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주도 미스신], “당연히 좋은 남자 잡으려고 안달해야지”

 

뻔한 스토리인 줄 알고 보지 않은 영화.
하지만 어느 일요일 저녁,
혼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슬퍼졌다.
좋은 남자를 꿰차려는 신미수의 좌충우돌이 나로 하여금 여성의 현실을 일깨워 줬으니까.

난 여자들이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출판사에 다니는 여자의 말이 아니었다면 더 오래도록 몰랐을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 다닐 수 있을지 모르잖아.”
그랬다. 문제는 먹고 사는 거였다.
여자들 중 태반이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현실 앞에서
결혼은 여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일 수 있으니까.
먹고 살 걱정만 없다면 여자들 중 독신으로 사는 이는 지금보다 더 늘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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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21에서 어떤 기자가 쓴 글이 기억난다.
“신미수 정도면 얼굴도 예쁘고 잘나가는 광고회사 팀장인데 왜 그리 남자에게 안달이야?
난 전혀 공감 못해!”
평론가 황진미는 거기에 대해 이런 반박을 했다.
“한예슬을 쓴 것은 배우니까 쓴 거구 극중에서 한예슬이 맡은 역은 그다지 미모가 아닌 거야.
글구 광고회사 팀장이라봤자 언제 잘릴지 모르는 그런 처지 아니니.
그러니 당연히 좋은 남자 잡으려고 안달해야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글을 쓴 기자는 여성,
남자인 내가 봐도 이렇듯 공감가고 슬퍼지는 영화를
그 여자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니, 그 여잔 모아놓은 재산이라도 많은가보다.


영진공 서민

신해철, <쾌변독설>

신해철이 똑똑하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쾌변독설>을 읽으면서 알게 된 신해철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히틀러의 이념은 존중하지 않지만 그가 써먹었던 선전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 기법들을 자신의 콘서트 때 써먹었다는 대목이라든지, 음악에 대한 그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구절들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때는 그가 어려서부터 음악을 하려고 했고, 부단한 노력으로 결국 그 꿈을 이루어 낸 것, 그리고 지금 음악을 만들며 살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대마초 때문에 감옥에 갔을 때, 신해철은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들어온 사람들로부터 사회과학을 배웠고, 조폭들로부터는 신체 단련과 싸우는 법을 배웠을 정도로 낙천적인 신해철, 그의 집안도 그에 못지 않았다. 결혼할 여자가 암으로 투병 중임에도 집에서는 적극 찬성을 해줬는데, 이유가 이랬다.
“해철이는 장가를 안갈 것 같다고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아, 병이야 고치면 되는 거고, 여자라는데’ 하는 생각에 오히려 환영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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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터뷰어 지승호(이하 존칭 생략)와 최고의 입담꾼인 신해철이 만난 7일간의 행적을 담은 이 책이 재미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근데 난 이번 책을 읽으면서 신해철보다 지승호에 대해 더 궁금증을 갖게 되었는데, 그건 그가 너무도 박학다식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치 관련 인터뷰집을 낼 때야 “전공이니까”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화감독과의 인터뷰집을 두권 낼 때 보니까 영화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었다. 그때도 그렇구나 했다. 원래 책과 영화와 정치는 어느 정도 통하니까. 이번 책에서 지승호는 자신이 음악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아는 게 많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음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걸 보니, 그건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갑자기 공부한 게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젊은 시절 음악에 빠져 살았을 것이고, 나이든 이후에도 음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몇 번 만나뵌 지승호님은 새벽까지 술만 드시던데, 언제 그런 방대한 공부를 다 하는 걸까?

지승호도 지적한 바 있지만, 가끔 그에게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의 인터뷰집도 좀 내달라”고 요구하는 팬들이 있단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코드가 맞는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만일 지승호가 우리 동네에서 출마하는 전여옥과 인터뷰를 한다면? 십중팔구 싸움질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도…”를 외치는 사람들은 싸움구경이 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지 말자. 싸움구경이야 재미있을지 몰라도 직접 싸우는 당사자는 무척 힘들다. 그리고 내가 알기에 지승호님은-앗 나도 모르게 존칭을!-매우 소심한 분이라, 싸우고 나면 후유증이 오래 갈 거다. 최고의 인터뷰어는 우리 사회의 재산, 그를 싸움판으로 내모는 대신,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자. 책 사는 것도 존중의 한 방법이다.

영진공 서민

ps) 한가지 아쉬운 점. 신해철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배우나 미덕이 있잖아요. 미더덕 말고.” 이런 개그, 아무리 신해철이라 해도 욕먹는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유머를 한단 말인가. 이런 건 지승호 님이 정리해 주셨어야 하는데 그대로 실었다. 정말 아쉬운 대목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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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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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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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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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18대 총선이 끝났다.
적어도 향후 4~5년 간의 한국 정치지형이 결정 되었다.
이런 저런 분석 할 것도 없이 보수 우익의 압승이다.
보수 우익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나머지에 약간의 중도 우익이 자리를 잡았고,
진보 또는 좌익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결과인데, 그럼 왜 글 제목에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써놓았는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1945년에 한민당을 창당한 이래 2004년 초까지 대통령과 의회권력을 독점해 왔다.  그들은 자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대통령으로 따지면 그렇겠지만 의회권력까지 함께 보면 잃어버렸다고 해봐야 4년 남짓이다.

그 시기동안 그들이 권력을 차지 또는 유지해온 주요소를 보자면,
군사쿠데타 두 차례, 관권 및 금권 선거 수 차례, 체육관 선거 수 차례, 공안분위기 조성 수 차례, 지역감정 유발 수 차례 등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권력 위임의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의사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기보다는 독재, 무력, 강압, 공안, 관권, 금권, 지역감정, 북풍, 미풍, 언론 등의 외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시기동안 보수 우익의 장기집권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못했다.
단지, 독재와 강압에 시달리고 관과 보수언론의 헛된 계몽에 길들여진 유권자들이 제대로 권한행사를 할 수 없었거나 기회 자체를 빼았겼다는 분석 정도.
결국 그 긴 세월동안 한국 유권자들이 실제로 어떤 사회구조를 원하고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17대 총선에서의 권력교체도 실은 탄핵사태라는 외적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과거 선거에서 볼 수 있었던 외적 요소가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총선의 결과를 우리 사회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의사표현으로 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세월을 거쳐 이제야 비로소 한국 유권자들의 자발적 표심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실로 즐겁다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무엇이 즐거운가.

한국 유권자들의 사회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확인하게되어 즐겁다.
54%의 유권자들은 사회공동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머지 46% 중 2/3는 우리 사회에선 더불어 함께 사는 것보다는 일단 내가 먼저 잘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사표현을 하였다.
즉, 80%가 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제 살길에 몰두하는 게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예 공영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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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뒤쳐진 사람들로 보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만 제도가 갖춰지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개선의 의무감이나 공헌 필요성을 느끼지말고 그냥 내가 돈 많이 벌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나아지리라 생각하면 되겠다.  

어떤가, 우리 이웃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확인하여서 좋고 그에 맞춰 나의 생활을 대응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게 되어서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고 도덕성보다는 능력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여서 즐겁다.
성추행범, 철새정치인, 계파가신, 경제사범, 파렴치범, 선거사범, 극단주의자, 금품제공자 등 수많은 문제인사들이 대부분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능력이 출중해서란다.

그러니까 앞으로 휴일날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릴 때 거리낌 없이 버스전용차선으로 주행하라.  걸리지만 않으면 되고 걸려도 빠져나올 능력만 있으면 된다.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라, 거리에 가래를 뱉으라, 줄서지 말고 빈자리 양보하지 마라,
세금이나 성금 같은 거 내지 말고 능력으로 사회에 공헌하라, 되는대로 만지고 멋대로 욕하고 아무한테나 반말하다가 불리하면 대충 사과하고 나중에 능력으로 보여주라.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래도 된다고 하였다.

어떤가, 앞으로 공중도덕이나 사회예절에 대한 괜한 부담감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또한 즐거운 건, 과거에 대한 각성과 미래에 대한 책임 같은 건 접어두고 오로지 현실의 풍요만 추구하면 된다는 걸 깨달아서이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직 현재의 내 재정이 늘어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좋다.  말만이라도 기분 좋게 그렇다고 하면 된다.  내가 노력 안해도 해준다고 하면 된다.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걸 좋다고 하였다.

즐겁지 않은가.  내 능력을 개발할 필요도 없고 남들 하는 거 눈치보다가 적당히 따라가면 되고 남들이야 어찌되든 내 주머니만 챙기면 되고.  심신이 힘들 땐 말솜씨 좋고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의 립 서비스에 행복해 하면 되니 말이다.

이러니 내 어찌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있을소냐.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