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 잘살게 피쳐링!!


아유 난 몰라요. 그냥 잘 먹고 잘살게만 해주세요.
자꾸 싸우고, 촛불 들고, 자기만 잘났다고 소리치는데 진짜 어려운 서민은 그런 거 안해요.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그럴 틈이 어딨어요.


미쳤냐? 가만히 냅두면 정치인들이 알아서 니 밥그릇 챙겨주게?
가만히 냅둬봐라.  관심 뚝 끊은 서울시 의회.  3천만원 주고 시의장직 사더라.  니 세금으로 저 짓거리 하고 있으니까 좋냐?

심지어는 십몇억 주고 국회의원직도 산다. 걔 재판 끝나면 한나라당 들어간댄다.

엊그제 이석연 법제처장이 어떤 강연에서 이런 소리 하더라.

“현행 헌법 규정 중에는 자유시장경제라는 헌법의 기본원리를 제약하는 규정이 많이 산재해 있다”
“개헌 과정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관여를 규정한 조항을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맞게 손질하는 게 필요하다.”

뭔 소리냐?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 조항을 손질하겠다는 소리다.
그럼 그건 또 뭔 소리냐?

경제민주화 조항이란 게 이렇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수 있다’


이 조항을 없애거나 고친다는 얘기다.  더 풀어 보자.  예전에 너 대통령 투표권 있었어, 없었어?  없었지?  체육관에 모여 몇 놈만 투표했잖아.  그 투표권을 일정한 나이의 전국민이 갖게 된 걸 뭐라 그래? 민주화라 그러지.


너 지금 돈 있어, 없어?  없잖아.  그래서 그 돈이 적절하게 재분배되도록 국가가 조정할 수 있다는 게 경제민주화야.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너 혼자 시장에 나가서 돈 번다고 생각해봐.  너 돈 없고 담보 없다고 은행에서 대출도 안해주잖아.  너 학벌 낮다고 취직도 안 시켜주잖아.  너 겨우겨우 돈 마련해서 구멍가게 차렸어.  근데 옆에 E-마트 오픈해.  그럼 너 망해, 안 망해?  그래서 이처럼 가진 자들 위주로 재편된 시장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게 경제민주화야.  시장에서 힘 센 놈한텐 나쁜 거고, 우리처럼 지지리도 순진하고 가난한 넘들한텐 좋은 거지.

너 세금 조작해서 몰래 삥땅 쳐봐.  세무서에 걸리믄 어떻게 돼?  아이구 어려운 살림에 이해합니다, 하고 세무서에서 봐줄 것 같애 안 봐줄 것 같애?  콩밥 먹을 거 같지?

근데 400억 삥땅친 사람은 콩밥 안 먹는다.  이건희.  걔는 왜 콩밥 안 먹어?  시장에서 힘이 세니깐 안 먹지.  이거 공평해 안 공평해?  안 공평하지?  이렇게 안 공평한데도 니가 관심 끊으니깐 경제민주화 조항 손댄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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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와 경제 성장의 상관관계>

니가 하는 코딱지만한 동네 삼겹살집.  거기 주된 손님이 누구야. 영식이 아빠, 춘섭이 엄마, 재팔이와 봉선이 커플 아냐.  영식이 아빠 뭐해?  중소기업 부장.  춘섭이 엄마는 뭐해? 동네 슈퍼 사장.  재팔이 봉선이는 뭐해? 컴퓨터 부품 공장 생산직.

근데 명박이가 고환율 유지했어.  그러니까 대기업이 수출이 잘돼.  그런데 영식이 아빠네 회사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야.  원자재는 외국에서 수입해 와.  하지만 환율이 오르니까 수입원자재 가격은 더 올랐어.  대기업이 납품단가는 안 올려줘.  당연히 중소기업 망할 판이야.  그러니까 영식이 아빠, 재팔이, 봉선이 다 지갑을 닫아.  너네 가게도 안 와.  너네 가게도 손님 없어.  너 장사 안돼. 이해되니?


이명박 정부가 환율 올려서 대기업 수출 잘되면 국가 경제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영식이 아빠, 재팔이, 봉선이, 그리고 니네 가게 피똥싸게 파리 날리고 있는 거야.  그럼 돈은 누가 벌었어?  이건희만 벌었지.  이건희 돈 버니깐 니네 가게도 잘돼, 안 돼?  안 되지.

게다가 엊그제는 또 환율을 내린다고 외환보유고를 꼬라박았어.  그랬더니 어떻게 돼? 주식시장이 무쟈게 불안하잖아.  당연하지.  그랬더니 주식투자하던 춘섭이 엄마 쫄딱 망해.  그래서 니네 가게 안 와.  너 장사 안돼.  파리 날려.  이해되니?

정부가 폐지한다는 출자총액제한제.  회사 자산의 25% 이상을 계열사에 투자할 수 없다는 조항.  너하고 아무 상관없을 거 같지?  근데 상관 있어.  들어봐.  옆집 문방구 사장 춘자가 돈 벌어서 새 장사를 시작할라고 해.  쫄면집, 라면집, 김밥집.  그래서 춘자는 백원을 투자해서 쫄면집을 개업했어.  그런데 그 쫄면집이 다시 그 백원을 고스란히 투자해서 라면집을 만들어.  또 라면집은 고스란히 그 백원을 투자해서 김밥집을 개업해.

본래대로라면 삼백원을 투자해야 될 일을 백원 투자해서 다 해버렸어.  하지만 장사가 안돼서 김밥집이 망했어.  김밥집에 자기 자본금 다 꼴아박아 투자했던 라면집도 같이 망해.  역시 마찬가지로 쫄면집도 연달아 망해.  삼백원으로 해야 할 일 백원으로 해놨더니, 백원만 손해보면 가게 3개가 동시에 망하는 거야.  그랬더니 이 가게에 돈 빌려준 동네 은행도 망해.  그랬더니 그 은행에 적금 붓던 너도 망해.  너 뿐만이 아니라 니네 동네 주민들 전부 망할 판이야.  그래서 어떡해?  어쩔 수 없이 공적 자금 들여서 나라가 은행 살려줘.  이 공적 자금이 뭐다? 바로 니 세금이다.

이처럼 정부가 하는 일이 너하고는 별 관계 없을 거 같지만, 모든 거 하나하나가 니 먹고사는 데 다 관계있는 일이야.

엊그제는 또 YTN에 낙하산 사장을 임명했어. 주주가 주주총회 참석하는 것까지 막으면서 날치기로.  그랬더니 어떻게 돼?  전씨 시절 땡전뉴스 기억나지?  KBS가 땡전땡전 하는 동안 전씨는 뭐하고 있었어?  비자금 수천억 만들었지?  그 비자금 수천억 누구 돈이었어?  니 돈이었지.  IMF 터지기 전에 조선일보가 뭐라고 했어?  IMF 따위는 없다고 했지?  그거 믿고 있던 니네 삼촌 어떻게 됐어?  쫄딱 망했지?  YTN이 또 그 짓거리 하면 너 손해 봐, 안 봐?  보겠지.  YTN 사장 낙하산 임명이 너하고 상관 있어, 없어? 있지.

상황이 이런 데도 넌 그저 앵무새처럼 ‘잘살게만 해주세요X100’를 허구헌날 피쳐링 하고 있으니.  넌 저기 여의도에 있는 쟤네들이 천사라고 생각해?  너무나도 맑고 착해서 알아서 너한테 신경쓰고, 너한테 잘해줄 거라고 생각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안 그러면 허구헌날 그 모냥 그 꼴이야.  니 코만 베가면 좋지.  가만있으면 간도 쓸개도 십이지장도 췌장도 다 빼갈 거야.


다시 강조하지만 니가 정치에 신경쓰지 않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지 않고, 투표하지 않고 혹은 아무렇게나 투표하고, 허구헌날 무의미한 ‘잘살게 피쳐링’만 해댄다면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결코.


영진공 철구

<스나크 사냥>, 이야기에 빠져들어 스나크가 나오건 말건 단숨에 읽게 되는 책


 

한 작가의 책을 계속 읽다보면 지겨워질 때가 있다. 예컨대 나랑 동갑에다 미모며 별 거 아닌 스토리로 책 한권을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멜리 노통은 열권 가까이 읽었더니 이젠 이름만 들어도 멀미가 난다. 한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떠들고 다녔던 베르베르와는 <뇌>를 끝으로 결별했다. 이와 반대로 읽을수록 저자에게 빠져들고, 다음 책을 빨리 내줬으면, 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가 바로 그런 작가다. 특히 <이유>라는 작품은 결정적으로 미미여사를 존경하게 만든 작품. 그 후부터 미미여사가 쓰면 난 산다,는 단순한 원칙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스나크 사냥>을 읽은 건 대략 한 달쯤 전이다. ‘스나크’가 뭔지도 모르면서 책을 산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내 원칙 때문인데, 알고보니 스나크는 루이스 캐롤이 창안한 괴물로, 그 괴물을 잡으면 잡은 사람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단다. 스나크가 언제쯤 나오려나 책장을 넘기다, 이야기에 빠져들어 스나크가 나오건말건 상관없다는 태도로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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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여사의 뛰어난 점은 스피디하게 사건을 전개함으로써 하려던 일을 작파하고 책을 읽게 만든다는 것도 있지만, 무릎을 치게 만들만큼 표현력이 출중하다는 것도 또다른 장점이다. 예컨대 남자가 여자를 이용할대로 이용하고 버렸을 때, 미미여사는 이런 표현을 썼다.

“오빠는 그녀를 완전히 버렸다. 대기권을 빠져나간 로켓이 필요 없어진 연료 탱크를 떼어 버리듯이.(49쪽)”
아류작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저 표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거다.
“오빠는 그녀를 버렸다. 2층에 올라간 헤밍웨이가 사다리를 치워버리듯이”
쓰고나니 괜찮은 아류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다른 구절을 보자.

“노리코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마치 커다란 케이크를 통째로 주고 자, 마음대로 잘라라,하는 말을 들은 다섯 살 어린애같은 심정이었다(207쪽).”
한 2-3분 머리를 굴렸지만 이건 아류작도 못만들겠다. 이런 표현을 하기 위해 미미여사는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했을까?

번역자 혹은 작가의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만 더 옮겨본다. 상황은 신랑과 신부가 막 결혼을 한 상태.
“신부는..오늘 밤은 푹 자고 싶다고 했다. 할 기분이 아니야. 상관없잖아.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또 있어서 반가웠지만, 그보다 ‘할’과 ‘하는’ 위에다 점을 찍어 강조를 한 게 웃겼다. 대체 점은 왜 찍어놓은 걸까? 읽다보니 다른 대목에도 강조를 해놓은 게 있었지만, ‘하는’에 찍어놓은 점은 읽는 내내 웃겼다. 내가 요즘 너무 밝히는 건 아닌지.

영진공 서민

쿵푸 팬더, 미국인들을 위한 무협???


언제나 강호는 소란하고
기존의 질서는 땅에 떨어지고
악당의 손에 놀아나는
풍전등화의 상황입니다

영웅은 늘 여러분의 옆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이거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
부랑아들에서만 나옵니다

다만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노력해 봐야
절대 소용없습니다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이 아시아로 눈을 돌렸던 적은
좀 오래됐지만 성공한 디즈니의 <뮬란>에서 시작 됩니다.

실사로 보면 70년대 이소룡 큰 형님의 반짝 무협천하 이후 지리멸렬 했던
헐리우드에서 2000년대 들어와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 차이없이 B급 동시상영관에서
전설을 꿈꾸었던 홍콩 무협의 키드들이 미국의 액션에 중국 무협을
가미하였고 무협영화의 집대성이라고 본인 혼자 믿고 있는 <매트릭스> 시리즈와
일본 사무라이 영화와 홍콩 쇼브라더스의 비내렸던 영화를 홀로 마스터 하신
쿠엔틴타란티노 형님의 <킬빌>과 그리고 앙리 형님의 <와호장룡>들이 히트 하면서
그리고 윤발이 연걸이 성룡 형님 그리고 오우삼 서극 감독님의 활동들이 배양으로 어우러저
무협의 신화는 헐리우드에서 한 장르로 자리잡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디즈니는 로봇의 고독과 사랑을 다룬 <WALL-E>로 승부를 보려 하고 있고 드림웍스는 홍콩 무협으로 승부를 보았습니다. 일단 디즈니의 로봇영화도 대박이 예상되지만 드림웍스는 이러한 시류를 잘 타고 일단 대박을 터트리고야 말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고 내용을 들으신 분도 많겠지만 90여분의 영화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 하고 전형적인 무협지의 양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강호는 늘 악당에게 휘말려 있고 이를 무찌르고 물리칠 영웅은 어려서 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한 엘리트 또는 고수들이 지키는게 아니라 돌연히 선택 받아 나타난 이름모를 용사에 의해서 지켜진다는 간단한 스토리 입니다.

이러한 스토리에 어린이들의 눈높이와 지겨운것을 못참고 코메디를 좋아하는 대부분 미국인들의 성향을 만족 시키기 위해 지지리 궁상이지만 귀여운 판다와 호랑이의 대결로 상징성을 몰고간 전략 역시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형적인 무협의 구성은 이름없고 핍박받은 계층의 사람중의 한명이 구조적으로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세상을 악당의 손에서 구원한다는 식으로 전개 되기에 사회가 어지러울 수록 시대가 힘들수록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경향이 강하게 있습니다. 또한 힘이면 모든지 정의라는 기본적으로 단순한 가치관 때문에 통치수단으로도 본의 아니게 이용되는 수가 있었지요.

아이러니 하게 우리나라에서 무협이 가장 인기 있었던 50년대 70년대, 80년대 시기를 보면 오비이락일 수도 있겠지만 위의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게 되지요.

영화는 재미 있게 보았습니다. 비판할 점도 별로 없었고 드디어 동양 문화가 헐리우드에서 꽃이 피는구나라는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무협의 근본적인 모순이자 기본전제, 즉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대다수는 열심히 살아봐야 결국 영웅은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서나 나온다는 것.  즐거운 볼거리를 한꺼풀 벗기고 이를 대입해보면, 우리 대다수는 그저 제 삼자에 불과한 박수 부대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팬더는 하층민임에도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단순히 선택 받은 자이기에 십 수 년 수련을 거듭한 5인의 용사나 악당 주인공도 결국은 단기 속성의 판다에게 상대도 안되는 들러리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논리는 누구 자식으로 어떤 나라에서 태어 났냐라는 단지 출발점의 차이로 갈 수록 큰 차이가 나는 우리들의 현실과 마찬 가지로 씁쓸해 지기 마련 이지요.

결국 영웅이 절대 될 수 없는 대다수 우리의 해결책은 그래도 더 망가지지 않게 하루 하루 열심히 살다가 소주 한잔 하는 일이 다가 아닐까요.

이상 팬더와 비슷한 몸무게지만 전혀 운동신경이 없어 태권도 노란띠인 클린트 였습니다.


영진공 클린트

“세계대전 Z”, 좀비업계의 아이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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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68년에 조지 로메로가 창조한 이후부터 공포영화의 주인공이었지만
최근에 새로이 조명받는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최근 본 진짜 무서운 영화 [REC](필름2.0에도 썼지만 저 이거 보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걷기도 힘들었음 -_-;;;), <28주 후>와 <28일 후>와 <저주받은 새벽>과 <황당한 새벽>과 매드슨의 원작을 새로 만든 <나는 전설이다>도 모두 좀비 이야기죠. 심지어 매드슨의 원작에 등장하는 놈들은 원래 뱀파이어 에 가까웠습니다만, 그게 새 영화에선 완전 좀비로 변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21세기는 좀비의 재발견의 시대인듯도 합니다.

여튼, 그 좀비 재발견 시리즈의 정점에 있다고 할만한 작품이 이 <세계대전 Z> 입니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책의 저자는 이 전에 이미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써서 지명도가 높아진 사람으로 이번에는 아예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좀비가 발생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과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 전지구적인, 소위 말하는 글로벌한 상상력을 펼쳐냅니다.

이건 단순히 좀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발병기제나 전염의 기제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과연 어떻게 전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병리학 SF 이기도 하죠.

중국에서 발생한 질병은 특유의 정보통제와 허술한 인적보안 시스템을 통해 제3세계 중심으로 확산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요한 외화벌이 수단 중의 하나인 장기이식을 통해 선진국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그 질병에 대한 각국의 대처는 또 다른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양상을 펼쳐내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각각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을 통해서 회고되는 옴니버스 형태라서 요즘 인터넷 세대가 읽기에도 편합니다.

남아공의 냉혹한 아파르트헤이트 전문가 폴 레데커 이야기,
영국의 성을 지켜낸 사람이 회상하는 “그녀” 이야기,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습관 덕에 이스라엘을 살려낸 정보분석관 이야기,
휠체어를 타고 좀비 자경단의 일원으로 활약한 사람 이야기
등은 뜻밖의 감동을 주기도 하고요.
특히 영국의 “그녀” 이야기는… 그 비실거리는 영국도 최소한 우리나라보다 백배 낫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죠. (정말로 그럴 것 같은)

이런 이야기가 요즘 각광을 받는 이유는 (이 책은 출판된 이후 몇개월간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브래드피트가 영화 판권을 샀다더군요.) 예전엔 듣도보도 못한 질병들이 등장하고 있는 요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좀비가 아닙니다.  좀비에 대한 대책은 거의 완벽하게 세워져 있으니까요 … (^_^)
하지만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어떤 질병(혹은 재난)이 우리를 위협할 가능성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질병 자체 뿐만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있는 우리 세상이고요.

여튼 이 책은 그 자체로 훌륭한 SF 소설이고, 좀비 업계의 아이팟이며
좀비를 통해서 지금 우리 세상이 얼마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배우게 해주는 재미있는 국제관계학 책이기도 합니다.


영진공 짱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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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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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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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