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Last Life in the Universe, 2003), “어떤 날의 백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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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속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인 것 처럼, 그리하여 절대적인 외로움만이 나의 존재를 설명해주는 모든 것인양 느껴지던 어떤 날의 백일몽과 같은 영화가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다. 무엇이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시종일관 모호하게만 느껴지는 이 영화는, 사실 눈에 보여지는 100%가 전부 꿈이며 환상이다. 유일한 현실이라고는 영화 초반 주인공의 짧은 독백이 전부다.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은 이미 목 매달아 죽은 상태인데, 그것이 ‘3시간의 후의 내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3시간 후 자살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이후의 전개는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마뱀 같은 환상의 연속이다. 이런 방식의 전개는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일찌감치 설명이 주어지는데, ‘잠시 정신을 잃고 눈을 떠보니 다른 인생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이겠느냐’고 한다. 그리하여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세 번씩이나 죽음을 맞는다. 그러고도 계속 살아간다. 물론 이전과는 약간씩 다른 인생이다. 그리하여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이라 믿었던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 나의 존재를 위로받고 또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줄 수 있게 되는 달콤한 여름 날의 꿈을 끊임없이 전개시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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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것 자체가 본래 2시간의 꿈 이야기일 수 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이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가 한낯 팬터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의식을 이렇듯 숨김없이 드러낸다. 영화 타이틀이 영화가 한참이나 진행된 중간에 뜬금없이 보여지는 것이나, 일본 문화원 내에서 아사노 타나노부의 출연작 “이치 더 킬러”의 포스터를 걸어놓은 것, 그리고 거의 끝나가기는 하지만 아직 영화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공항에 앉은 여주인공이 바라보던 TV 화면 위로 엔딩 크리딧을 미리 올려 보내던 장면 따위도 모두 마찬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 그리고 영화가 끝나자 마자 금새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영화 속 현실과 꿈의 경계는 시종일관 모호하고, 그래서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심지어는 영화 속에 들리는 대사들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사노 타다노부의 존재감과 크리스토퍼 도일의 ‘끊임 없이 대화하는 듯한’ 카메라, 그리고 엠비언트 계열의 미니멀한 배경 음악들만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 꿈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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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눈물의 마음


분향소에 향을 꽂는다. 겨울의 한기에 순식간에 얼어버린 향 냄새는 나에게 달하지 않는다. 향을 꽂는 그녀들의 곁에는 고인의 아내로 보이는 유족들이 함께 선다. 함께 묵념을 한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분향을 할, 혹은 헌화를 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덩그러니 먼 발치에 섰다.

나와 같이 지하철에서 내린 아가씨들이었다. 학생처럼 보였는데 수수한 차림이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용산 사고 현장 분향소는 우리나라 최고 회계 사무소라는 삼일 회계 법인 바로 몇 미터 뒤에 있었다. 그녀들과 나는 우연히 방향이 같았고, 화재의 흔적 보다 진압의 흔적이 완연한 그곳의 참혹함 앞에서도 나는 참혹해 하지 않았고, 서성거렸고, 그때 그녀들은 분향소에 들어섰다.

동지애를 표시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사고 건물 옆으로 붙어 있었다. 시를 이루지 못한 한 시인의 시도 큼직히 걸려 있었다. 전경 버스는 길을 봉쇄하고 있었고, 언론사 기자는 인도에 주차된 취재차량 안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요동치는 곳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내 귀를 부여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영하 십도, 매서운 날씨에 그곳을 종일 지켜야 하는 유족들은 눈만 빼고 온 몸을 다 가렸다. 고인의 영정 사진 뒤로, 살아남은 사람은 추위를 느끼는 법이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곳이 지긋지긋했고, 떠나고 싶었다. 그때 묵념을 하던 한 아가씨가 손을 눈가로 올리더니 눈물을 닦았다.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관계자도 아닌 게 분명한 그녀를 울리는 그 정서는 무엇일까 멀찍이 서서 생각했다.

사실은 너무나 간단하고 자명하다. 시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 보다 시 내곽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개발이익을 남긴다. 집주인들은 평균 5억의 보상을 받았고, 개발사들은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남길 테다. 그 이익의 떡고물 앞에 용역업체가, 구청이, 경찰이, 검찰이 머리를 조아린다. 사라지는 것은 평균 2천만원의 보상을 받고 갈 곳이 없어진 세입자들 뿐이었다. 자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은 개발이나 국익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그 과정을 지켜야 할 법은 이미 평등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역시 너무 늦은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자명한 원칙은 이미 깨졌고,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져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면화하고 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것’이 ‘만인 앞에 평등한 법’ 보다 사람들에게 가깝다. 그래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은 순간, 다시 말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약속이 깨어지는 순간을 목도한 사람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신념처럼 떠받든다. 법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니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부자가 되고 힘 센 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밖으로 내뱉진 않지만, 마음 속에서 붙들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이다. 하지만 분향소 안의 그녀는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쩌면 희망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불 붙기를 기다리는 방관자일 수도 있다. 촛불 집회를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연결하려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아우성이 내키지 않았고, 그래봐야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투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가난한 상상을 할 뿐이었다. ‘조국’이나 ‘민족’이란 단어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나는 수시로 이 땅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그녀는 눈물의 마음을 가졌고, 추하고 추한 나는 방관자의 마음을 가졌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는다면 그것은 저 눈물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될 것이었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길 바라면서도 그러나, 눈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나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마침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난 거야?”
“응, 그러니까 불조심해야 해.”

모자는 풍채 좋은 삼일 회계법인 빌딩의 그늘 아래로 멀어져 갔다. 지난 정권 시절 브리핑룸 통폐합이 언론탄압이라고 대통령에게 항의하던 용감한 기자들은 승용차 안에서 선잠을 잔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떤 언론도, 무허가 용역업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입했는지, 동의 없는 시신 부검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런 비극을 낳으며 추진한 재개발의 이익은 최종적으로 누가 가져가는지 말하지 않는다. 눈물 흘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나는 애꿎은 서울의 풍경만 기록한다.

2009년. 1월. 신용산 역 2번 출구 그곳.

영진공 철구

“체인질링”을 돋보이게 하는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 작품인데 그 실력 어디 갈까. <체인질링>은 그 명성에 값한다. 깊이 있는 연출과 거장다운 시선 +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까지, <체인질링>은 열거한 장점만으로도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다. 그러니 이상 리뷰 끝???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한 가정의 유괴사건이 LA 공권력의 부패로 치환되는 거대한 이야기를 단순해 보일 만큼 간결하게 다루는 영감님의 솜씨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체인질링>은 1928년 LA에서 발생한 ‘와인빌 양계장 살인사건’(Wineville Chicken Coop Murders)을 다뤘다. 더 정확하게는, 이 사건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월터 콜린스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의 평생에 걸친 아들 찾는 과정을 그렸다. 여담인데, 같은 소재를 론 하워드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강인한 모성의 고군분투기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면 크리스틴이 겪는 아픔에 포커스를 맞추며 결국엔 가족 화해 드라마로 마무리 지었을 소재를 이스트우드 옹은 ‘절대 악을 퇴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무슨 소리냐고? 자세한 ‘썰’은 줄거리부터 확인한 후에. 

LA에 거주하는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은 전화교환수 감독관으로 일하며 아들 월터를 보살피는 싱글 맘이다. 아들과 채플린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문제의 토요일, 일손이 딸린다며 동료들은 크리스틴을 회사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엄마 없는 토요일을 보내게 된 월터는 행방불명이 된다. 다행히 5개월 후 경찰은 월터를 발견하지만 크리스틴은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시점부터 이야기는 관객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되풀이되는 그녀의 반항에 뿔난 존스(제프리 도노반) 경찰은 크리스틴이 엄마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며 급기야 정신병원에 가두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평소 LA 경찰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해오던 구스타브(존 말코비치) 목사가 합류하면서 월터의 유괴사건은 선량한 시민과 악랄한 공권력의 대결구도로 변모한다.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인간이 이에 맞서는 행위를 무덤덤하지만 고귀하게 그렸던 이스트우드의 태도는 <체인질링>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전작에서 사건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묘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변화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즉, <체인질링>이 주목하는 건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슬퍼하는 크리스틴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을 정신병자로 모는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는 그녀의 분노다. 그러니까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을 통해 드러내는 관심사는 유괴범을 잡는 데 있지 않고 공권력의 무능을 파헤쳐 본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체인질링>은 실제 사건을 바탕(Based on)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화(A True Story)다. (이를 강조하려는 듯 흑백화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금세 컬러로 바뀐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가 막힌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이냐며 혀를 내두르지만 이스트우드 감독은 바로 그 점에서 영화의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그것이 공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거대 악(惡)이란 바로 공권력의 부패라는 것을!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관심 없는 척 하다가 어느 순간에 월터의 살인자로 추정되는 인물 고든 노스콧(제이슨 버틀러 하너)을 불러내고 놀랍게도 LA경찰의 부도덕을 이 자의 살인행각과 동일시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를 위해 이스트우드 옹이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교차 편집이다.

※ <체인질링>을 안 보신 분들이라면 이 글 곳곳에 지뢰가 깔려 있으니 알아서 스텝 밟으시길.


이미 밝혔듯, <체인질링>으로 이스트우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거대 악의 실체, 즉 공권력의 부패다. 거기에 이 더럽고 추잡하고 비도덕적인 공권력을 박멸하고자 하는 바람까지 담았다. 고든 노스콧의 목에 줄을 달아 사형시키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노스콧의 아동 살해와 (죄 없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가둠으로써) 그녀의 사회생명에 무참히 도끼질을 가한 LA경찰의 부패는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차편집을 통해.

크리스틴과 구스타브의 헌신으로 LA경찰의 무능을 증명해 존스 형사를 재판 석에 앉히는 순간, 이스트우드 옹은 다음 장면에 노스콧의 재판과정을 병치한다. 존스와 노스콧의 재판은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평행하게 놓음으로써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여 크리스틴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는 변호사의 질문에 존스 형사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다음 장면에는 여지없이 자신은 무죄라며 소리치는 노스콧의 경우가 끼어들고, 존스 형사가 LA경찰직에서 영구 제명 판결을 받는 순간, 노스콧 역시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두 개의 악에 대한 동일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교차편집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20명 이상의 아동을 유괴해 살인행각을 벌인 검거 이전 상황은 회상 형식으로 짧게 묘사할뿐더러 그가 왜 살인을, 그것도 아이들만 집중적으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불친절하다싶을 정도로 설명을 아낀다.

그래서 나는 <체인질링>을 두고 미학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하는 의견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현란한 서술법, MTV적인 영상, 능수능란한 CG 등 현대영화를 평가하는 잣대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체인질링>에서 이스트우드 영감님이 보여주는 교차편집 같은 기교는 말 그대로 구식, 고전적이니까. 다만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대가의 호흡과 손놀림은 모두 고전적인 방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눈에 평범하게 보이는 기법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난 <체인질링> 오프닝에 대해 흑백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부분을 두고 실화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혔다. 이에 덧붙여, 영화의 엔딩에 제시되는 자막을 보면 오프닝의 컬러 전환은 또한 현실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임을 환기시키려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체인질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엔딩의 자막이다. 우린 이미 이전 장면을 통해 LA경찰의 부패를 상징하는 인물 존스가 쫓겨남으로써 거대 악이 퇴치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자막. “존스는 몇 년 후 LA경찰에 복귀했고 아들의 생사 여부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크리스틴 콜린스는 2006년 사망했다.”

부패한 공권력은 부활하고 정의는 숨을 거뒀다는 비보.

아시다시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다. 고전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그가 느끼는 지금의 현실은 크리스틴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턴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만 신경 쓰는 동안 미국 사람들은 직장 잃어 집 잃어 경제파탄으로 거리에까지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는 이스트우드가 팔십 평생 살아왔던 조국이 아니다. 풍요로웠던 나의 집, 나의 가족, 나의 핏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Home Sweet Home, 나의 진짜 미국을 돌려줘! 

공교롭게도 <체인질링>이 공개된 시점은 2008년.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 이스트우드는 론 하워드로부터 <체인질링>의 연출제의를 받곤 바로 승낙했다. 과거의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크리스틴과 같은 의지와 결단력을 통해 현 공권력의 무능과 부패, 부도덕을 퇴치하자고 발언하기 위해, 호소하기 위해. 그리고 덧붙이시길,

“현실은 허구보다 더 복잡하다.”

<체인질링>은 별다른 기교 없이, 시간 순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까닭에 꽤 단순해보이지만 그 속은 매우 복잡한 텍스트로 구성돼있다. 그 복잡함을 푸는 열쇠는 다름 아닌,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에서 보여준 교차편집은, 그래서 흥미롭다. 거기에는 영화를 대하는 그의 철학과 더불어 삶에 대한 방식까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나뭉

 

체인질링, “미니멀리즘의 진수”







미니멀리즘의 진수가 이 영화더군요.
영화가 미니멀하다는 건 아닙니다.
장장 2시간 20분짜리 영화이고, 사건의 시작부터 끝의 끝까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니까요.

미니멀한 것은 연출과 음악입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특별히 영화다운 뭔가를 더 붙이지 않죠.
이 영화는 그저 그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영화입니다.
카메라도 조용하고 진행도 조용하고 음악도 조용합니다.
네, 그 음악도 이스트우드 옹의 작품이고요.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꽤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졸리의 연기도 훌륭하고, 시대고증도 좋습니다.
게다가 조용한데도 긴장감은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이스트우드 옹이 이렇게 말하는 거 같습니다.
“영화 뭐 별거 있어? 사건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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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네가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돼, 하지만 일단 싸우게 되면 네가 끝을 내거라

영화를 보며 우리나라를 떠올린 분들 많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시스템이 거지같으면, 그 시스템의 문제를 고칠 기회도 생깁니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거지같은 압박을 가할때, 진짜 용기가 드러납니다.
담당자들이 멍청이 짓을 할때 진짜 똑똑한 것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열라 고생하고 머리를 쓰고 힘을 모아야 되죠.

영화의 엔딩을 가능하게 만든 건,
끝까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 주인공과,
자기 일이 아니지만 지역공동체의 대표로 정의롭고 단호하고 현명한 전략을 펼친 목사 (물론 요즘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로는 영락없는 “외부세력”입니다만),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형사,
제대로 준비하고 변론 할 줄 아는 변호사,
막판에 청문회를 통해 상식으로 귀의한 시의원들,
그리고 그들 시의원들에게 압박을 가한 시민들 모두입니다.

이들 중 하나만 없었어도 그 결말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저런 역할들이겠죠.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이 거지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진짜 전문가들, 영리한 전략들, 그리고 아닌 건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단 사실입니다.

이 영화가 왜 청소년관람불가일까요?
이런 영화야 말로 청소년들이 봐야 하는데 말이죠.

최근에 <작전>을 청소년불가로 만든 것도 그렇고…
어디선가 돌로레스 엄브릿지의 향기(라고 쓰고 악취라 읽음)가 피어오르는군요.



영진공 짱가


하드웨어 스펙을 높이면 잘 팔릴 거라고? 글쎄올시다!




IT 분야에서 이름난 블로그나 커뮤니티 사이트의 하드웨어 리뷰는 거의 예외없이 스펙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숫자가 높으면 높을수록 열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1) 이거 봐, 이 PMP는 DIVX에 XVID, WMV9, 거기다가 H.264까지 재생한다는 거야. 이걸 안 사면 도대체 뭘 사겠어?
2) 이건 AMOLED라고. 10000:1이 넘는 명암비를 자랑한단 말야. 엄청난 숫자 아냐? 이건 무조건 질러야 해!

이런 사용자들의 입심에 힘입어 한국의 IT 하드웨어 업체들은 용감하게 신기술을 도입하고 과감하게 수십 가지 기능을 박아넣는 데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 그래, 이거저거 집어넣으면 값이 좀 비싸도 잘 팔릴 거야! 틀림없어!
하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인 마진율 악화와 수출 부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내수 시장의 불황으로 자금난에 허덕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펙에 열광하는 건 일부 마니아나 얼리어답터에 한정될 뿐이다. 그나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쉽사리 돈을 쓰지도 않는다. 이거저거 따지고 재는 사람들이 돈지갑을 설렁설렁 열 리가 없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기술엔 별 관심 없다. 액정을 AMOLED로 박아넣건, 신기술을 무지막지하게 집어넣건, 그런 건 별로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는 a) 가격이 싸거나, b) 폭풍간지를 불러일으키는 쉬크함과 새끈함을 겸비하거나,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기능이 많은 걸 좋아한다고? 그런 건 근거 없는 도시괴담 수준의 신화다.

외국 시장의 현실은 이보다 더 각박하다. 미국이나 유럽은 인터넷 쇼핑몰보다 대형 양판 체인이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크다. 애플이나 필립스, 소니 같은 대형가전업체에 비해 이름값이라 할만한 게 없는 한국의 중소 IT 업체가 이런 양판점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a)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하거나 b) 어쨌건 엄청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해야 하고 c) 뭐가 어찌 됐건 무지막지하게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드웨어 스펙을 무지막지하게 올렸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는 덴 한계가 있다. 그나마도 애플 아이폰/아이팟 터치의 성능을 쫓아가기조차 벅차 숨을 헐떡일 지경이다.
일례를 들어 보겠다. 아이폰/아이팟 터치에는 3D 가속 칩셋 외에 주문 제작된 2D 가속 칩셋도 들어가 있다. 이것은 bitblit 함수를 가속 처리하는 칩셋으로 화면 처리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준다. 터치 스크린에서 아이콘을 끌어당기면 아무런 시간 지연 없이 움직이는 건 순전히 이 칩셋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가속 칩셋이 없는 다른 디바이스들은 터치 스크린에서 아이콘을 끌어당기면 0 콤마 몇 초 후에나 반응이 일어나기 일쑤다. 이건 3D 칩셋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거 하나 해결하겠답시고 2D 가속 칩셋을 주문 제작한다는 건 보통의 하드웨어 업체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짓이다.
아니, 주문 제작 칩셋이고 뭐고를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천만이나 억 개 단위로 부품을 구입하거나 라이센스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대형 가전업체의 구매력을 쫓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 따라서 고만고만한 한국 중소 IT 하드웨어 업체가 원가율을 낮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동급 가격대에서 대형 가전업체의 최신, 최고 스펙의 제품보다 한 단계 딸리는 제품을 만드는 게 고작이다.

이름값도 없고, 그렇다고 기능이 정말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가격 경쟁력까지 없다면, 해외 시장에서 애플이나 소니, 필립스를 이긴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날개돋친 듯 팔린다는 건 기대할 수조차 없다. 기껏해야 몇 천, 몇 만대를 팔고선 [의미있는 숫자]라고 자축할 뿐인데, 그 정도 숫자로는 해외 법인 유지비도 나올까 말까다.

이런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블로거들은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한국 업체들에게 끊임없이 충고할 것이다. 하드웨어 스펙을 높이라고.
하지만 그 충고가 과연 얼마나 쓸모있는 충고일까 하는 점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결과만 놓고 보면, 정말 무쓸모한 충고였으니까!

영진공 DJ.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