하여 새로운 해석으로 터치한 작품인 것이다.

이처럼 원곡의 느낌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섬세하게 입히고 특히 우리 정서에 맞게 제대로 향토화한 걸작을 두고,
그저 샘플링만 했다고 스스로 깎아내리다니 …

지나친 겸양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하였거늘 어찌 그리하였단 말인가, 에혀 …

영진공 이규훈

삶의 의미라 … [The Meaning Of Life] 中 Pt. 6

대운하, 뉴타운, 삼성, 광우병, 물가, 유가, 아마츄어리즘, 패거리정치 …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도대체 뭐가 경제살리기고 뭐가 국정안정인거냐.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Monty Python의 걸작 <The Meaning Of Life>(1983).
그 중에서 Part 6을 준비 해 보았으니 감상해 보시라.

단, 식사 직전이나 직후에는 감상을 자제해 주시고 … 한글자막은 없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시라 ^.^


판도라의 상자 – 20대는 죄가 없다.

 

일본에서 2008년도 2분기에 시작된 드라마 중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다.

한 국립대 의대 연구원이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버리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듯 – 아직 1회까지 밖에 안 나왔지만 이미 1회에 약을 개발했다 – 하다.

감히 건방지게 말하지만,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벌써 깨달은 분들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 보시는 분들이고, 도무지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순진하게 세상 사시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영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무상 의료가 진작부터 지원되는 나라였다면 위의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이 그토록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과 일본은 그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하다 못 해 사람 목숨을 돈으로 따져야 하는 – 일본도 우리도, 암 치료비 때문에 집의 재정이 풍비박산 나며, 이로 인해 돈이냐 목숨이냐를 따져야 하는 더러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슬픈 나라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TV시리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 실제로 개발되어버리면 일본은 절대절명절체절명의 위협을 받게된다. 일본의 생명 또는 질병 관련 보험 중 ‘암’과 관련된 상품은 무너져 버리고 보험의 기능이 무너짐과 동시에 금융권의 악재가 온다. 이와 더불어 ‘암’으로 인해 죽어나가야 할 예상치의 인구가 급작스레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인구는 고스란히 최고령 인구가 즐비한 일본사회에 더더욱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 버리며, 이는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암’으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모든 산업에 위해가 가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그 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올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기득권이 해낼 수 있는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금권’에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약’이 개발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제약사와 병원, 금융권은 연합을 해서라도 후생성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약이 ‘절대’로 출시되지 못하도록, 혹은 ‘출시하더라도 전 재산을 털지 않으면 안되도록’ 가격을 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충격’은 완화되고 결국엔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릴 지언정, 진정한 ‘암의 정복’은 결국 ‘한 과학자의 인간승리’가 아닌 ‘금권의 승리’로 둔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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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신약 개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새로운 ‘기득권’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나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욕심’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언제나 기득권의 회유와 협박, 달콤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또 다시 실망 뿐인 – 이재오를 무너뜨린 문국현 케이스 제외 – 선거가 끝났다. 기득권은 밤낮 안 가리고 국민을 농락했고 국민은 또 다시 무장해제 당하고 멍청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 혐오감이든 나발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의 20대를 만든 것은 지금의 4~50대 부모와 그들이 즐겨보던 조중동이며, 대입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기득권이 만들어 둔 시스템일 뿐이다.

20대는 벌 받을 일이 없다.

기득권이 만든 기본적인 교육 시스템조차 파괴시키지 못한 이 사회의 중년들이 이 사태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분명 책임이 없다.

열 아홉부터 종이 쪼가리 도장 찍을 권한 준다고, 대가리에 똥이 들었는지 글로벌하게 원대한 꿈이 들었는지 따지면 뭐 할 것인가? 그 속에 뭔가 채울만한 그런 기반조차 주지 않은 채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이들은 그저 이제부터 당신들의 ‘개발독재’ 때처럼, 그렇게 허리 졸라 살면 그만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물어 뜯고 살면 된다. 30대들, 자신들도 그런 기반 없이 이 사회를 버텨왔다고 이들에게 ‘우리는 그랬어’라면서 저항의 삶을 강요할 텐가? 자신들이 읽어오던 ‘빨간 책’이, 맑시즘이 사회에서 퇴출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이 ‘밥벌이’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던 동안, 이들이 권력에 의해 ‘취업에만’ 힘쓰는 불쌍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20대를 비난하지 말자. 이들은 그런 사춘기를 보내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비극에 놓였다.

이제 고민은 오히려 중년, 당신들의 것이다. 애새끼들은 서른이 넘어도 취업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돈 달라 보챌 거고, 의료보험 민영화되어 늙어가는 몸이 아파도 병원은 커녕 약도 못 사고, 연금이고 나발이고 수급액은 줄어들어 결국 피폐한 노년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른다. 가끔 변수가 생겨봤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기득권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농락한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의 유일한 방법인 ‘대의 민주주의’조차도 결국 ‘돈’과 ‘권력’에 농락당하면 끝이다.

슬슬 땅값 오르던 노원구에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이 됐다.

유시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덕양구 갑에 재개발 시기로 슬슬 땅값이 오르더니 심상정이 아닌 ‘한나라당 손범규’가 됐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던가?

그 희망이 의지로 발현되어 결국 우리는 나설 것이다.

투표고 나발이고 언제나 물러나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 세대의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결국 금권에 타락한 정권에 맞서고 격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는 한 신의 ‘약’은 일반 국민의 손에 오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을 386, 486 선생들의 아래에서 보냈던 걸 감사해하며 …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