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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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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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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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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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18대 총선이 끝났다.
적어도 향후 4~5년 간의 한국 정치지형이 결정 되었다.
이런 저런 분석 할 것도 없이 보수 우익의 압승이다.
보수 우익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나머지에 약간의 중도 우익이 자리를 잡았고,
진보 또는 좌익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결과인데, 그럼 왜 글 제목에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써놓았는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1945년에 한민당을 창당한 이래 2004년 초까지 대통령과 의회권력을 독점해 왔다.  그들은 자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대통령으로 따지면 그렇겠지만 의회권력까지 함께 보면 잃어버렸다고 해봐야 4년 남짓이다.

그 시기동안 그들이 권력을 차지 또는 유지해온 주요소를 보자면,
군사쿠데타 두 차례, 관권 및 금권 선거 수 차례, 체육관 선거 수 차례, 공안분위기 조성 수 차례, 지역감정 유발 수 차례 등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권력 위임의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의사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기보다는 독재, 무력, 강압, 공안, 관권, 금권, 지역감정, 북풍, 미풍, 언론 등의 외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시기동안 보수 우익의 장기집권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못했다.
단지, 독재와 강압에 시달리고 관과 보수언론의 헛된 계몽에 길들여진 유권자들이 제대로 권한행사를 할 수 없었거나 기회 자체를 빼았겼다는 분석 정도.
결국 그 긴 세월동안 한국 유권자들이 실제로 어떤 사회구조를 원하고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17대 총선에서의 권력교체도 실은 탄핵사태라는 외적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과거 선거에서 볼 수 있었던 외적 요소가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총선의 결과를 우리 사회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의사표현으로 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세월을 거쳐 이제야 비로소 한국 유권자들의 자발적 표심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실로 즐겁다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무엇이 즐거운가.

한국 유권자들의 사회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확인하게되어 즐겁다.
54%의 유권자들은 사회공동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머지 46% 중 2/3는 우리 사회에선 더불어 함께 사는 것보다는 일단 내가 먼저 잘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사표현을 하였다.
즉, 80%가 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제 살길에 몰두하는 게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예 공영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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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뒤쳐진 사람들로 보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만 제도가 갖춰지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개선의 의무감이나 공헌 필요성을 느끼지말고 그냥 내가 돈 많이 벌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나아지리라 생각하면 되겠다.  

어떤가, 우리 이웃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확인하여서 좋고 그에 맞춰 나의 생활을 대응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게 되어서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고 도덕성보다는 능력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여서 즐겁다.
성추행범, 철새정치인, 계파가신, 경제사범, 파렴치범, 선거사범, 극단주의자, 금품제공자 등 수많은 문제인사들이 대부분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능력이 출중해서란다.

그러니까 앞으로 휴일날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릴 때 거리낌 없이 버스전용차선으로 주행하라.  걸리지만 않으면 되고 걸려도 빠져나올 능력만 있으면 된다.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라, 거리에 가래를 뱉으라, 줄서지 말고 빈자리 양보하지 마라,
세금이나 성금 같은 거 내지 말고 능력으로 사회에 공헌하라, 되는대로 만지고 멋대로 욕하고 아무한테나 반말하다가 불리하면 대충 사과하고 나중에 능력으로 보여주라.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래도 된다고 하였다.

어떤가, 앞으로 공중도덕이나 사회예절에 대한 괜한 부담감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또한 즐거운 건, 과거에 대한 각성과 미래에 대한 책임 같은 건 접어두고 오로지 현실의 풍요만 추구하면 된다는 걸 깨달아서이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직 현재의 내 재정이 늘어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좋다.  말만이라도 기분 좋게 그렇다고 하면 된다.  내가 노력 안해도 해준다고 하면 된다.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걸 좋다고 하였다.

즐겁지 않은가.  내 능력을 개발할 필요도 없고 남들 하는 거 눈치보다가 적당히 따라가면 되고 남들이야 어찌되든 내 주머니만 챙기면 되고.  심신이 힘들 땐 말솜씨 좋고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의 립 서비스에 행복해 하면 되니 말이다.

이러니 내 어찌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있을소냐.


영진공 이규훈

<쾌도 홍길동>, 종방에 부쳐

 


애초에 파격으로 시작했던 만큼 끝까지 그냥 판타지나 가상역사/대체역사로 가버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홍자매의 야심을 오해한 거였다.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은 굉장히 세심한 설정에서까지 원전 홍길동을 가져오는 반면, 원전 홍길동이 오늘날에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의미를 최대한 끌어냈고 원작의 시대적 한계는 물론 주제의 한계까지 가볍게 뛰어넘었다. 15%의 시청율 속에서 이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했던 팬들마저도 대체로 ‘드라마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고 불평을 하지만, 내 감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무수한 단점들과 아쉬움이 노출되긴 했어도, <쾌도 홍길동>은 한국의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해내지 못한 어떤 경지를 획득했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상업적인 매체가 어떻게 가장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성을 획득해내는가,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가에 대한 어떤 전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전 글에서 썼듯, 이 드라마는 한 사람의 영웅이 민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민중이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 영웅을 앞세워 그 어깨에 짐을 얹어주는 방식을 보여준 한편, 실재와 허구 간의 상관관계와 실재가 허구화되는 방식 및 허구가 다시 실재화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이미 충분히 쌓여진 예술과 이야기의 전통 안에서 수직의 방향이 아니라 ‘팬픽’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평의 방향으로 어떻게 예술의 범위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쾌도 홍길동
<쾌도 홍길동>은 공중파에서 보기 드문, '대놓고 혁명을 선동하는' 드라마였다.


그렇다, 사실 <쾌도 홍길동>은 허균의 원전인 ‘홍길동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길동’이라는 허구 캐릭터에 대한 팬픽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 원전을 분명히 밝히면서 원전과 지금의 현재 사이의 틈새를 비집어 새로운 의미로 채우고, 기존에 존재하던 캐릭터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항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포스터모더니즘적인’ 예술방식일 수 있다. 이 안에서 한 시대에 머물렀던 고전은 현대적인 옷을 갈아입으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그리고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내고 어떻게 교훈을 현실세계에 접목시켜야 하는지 깨닫는다. 조선시대의 홍길동은 적서차별에 들고일어났지만, 현실의 홍길동은 계급에 들고 일어나야 한다. 홍길동이 죽은 직후 <쾌도 홍길동> 안에서의 조선은, 이제 신분제는 폐지됐으나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되는 것도 슬쩍 스쳐지나간다.


우리는 이미 극장가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BBC에서 어떻게 드라마화되었는지(열정을 주체못해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미스터 다아시의 새로운 면이 추가된), 그리고 이 드라마가 또다시 어떻게 팬픽의 형식을 통해 소설과 영화로 확장되었는지(브리짓 존스 시리즈 소설 및 영화)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홍자매가 이전에 시도했던 <쾌걸 춘향>과 다른 점은, <쾌도 홍길동>이 직접적으로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영어공용화 정책과 FTA를 비꼬고 병역비리와 삼성비리를 씹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현실풍자는 시청율이 알파요 오메가인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오히려 시청율을 떨어져나가게 만든 주범으로 작용한 감도 있다.) 8, 90년대의 거대담론에 지친 사람들이 탈정치를 부르짖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고,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폐쇄적인 개인에 갇혀 자폐증적 동어반복만 부르짖고, 그 와중에 딴 거 다 필요없고 경제 살리기가 제일이라며 함량 미달의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을 때, 타인의 사정과 사회의 돌아가는 꼴이 알 게 뭐냐며 자기 설움에만 집중하던 길동이와, 그저 오늘 하루 잘 먹고 재미있게 지내는 것에 만족하던 이녹이는 점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미셸 바렛의 저 유명한 구호를 직접 몸으로, 아주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에 목이 말라 한량으로만 떠돌던 길동이는 점차 사회 모순에 눈을 뜨고, 자신이 만들고 지켜가야 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시켜낸다. 이녹이 역시 지식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을 그 스스로 선택하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죽음은 비록 어떤 면에서는 ‘자살택’에 불과할지 몰라도, 죽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꿈을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영생을 얻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회에서 내가 특히 울었던 장면은 활빈당 일동이 굳이 곰이를 산채 밖으로 내보내 살리고, 연씨가 곰이를 무사히 나가게 하기 위해 대신 화살을 막고 죽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홍자매가 단순히 시청자를 억지로 울리기 위해 만든 장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이건 내가 홍자매 중 언니 되는 쪽과 동갑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 30대 초중반의 소위 X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정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온갖 무용담을 가지고 있는 386 선배들에게 쨔질 수밖에 없고 별 거부감없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 경쟁의 생존방식을 몸으로 익힌 20대들에게 걱정을 느끼는 이 세대는, 선배들의 가치는 유산으로 받았으나 선배들의 과오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그러나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게 당연하고 그 후배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그 와중에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가질 수가 없었던 세대다. 386 선배만큼 권력을 탐할 주제도 못 되기 때문에 그저 후세대들을 위해 내 한 몸 거름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고. 연씨의 죽음은 바로 그 정서를 극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지도자는 될 수 없으나 그 지도자의 가치와 이상만큼은 그대로 유산으로 받은 이 세대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그 이상이 어린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88만원 세대 바로 윗세대에 속한 지금의 30대 초중-후반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다. 연씨의 죽음은 바로 이 정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현실에 분노하되 결국 절망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거짓희망을 대표하는 율도국 따위를 건설하고 심지어 거기서 왕으로 군림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대신, 위아래 없는 작은 공동체(이것이 바로 ‘꼬뮨’이 아니겠는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울러 저 율도국이 등장하고 초인 영웅이 등장하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시대의 시스템 한계에 갇힌 기득권자인 은혜(권력의 핵심인 좌의정 영감의 외동딸)로 설정된 것 역시 지극히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설정이라 생각한다. 홍자매의 ‘작가’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은 물론 그 작가 집단의 ‘한계’마저도 겸허하게 투영시킨 것이 바로 은혜가 홍길동전의 원저자라는 저 설정이다.


<쾌도 홍길동>이 이토록 내게 준 것이 많은 만큼, 이것이 끝난 현재 가슴 한구석이 참 싸하면서 허하다. 단순히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채널을 고정하며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서, 혹은 내가 길동이 역을 했던 강지환에게 반해버려서 더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아쉬움 탓도 아니다. 아니, 드라마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강지환보다는 홍자매가 만들고 강지환이 그려낸 ‘홍길동’에 너무나 반해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 물론 현실로 눈을 조금만 돌리며 여기저기 참 많이도 보인다. 내가 명함을 여러 장 바꾸는 시간 동안 딱 한 곳에서 여전히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그녀나, 여전히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그를 몇 년만에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 현실의 홍길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홍길동에 그토록 반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길동이가 꾸었던 이상, 그리고 길동이가 현실화시켰던 그 코뮨에 더이상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진공 노바리

[총선 맞이 가사 검열] Fast Car

내일이 총선일이다.

투표를 꼭 하여야 하나?
사실 누가 국회의원이 되든, 어느 당이 많이 되든 나와 내 가족 또는 우리 국민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 될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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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해야만 하는가?
누구를 또는 어느 정치세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최소한 4년 간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나갈 환경이 결정되고 또 생활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그 진행정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좀 서글픈 이유이기는 하다.
보다 희망에 찬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러지 못하다.

노래 한 곡을 준비 해 보았다.
Tracy Chapman의 데뷰앨범인 <Tracy Chapman> (1988)에 수록되어있는 “Fast Car”이다.

가사의 내용에 보여지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지금이라고 해서 별 달라지지 않았고,
이건 한국이 아닌 미국의 얘기일 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총선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노랫말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쉬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투표가 이 상황을 어떻게 얼마만큼 개선하고자 하는지를 결정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방법과 방향을 고려하여 어느 정치세력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을 외면하는 건 나의 몫이 아니다.  그저 포기일 뿐이다.

그러니 투표하자.  내 몫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You got a fast car
I want a ticket to anywhere
Maybe we make a deal
Maybe together we can get somewhere

네 차는 참 빠르지,
나를 태우고 아무데나 가줘,
조건을 걸어도 좋아,
그냥 우리 함께 어딘가로 가버리든가,

Anyplace is better
Starting from zero got nothing to lose
Maybe we’ll make something
But me myself I got nothing to prove

아무데라도 좋아,
빈 손으로 시작하면 잃을 것도 없으니,
우리 뭐라도 하면 되지,
지금 내겐 아무 것도 없는 걸,

You got a fast car
And I got a plan to get us out of here
I been working at the convenience store
Managed to save just a little bit of money
We won’t have to drive too far
Just ‘cross the border and into the city
You and I can both get jobs
And finally see what it means to be living

네겐 빠른 차가 있지,
내겐 우리 함께 여길 벗어날 계획이 있어,
그간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약간의 돈을 모았어,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돼,
주 경계를 넘어서 다른 도시로 가자고,
너와 나 직장을 잡고,
산다는 게 뭔지 경험해 보자,

You see my old man’s got a problem
He live with the bottle that’s the way it is
He says his body’s too old for working
I say his body’s too young to look like his
My mama went off and left him
She wanted more from life than he could give
I said somebody’s got to take care of him
So I quit school and that’s what I did

울 아빠는 문제가 많아,
항상 술병을 끼고 살지,
일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일 뿐이야,
울 엄마는 도망 가버렸지,
울 아빠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원했나봐,
누구라도 아빠를 돌봐야했지,
그래서 내가 학교를 때려치운거야,

You got a fast car
But is it fast enough so we can fly away
We gotta make a decision
We leave tonight or live and die this way

네 차는 빠르지,
그 차를 타고 하늘 위로 나를 수도 있을까?
우리 결정을 해야 해,
오늘 밤에 떠나든지 아니면 이렇게 살다 죽는 거야,

I remember we were driving driving in your car
The speed so fast I felt like I was drunk
City lights lay out before us
And your arm felt nice wrapped ’round my shoulder
And I had a feeling that I belonged
And I had a feeling I could be someone, be someone, be someone

너와 함께 네 차를 타고 달리던 걸 기억해,
너무 빨라서 마치 술에 취한 듯 했지,
우리 앞을 스쳐가는 도시의 불빛들과,
내 어깨를 감싼 네 팔의 근사한 느낌,
그때 비로소 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느낌을 알았어,
그리고 내가 사람이라는 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

You got a fast car
And we go cruising to entertain ourselves
You still ain’t got a job
And I work in a market as a checkout girl
I know things will get better
You’ll find work and I’ll get promoted
We’ll move out of the shelter
Buy a big house and live in the suburbs

네겐 빠른 차가 있지,
그 차로 우린 달리며 즐기는 거야,
넌 아직 직장이 없지만,
난 마트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어,
앞으로 형편이 좋아질 거야,
네가 직장을 잡고 내 시급도 오르면,
쪽방에서 벗어나,
교외의 큰 집을 사는 거야,

You got a fast car
And I got a job that pays all our bills
You stay out drinking late at the bar
See more of your friends than you do of your kids
I’d always hoped for better
Thought maybe together you and me would find it
I got no plans I ain’t going nowhere
So take your fast car and keep on driving

넌 빠른 차를 몰고,
난 내가 번 돈으로 생활비를 내지,
넌 술 마시느라 늦게까지 안 들어보고,
자식들 보다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지,
난 항상 형편이 좋아질 거라고 믿어,
너와 내가 함께 그 길을 찾아낼 거라고 생각하지,
 내겐 아무 계획도 없고, 어디로도 가지 않아,
그러니 네 빠른 차를 몰고 그냥 사라져 버리든가,

You got a fast car
But is it fast enough so you can fly away
You gotta make a decision
You leave tonight or live and die this way

네 차는 빠르지,
하지만 그 차를 타고 구름 위를 달릴 수는 없을 거야,
결정을 내려,
오늘 밤 떠나든지 아니면 이렇게 살다 죽든지,

영진공 이규훈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녹색 평론사




경제 침체의 멍에를 쓰고 노무현 정권은 퇴진하고 경제 활성화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수치상으로 보자면 노무현 정권 하에서의 경제는 결코 침체가 아니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체감할 수 없었고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 결과 국민들은 도덕성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경제를 발전시켜 자신들의 가난을 없애 줄 것으로 기대되는 이명박 정권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왜 경제가 발전하였음에도 양극화는 줄어들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얼마나 경제를 성장시켜야 양극화는 줄어들고 모두가 가난에서 해방된 파라다이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




파이는 얼마나 커져야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20세기 냉전의 시기를 거치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커다란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결국 자본주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자본주의는 인류의 진보이자 진리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지금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은 이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저자는 ‘상식’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식이 되었다는 것을 정치학에서는 패권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현실처럼 보입니다. 논의나 토론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는, 실증이 이미 끝난, 혹은 실증 이전의 믿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의 위치에 놓입니다. 패권적인 사고에 모두 설득당한다기보다도 그것을 의심조차 하기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배타적 진리, 즉 상식이 되고, 그 이외의 사고방식은 비상식이 됩니다.”




사실 조금만 둘러보아도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 빈부격차의 해결책 역할을 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30~40년 전보다 몇 배나 국민 소득이 증가했지만 양극화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세계 최장 근무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눈을 돌려 세계를 보더라도 마찮가지다. 행복지수는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낮은 유럽국가들에게서 높이 나타난다. 세계 유수의 도시는 발전을 거듭하고 빌딩은 하늘 위로 끝없이 치솟지만 슬럼가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다. 




16세기 전에는 천동설이 상식이었고 자연발생설이 상식이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것이 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듯 저자는 경제성장이라는 상식을 깨야만 진정한 해결책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해결책 중의 하나로 ‘제로성장’을 제시한다. 나 역시도 ‘상식’에 길들여져서인지 그의 ‘제로성장론’이 조금 허황되게 느껴지지만 저자의 이 말 만큼은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중략)….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명박 정부는 파이를 크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얼마나 공정히 나눌 것인가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지금 그가 보여준 정책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경제성장을 핑계로 기업의 규제를 풀고 복지정책을 축소함으로서 오히려 부의 쏠림을 더욱 굳건히 만들고 있다. 우리가 경제성장이라는 ‘상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이명박 정권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며 생존해나갈 것이며 그 피해는 이명박 정부를 지지한 가난한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 책은 경제문제 뿐 아니라 ‘상식’이란 틀에서 군대, 정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군대문제에서는 국가에 교전권이 필요한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정치문제에서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