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사건 관련 시국선언을 지지합니다.

 

 


 


 


“영화진흥공화국”(이하 영진공)은 금번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사건 관련 학생 및 시민단체들의 시국선언을 적극 지지합니다.


 


○ “영화진흥공화국”의 입장은 오늘(6월 20일) 기자회견을 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시국선언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과 경찰 축소수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

–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공공기관이 주도한 선거개입,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합작

지난 6월 14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지난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국가정보원 소속 직원들에게 인터넷상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종북 세력’에 대항하는 심리전을 수행하고 종북세력의 제도권 진입을 차단한다는 미명 하에 직원들에게 선거 개입을 지시하였다. 국가정보원은, 막대한 재원과 조직력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정보력으로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었다. 우리는 국민의 눈길이 닿지 않는 정부기관이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고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문제는 사건이 알려진 지 반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재판에 넘겨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경찰에 의한 수사축소 및 은폐 사태가 있었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재직 중이었던 지난 12월, 선거운동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인터넷 댓글 의혹이 도마 위에 오르자, ‘신속한 수사’를 이유로 키워드를 78개에서 4개로 축소수사하였고,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두고 갑자기 무혐의 내용의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하는 등 특정 후보에게 명백하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 했다.

결국 검찰에 의해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수천 건의 댓글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김용판 전 청장도 불구속 기소가 되었다. 경찰은 국가정보원과 한패가 되어 정권 재창출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주권 행사에 개입한 국가권력, 정부는 엄중한 조치를 단행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하라.

이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핵심적인 권력기관들이 국민들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거에 개입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에 있다. 본 사건은 공권력이 국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불법적이면서도 은밀하게 행사할 때,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1조가 공문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오늘날 보통, 직접, 평등, 비밀원칙에 기반을 둔 선거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과 희생에 기반한 성과이다. 그러나 권력기관들이 정권의 개가 되어 오히려 국민들의 여론을 통제하는 데 앞장서는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모습이 군사정권 하에서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가 수행하던 역할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짓밟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관계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인 황교안의 행보를 보면 정부가 이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는 이미 원세훈 전 원장에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한다는 검찰의 입장을 꺾은 바 있다.

국가정보원의 범죄사실을 공개한 내부고발자들은 파면, 기소 처분된 데 비춰볼 때 범죄의 총책임자인 원세훈, 김용판에 대한 처분은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벌써부터 정권의 외압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본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고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우려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국가정보원의 행보를 옹호하면서, 국가권력기관이 민주주의의 절차를 마음대로 훼손하고 있는 중차대한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국가정보원 인사들과 축소수사와 허위보도로 국민을 속인 경찰 관계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권력기관이 어떠한 형태로도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국민들을 속이지 않겠다는 약속과 구체적인 방안을 정부 스스로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정부가 책임지고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이 땅의 국민들과 함께 더 이상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모습을 방관하지 않고 직접 일어날 것이다. 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기는 권력은 용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똑똑히 기억하기 바란다.

선거에 개입하고 수사를 축소 은폐한 관련자들을 처벌하라!

권력기관의 간섭 없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장하라!

민중해방의 불꽃

제55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2013. 6. 20.


 


영진공 일동


 


 


 


 


 


 


 


 


 


 


 


 


 


 


 


 


 


 


 


 


 


 


 


 


 


 


 


 

“잭 리처”, 행동하는 보수의 표상

 

 


 


 



 


 


포스터 카피 보소.


‘법은 한계가 있다. 그에게는 (한계가) 없다.’


이런 Fox TV 잭 바우어 같으니라고 … 모든 히어로 ‘잭’은 다 이런가 싶기도 하다.


 


이번 대선에 표창원 전 교수께서 상당한 ‘히트’를 치시고, 그 뒤로도 계속 인기(?)를 지속중이신데, ‘참다운 보수’가 무엇인지 표방하는 모습이 참 좋아보인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고수하려는 참다운 보수를 보기 어려운 것일까?


 


어릴 때 나는 마치 홈쇼핑 운동기구 광고에 나오는 듯한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배웠다. ‘불의를 못 참으십니까? 정의를 위해 한 몸 불사르실 겁니까? 여러분에게 판검사 또는 경찰을 추천합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사람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 ‘돈’ 많이 번다고 의사를 자식에게 강권하는 현재의 아비, 어미들 말이다.


 


뭐 사실 언론에 연일 보도되는 것들을 보면 그게 그리 틀린 얘기도 아니다, 헌재소장 후보자랍시고 나온 인물이 권력을 얼마나 남용해댔으면 그렇게 돈파리가 꼬이는지, 언제부터 명예가 타락과 동의어인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어린 내게 가르쳐준 세상의 숭고한 가치들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법’이 가진 제한.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법이란 게 잘못 되었는데도 그걸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 이건 진보가 아니라 건전한 ‘보수주의자’가 해야될 가치덕목인데도 말이다.


 


잭 리처는 군 수사관 출신의 ‘자유주의자’다.


법적으로 제재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고 있다. 운전면허증, 거주지 등록 등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보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련다. 자신이 가진 ‘정의’의 원칙에 따라 합리적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군인’은 보수와 닿아 있을수밖에 없다. 애국과 명예, 정의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the well-trained soldier 는 그런 사람들이다. 잘못된 명령에 항거하고, 비도덕적인 전술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만 우리는 가스통을 들고 협박을 일삼는 불한당 같은 퇴역군인들이 판치는 나라에 살고있다. 허나 어쩌겠는가 … ‘비정상적’인 보수 세력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이 영화의 Best Shot 을 꼽자면 이 장면을 들고 싶다.


정의로운 보수의 결집이라고나 할까? 해병대 출신 저격수와 한 세대 아래의 육군 출신 미끼. 특히 로버트 듀발이 한 쪽 눈을 감고 있는 이유는 야간 저격 훈련을 해본 사람이면 익히 아시리라.


 


요약하자면,


정의를 위해 법이 무시되는 것도 웃기지만,


법이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더 무섭다.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1. 톰 크루즈 마니아
2. 무기 전문가
3. 미 육군과 미 해군(해병대)의 기싸움 좋아하는 사람


 


그나저나 톰 크루즈 영화 중에 기억나는 것들은 대부분이 군영화 뿐이다.


7월 4일생, 탑건, 어퓨굿맨 ……


 


 


 


영진공 함장


 


 


 


 


 


 


 


 


 


 


 


 


 


 


 


 


 


 


 


 


 

“체인질링”을 돋보이게 하는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 작품인데 그 실력 어디 갈까. <체인질링>은 그 명성에 값한다. 깊이 있는 연출과 거장다운 시선 +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까지, <체인질링>은 열거한 장점만으로도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다. 그러니 이상 리뷰 끝???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한 가정의 유괴사건이 LA 공권력의 부패로 치환되는 거대한 이야기를 단순해 보일 만큼 간결하게 다루는 영감님의 솜씨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체인질링>은 1928년 LA에서 발생한 ‘와인빌 양계장 살인사건’(Wineville Chicken Coop Murders)을 다뤘다. 더 정확하게는, 이 사건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월터 콜린스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의 평생에 걸친 아들 찾는 과정을 그렸다. 여담인데, 같은 소재를 론 하워드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강인한 모성의 고군분투기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면 크리스틴이 겪는 아픔에 포커스를 맞추며 결국엔 가족 화해 드라마로 마무리 지었을 소재를 이스트우드 옹은 ‘절대 악을 퇴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무슨 소리냐고? 자세한 ‘썰’은 줄거리부터 확인한 후에. 

LA에 거주하는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은 전화교환수 감독관으로 일하며 아들 월터를 보살피는 싱글 맘이다. 아들과 채플린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문제의 토요일, 일손이 딸린다며 동료들은 크리스틴을 회사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엄마 없는 토요일을 보내게 된 월터는 행방불명이 된다. 다행히 5개월 후 경찰은 월터를 발견하지만 크리스틴은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시점부터 이야기는 관객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되풀이되는 그녀의 반항에 뿔난 존스(제프리 도노반) 경찰은 크리스틴이 엄마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며 급기야 정신병원에 가두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평소 LA 경찰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해오던 구스타브(존 말코비치) 목사가 합류하면서 월터의 유괴사건은 선량한 시민과 악랄한 공권력의 대결구도로 변모한다.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인간이 이에 맞서는 행위를 무덤덤하지만 고귀하게 그렸던 이스트우드의 태도는 <체인질링>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전작에서 사건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묘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변화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즉, <체인질링>이 주목하는 건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슬퍼하는 크리스틴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을 정신병자로 모는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는 그녀의 분노다. 그러니까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을 통해 드러내는 관심사는 유괴범을 잡는 데 있지 않고 공권력의 무능을 파헤쳐 본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체인질링>은 실제 사건을 바탕(Based on)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화(A True Story)다. (이를 강조하려는 듯 흑백화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금세 컬러로 바뀐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가 막힌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이냐며 혀를 내두르지만 이스트우드 감독은 바로 그 점에서 영화의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그것이 공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거대 악(惡)이란 바로 공권력의 부패라는 것을!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관심 없는 척 하다가 어느 순간에 월터의 살인자로 추정되는 인물 고든 노스콧(제이슨 버틀러 하너)을 불러내고 놀랍게도 LA경찰의 부도덕을 이 자의 살인행각과 동일시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를 위해 이스트우드 옹이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교차 편집이다.

※ <체인질링>을 안 보신 분들이라면 이 글 곳곳에 지뢰가 깔려 있으니 알아서 스텝 밟으시길.


이미 밝혔듯, <체인질링>으로 이스트우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거대 악의 실체, 즉 공권력의 부패다. 거기에 이 더럽고 추잡하고 비도덕적인 공권력을 박멸하고자 하는 바람까지 담았다. 고든 노스콧의 목에 줄을 달아 사형시키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노스콧의 아동 살해와 (죄 없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가둠으로써) 그녀의 사회생명에 무참히 도끼질을 가한 LA경찰의 부패는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차편집을 통해.

크리스틴과 구스타브의 헌신으로 LA경찰의 무능을 증명해 존스 형사를 재판 석에 앉히는 순간, 이스트우드 옹은 다음 장면에 노스콧의 재판과정을 병치한다. 존스와 노스콧의 재판은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평행하게 놓음으로써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여 크리스틴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는 변호사의 질문에 존스 형사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다음 장면에는 여지없이 자신은 무죄라며 소리치는 노스콧의 경우가 끼어들고, 존스 형사가 LA경찰직에서 영구 제명 판결을 받는 순간, 노스콧 역시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두 개의 악에 대한 동일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교차편집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20명 이상의 아동을 유괴해 살인행각을 벌인 검거 이전 상황은 회상 형식으로 짧게 묘사할뿐더러 그가 왜 살인을, 그것도 아이들만 집중적으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불친절하다싶을 정도로 설명을 아낀다.

그래서 나는 <체인질링>을 두고 미학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하는 의견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현란한 서술법, MTV적인 영상, 능수능란한 CG 등 현대영화를 평가하는 잣대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체인질링>에서 이스트우드 영감님이 보여주는 교차편집 같은 기교는 말 그대로 구식, 고전적이니까. 다만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대가의 호흡과 손놀림은 모두 고전적인 방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눈에 평범하게 보이는 기법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난 <체인질링> 오프닝에 대해 흑백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부분을 두고 실화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혔다. 이에 덧붙여, 영화의 엔딩에 제시되는 자막을 보면 오프닝의 컬러 전환은 또한 현실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임을 환기시키려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체인질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엔딩의 자막이다. 우린 이미 이전 장면을 통해 LA경찰의 부패를 상징하는 인물 존스가 쫓겨남으로써 거대 악이 퇴치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자막. “존스는 몇 년 후 LA경찰에 복귀했고 아들의 생사 여부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크리스틴 콜린스는 2006년 사망했다.”

부패한 공권력은 부활하고 정의는 숨을 거뒀다는 비보.

아시다시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다. 고전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그가 느끼는 지금의 현실은 크리스틴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턴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만 신경 쓰는 동안 미국 사람들은 직장 잃어 집 잃어 경제파탄으로 거리에까지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는 이스트우드가 팔십 평생 살아왔던 조국이 아니다. 풍요로웠던 나의 집, 나의 가족, 나의 핏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Home Sweet Home, 나의 진짜 미국을 돌려줘! 

공교롭게도 <체인질링>이 공개된 시점은 2008년.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 이스트우드는 론 하워드로부터 <체인질링>의 연출제의를 받곤 바로 승낙했다. 과거의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크리스틴과 같은 의지와 결단력을 통해 현 공권력의 무능과 부패, 부도덕을 퇴치하자고 발언하기 위해, 호소하기 위해. 그리고 덧붙이시길,

“현실은 허구보다 더 복잡하다.”

<체인질링>은 별다른 기교 없이, 시간 순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까닭에 꽤 단순해보이지만 그 속은 매우 복잡한 텍스트로 구성돼있다. 그 복잡함을 푸는 열쇠는 다름 아닌,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에서 보여준 교차편집은, 그래서 흥미롭다. 거기에는 영화를 대하는 그의 철학과 더불어 삶에 대한 방식까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