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불구경하기 영화에서 감동은 어디에 있는 건가

 


 

 


 


 



 


 


 


재난영화를 만들떄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다.


영화로서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절대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사람이 죽고 다쳐나가는데 그걸 보면서 ‘우와’ ‘대박’ 뭐 이런 탄성이 나오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재난이 그저 우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구조적 결점이나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난의 영화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아야하며, 애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게 만든 나쁜 놈들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난은 …… 그냥 사고다.


구조적 병폐나 인간의 탐욕이 주원인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물론 헬기가 비행한 상황이나 건물주의 행동이나 소방국장이 벌이는 뻘짓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그토록 큰 재난을 일으킨 주범들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놈도 없고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도 없다. 그냥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나가는 대형사고를 그런 스펙타클한 화면으로 왜 봐야하는가. 그나마 찌질한 나쁜 놈들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응징도 가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봐야할 게 뭐고 어디에서 감동해야 하는 걸까. 실감나는 장면 연출? 불구경? CG감상? …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요즘 나의 고민은, 내 과거의 가난했던 경험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나의 가난에 대한 경험이 타인에게는 화두로 삼기에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어서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꼭 등장하는 ‘가난한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불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작위적인 설정(요즘 세상에 청소용역직에게 누가 3개월치나 월급을 가불해주나? 게다가 용역직 월급 120만원이라 가정하고, 석달치 360만원에 세금 때면 330만원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 하면, 그 가족은 3개월을 손가락 빨고 사나?) 때문만은 아니리라.


 



영화 한 편에 9,000원을 내고 보러올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현대의 가난’이란 소재가 외면하고 싶은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타워”에 등장하는 청소 아주머니는 감동을 위한 소재로서는 불편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정치인은 소방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VIP랍시고 안전하게 도망가고, 쓸데없이 고집부려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놈은 상황실에서 방방 뛰고, 애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쳐나가고 …… 그 와중에도 가난한 청소 아주머니는 그저 짐만 되는 사람으로 표현될 뿐, 이렇다 할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가난이란 그런 것일 듯 하다. 그저 불편한 짐.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약자가 표현되는 수준. 복지 예산으로 먹여살리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마냥 버릴 수도 없는. 딱 그 수준. 그게 우리의 투표 결과고, 현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계층의 모습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으라면 설경구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한다. 영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순교의 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갖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평소의 강인한 모습을 잊고 눈물을 터트리는 …… 그저 평범한 영.웅.


 



그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ㅆㅂ, 죽기 싫은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 욕심들만 채우려는 캐릭터를 보다가, 그나마 ‘양심’을 가진 캐릭터를 보니 살짝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영화에 대한 불만이 확 치밀어 올라왔다가 그 장면 하나에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슈퍼히어로를 만들지 않아서.


 


 


 


영진공 Red Submarine


 


 


 


 


 


 


 


 


 


 


 


 


 


 


 


 


 


 


 


 


 


 


 


 


 


 


 


 


 


 


 



 



나도 레즈물이 보고 싶다!!!



쪽팔린 고백부터 해보자.
끓어넘치는 피를 감당하기 힘든 시절, 솔까말 나도 야동 엄청나게 봤다.  하루라도 안 보면 사타구니에 진정제를 맞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 야동은 나에게 단순한 욕구충족 + 대리만족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상황에서 필요 이상의 흥분을 해 버리는(버스에서 살짝 여성과 몸이 스친 것만으로도 발기가 된다든지 하는) 나의 왕성한 성욕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화성의 수분만큼은 있었다(…라고 변명한다.) 물론… 므흣한 목적이 화성의 수분을 제외한 다른 것들만큼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보는 야동의 장르는(-_-;;)다름아닌 레즈물이었다. 그렇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여성끼리의 성행위를 주로 다루는 레즈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 지금도 싫어하진 않는다

호오… 사진 참으로 므흣하다.. 흠흠.

암튼, 당시 내가 위와 같은 이쁜 녀성들이 사랑을 나누는 레즈무비들을 즐겨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포르노라는 장르적 특성상 최소한 두 사람이 홀랑 벗은 상태에서 영화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털이 수북한 남자 배우의 몸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것이 좀,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들이 천사같은 여성들의 몸을 유린하는 내용이 많은 메이드 인 저팬 필름들은 지금도 보기가 많이 괴롭다…그건 고문이지..) 물론 금기를 깨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보다 보면 여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금기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어버리기 때문에 … (도대체 얼마나 본 거냐…)

암튼, 누구에게도 대 놓고 “제 이름은 없다구요. 취미생활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야동을 보는 것이구요. 그 중에서도 레즈물을 좋아라 합니다. 회사는 SOD를….”이라는 식으로 나의 이런 취향을 말함으로서 사회적 매장을 초래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내가 위와 같은 영상물을 보는 것을 즐기고, 므흣해하고, 심지어는 모으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죄라거나,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하지 않는다.
불법 공유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죄가 맞지만 …(지금도 모으냐구요 …? 슬프지만 지금 저는 그때처럼 펄떡펄떡하지는 않는군요. 그래도 가끔은 봅니다. 추석맞이 행사 정도로.)

나를 즐겁게 하는 행위가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머리가 미쳐 돌아가 길거리에서 손잡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을 죄다 레즈비언으로 본다거나 하는 식의 행동을 한 적도 없으니까. 이 대목에서 다시한번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하고 싶어지지만 … 일단 본론으로 돌아가자.

올해들어 유난히 남성 동성애, 그러니까 게이에 관한 문화컨텐츠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미 개봉해서 여성관객 점유율 86%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한 [앤티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 [쌍화점]등 스크린을 채우는 영화들과 10월에 막을 내린 [쓰릴 미]와 같은 뮤지컬도 그렇다.
[바람의 화원]이나 [커피프린스]처럼 남장여자와 남자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들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동성애 코드가 이미 일반 대중에게 별 거부감없이 먹혀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단편적으로나마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왜 남성 동성애 뿐인지.

세상은 넓고, 동성애자들은 많고, 그 중에 절반은 여성 동성애자일텐데. 왜 남성 동성애만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환영받는지에 대해선 참으로 궁금하다.


만드는 쪽에선 이 질문에 대해 이미 준비된 대답이 있을 듯하다.
“돈이 되니까 그렇지.”

[앤티크]를 보러 온 수많은 여성관객들이 전부 동성애자로서 동성간의 사랑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얻었다거나, 동성애자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현상을 직접 만들어냄으로써 동성애자들의 사회적 인권 발현에의 참여의지를 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재미”와 “흥미”를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만족을 느꼈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도 이미 대답은 나와 있는 듯 하다. 주변에서 [앤티크]를 보았다는 여성분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보라. 대충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꽃미남에 몸 좋은 애들이 넷이나 나오니까.”

아 물론, 좋은 원작이 있고 좋은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고, 거기에 때마침 꽃돌이 네명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이야기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잘생긴 남자들이 넷이나 나와서 지들끼리 알콩달콩 사랑도 하고, 사랑하다보니 뽀뽀도 하고, 지켜보는것이 므흣해서, 그래서 극장을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흠이 될까? 매력적인 이성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감상의 목적이 된다 한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앤티크]는 본격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다. 가볍게 거부감이 없는 정도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가벼운 동성애는 여성으로 하여금 여러 부분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비된다. “꽃미남”이라는 거부하기 힘든 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누구도 이것을 남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남자끼리 키스하는 것을 보면 거북해지는 남자인 나 또한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남성들이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휘바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여성들을 변태로 몰아붙이거나 야유를 날릴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나의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레즈물을 보았지만, 난 전혀 변태가 아니니까.

그렇담 꾸물꾸물 솟아나는 생각. 나도 욕망을 충족시켜보고 싶다. 코딱지만한 컴퓨터 화면에서 이름도 모르는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포르노는 더 보고싶지 않다. 나도 당당하게 극장에서 김혜수와 손예진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생각만으로도 환상적이다…흠냐…) 레즈영화를 보고 싶다. 여성 동성애에 대한 깊은 고찰이나 고민을 함께할 능력은 안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 환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의사는 있다.(그리고 DVD한정판을 사기위해 교보문고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새치기 하는 녀석이 있으면 허리를 반대로 접어버릴 용의도 있다.)

그러니까 좀, 만들어 줘!! 나도 당당하게 레즈영화 보고 싶단 말이다!!!

영진공 거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