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 죽음을 부르는 사회의 자화상

 

 

 

 

동급생에게 집단폭행 당한, 인천의 한 중학생 정신과 치료 2013.06.17

인천의 한 중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4월 3일 인천청라중학교 1학년 강모(13)군이 체육시간에 남의 옷을 밟았다는 이유로 운동장에서 동급생 5명에게 집단폭행 당했다. 강 군은 땅에 떨어진 옷을 실수로 밟은 점을 사과했지만 이들은 다음날 더 많은 학생들을 교실로 데려와 강 군을 때리는 등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폭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가해 학생들은 여학생들까지 데려와 강 군이 맞는 모습을 구경하도록 하는가 하면 음식쓰레기를 강제로 입에 넣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0대 5명이 여중생 집단폭행…경찰 조사 2013.05.16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또래 여중생을 집단 폭행한 혐의로 16살 전 모 군과 16살 김 모 양 등 10대 5명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전 군 등은 지난 11일 오후 6시쯤 의정부동의 한 골목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중학교 2학년 14살 김모양을 집단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행인이 112에 신고한 것을 눈치채고 달아났다가 출동한 경찰관들의 수색 끝에 붙잡혔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 중 일부는 이틀 전인 9일에도 포천의 한 다리 밑에서 김 양을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은 김 양을 강제추행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는 주장이 학교 자체조사에서 제기돼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할 계획입니다. 김 양은 코뼈 등을 크게 다쳐 수술을 받고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 머릿 속을 지배하는 단어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지메의 구조”라는 책을 보면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전체주의 사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는 이런 구조를 <중간 집단 전체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전쟁과 같은 특수한  때 일반적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소규모 집단에게 자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가장 대표적인 영화로는 “파리 대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시민법이 통하지 않는 자치적 사회의 특징은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없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하더군요. 마치 우리나라의 학교나 군대처럼 말이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 억지로 친근해질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보스-추종자-평민-노예 그룹으로 나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따를 괴롭히는 “그들만의 축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내부의 법이나 규칙도 외부와 달라서 학교는 학교법이 군대는 군법이 일반 헌법이나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게 됩니다. 금 “정봉주의 전국구” 듣다가 경악한 게 군대 내의 사법체계에서는 사단장이 판결까지도 바꿀 수 있답니다.

 

 

 

 

 

대개 폭력이나 괴롭힘의 양상은 아래와 같더군요.

1. 분노하는 신 (폭력으로 약자를 눌러버람) – 무자비한 폭행

2. 주인 노예 (언제든 굽신거리며 주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

   – 심부름, 셔틀, 무엇이든 하도록 시키는 짓

3. 장난치는 신(치약먹이기, 바퀴벌레먹이기, 이상한 짓 시키기)

   – 윤일병에게 한 짓들, 학교에서 왕따에게 이상한 짓 시키기등

 

결국 이 비정상적인 환경을 제거하지 않거나,  일반 시민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는 이상 학교와 군대에서는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는 얘기였고, 그 사회 바깥으로 나오면 자기가 거기에서 왜 그런 짓을 하고 살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번주까지 내내 군 자살 사건, 사망사건이 끊이지를 않는걸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2013년 6월 17일의 기사를 보면 자신의 지위를 알리기 위해 다른 반 애들에게 구경까지 시키면서 저렇게 하고 있었답니다.

전 세월호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부 규칙이 시민법의 규칙보다 우위에 있는 집단-그게 바로 관피아겠죠. 정당 내부의 규칙 역시 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안철수나 김한길도 이 관점에서보면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즉 자기들의 규칙이 그 어떤 일반적 시민사회의 규칙보다 우선인 사회 말이죠.

 

 

 

 

 

저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정에서도 자주 보입니다. 부모의 말도 안되는 규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많이 반복됩니다. 그 안에서는 평등한 시민사회의 규칙보다는 얼핏 보스와 노예같은 상태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다시 철저히 그런 사회로 편입되고, 군대에 가면 한번 더,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도 또 한번 더, 그 자신이 가정을 가지면 또 그렇게 하겠지요.

 

이러한 때에 싸워야 할 적은 뭘까요?

유교적 고정관념일까요? 아니면 폐쇄적인 가족주의의 병폐?

해답을 찾고 있지만 답이 잘 나오질 않네요 …

 

 

 


영진공 신샘

 

 

 

 

 

 

 

 

 

 

 

 

 

 

 

 

 

 

 

 

 

 

 

 

 


 

“캡틴”을 보내면서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선, ‘졸필’이나마 주절거리고 싶어지고 그런 사소한 노력이나마 고인을 추모하는 일련의 행동일까 하여 몇 자 적어봅니다.

 

9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대학을 갔던 내게, 90년은 ‘전교조 교사 해직 사태’만 선명히 기억에 남는 한해입니다. 3학년이야 ‘입시’땜에 말할것도 없고, 1학년때는 ‘물정’ 모르는 신입생이라 치면 고교시절 어느 면으로든 가장 좋았던 해는 2학년.

 

학교에서 ‘전교조 사태’로 해직 당한 3분의 선생님 중 한분을 담임으로 뒀던 우리 반은 그래서 행복했고 … 그랬던 만큼 그분의 빈자리로 인해 남은 2학년 생활이 우울했던 그런 반이었더랍니다.

 

늘 뻔한 잔소리로 때우기 마련인 조례시간을 꼭 필요한 전달사항만 간단히 전하고, ‘5분 스피치(Speech)라는 걸 저희들로 하여금 순서대로 준비하여 발표하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주제로 자기 생각과 의견을 남 앞에서 발표해 보고, 또한 그에 대한 또다른 견해나 의문을 제시하게 하는 이른바 “발표 및 토론학습’을 처음 경험하게 해 주셨던 분이었답니다.

 

그 밖에도 어느 볕좋은 토요일 오후 (우리때는 토욜 오후에도 4교시 수업 끝나고 자율학습이란 걸 하고 저녁쯤 하교했었어요 … 생각하니까 새삼 승질 나네 ㅆㅂ!!),

 

자습하던 우리를 바닷가로 다 끌고 나가서 함께 공을 차고 둘러 앉아서 장기 자랑도 하면서 한마디로 ‘즐거운 토욜 오후’를 선물해 주셨던 멋진 분이셨죠. 오로지 ‘대학진학’을 위한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던 그 시절, 일등도 꼴등도 없는 … 대가리도 찌질이도 없는 … 어깨동무라는 그 피상적인 단어를 실제로 느끼게 해준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날 장기자랑 제 순서때 다리를 다쳐서 목발을 했던 급우의 목발을 소품 삼아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기타처럼 두드리며 껑충거리면서 못하는 노래를 커버하여 반친구들 뿐만 아니라 그때 해변에 있던 일반 관광객들에게 일제히 박수를 받았던 저의 즉흥적인 퍼포먼스에 관해서도 깨알같이 자랑해 봅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학급문고’. 대부분 집에서 굴러다니는 책들을 가져다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반마다 있었던 ‘학급문고’. 그러나 저희 반에는 ‘걸리버 여행기’나 ‘몽테 크리스토 백작’ 대신에 루이제 린저의 ‘북한 여행기’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그리고 ‘노동의 역사’ 같은 그때 당시엔 고등학생이 읽기엔 위험하고 불온한 서적으로 오인받을 만한 이른바 ‘사상서적’, 정확히 말해 ‘사회 과학 서적’들이 가득찬, 아버님이 목수셨던 반친구의 협찬을 받아 특수제작된 자물쇠 달린 ‘금고형 학급문고’가 교실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당시 저희 학교에선 세분의 선생님, 두분의 국어 선생님과 한분의 영어 선생님이 ‘해직’을 당하셨습니다. 그 때 학급문고 도서관리 담당을 하고 있던 저는 교무실 학생과에 끌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진실’이 담겨있던 그 책들이 교무실 한켠에 널부러져 있고, 여기 저기서 수근거리며 저를 쳐다보던 다른 교사들의 그 눈빛 그리고 그 경멸의 눈빛들을 대표로 한마디로 정리해 주듯이 내뱉던 학생과장.

 

“애덜을 빨갱이를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만 이 셰끼”

 

그리고 그 책 중 한권으로 제 뒤통수를 두어대 사정없이 후려쳐 주시는 ‘무식함’은 절대 생략하지 않았던 그 학생과장.

그리고 퇴학이니 정학이니 절 협박하면서 강제로 쓰게 했던 ‘각서’인지 ‘진술서’인지 그 정체모를 필사본(?). 그 글씨도 드럽게 못쓰던 그 학생과장이 연필로 초안을 잡아준 종이에 제가 볼펜으로 덮어쓴, 여러분이 뻔히 예상 가능한 내용들.

 

 

 

 

 

“담임 교사의 강요에 의해 불온서적인지 모르고 도서관리를 맡았고 … 그 교사의 불순한 교육의도에 대해 증언할 수 있다”는 등의 더 이상 글로 옮기고 싶지도 않은 …

편모슬하에서 거의 유복자나 다름없는 외아들로 자란 제게 이런 일로 어머니 맘을 아프게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어리던 저는 처음으로 현실과의 괴리라는 걸 경험했고, ‘굴복’이라는 처절하고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죠.

몇자 끄적이려던 것이 장황해졌습니다만, 암튼 당시 저랑 비슷한 경험을 했을 … 이른바 ‘우리 선생님’을 빼앗긴 경험들.

 

불의의 사고나 병가 내지 임신등으로 인한 정식 휴가가 아닌 ‘해직’이라는 이유로 두 명의 담임이 있었던 학년이 있는 일부의 우리 세대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는 각자의 경험의 크기에 따라 다를지라도, 많은 의미와 생각들을 가져다준 영화였음에 틀림없습니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그 영화를 보면서 흘렸던 그 뜨거운 눈물 … 아직 살아계신 울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까진 다시 흘릴 수 있을까 싶은 눈물이었던 저에겐 이 영화만큼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영화는 만날 수가 없을겁니다.

저에게 ‘로빈 윌리암스’는 그 힘없던 시절, 지켜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한 그 선생님의 쓸쓸한 마지막 모습이 거짓말처럼 그대로 투영된 ‘캡틴’으로 다가와 앞으로도 그 모습으로만 기억될 배우입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그 마음을 하소연 할 데가 없어 이렇게,

 “학창 시절 전교조 해직교사를 담임으로 둔 경험때문에 나름 감동깊게 본 영화의 주연배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

이 두 줄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글을 이렇게 긴 지면을 할애하여 적어 봅니다.

 

 

“Thank you, captain, thank you.”

 

 

 

영진공 마사오친구막싸요

 

 

 

 

 

 

 

 

 

 

 

 

 

 

 

 

 

 

 

 

 

 

 

 

 

 

 

 

 

“가오갤”, 유쾌한 찌질이들이 은하계를 수호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Guardians of the Galaxy)라는 은하수호대는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가오갤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쩌면 시저도 못한 세계정복을 디즈니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오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옹골차게 유머를 주입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심지어 그 진지할 수밖에 없어야 할 클라이막스의 위기상황에서도 이들은 유쾌한 유머로 위기를 헤쳐나갑니다.

 

그런점에선 정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위대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이 황홀할 정도로 가지각색인 데다가 그 종류도 애정이 깊이 들만큼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과 “겨울왕국”을 강하게 이끌어줌으로써 흥행에 성공시킨 장점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바로 음악입니다. 80년대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절묘하고 흥겹게 배치시켜 놓아서

가뜩이나 유머에 즐거워하던 관객들의 흥을 더욱더 돋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이 장점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안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마블 코믹스가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으며 발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는 전혀 창의적인 발상이 없습니다. 스토리는 너무 밋밋하고 별 볼일 없으며 세계관의 확장으로만 이용됩니다. 그래서 화려한 영상은 단지 스토리의 부실함을 감추기 위한 겉치레로 전락해 버렸고 영상미마저 색이 바라게 됩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특색은 있지만 그 깊이가 너무 얕습니다. “어벤저스”는 그 영화를 위해 이전부터 캐릭터 고유의 영화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래도 그다지 깊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벤져스 팀에 깊이를 부여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전혀 아닙니다.

 

새로운 영웅들에게 새로운 활약을 위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기엔 그들은 너무 어중이떠중이들입니다. 우정타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습구요.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연이은 흥행으로 인한 마블의 오만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더도말고 덜도말고 오락블록버스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4D로 봤는데 영화 도중 얼굴에 물을 (기분나쁠정도로) 쏟아붓는 장면이 3개 정도가 있고 우주선의 움직임을 표현하느라 쓸데없이 움직여대는 의자에, 액션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격하게 움직여서 안경추스르느라 오히려 액션이 보이지 않았던 점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저 여름을 잠시 잊게 할만한 오락영화 입니다. “윈터 솔져”를 기대하였지만 이 영화는 그저 유머감각이 좋아진 “트랜스포머”일 뿐이었습니다.

 

하나 더 아쉬웠던 점은 영화가 청소년 관람가라 그런지 등장인물의 몇몇 재미있을 드립을 직역해서 번역하여서 좀 더 찰지게 전달되지 못한 점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유머감각은 정말 최고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영화 중 최고의 드립

-지금 뭐하는 거지?

-댄스배틀!

 

 

영진공 샤인제이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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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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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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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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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18대 총선이 끝났다.
적어도 향후 4~5년 간의 한국 정치지형이 결정 되었다.
이런 저런 분석 할 것도 없이 보수 우익의 압승이다.
보수 우익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나머지에 약간의 중도 우익이 자리를 잡았고,
진보 또는 좌익의 자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결과인데, 그럼 왜 글 제목에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써놓았는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1945년에 한민당을 창당한 이래 2004년 초까지 대통령과 의회권력을 독점해 왔다.  그들은 자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대통령으로 따지면 그렇겠지만 의회권력까지 함께 보면 잃어버렸다고 해봐야 4년 남짓이다.

그 시기동안 그들이 권력을 차지 또는 유지해온 주요소를 보자면,
군사쿠데타 두 차례, 관권 및 금권 선거 수 차례, 체육관 선거 수 차례, 공안분위기 조성 수 차례, 지역감정 유발 수 차례 등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권력 위임의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의사가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기보다는 독재, 무력, 강압, 공안, 관권, 금권, 지역감정, 북풍, 미풍, 언론 등의 외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시기동안 보수 우익의 장기집권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질 못했다.
단지, 독재와 강압에 시달리고 관과 보수언론의 헛된 계몽에 길들여진 유권자들이 제대로 권한행사를 할 수 없었거나 기회 자체를 빼았겼다는 분석 정도.
결국 그 긴 세월동안 한국 유권자들이 실제로 어떤 사회구조를 원하고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던 것이다.
(17대 총선에서의 권력교체도 실은 탄핵사태라는 외적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과거 선거에서 볼 수 있었던 외적 요소가 거의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총선의 결과를 우리 사회 유권자들의 자발적인 의사표현으로 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세월을 거쳐 이제야 비로소 한국 유권자들의 자발적 표심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실로 즐겁다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무엇이 즐거운가.

한국 유권자들의 사회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확인하게되어 즐겁다.
54%의 유권자들은 사회공동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머지 46% 중 2/3는 우리 사회에선 더불어 함께 사는 것보다는 일단 내가 먼저 잘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사표현을 하였다.
즉, 80%가 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제 살길에 몰두하는 게 좋은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고 아예 공영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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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뒤쳐진 사람들로 보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할 정도만 제도가 갖춰지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개선의 의무감이나 공헌 필요성을 느끼지말고 그냥 내가 돈 많이 벌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나아지리라 생각하면 되겠다.  

어떤가, 우리 이웃들의 그런 사고방식을 확인하여서 좋고 그에 맞춰 나의 생활을 대응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게 되어서 즐겁지 아니한가.  

그리고 도덕성보다는 능력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여서 즐겁다.
성추행범, 철새정치인, 계파가신, 경제사범, 파렴치범, 선거사범, 극단주의자, 금품제공자 등 수많은 문제인사들이 대부분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능력이 출중해서란다.

그러니까 앞으로 휴일날 승용차로 고속도로를 달릴 때 거리낌 없이 버스전용차선으로 주행하라.  걸리지만 않으면 되고 걸려도 빠져나올 능력만 있으면 된다.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라, 거리에 가래를 뱉으라, 줄서지 말고 빈자리 양보하지 마라,
세금이나 성금 같은 거 내지 말고 능력으로 사회에 공헌하라, 되는대로 만지고 멋대로 욕하고 아무한테나 반말하다가 불리하면 대충 사과하고 나중에 능력으로 보여주라.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래도 된다고 하였다.

어떤가, 앞으로 공중도덕이나 사회예절에 대한 괜한 부담감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또한 즐거운 건, 과거에 대한 각성과 미래에 대한 책임 같은 건 접어두고 오로지 현실의 풍요만 추구하면 된다는 걸 깨달아서이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직 현재의 내 재정이 늘어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도 좋다.  말만이라도 기분 좋게 그렇다고 하면 된다.  내가 노력 안해도 해준다고 하면 된다.
80%가 넘는 유권자들이 그걸 좋다고 하였다.

즐겁지 않은가.  내 능력을 개발할 필요도 없고 남들 하는 거 눈치보다가 적당히 따라가면 되고 남들이야 어찌되든 내 주머니만 챙기면 되고.  심신이 힘들 땐 말솜씨 좋고 허우대 멀쩡한 사람들의 립 서비스에 행복해 하면 되니 말이다.

이러니 내 어찌 즐겁다 하지 않을 수 있을소냐.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