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불구경하기 영화에서 감동은 어디에 있는 건가

 


 

 


 


 



 


 


 


재난영화를 만들떄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다.


영화로서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절대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사람이 죽고 다쳐나가는데 그걸 보면서 ‘우와’ ‘대박’ 뭐 이런 탄성이 나오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재난이 그저 우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구조적 결점이나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난의 영화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아야하며, 애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게 만든 나쁜 놈들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난은 …… 그냥 사고다.


구조적 병폐나 인간의 탐욕이 주원인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물론 헬기가 비행한 상황이나 건물주의 행동이나 소방국장이 벌이는 뻘짓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그토록 큰 재난을 일으킨 주범들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놈도 없고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도 없다. 그냥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나가는 대형사고를 그런 스펙타클한 화면으로 왜 봐야하는가. 그나마 찌질한 나쁜 놈들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응징도 가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봐야할 게 뭐고 어디에서 감동해야 하는 걸까. 실감나는 장면 연출? 불구경? CG감상? …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요즘 나의 고민은, 내 과거의 가난했던 경험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나의 가난에 대한 경험이 타인에게는 화두로 삼기에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어서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꼭 등장하는 ‘가난한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불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작위적인 설정(요즘 세상에 청소용역직에게 누가 3개월치나 월급을 가불해주나? 게다가 용역직 월급 120만원이라 가정하고, 석달치 360만원에 세금 때면 330만원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 하면, 그 가족은 3개월을 손가락 빨고 사나?) 때문만은 아니리라.


 



영화 한 편에 9,000원을 내고 보러올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현대의 가난’이란 소재가 외면하고 싶은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타워”에 등장하는 청소 아주머니는 감동을 위한 소재로서는 불편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정치인은 소방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VIP랍시고 안전하게 도망가고, 쓸데없이 고집부려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놈은 상황실에서 방방 뛰고, 애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쳐나가고 …… 그 와중에도 가난한 청소 아주머니는 그저 짐만 되는 사람으로 표현될 뿐, 이렇다 할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가난이란 그런 것일 듯 하다. 그저 불편한 짐.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약자가 표현되는 수준. 복지 예산으로 먹여살리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마냥 버릴 수도 없는. 딱 그 수준. 그게 우리의 투표 결과고, 현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계층의 모습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으라면 설경구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한다. 영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순교의 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갖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평소의 강인한 모습을 잊고 눈물을 터트리는 …… 그저 평범한 영.웅.


 



그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ㅆㅂ, 죽기 싫은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 욕심들만 채우려는 캐릭터를 보다가, 그나마 ‘양심’을 가진 캐릭터를 보니 살짝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영화에 대한 불만이 확 치밀어 올라왔다가 그 장면 하나에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슈퍼히어로를 만들지 않아서.


 


 


 


영진공 Red Submarine


 


 


 


 


 


 


 


 


 


 


 


 


 


 


 


 


 


 


 


 


 


 


 


 


 


 


 


 


 


 


 



 



“페어 러브”, 외화내빈의 독립 멜로 영화

최근에 새로 개봉한 세 편의 한국영화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의외의 수확을 기대해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람했습니다. 예전에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나 되는 독립영화가 만들어져서 호평을 얻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었는데 그게 바로 신연식 감독의 <좋은 배우>(2005)였더군요. 포스터에서 보이는 안성기와 이하나의 멜러가 특별히 궁금할 이유는 없었지만 새로운 연출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페어 러브>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안성기와 이하나의 관계는 대놓고 연애를 할 수도 있고 포스터와 제목에서 암시되는 것과는 달리 연애가 아닌 좋은 관계만 유지하는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매우 드라이한 설정과 전개의 영화일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영화의 내용이 어찌되었건 제가 기대했던 것은 엇비슷한 이야기도 아주 맛깔스럽게 가공해내는 신인 감독의 연출 솜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었는지를 우선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물론 영화가 기대했던 바를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페어 러브>는 카메라 수리 전문가인 50대의 독신남이 죽은 친구의 20대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어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분에게서 먼저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시작하고야 맙니다. 주인공 형만(안성기)이 얼토당토 않게 럭셔리한 스튜디오를 차려놓은 미중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관계에 서툴고 그나마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인물로 설정된 것은 참 다행한 출발이었습니다.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친구의 딸을 떠맡아 돌보려고 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편의 멜러 영화로 보았을 때 <페어 러브>는 정체성이 아주 애매모호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담백한 러브 스토리의 세계로 관객들을 데려가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득한 성찰의 편린을 남겨주는 것도 아닙니다. <페어 러브>에서 본격적인 연애의 시간은 뮤직비디오처럼 흘러가고 이별 후의 희망 찾기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지기만 할 뿐입니다. 뜬금없이 시작되었다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깨져버리는 것은 – 사랑이 그렇게 왔다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가 그렇게 뜬금없이 느껴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던 2시간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감독은 분명 자신의 연애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구상해서 각본으로 완성하고 마침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 경험에 비해 연애 영화에 대한 분석, 특히 만드는 이로서 갖춰야 할 화법에 대한 분석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페어 러브>를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안성기를 배우로서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입장입니다만 <페어 러브>에서 안성기는 무난한 수준 이상의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대가 되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가난한 카메라 수리공으로서는 잘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캐스팅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 그러나 이 영화는 안성기의 캐스팅을 통해 투자와 제작 여부가 결정된 경우였을 겁니다 –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안성기는 50대 노총각의 추레함을 연기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배우입니다.

결국 50대 노총각이어야할 형만을 인스턴트 커피 광고를 통해 보던 CF 모델 안성기로 보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캐릭터를 요구한 감독의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안성기가 연기한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캐릭터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사실성도 없고 그래서 몰입도 안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하나의 경우 그야말로 발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역시 이하나의 능력 부족이라기 보다는 배우에게서 제대로된 연기를 이끌어내지 못한 연출가의 능력 부족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모호하고 배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된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때론 연출가의 천재적인 재능이 배우의 발연기를 오히려 새로운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페어 러브>는 그런 작품에 해당되지는 않는 쪽입니다. 형만과 남은(이하나)의 대화는 때론 불필요하게 긴 시간 동안 주절대기만 한다는 느낌을 주고 특히 마지막 엔딩은 한 편의 영화를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는 신인 감독의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에게 <페어 러브>는 마치 형만에게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3년 동안 짜증이 나게 만들던 조카 녀석 같은 영화입니다. 간간히 웃게 만드는 대목도 없진 않았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자기 감정에만 빠져 대화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형만은 뒤늦은 연애로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인지상정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페어 러브>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이 사랑의 아픔 중에 있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무릇 제대로된 멜러 영화란 – 사랑을 소재로 한 예술 영화가 아니라 기왕에 일반적인 기준의 대중 영화이기로 했던 거라면 – 없던 사랑의 감정까지 마구 불러일으키는 묘약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예쁘게만 보이려다 사랑과 연애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면 결국 외화내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잘 알려진 배우들과 저예산 독립영화의 접목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애매한 작품들만 양산하다가 끝날 소지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레드카펫 놀이 – [PIFF]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4)




해운대 백사장은 언제나 밤에 거닐게 됩니다. 낮에는 볕이 따갑거니와 그 더위에 못 이겨 어서 빨리 바다로 뛰어들고 싶게 만들거든요.


행사 시작은 8시 30분부터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8시 30분이 되어도 시작은 커녕 행사가 왜 늦어지고 있는지 방송조차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백사장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렇게 밀집되어 저마다 가까이서 보기위해 자리를 잡은 터라 앉기도 어려웠지요.


저는 아예 레드카펫의 시작점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카펫의 3분의 2지점에 기자들의 Photo-Zone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는 이미 사람들로 ‘山’을 이루고 있던 터에다가 레드카펫 끄트머리에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전경 몇 개 소대 정도가 아예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있었습니다. 프레스 뱃지를 보여줘도 통행이 안 되더군요.

뭐 우리는 홍길동과 일지매의 후손.

가볍게 담 넘기.


행사 진행요원이었는지 그냥 구경꾼인지 모르겠지만 백사장에 세그웨이를 타고 나타났더군요. 아마 행사 진행요원이 백사장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면 피곤할까봐 주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은 해봅니다만 – 만약에 그 정도라면 PIFF도 개념있음? – 어쨌거나 세그웨이를 실물로 본 건 처음입니다.

더군다나 백사장에서 저렇게 잘 굴러 가다니!!

9시가 조금 넘어서야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안성기 아저씨가 역시 제일 먼저 나오더군요. 사실 유인촌이 먼저 나오면 ‘미친 xx’하고 욕을 해주려 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영원한 ‘이쁜 언니’ 강수연. 물론 꼬장꼬장하게 생기신 PIFF 김동호 위원장께서도 미소를…


눈에 거슬리는 놈도 하나 나타났는데 촛불시위 때 ‘채증’하던 그 놈입니다. 꼴에 사진기 들고 설쳐야 하는 보직을 맡았으니 오늘은 ‘배우’ 채증하러 왔나봅니다. 더군다나 일반 시민은 ‘우러러’ 보게 만든 레드카펫 단 위에 떠억하니 올라가서 대놓고 찍더군요. 훗. 그러나 사진기 성능이 안 받쳐줬던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능. 물론 더 좋은 자리를 찾으러 갔는지도 모르지만.


아 제 사진기도 엄청 나쁘지요. 배우 사진 80%를 결국 날려 먹고 말았다능. 그래서 우리 이쁜 예지원 배우가 흐릿하게 ㅠㅠ


유준상 배우도 보이고 – 사실 그 옆에 김혜나라는 사람은 제가 잘 몰랐다능 ㅡ.ㅡ 미안해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 아니면 이름을 잘 몰라연 ㅡ.ㅡ


3일에 있던 레드카펫에서는 임형준 배우와 김지수 배우가 함께 걸었어요. 5일에는 김주혁 배우와 함께 걸었다던데 이미 그 때 저는 올라왔다능.


식객의 김강우 배우와 김소연 배우도 나란히 등장. 김강우는 참 멋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한국 배우들은 바삐 걸어가기 바빴어요. 물론 그네들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언론에 나가는 Photo-Zone이었지만 꽤 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손 한 번 안 흔들어주고 가는 배우가 허다했지요. 물론 이건 인격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어떤 남자 배우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레드카펫에 딱 올라서면서 그 많은 인파에 놀라 ‘어떡해!?!’를 내지르면서 부끄러워하더군요. 어허 배우가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야 ㅋㅋ

더군다나 오광록 배우 – 개인적으로 오광록 아찌라고 부르고픈 ㅋㅋ – 는 그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어찌나 빨리 휙휙 걸어 가시던지. 아 물론 좌우로 둘러보면서 그 특유의 웃음을 비춰줌으로 인해 관객들이 무척이나 유쾌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이기선 배우 – 제임스 키선 리, 혹은 제임스 카이슨 리 – 와 문 블러드굿 배우는 레드카펫 처음부터 아예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좌우로 허리 굽혀 절을 하던 모습에 ‘우왕국’을 연발할 정도였어요.

레 드카펫 놀이가 재밌는 이유는 순전히 관객들 덕분입니다. 저 멀리 배우들이 자동차에서 내리는 입구쪽에 환호성이 들려오면 이번에 등장할 배우가 어느 정도 인기인인지 나타납니다. 다니엘 헤니가 등장할 때는 해운대가 떠나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카펫’에 올라가면 누구나 ‘스타’가 된다는 겁니다. 레드카펫 초반부터 Photo-Zone까지 가는 동안 꽤 많은 배우들의 ‘코디네이터’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들이 뒤를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이미 스타가 지나간 후에 등장하는 스탭들이 나타납니다.

이 스탭들을 위해서도 관객들은 아낌없이 환호를 보냅니다. 무식한가요? 무지하다고 비판할 건가요? 말도 안 돼죠. 보안 요원이 급히 뛰어가는 것도 우리 관객들에겐 환호하고 즐거워할 광경입니다. 그 곳은 ‘레드카펫’이니까요.

물 론 문제도 있었지요. 너무 띄엄띄엄 배우들이 입장하게 되니까 관객들은 지루해하면서 허리를 두드려가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더군다나 레드카펫 등장 인물들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관객이 대부분인데 아무런 설명도 없으니까 외국 배우들이 등장하면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레드카펫 단상 아래에 LED 전광판을 설치해서 현재 지나가는 배우의 이름과 국적, 주요 작품 내역 정도가 텍스트로 출력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뭐 어쨌거나 재미난 ‘관객’들이었습니다. 어떤 여배우가 나오자마자 부산 사투리로 ‘우와!!…. 에이 성형 안 했다다두만 했네!’라고 ‘배우 민망하게’ 외치는 관객부터, 등장 인물들의 배역을 마구 불러주는 관객까지.


별로 ‘우리나라 레드카펫 문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확실히 축제 분위기의 관객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행사인 것 만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PIFF의 밤이 저물어 가는 거죠.

영진공 함장

“나도야 간다”, 김수철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의 주제가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아니라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이다. 물론 송창식의 곡이 먼저 나왔고(아마도 75년, <바보들의 행진> OST에서였다고), 배창호 감독의 영화 제목은 거기에서 따왔을 수도, 혹은 다른 데에서 연유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건 마지막에 일행이 춘자의 고향에 도달해 무사히 어머니의 품에 안착할 뿐만 아니라 춘자가 말을 되찾기까지 하는, 매우 낙관적이고 희망이 넘쳐나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에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송창식의 노래가 아무래도 좀 우울한 구석이 있는데다 가사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간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도피’의 고래를 찾아나서는 듯한 느낌인 반면, 김수철의 노래에는 청춘다운 패기와 정말로 희망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힘이 살아있다.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젊은 나이를/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인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용철이 1925년에 발표한 시 ‘떠나가는 배’의 1연을 베이스로 한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 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김수철의 ‘젊은 그대’도 그렇지만, ‘나도야 간다’ 역시 굉장히 단순하고 힘찬 로큰롤 가락인지라 박용철의 원시의 비장하면서도 절망어린 표정 대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나는 희망의 힘이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이런 건강한 희망과 낙관이야말로 현실을 돌파하는 가장 큰 힘, 나아가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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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을 검색하다가 저 뮤직비디오를 찾았는데, 2002년에 제작된 거라고 하는 듯? 이미숙과 안성기가 찬조출연을 해주고 있는데, 이미숙의 추억 속 앨범에 등장하는 <고래사냥> 원래 영화 장면, 이라는 시작도 좋고(미숙언니 너무 예쁘심 ㅠ.ㅠ), 안성기가 <고래사냥>의 바로 그 거지왕초 캐릭터로 다시 등장하는 것도 너무 좋다. (안성기 최초의 뮤직비디오 출연이라고 한다.) 다만 현대의 아이들은 너무… 곱고 팬시하다는. 뭐 뮤직비디오니까 어쩔 수 없는 거려나. 남자애가 보고 있던 TV에 나오는 장면이 유곽에서 도망치는 장면과 기차 지붕 위로 올라타는 장면인데, 특히 저 기차 장면은 영화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잘 찍힌 명장면이다. 음악은… 기타 사운드가 좀더 일렉해지고, 전체 템포가 좀더 빨라진 듯한. 소박한 원래 버전이 더 좋지만 이 버전도 나쁘진 않다.


<고래사냥>이 저토록 희망차고 낙관적인 영화임에도 나는 영화를 보다가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신나는’ 2002년 뮤비 버전도, 처음에 볼 땐 혼자 막 눈물 찔끔대며 가슴이 아팠더랬다. 웃다가 울다가 가슴 부여잡다가, 그럼에도 너무나 밝은 저 김수철의 표정이 참 좋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아, 근데 다시 들어도 진짜 명곡이다. 25년 전 노래가 이토록 세련되고 여전히 힘있을 수가 있다니까. 김수철 만세!




봄이 오는 캠퍼스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편지를 쓰네
노랑나비 한 마리 꽃잎에 앉아
잡으려고 손 내미니 날아가 버렸네
떠난 사랑 꽃잎 위에 못다 쓴 사랑
종이 비행기 만들어 날려 버렸네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집으로 돌아갈 때 표를 사들고
지하철 벤치 위에 앉아 있었네
메마른 기침 소리 돌아보니까
꽃을 든 여인 하나 울고 있었네
마지막 지하 열차 떠난 자리에
그녀는 간데 없고 꽃 한 송이 뿐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사랑 찾아 나도야 간다


사랑아 나도야 간다


영진공 노바리

[꼬방동네 사람들], 가장 훌륭한 데뷔작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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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영화포스터답다…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던 배창호 감독이 데뷔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의 원작자인 이동철 씨가 쓴 또다른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판자촌 마을인 이 꼬방동네는 아침마다 하나뿐인 공동화장실에 길게 줄이 늘어서며 빨래터에서 팬티 한 장을 서로 내 거라고 아귀다툼을 하다 싸움이 나기도 하는 동네다. 이곳에서 검은 장갑을 낀 여인 명숙(김보연)은 매일 노름이나 하며 소일하는 한량 태섭(김희라)과 결혼해, 새아빠에게 반항하며 점점 삐뚤어져가는 아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던 명숙 앞에 그녀의 전남편이자 아이의 생부인 주석(안성기)이 나타난다. 택시기사로 변해있는 주석은 명숙과 서로 사랑해 결혼했지만 원래 직업은 소매치기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했던 명숙은 몇 번이고 그가 감옥에 갈 때마다 그를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에도 지치자 결국 꼬방동네에서 태섭과 재혼한 것이다.

아마도 이동철의 원작에서는 명숙과 태섭, 주석 간의 삼각관계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리라. 그러나 배창호 감독은 꼬방동네의 여러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들의 삼각관계를 영화의 중심으로 적극 끌고 나온다. 이는 아마도 시나리오 검열, 이후 완성된 영화의 검열이라는 이중검열제도가 존재하던 당시 검열의 칼날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여겨진다(실제로 배창호와 이동철이 각색한 시나리오는 사전 검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 지시를 받았고,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제목마저 사용 금지를 당했다.). 다행히 완성된 영화는 해외상영 불가를 조건으로 무수정 통과를 하게 되는데, <꼬방동네 사람들>이 결국 멜러영화라는 장르의 틀로 만들어진 것은 검열의 결과이긴 했으나, 배창호 감독의 영화세계를 규정짓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들 역시 대체로 진한 멜러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명숙에 대해 접지 못한 사랑 때문에 계속 명숙 모자 앞에 나타나는 주석. 그리고 어쩐지 낯이 익은 주석을 의심하면서도 사람좋은 한량의 태도로 주석을 대하며 슬슬 찔러보는 태섭. 그 사이에서 조마조마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명숙. 영화는 이렇게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줄거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연 빛나는 것은 배창호 감독이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방식, 그리고 이들의 이런 갈등이 펼쳐지는 배경이 되는 꼬방동네이다. 아내가 힘들여 번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는 태섭은 사람좋은 너털웃음과 능글거리는 태도로 애교를 떠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제아무리 명숙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마초적으로 군다 해도, 주석 앞에서 자신이 무서운 사람이라며 폼을 잡고 허풍을 친다 해도, 그가 그렇게 과장된 폼을 짓고 있는 동안 드러나는 건 혹여 사랑하는 명숙이 결국 자신을 떠날까 봐 안달하는 두려움이다. 김희라는 이 태섭 캐릭터를 그 ‘육덕진(!)’ 몸으로 매우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술값으로 아내가 힘들여 본 돈을 슬쩍해 팬티 속에 숨겨놓고, 잔치 때 그저 신나서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그러다 주석과 대작을 하며 그에게 허풍을 치면서도 그 사이로 이 건달 한량의 두려움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가 너무 훌륭해서, 어릴 적 TV에서 주로 후까시를 잔뜩 잡는 조직 보스 역으로 낯이 익은 이 분이 이토록 연기를 잘 하는 분이었구나, 새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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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녀의 삼각관계가 영화를 이끄는 축이 된다.


한편 주석 역시 참 기구한 인생인데, 소매치기인 걸 숨긴 채 명숙과 결혼했다가 감방에 가는 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돌아온 뒤 마음잡고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항구에서 일을 하지만 전과가 있는 탓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소매치기 재범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인생이 더욱 꼬이게 된다. 그때까지도 기다려줬던 명숙이건만, 굶고 있는 자식과 아내 때문에 눈이 뒤집힌 그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가 잡히는 장면은, 정말로 지갑을 훔쳐야겠다는 일념보다는 차라리 잡혀서 인생 끝내고 싶다는 도피적인 절망감이 가득하다. 명숙을 꼬시던 시절엔 자신만만하고 철없어 뵈던 젊은 청춘이었던 이가 꼬방동네에 나타나 명숙과 7년만에 재회를 하는 현재 시제에서는 어느 새 깊고 어두운 우울과 고독을 눈에 가득 담은 30대가 돼 있다. 배창호 감독은 안성기 특유의 도시적 우울과 고독을 가득 안은 ‘걷는 모습’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가 미로같은 꼬방동네의 골목을 헤매며 명숙의 주변을 서성이는 장면이 주는 안타까움은, 보통 사람 좋아보이는 호인 인상으로 여겨지는 안성기의 얼굴이 실제로 깊은 도시의 우울을 근사하게 체현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됐는데, 배창호 감독의 말을 듣자하면 이 당시에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 시네마스코프 촬영은 우연히 꼬방동네에 왔던 주석이 명숙을 발견하고 뒤쫓는 장면, 그리고 명숙을 뒤따라가는,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너비의 좁디좁은 골목길 장면, 그리고 마을잔치 장면 등에서 매우 적절히 효과를 드러낸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정말로 빛을 발하는 장면은 이런 몹씬보다도 의외로 안성기나 김보연 같은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이다. 배창호 감독은 종종 시네마스코프의 가로로 절찍한 화면을 반은 인물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나머지 반은 후경의 (초점이 아웃된) 움직이는 사람들/물체들로 채워넣곤 하고, 이런 미장센은 <꼬방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이후 <적도의 꽃> 같은 영화에서도 반복되는 화면이다. 이런 장면에서 인물의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힘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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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출연한 공옥진 씨의 이른바 ‘병신춤’에 환호하는 마을사람들.


판자촌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고 힘겹게 만드는 당시 사회상을 세 남녀의 멜러영화의 틀로 그려낸 것이 과연 이 영화의 단점일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모를 비밀을 안고 있는 태섭뿐 아니라 주석과 명숙의 캐릭터를 통해 화려한 도시의 한 구석, 산동네의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가난하기에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다. 뿐만 아니라 배창호 감독은 이들의 삶을 그저 절망과 우울로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회갑을 맞은 마을 어른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돈을 각출해 마을 잔치를 열고 함께 즐기는 이른바 마을잔치 장면 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따뜻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힘을 애정어린 눈길로 묘사해낸다. 늘씬하고 값비싼 명품을 몸에 두른 세련된 도시여인한테나 어울림직한 ‘삼각관계’를 판자촌의 검은 장갑 ‘명숙’을 주인공으로 펼치면서, 이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의 삶에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절망뿐 아니라 그럼에도 웃음과 사랑이, 춤이 있다는 것을, 그로인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2년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은 다소 “80년대 영화스럽다’ 싶은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한 시대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한 당시의 영화문법일 뿐만 아니라, 신인감독의 데뷔작으로서의 미숙한 부분이기도 할 터이다. 그럼에도 <꼬방동네 사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과 함께 가장 놀라운 데뷔작으로 꼽혀도 무방할 만큼 아름답고 능숙한 연출솜씨를 자랑하는, 소중한 작품이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