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리처”, 행동하는 보수의 표상

 

 


 


 



 


 


포스터 카피 보소.


‘법은 한계가 있다. 그에게는 (한계가) 없다.’


이런 Fox TV 잭 바우어 같으니라고 … 모든 히어로 ‘잭’은 다 이런가 싶기도 하다.


 


이번 대선에 표창원 전 교수께서 상당한 ‘히트’를 치시고, 그 뒤로도 계속 인기(?)를 지속중이신데, ‘참다운 보수’가 무엇인지 표방하는 모습이 참 좋아보인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고수하려는 참다운 보수를 보기 어려운 것일까?


 


어릴 때 나는 마치 홈쇼핑 운동기구 광고에 나오는 듯한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배웠다. ‘불의를 못 참으십니까? 정의를 위해 한 몸 불사르실 겁니까? 여러분에게 판검사 또는 경찰을 추천합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사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 ‘돈’ 많이 번다고 의사를 자식에게 강권하는 현재의 아비, 어미들 말이다.


 


뭐 사실 언론에 연일 보도되는 것들을 보면 그게 그리 틀린 얘기도 아니다, 헌재소장 후보자랍시고 나온 인물이 권력을 얼마나 남용해댔으면 그렇게 돈파리가 꼬이는지, 언제부터 명예가 타락과 동의어인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어린 내게 가르쳐준 세상의 숭고한 가치들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법’이 가진 제한.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법이란 게 잘못 되었는데도 그걸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이건 진보가 아니라 건전한 ‘보수주의자’가 해야될 가치덕목인데도 말이다.


 


잭 리처는 군 수사관 출신의 ‘자유주의자’다.


법적으로 제재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고 있다. 운전면허증, 거주지 등록 등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보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련다. 자신이 가진 ‘정의’의 원칙에 따라 합리적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군인’은 보수와 닿아 있을수밖에 없다. 애국과 명예, 정의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the well-trained soldier 는 그런 사람들이다. 잘못된 명령에 항거하고, 비도덕적인 전술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우리는 가스통을 들고 협박을 일삼는 불한당 같은 퇴역군인들이 판치는 나라에 살고있다. 허나 어쩌겠는가 … ‘비정상적’인 보수 세력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이 영화의 Best Shot 을 꼽자면 이 장면을 들고 싶다.


정의로운 보수의 결집이라고나 할까? 해병대 출신 저격수와 한 세대 아래의 육군 출신 미끼. 특히 로버트 듀발이 한 쪽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야간 저격 훈련을 해본 사람이면 익히 아시리라.


 


요약하자면,


정의를 위해 법이 무시되는 것도 웃기지만,


법이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더 무섭다.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1. 톰 크루즈 마니아
2. 무기 전문가
3. 미 육군과 미 해군(해병대)의 기싸움 좋아하는 사람


 


그나저나 톰 크루즈 영화 중에 기억나는 것들은 대부분이 군영화 뿐이다.


7월 4일생, 탑건, 어퓨굿맨 ……


 


 


 


영진공 함장


 


 


 


 


 


 


 


 


 


 


 


 


 


 


 


 


 


 


 


 


 

“타워”, 불구경하기 영화에서 감동은 어디에 있는 건가

 


 

 


 


 



 


 


 


재난영화를 만들떄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다.


영화로서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절대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사람이 죽고 다쳐나가는데 그걸 보면서 ‘우와’ ‘대박’ 뭐 이런 탄성이 나오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재난이 그저 우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구조적 결점이나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난의 영화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아야하며, 애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게 만든 나쁜 놈들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난은 …… 그냥 사고다.


구조적 병폐나 인간의 탐욕이 주원인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물론 헬기가 비행한 상황이나 건물주의 행동이나 소방국장이 벌이는 뻘짓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그토록 큰 재난을 일으킨 주범들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놈도 없고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도 없다. 그냥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나가는 대형사고를 그런 스펙타클한 화면으로 왜 봐야하는가. 그나마 찌질한 나쁜 놈들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응징도 가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봐야할 게 뭐고 어디에서 감동해야 하는 걸까. 실감나는 장면 연출? 불구경? CG감상? …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요즘 나의 고민은, 내 과거의 가난했던 경험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나의 가난에 대한 경험이 타인에게는 화두로 삼기에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어서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꼭 등장하는 ‘가난한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불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작위적인 설정(요즘 세상에 청소용역직에게 누가 3개월치나 월급을 가불해주나? 게다가 용역직 월급 120만원이라 가정하고, 석달치 360만원에 세금 때면 330만원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 하면, 그 가족은 3개월을 손가락 빨고 사나?) 때문만은 아니리라.


 



영화 한 편에 9,000원을 내고 보러올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현대의 가난’이란 소재가 외면하고 싶은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타워”에 등장하는 청소 아주머니는 감동을 위한 소재로서는 불편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정치인은 소방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VIP랍시고 안전하게 도망가고, 쓸데없이 고집부려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놈은 상황실에서 방방 뛰고, 애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쳐나가고 …… 그 와중에도 가난한 청소 아주머니는 그저 짐만 되는 사람으로 표현될 뿐, 이렇다 할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가난이란 그런 것일 듯 하다. 그저 불편한 짐.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약자가 표현되는 수준. 복지 예산으로 먹여살리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마냥 버릴 수도 없는. 딱 그 수준. 그게 우리의 투표 결과고, 현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계층의 모습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으라면 설경구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한다. 영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순교의 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갖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평소의 강인한 모습을 잊고 눈물을 터트리는 …… 그저 평범한 영.웅.


 



그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ㅆㅂ, 죽기 싫은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 욕심들만 채우려는 캐릭터를 보다가, 그나마 ‘양심’을 가진 캐릭터를 보니 살짝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영화에 대한 불만이 확 치밀어 올라왔다가 그 장면 하나에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슈퍼히어로를 만들지 않아서.


 


 


 


영진공 Red Submarine


 


 


 


 


 


 


 


 


 


 


 


 


 


 


 


 


 


 


 


 


 


 


 


 


 


 


 


 


 


 


 



 



“락 오브 에이지”, 왜 매운탕에 설탕을 풀었을까?

 



 


 


 


 


 







요건 영화 포스터
이거슨 뮤지컬 포스터



 


 


 


최근 개봉한 영화 “락 오브 에이지 (Rock of Ages)”,


이 영화는 2006년 처음 무대에 올랐던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 한 것이다. 그런데 제목과 주요 등장인물이 같기는 해도 극의 전개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도 너~어~무! 다르다.


 


이 뮤지컬은 지금도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영국의 웨스트엔드에서 계속 성황리에 공연 중인데, 극 중 주요인물인 드류와 셰리, 그리고 스테이시의 행로는 영화와는 매우 다르게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꽤나 비중있는 패트리샤라는 인물도 원작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뮤지컬과 영화에서 같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Journey의 명곡 “Don’t Stop Believin'”을 통해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도 영화와 뮤지컬이 매우 다른 데다가, 이미 미드 “글리(Glee)”에서 줄창 단물을 빼먹은지라 좀 김이 샌다고나 할까.


 


글리에서 어떻게 단물을 빼먹은 거냐고? …… 이렇게~!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X Factor에서의 초대 공연 영상

 



 


 


그건 그렇다치고, 이 영화 왜 이렇게 됐을까? 떡하니 Rock of Ages라고 마빡에 타이틀 붙여놓고서는 어찌하여 Sugar Pop의 낯간지러운 해피엔딩으로 갈무리 하여야 했을까? 마치 얼큰한 매운탕에 설탕을 대박으로 타 넣은 듯한 입맛을 선사하는 건 왜일까?


 


미국의 드라마 제작자 중에 아론 소킨이라는 사람은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져있는 미드 “웨스트윙 (West Wing)”의 제작자이다. 그가 이전에 발표하였다가 대박으로 망한 드라마 – 허나 일부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꽤나 호평을 받았던 –  “Studio 60 on the Sunset Strip”(2006~2007) 에는 아론 소킨이 생각하는, 그리고 미국 민주당 사람들의 생각이라 믿어지는 미국의 자존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러니까 미국은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가 아니고, 가족을 걱정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 않는. 뭐 그런 나라라는 신념이 듬뿍 배어나오는 작품이다.


 


영국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휴 그랜트가 영국 수상으로서 자신의 나라가 미국 보다 훨씬 자긍심이 있는 나라라고 이야기하며 이런 대사를 친다.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너리, 해리포터가 있고, 데이빗 베컴의 오른발도 있죠.”


 


미국은 유럽에 비해 대문호가 많은 것도 아니며 (물론 마크 트웨인이나 존 스타인벡, 펄 S. 벅 등 우리가 아는 많은 문호가 있지만), 전쟁 일으키기 좋아했지만 대놓고 전쟁 영웅을 시대적 자부심으로 가질 정도로 어리석진 않죠.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축구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가 최고지만, 미국인에게 최고는 ‘미식축구’. 그런데 미국 외에 이거 인기 있는 나라 거의 없다고 봐야 할듯.


 


 



Studio 60 … 의 에피소드 중에서

 


 


암튼 Studio 60 … 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유추해보자면 그러니까 … 미국의 정체성은 ‘자유’라는 것. 그래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 언론의 자유를 위해 매카시즘에 대항했던 블랙리스트 이야기도 다루었고,


 


그런데 극 중에서 이 스튜디오는 SNL로 유명한 뉴욕이 아니라 LA의 선셋 스트립에 있다. 그건 그러니까 헐리웃과 그걸 대표하는 정체성은 Sunset Strip에 있다라는, 그래서 이를 이용한 세트를 꾸며 가장 자기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Modern Comedy Show’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한다 (위의 동영상이 그 선언이다).


 


헐리웃의 현대 TV, 영화 산업이야 말로 미국이 자랑하는 자부심일 테니 ……


 


영화 Rock of Ages의 배경 또한 헐리웃의 Sunset Strip 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곡이 80년대 글램 메탈(Glam Metal)넘버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뮤지컬의 배경과 제작의도가 80년대의 헐리우드라는 키워드로 집약되니 말이다.


 


여기서 잠깐, Glam Metal은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헤어 메탈, 팝 메탈, 헐리우드 메탈 등. 왜 헤어 메탈이냐고? 아래를 보시라.


 


 


 


배배꼬인 언니들 (Twisted Sister)



 


 


 


60년대에 유행했던 글램록(대표적인 노래들은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많이 나온다.)을 메탈의 영역으로 확장한 게 글램메탈인데,


 


사실 … 반짝이는, 화려한, 말랑말랑한, 섹시한 … 등의 단어가 메탈과 어울릴리가 없잖아! 게다가 노래는 온통 사랑타령! … 그런데 이들은 그런 음악을 했고, 그런 노래를 불렀다. 어디에서? 헐리우드 선셋 스트립에서!


 


그러다보니 아까도 말했듯, 매운탕에 설탕 푼, 홍어찜에 꿀 바른 그런 맛이 나는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들은 대부분 당시 어메리칸 락 밴드의 곡으로, Night Ranger, David Lee Roth, Poison, Foreigner, Pat Benatar, Extreme, Warrant, Bon Jovi, Twisted Sister, Quarterflash, REO Speedwagon, Starship, Journey, Guns N’ Roses 등 6~80년대를 호령한 락, 메탈, 헤비메탈 밴드 들의 주옥같은 곡들로 구성되어 즐거움을 선사하긴 하는데 …


 


이게 당장 먹을 땐 달아서 그럴 듯 한데 자꾸 씹고 뜯고 먹고 즐길 수록 그 맛이 그 맛이 아닌 거다 …


 


그럼 왜 이런 맛이 나게 되었을까?


 


 


 



80년대 미국의 TV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시트콤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80년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터, 레이건, 부시로 이어지는 이 시기에 미국은 어쨌거나 ‘호황’이었다. 월남전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표면적이나마 냉전이 종식되었으며 돈이 마구 뿌려졌다.


 


80년대 초반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택한 레이건의 재정팽창정책, 레이거노믹스는 한 마디로 지금의 MB 경제정책의 벤치마킹모델이다. 부자와 기업에게 돈을 몰아주고, 세금은 줄이고, 소비는 장려하고 … 말하자면, 부자와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거다 …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미국은 사상최악의 재정적자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그 유명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정치신인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어쨌든 80년대의 미국은 석유와 군수산업에 쏟아부어지는 국민의 세금과 찍어서 뿌려대는 화폐의 힘으로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그리고 그런 돈 소나기를 음악 산업이 놓칠리 없었다.


 


 


 




CF나 스포츠 중계 시에 자주 나오는 노래, Van Halen의 “Jump”.


그걸 이렇게 불러버리면 우리보고 어쩌라고 … -.-;;; 




 


이제 고뇌하는 뮤지션은 돈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이 사회의 그늘을 읊조리고 고통을 토로하는 음악은 상품이 될 수 없었다. 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큰 음량과 강한 드럼 비트, 가슴을 후비는 기타 리프, 절규하는 보컬리스트는 좋은 상품이었지만, 거기에 골치아픈 사회현상을 실어 올리는 건 영업상 매우 손해보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러니 락도 팔 수 있어야 노래를 부르게 해 주었다. 팔릴려면 고객의 입맛에 맞춰서 노래를 만들어야 했고 … 그래서 락이라는 의상을 입고 락 비트의 연주를 하면서 팝에서나 들었던 사랑노래가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즐기는 음악, 놀 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댄스, 디스코, 보이밴드가 나오게 되었고 금세 음악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산업적 측면을 제껴 놓고 생각해보아도,


선셋 스트립, 사실 이 동네에서 록의 정신을 말하긴 좀 그렇다. 거기에 서면 절로 ”와~ 1년 내내 이렇게 날씨 좋고, 쭉빵 아가씨들이 오락가락하는 여기서 메탈 밴드들이 노래한단 말이지” 소리가 나온다.


 


시애틀이나 뉴욕, 심지어 오스틴에 가도 이렇게 조건 좋은 록클럽은 없다. 본능에 충실한 게 록이라면 … 본능에 충실해도 언니들이 줄 서는 동네와 본능에 충실하게 음악해도 음습한 반응의 동네에서 만들어진 음악은 뭔가 달라도 많이 달라지는 거다.


 





해질녘의 선셋 스트립의 클럽들에서 내려다본 L.A. 시내는 확실히 있어보인다. 괴롭거나 허탈하거나 음울하지 않는 그냥 멋진 동네가 거기 있는 거다. 그러니 거기에서 절규하고 저항하는 락이 나올 턱이 있나.


 


 




 



내게 설탕을 쏟아부어줘!

 


락은 하고 싶고, 세상은 흥청거리고, 돈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고 … 그러니 삐딱선을 탄 거고 매운탕에 설탕을 확 부어버린 거다. 왜? 그렇게해도 맛있게들 먹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원작 뮤지컬에서는 나름 현실적인 마무리를 보여준다. 거기에서는, 화려함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살아온 젊은 시절, 그때가 지나고 돌아보니 …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Don’t Stop Believin’ 하자는 거다.


 


그런데 영화는 그러면 안 팔릴 것 같았나보다.


화려함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살다보면 … 더 화려해진다 ~ 베이비!


이렇게 끝나버리니 말이다.


 


암튼 그렇게 락이라는 매운탕에 해피라는 설탕을 대박으로 붓고 또 부어서 설탕죽이 되어도 어쨌든 이건 시작이 락이니까 락이라고 불러도 됨, 님하. 라는 맛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라는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매운탕엔 설탕말고 고추기름을 넣자! OK?!  


 


 


 


 


영진공 헤비한 규훈이의 함장질

 


 


 


 


 


 


 


 


 


 


 


 


 


 


 


 


 


 


 


 


 


 


 


 


 


 


 


 


 


 


 


 


 


 


 

군인정신과 철들기



내가 아는 어느 교수가 자주 내뱉는 말이 있다. 누군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넌 군대도 갔다 온 녀석이….’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군대’에서 뭘 가르친다고 생각하길래 그런 ‘불합리한 생각’에 수긍할거라고 믿는지 의아스럽다.

더불어 가끔 어떤 분들이 ‘애가 군대를 갔다 와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표현을 쓸때, 그 표현에 담긴 내용이 ‘게으른 것을 타파키 위한 의도’라면 이해해 줄 법도 하지만 부당한 사회에 대해 투덜거리는 떼쟁이의 모습에 대고 내지른 일갈이라면 되려 반문하고 싶다. 그래, 그렇게 적응하는 것이 좋은가?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 ‘아나폴리스’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별칭이다. 아나폴리스라는 지역에 위치해서 ‘아나폴리스’다. 마찬가지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웨스트 포인트에 위치해서 ‘웨스트 포인트’라 불린다. 물론 공군사관학교도 있지만 생긴지 얼마 안 되었거니와 해군비행단이 훨씬 우수하므로 전통에서 좀 밀린다.

어쨌든, 이 두 사관학교가 1년에 한 번 미식축구로 승부를 보는데, 미국의 최고 경기가 ‘슈퍼볼’이듯, 얘네의 이 아마추어 게임도 상당한 인기를 끈다. 생도 때, 웨스트 포이너(west pointer)인 생도(cadet)와 아나폴리스의 생도(midshipmen)의 격전을 비디오로 본 적이 있는데, 흥미 있던 부분은 게임이 아니라 관중석이었다.


웨스트 포인트 애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정갈하게 정렬해서 스탠딩 관람을 하고 있었지만, 아나폴리스 애들은 완전 개판이었다. 복장도 동정복(冬正服)을 양쪽이 입었으나, 해군은 단추 풀어헤친 사람부터 시작해서 스카프 풀어 휘휘 돌리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이건 문화적 충격이었다. ‘오와 열’을 중시하는 ‘군대 문화’에서 이런 해군의 ‘개날라리’ 모습은 새로운 것이었고,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고 인식하는 장교들이 생도들을 가르친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흔히 얘기하는 ‘할 땐 하고, 놀 땐 놀자’라는 정신이리라.

물론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테잎을 보여준 사람은 해사를 나와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과정을 위탁교육으로 졸업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군 내부의 전반적인 보수성향보다는 진보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육군이든 해군이든 우리나라는 군복에 주름 하나 잘못 잡혀도 꼭 한 소리 하거나 심하면 완전군장 돌리는 돌아이도 많았으니까 말이다.

제복은 옷이다. 옷은 입는 사람의 ‘사고’를 제한한다. 그런 격식과 규칙이 사고를 제한하고 지배하는 단체는 쉽게 통일성을 갖추고 지휘하에 놓일 경우,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런 곳에서는 ‘튀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며, 체제에 불응하는 것도 허용되지 아니한다. 더불어 밤송이를 ‘까라면 까는’ 것이 당연한 곳이기에. 불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바로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무비판적인 사고로 수긍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군대이고, 맨 처음 언급했던 사람들이 얘기하는 ‘체제에 대한 순응’을 투영시키기에 좋은 군대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다.
‘군인 정신’이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과거 김종학 PD가 만든 ‘백야 3.98’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병헌이 공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였다가 불명예 전역을 하고 안전기획부(지금의 국정원)로 들어가서 북한군 장교인 최민수의 공작을 와해시킨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병헌이 불명예 전역을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율곡 사업의 비리. 당시에 불거졌던 F-16의 기체 결함 이슈에 겹쳐서 김종학 PD가 머리 굴려 만들어 낸 작은 에피소드지만 참 멋진 대사를 만들어 냈다.

기체 결함으로 추락하는 와일드 캣에서 탈출한 이병헌이 전투기 수입과 관련된 정부와 군의 비리를 캐내다가 공군 심리에서 결국 비리를 입증한 후 불명예로 전역한다. 이 때 심리장면에 군 수뇌부 역할로 출연한 정동환 씨에게 이병헌이 왜 이런 ‘불합리한 전투기 수입’을 벌였는지 이의를 제기하자, 분노하며 일갈하기를,

‘그게 바로 군인정신이야’

라고 하였다. 군인이라면 정치인의 꼼수와 이런 저런 알력에서 겨우 건져낸 ‘불량품’을 갖고도 열심히 ‘싸워야 하는’것. 그게 바로 군인이라는 주장이었다. 아, 이 얼마나 엿 같은 소리던가. 물론 상당히 ‘애국심’에 가득 찬 일갈이었으며, 어느 면으로 보면 ‘그래 그게 군인정신이지’라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군인정신이 아니다. 군인은 ‘불합리한 침략’에 맞대응하며, 그런 ‘불합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존재이지, 그걸 그대로 ‘순응’하면 그건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아예 처음부터 ‘부정’하는 존재의 배반이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군대가, 내부에서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때부터 그 군대는 비리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이제 사회를 병영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군대의 시스템을 적용시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 논리를 고스란히 돌려주자. 이 사회에서 시끄럽기 그지 없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그저 이 사회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다.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에 대해 일갈하는 사람들은 사회 내부에 있는,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자정능력에 대해 일말의 기대감을 걸고 현실 개혁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저 혼자 잘난 양 독야 청정하는 선비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이 덜 들어서’ 바른 소리를 해대는 것은 더욱 아니다.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를 알기 때문이고,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권위와 권력의 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허황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가면 늦다. 나는 계속 깨어 있고 싶어도, 지친 삶의 무게에 눈꺼풀이 내려 앉을 것이며, 아무리 청년이고 싶어도 세월의 고집은 보수를 지향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불합리를 불합리라고 인지하고 그에 반항할 수 있을 때,
이 때가 바로 내가 남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때다.

당신들이 배운 ‘군인정신’이 권위에 짓눌려, 권력에 신음하는 맹목적 복종이라면,
내가 배운 ‘군인정신’은 불의에 항거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지켜주는 일이며, 인습에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뼛속 깊숙이 전사의 기질을 가진 그것이다.

시원스레 뻗은 평탄한 길에서 모난 돌은 잘 구르지 못하지만, 울퉁불통하고 중간중간 끊어진 길, 음습한 이끼들이 잔뜩 끼어있는 곳에서는 모난 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진공 함장

“레지던트 이블 4: 끝나지 않은 전쟁”, 엄브렐라는 왜 안 망하는 거냐고!


씨바, 드래곤 볼 손오공도 그랬고, ‘서극의 칼’도 그랬어. 오로지 주인공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뿐이었다고! 설마 다운그레이드 시킬 줄은 몰랐단 말이지! – 초능력 연구가의 모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호러 게임 마니아에게, 아니 정정하자. 게임 마니아에게…. 아니 이것도 정정하자. 우먼 파워 마니아에게 햇살과도 같은 영화다.

‘이쁜 녀석이 쎄기까지!’라는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는 우리 밀라 언니는 레지던트 이블 2편 말 쯤부터 요보비치 선생이 되더니 겉잡을 수 없는 사이킥 파워로 전 좀비를 다 격퇴시키는 슈퍼 메가톤급 울트라 히로인이었다.

3편이 끝날 때 쯤엔 어디 캡틴 어메리카 애들 통째로 와도 못 이길 정도로 강해진 언니였단 말이다!

1. 엄브렐라 도쿄 본사 습격 Scene
     수많은 앨리스가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 쑥대밭을 만드는 재미도 뛰어나지만 4번째 이야기를 감상하기 위해 착실하게 1~3편을 복습하고 온 관객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는 장면이기도 한 이번 장면은 인공위성의 지령까지도 쌩깔 정도의 뛰어난 앨리스를 한 방에 무력화 시킨다. 아 이제 사이킥 파워 따윈 안녕 내 사랑 앨리스.

2. 굴을 팔 수 있는 좀비 Scene
     1편부터 돌연변이 좀비는 꼭 보스급이었는데 이번에는 보스급도 하나 출몰하고 – 사형수 두건 쓴 녀석 – 나름 지능적인(?) 놈들이 나타난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놈들이 3편에서 박사가 테스트했던 놈들의 변형으로 생각되는데 어쨌거나 여성 관객들은 기존 복습과 달리 흉측한 놈들이 나와서 좀 아찔했을 것이다. 나도 순간 움찔했던 장면이 있다.

3. 동전 취미 생활 Scene
     이미 전 세계는 멸 to the 망 한 상황에 동전 따위 필요할리가 없으나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앨리스를 보면서 흐뭇했다. 보통 뭔가 총알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 녹이고, 주조하고 뭐 이런 Skill은 이제 따분한 영화의 장면. 마치 카지노 칩을 쌓듯 동전을 모으는 장면을 본 후 ‘저걸 뭐에 쓰지?’라고 고민하다가 한 방에 터지는 ‘잭팟’ 광경을 보니 묵은 체증이 싸악 가시는 통쾌함!

4. 사형수와의 결투 Scene
     클레어와 앨리스, 둘이서 사형수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아마 후에 액션 영화 명장면에 뽑힐 거라 생각될 정도로 미끈하다. 등장 인물의 몸을 가르며 나타난 사형수의 덩치에 맞지 않는 날렵한 몸놀림에, 이를 자세히 묘사하기 위한 슬로우 모션은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아, 이 장면 때문에라도 3D 돈 아깝지 않다.

영화 마무리되고 엔딩 크레딧 1분 정도 올라가면 영화 다음 편 예고(?) 나온다. 아~ 밀라 요보비치 환갑 때까지 시리즈 계속 이어가면 나는 좋지만, 도대체 인류가 멸망했는데도 엄브렐라는 왜 멸망하지 않느냔 말이다! – 참고로 일본 캡콤에서 만든 3D 애니메이션 레지던트 이블에서 엄브렐라는 이미 망한 것으로 나온다. – 뭐 어쨌든. 다음 편은 몇 년 쯤에 나오려나?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