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레즈물이 보고 싶다!!!



쪽팔린 고백부터 해보자.
끓어넘치는 피를 감당하기 힘든 시절, 솔까말 나도 야동 엄청나게 봤다.  하루라도 안 보면 사타구니에 진정제를 맞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 야동은 나에게 단순한 욕구충족 + 대리만족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상황에서 필요 이상의 흥분을 해 버리는(버스에서 살짝 여성과 몸이 스친 것만으로도 발기가 된다든지 하는) 나의 왕성한 성욕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화성의 수분만큼은 있었다(…라고 변명한다.) 물론… 므흣한 목적이 화성의 수분을 제외한 다른 것들만큼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보는 야동의 장르는(-_-;;)다름아닌 레즈물이었다. 그렇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여성끼리의 성행위를 주로 다루는 레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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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도 싫어하진 않는다

호오… 사진 참으로 므흣하다.. 흠흠.

암튼, 당시 내가 위와 같은 이쁜 녀성들이 사랑을 나누는 레즈무비들을 즐겨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르노라는 장르적 특성상 최소한 두 사람이 홀랑 벗은 상태에서 영화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털이 수북한 남자 배우의 몸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것이 좀,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들이 천사같은 여성들의 몸을 유린하는 내용이 많은 메이드 인 저팬 필름들은 지금도 보기가 많이 괴롭다…그건 고문이지..) 물론 금기를 깨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보다 보면 여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금기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버리기 때문에 … (도대체 얼마나 본 거냐…)

암튼, 누구에게도 대 놓고 “제 이름은 없다구요. 취미생활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야동을 보는 것이구요. 그 중에서도 레즈물을 좋아라 합니다. 회사는 SOD를….”이라는 식으로 나의 이런 취향을 말함으로서 사회적 매장을 초래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내가 위와 같은 영상물을 보는 것을 즐기고, 므흣해하고, 심지어는 모으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죄라거나,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불법 공유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죄가 맞지만 …(지금도 모으냐구요 …? 슬프지만 지금 저는 그때처럼 펄떡펄떡하지는 않는군요. 그래도 가끔은 봅니다. 추석맞이 행사 정도로.)

나를 즐겁게 하는 행위가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머리가 미쳐 돌아가 길거리에서 손잡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을 죄다 레즈비언으로 본다거나 하는 식의 행동을 한 적도 없으니까. 이 대목에서 다시한번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고 싶어지지만 … 일단 본론으로 돌아가자.

올해들어 유난히 남성 동성애, 그러니까 게이에 관한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미 개봉해서 여성관객 점유율 86%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한 [앤티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 [쌍화점]등 스크린을 채우는 영화들과 10월에 막을 내린 [쓰릴 미]와 같은 뮤지컬도 그렇다.
[바람의 화원]이나 [커피프린스]처럼 남장여자와 남자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들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동성애 코드가 이미 일반 대중에게 별 거부감없이 먹혀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단편적으로나마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왜 남성 동성애 뿐인지.

세상은 넓고, 동성애자들은 많고, 그 중에 절반은 여성 동성애자일텐데. 왜 남성 동성애만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환영받는지에 대해선 참으로 궁금하다.


만드는 쪽에선 이 질문에 대해 이미 준비된 대답이 있을 듯하다.
“돈이 되니까 그렇지.”

[앤티크]를 보러 온 수많은 여성관객들이 전부 동성애자로서 동성간의 사랑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얻었다거나, 동성애자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현상을 직접 만들어냄으로써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인권 발현에의 참여의지를 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재미”와 “흥미”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만족을 느꼈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도 이미 대답은 나와 있는 듯 하다. 주변에서 [앤티크]를 보았다는 여성분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보라. 대충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꽃미남에 몸 좋은 애들이 넷이나 나오니까.”

아 물론, 좋은 원작이 있고 좋은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거기에 때마침 꽃돌이 네명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이야기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잘생긴 남자들이 넷이나 나와서 지들끼리 알콩달콩 사랑도 하고, 사랑하다보니 뽀뽀도 하고, 지켜보는것이 므흣해서, 그래서 극장을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흠이 될까? 매력적인 이성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감상의 목적이 된다 한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앤티크]는 본격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다. 가볍게 거부감이 없는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가벼운 동성애는 여성으로 하여금 여러 부분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된다. “꽃미남”이라는 거부하기 힘든 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누구도 이것을 남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남자끼리 키스하는 것을 보면 거북해지는 남자인 나 또한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남성들이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휘바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여성들을 변태로 몰아붙이거나 야유를 날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나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레즈물을 보았지만, 난 전혀 변태가 아니니까.

그렇담 꾸물꾸물 솟아나는 생각. 나도 욕망을 충족시켜보고 싶다. 코딱지만한 컴퓨터 화면에서 이름도 모르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포르노는 더 보고싶지 않다. 나도 당당하게 극장에서 김혜수와 손예진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생각만으로도 환상적이다…흠냐…) 레즈영화를 보고 싶다. 여성 동성애에 대한 깊은 고찰이나 고민을 함께할 능력은 안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의사는 있다.(그리고 DVD한정판을 사기위해 교보문고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새치기 하는 녀석이 있으면 허리를 반대로 접어버릴 용의도 있다.)

그러니까 좀, 만들어 줘!! 나도 당당하게 레즈영화 보고 싶단 말이다!!!

영진공 거의없다

샘플링(Sampling)이라고???

얼마 전에야 <원더걸즈>라는 소녀그룹의 “텔미”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전 국민 계층에 걸쳐 엄청나게 히트를 한 노래라는데, 이제야 일청한 난 뭐냐능 -_-;;;

그런데 이 노래가, 80년대에 반짝 히트했던 어느 디스코곡을 강하게 연상시키는지라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노래 혹시 그 노래 번안곡 아냐???”라고 …

역시나 이 곡의 작곡자가 그 곡을 샘플링했다고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흐음 … 글쿤 …

아니, 가만 … 샘플링이라고???
어머, 그럴리가 … 이건 샘플링이 아닌데 …

일단 두 노래를 직접 들어보자.


원더걸즈 테,테,테,테,테, 텔미히~


Stacy Q “Two Of Hearts” (1986)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서 샘플링이란 어느 곡의 몇 소절을 따오거나 연주기법을 차용하거나 또는 특정하게 반복되는 패턴(리프, Riff)을 모사하는 기법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위의 두 곡에서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샘플링인가.
이건 샘플링이 아니라 원곡의 창조적 재구성이라 해야 한다.

원곡의 분위기를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들어도 신나는 작품을 만들어 놓으시고선,
작곡자 그 분은 왜 굳이 샘플링이라고 겸양의 덕을 발휘하신 걸까???

그럼 여기서 샘플링이 뭔지 알아 보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다.
아래의 두 노래를 들어보자.

첫 곡은 <America>의 “Ventura Highway”라는 1972년 발표작이고,
두 번째 곡은 <Janet Jackson>의 “Someone To Call My Lover” (2001) 이다.



America “Ventura Highway”



Janet Jackson “Someone To Call My Lover”

America의 노래에서 계속 반복되는 기타 리프를 모사하여 Janet Jackson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한 걸 확인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샘플링이란 원곡의 특징적인 일부분을 제한적으로 따올 때 그 효과가 크다 할 것이다.

실례와 비교해 보니, 원더걸즈의 노래에 Stacy Q의 노래가 “샘플링” 된 게 없다는 나의 주장에 한껏 힘이 실리는 듯한 느낌은 혹시 나만 …

암튼 샘플링은 아니고 그럼 혹시 리믹스???

리믹스란 말 그대로 노래의 믹싱을 다시 하는 걸 일컫는다.
믹싱이란 따로 녹음된 노래의 요소들을 함께 엮어서 완성된 노래를 만드는 작업인데,
리믹스는 원곡의 분위기나 템포 등을 바꿔 새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다.

그래서 리믹스를 할 때는 새로운 악기파트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악기파트를 뺀다든지, 특정부분을 늘리거나 줄이든지, 빠르기나 비트를 바꾼다든지 하게 된다.
그리고 아예 서로 다른 곡들을 함께 섞어서 하나의 노래로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번에도 역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첫 곡은 Mariah Carey의 “Fantasy”(1995)이다.
이 곡의 중간 쯤에 Tom Tom Club의 노래를 샘플링한 부분이 있는데,
그 곡이 두 번째 동영상인 “Genius Of Love”(1981)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은 합쳐져서 리믹스 버젼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곡이 세 번째 동영상인 “Fantasy (ODB Remix)”이다.

확인해 보자.



Mariah Carey   “Fantasy”


Tom Tom Club   “Genius Of Love”


Mariah Carey   “Fantasy (Ol’ Dirty Bastard Remix)”


들었는가, 보았는가,
리믹스도 그렇고 샘플링도 그렇고 잘 만들어진 작품은 원곡과 대상곡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를 구성하면서도 각자의 특징이 잘 구분된다.

그런데 Stacy Q와 원더걸즈의 경우는 그런게 아니다.
원곡의 요소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각각 잘 분리하여 새로운 해석으로 터치한 작품인 것이다.

이처럼 원곡의 느낌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섬세하게 입히고 특히 우리 정서에 맞게 제대로 향토화한 걸작을 두고,
그저 샘플링만 했다고 스스로 깎아내리다니 …

지나친 겸양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하였거늘 어찌 그리하였단 말인가, 에혀 …

영진공 이규훈

명박오빠의 일침


일침[一鍼] 침 한 대라는 뜻으로, 따끔한 충고나 경고를 이르는 말.
 

문득 깨달았다.
명박오빠 관련 기사엔 유난히 일침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는 걸.
오빠가 그렇게 일침을 자주 놓던가? 궁금해져서 한번 검색해 봤다.
그러자 줄줄이 나오는 기사들.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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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당일부터 시작해 볼까?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친 뒤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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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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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지어 수군거리면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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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가서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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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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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무자년 새해를 맞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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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또다른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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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와 박수 속에서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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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새 두 번씩 같은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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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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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자회견에서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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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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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회의를 주재하며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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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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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대상 아침 방송에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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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애애하지만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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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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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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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취임 전 ========================

대통령 취임하고
첫 업무보고부터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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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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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우회적으로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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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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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보고에 앞서
차 마시다가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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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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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끄는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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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책하고, 꼬집고, 쓴 소리를 퍼붓고, 일침.
(헐… 안 울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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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고, 호되게 꾸짖고, 질책하고,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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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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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는 없슈.
일기예보에도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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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취임하고 27일(한달도 안 됐음)============
========= 참고로, 중복되는 내용의 기사는 최대한 뺀 것=========

그런데 이런 깐깐하고 무서운 오빠가
드디어 ‘칭찬’도 아닌 ‘극찬’을 했다는 것임.
대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면 오빠에게 극찬이란 걸 받아볼 수 있음?
가슴이 두근거렸음. 부랴부랴 기사를 읽어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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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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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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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도대체

“03오빠”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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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빵상 이전에 영삼 있었다.
사실이었다. 한때 영삼오빠의 어록은 ‘좀 짱’ 정도가 아니라 인기 최고였다.
오빠는 말만 화끈하게 하는 게 아니라 행동도 화끈해서, 고려대 특강하러 갔는데 학생들이 저지하니깐, 차 안에서 14시간을 버틴 적도 있다.
소변은 우유통에 누어가며 말이지. 이건 보통 화끈한 게 아니라서 홀딱 반할 수밖에 없었다구용.

한동안 조용했던 오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나라당 공천 때문에 화났다.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단다. 역시 오빠다!  재임시절 공식석상-무려 한중 정상회담 자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고 선언해 모두를 화들짝 놀라게 한 터프함, 어디 안 버린 거다. 이런 멋쟁이♡

오빠의 귀환이 반가워 아래 자료를 링크한다.
아 물론 반갑다는 거지, 사귀고 싶다는 건 아님.




영진공
도대체

영화 <추격자>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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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가 장안의 화제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한 편이 높은 완성도의 한국영화를 갈망해온 국내 객석의 환호를 받고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에 대한 갈망은 곧 자국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갈망함에서 비롯된다.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사람들은 자기 소속 집단, 선택이 아닌 운명적으로 그 소속이 결정되어버린 공동체에 대해 자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국의 영화 뿐만 아니라 스포츠 행사나 기타 문화적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일들에 열광한다. 반면에 국보 1호를 불태워 먹는다거나 하는 일에는 무한한 쪽팔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심하라. 우리나라만 유난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한 두 건 올리는 경우는 여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쪽팔림과 자부심에 대한 갈망은 동전의 양면이요 같은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이 없다. 쪽팔린 일이 아직 많다보니 자부심에 대한 갈망이 약간 강할 뿐이다. 쪽을 팔 일이 적어지고 지난 일들을 상기할 일이 없어질 때 즈음 과도한 갈망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될 일이다.

물론 <추격자>는 애국주의 마케팅(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화다. <추격자>에 대한 지지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결과론일 뿐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조롱하고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냐고 질문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추격자>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 관객들은 한국영화 보는 걸 몹시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거품 경제를 토대로 피어났던 1996년의 르네상스와 이후 2003년 황금의 해를 통과하기까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이전 보다 많이 좋아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만들어지는 숫자에 비해 충분하게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추격자>는 완성도의 가뭄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잘 자란 묘목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묘목을 잘 키워서 2008년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키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추격자>가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훌륭한 성공 사례다. 엄청나게 고된 여건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한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투자나 얄팍한 컨셉에 스타 캐스팅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이들의 치열한 근성과 재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품이 <추격자>다. 그리고 <추격자>는 그렇게 기억되어야만 한다. 이번 기회에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들의 요구 수준이 이 정도라는 점을 한국 영화계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당한 기획으로 만들어 놓고 배급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돈 놓고 돈을 절대 먹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예산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추격자>는 이러저러한 점이 잘 되었다고 조목조목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만든 이들의 성실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장르나 내용, 주제가 좋고 나쁨을 떠나 관객이 영화를 통해 ‘정성들여 만든 느낌’을 얻는다는 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고, 이는 뛰어난 재능과 용기를 앞세우기 보다는 엄청나게 길고 고된 과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추격자>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감독을 또 하나의 선물로 안겨주었다. 데뷔작에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근성을 보여준 감독들은 많지만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 팬들은 <추격자> 한 편으로 한국영화계의 일약 유망주로 떠오른 나홍진 감독의 존재를 몹시 반가워한다. 그가 앞으로 선보일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그리하여 감상 자체가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줄만한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존재는(나아가 이 영화에 참여한 주요 스텝들의 존재는) 관객들 보다도 기존의 감독들이나 앞으로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 앞으로 나홍진 감독과 같은 신인 감독들이 더 많이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관객이 알 바는 아니다. 관객이 할 일은 기성 감독이든 신인 감독이든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에는 좋은 대로, 미흡한 작품은 미흡한 대로 직관적으로 반응해주는 일 뿐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값진 선물만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추격자>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한국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질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게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만 <추격자>는 개인적으로 마음 편히 환호해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모방 범죄가 걱정된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흥미롭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뒷덜미를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는데 이후로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감독 인터뷰 등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며 그 정체를 알고자 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추격자>와 유사한, 그러나 <추격자>와 같지 않았던 다른 영화 체험들을 기억해내고 또한 비교했다. 그리하여 <추격자>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논리에 근거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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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인 가스파 노에(Gaspar Noe)의 2002년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1998)을 통해 자신의 반사회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 바 있던 가스파 노에는 벵상 까셀과 모니카 벨루치를 꼬드겨 전무후무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과 같이 시간 흐름의 역순으로 배치된 롱테이크 씨퀀스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젊은 연인이 파티에 갔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집으로 가려던 여자(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보도에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애인의 처참한 몰골을 뒤늦게 발견한 남자(벨상 까셀)이 괴한을 추적하고, 마침내 지하 SM 클럽에서 발견한 괴한(이라고 생각한 남자)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 얘기다. 살인 장면은 일반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에서 허용되는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고 원테이크로 처리되는 성폭행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폭행 자체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특별한 폭행의 동기가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장면이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지하보도를 지나가려던 다른 행인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 또한 너무 사실적인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 촬영 후 모니카 벨루치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을 나는 2003년의 본 영화들 중 베스트 10의 하나로 꼽았다. 영화는 너무 힘들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과 이 영화를 통해 전달받은 정서적인 충격(끝까지 보면 역겨움과 두려움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 방식에서나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내용 자체에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가능/불가능과 호불호를 정하는 것은 만드는 이와 관객이지 정부 기관이나 평론 집단과 같은 제 3자가 미리 할 일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전달한 정서적 충격이 감내할만한 수준이었던 탓도 있었지만(아마도 어떤 관객들은, 특히 여성 관객들은 도저히 감내가 안될 수도 있다) 그것이 외국 영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장소에서 내가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연기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별의별 영상물이 다 있고, 심지어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이라는 것도 있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도 엽기지만 그걸 구해다 보는 수요층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상업적으로 유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끔찍한 장면을 감내하고 또한 어렵지 않게 잊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판타지로 인식되기 때문이고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영화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연출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하는 티가 나고 영화 찍은 티가 나는 허술한 영화가 좋을 리는 없다.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다. <돌이킬 수 없는>은 저것이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충분히 객관화가 가능하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묻어둘 수 있는 영화다.

<추격자>는 잘 만들어진 그 만큼의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영화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리고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다. 한국 영화가 한국적인 소재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주니 외국 영화 볼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얘기다. <추격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기존의 한국 영화로부터 진일보한 만듬새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끝내 미진(서영희)가 영민(하정우)의 장도리에 맞아죽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주인공 중호(김윤석)가 애타게 찾으러 다녔고 또한 어린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하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는 점 자체는 칭찬 받을만 하다. 하지만 <추격자>의 이 장면에서 받은 일부 관객들의 충격은 예상할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관객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대인기피증과 같은 노이로제 증세라도 얻게 된다면 그건 영화가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 지상주의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일부 여성 관객들의 과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들을 타자화해서 봐줄 수 있는 관객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추격자>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은 작품이다. 싸이코 패스 계열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 외에도 영화가 남겨주는 씁쓸한 패배감과 좌절감은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끔찍한 장면이 많기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이 훨씬 심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은 지킨다. 바로 굳이 안보여줘도 될 장면은 안보여주고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추격자>는 작품의 의도와 흐름 상 미진이 영민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맞다. <추격자>는 미진의 머리가 영민이 휘두르는 장도리에 찍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만 않을 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미니멀한 음악을 배경으로 영민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방 안의 사방 벽에 미진의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눈을 뜬 채 의식을 잃은 미진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장도리에 맞아 흔들리는 모습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어디까지나 연출된 장면이라는 걸 감안하여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장면을 계기로 영민과 중호의 짐승 같은 싸움에 활력이 붙었다는 사실과 영화 전체가 상업영화의 울타리에서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은근한 쾌감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르롤린(조쉬 브롤린)의 아내 칼리진(켈리 맥도날드)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건 다름 아닌 관객을 위한 최후의 배려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외국 영화로서 현실감마저 덜 하다. 영화를 통해 얻는 서스펜스와 몸이 아프고 후유증이 올 만큼의 정서적 충격은 분명 다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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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한국영화로서 끔찍하기로 이름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1)은 <추격자>가 또 다른 맹점을 지적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사실적인 묘사로 치면 <복수는 나의 것>이 몇 수는 위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관객이 납득할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류(신하균)는 죽은 누나에 대한 원한과 장기매매단과의 거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이유로 살인을 한다. 동진(송강호)는 죽은 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영미(배두나)와 류를 고문하고 살해한다. 끔찍하기로는 동진 앞에서 자신의 배를 칼로 긋는 팽 기사(기주봉)도 마찬가지지만 그 심정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원한과 복수의 굴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의 분명한 동기를 지닌 등장 인물들을 타자화하며(그런 끔찍한 사연이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의 복수를 고려할 일 조차 없을 것이므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연민은 챙기고 극장에서 목격한 악몽을 잊는 것이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은 국내 관객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작품이 되었다. 한국영화라서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데다가 개운하게 입가심도 시켜주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완한 작품이 <올드보이>(2003)였고 <친절한 금자씨>(2005)도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런 방식의 대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추격자>는 복수극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살인이니 길 가다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관객들은 그와 같은 일이 지금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사법 제도와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잡았던 범인들조차 유유히 다시 걸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감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고 그 분노를 영화 속에 잘 담아냈다. 그러나 여기에 공노하며 영화의 흐름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관객은 주로 남자 관객들이다. 다행히 여자 범죄자에 의해 남성들이 연쇄살인을 당한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는 아직 없기 때문에 영화 속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여성 관객의 경우 그런 장면에 공노만 할 수가 없다. 당장의 두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진을 살려둘 수는 없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영민이 구멍가게에서 나오고 이후에 경찰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만으로 미진이 죽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진은 영민이 불러 살해해온 창녀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철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직업적 편견을 접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출장 마사지 여인이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미진은 어린 딸 하나를 부양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중호의 협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갔다가 변을 당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은 미진을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 누이, 내 가족의 하나와 마찬가지인 현실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미진이 살아남기를 바라게 되고 마침내 죽었을 때에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추격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요소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너무 잘 되어서 탈이다. 유영철의 희생자들에 대해 ‘그럴만 한 부류’라고 생각하거나 김선일씨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너도나도 달려들었던 세간에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달리 바라보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김선일씨의 소식만 전해듣기만 했을 때에도 이미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추격자>는 성취를 담보로 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직접 느낀 부분은 아니었으나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던 중에 의외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을 언급하고자 한다. 나홍진 감독은 극중 영민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에 대해 “원래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극이 진행되면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중호까지도 영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종들을 키우고 방치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고 또 그것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얘기는 이런 류의 영화를 숱하게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성격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이제 지겹다. 차라리 <추격자>의 영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최민식)과 같이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유전적인 요소도 있다지 않는가. 굳이 두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라고 본다. 안톤 쉬거는 그 자체로 피도 눈물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백 선생 역시 재미삼아 유아들을 살해하는, 그리하여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는 말종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말종에 대한 복수에 대한 복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영민은 너무 현실적인 악몽이다. 그 역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영화 속 캐릭터로만 끝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김윤석의 카리스마를 압도하는 하정우의 연기로 인해 더 강한 잔상을 남겨주기까지 한다. <추격자>에서 시스템의 불완전함은 누구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주변 환경으로만 남게 되고 결국 강조되는 건 하정우가 연기한 영민의 극악한 캐릭터다. 나는 적어도 나홍진 감독이 이런 캐릭터를 사용할 때에는 나름의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있는 시각을 갖고 있기를 바랬다. 최소한 “원래 그렇다”는 식은 아니길 기대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 의도상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경찰 조직과 사법 제도의 결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각심을 일으키고 공론화를 하고자 했던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 분노의 힘으로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 한 편이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리고 이런 정로의 완성도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과 그걸 얻는 과정에서 무시된 ‘지켜주었으면 했던 어떤 것들’을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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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예전에 알던 어떤 분이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2003)을 호되게 비판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이제사 난다. 그 양반 얘기가 “영화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다고 믿는데 <낭만자객>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악당이 어린 아이를 활로 쏘아서 맞추고 아이는 공중을 붕 날아 뒷쪽의 나무에 박혀 죽더라”는 거였다. 나와는 영화 취향이 많이 다른 분이었고 <낭만자객>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꽤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영화의 표현 방식에 아무런 제약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부합되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관객에게 보여졌을 때에는 극장에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을 건드릴 수가 있겠구나 했다. 그러고 잊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