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나니 종자기업들이 부른 미래 참극(1),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 2009)


* 저자: 파올로 바치갈루피
* 역자: 이원경
* 펴냄: 다른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노라면 미래는 응당 암울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SF계의 우등상을 줄줄이 수상하며 영미권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렸던 [와인드업 걸]역시 현재의 골치덩어리들을 모아 가카의 얼굴짝 만큼이나 암울하게 변해버린 세계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여타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SF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소재가 눈에 띤다. 작가는 우선 개연성 있는 세계상을 묘사하기 위해 현재 문제가 되는 화석연료의 고갈, 자원전쟁, 지구온난화, 신종 전염병 등으로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린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야 다른 SF작품들에서도 흔히 차용하는 소재들이다. [와인드업 걸]은 여기에 세계 식량을 독점하고 있는 다국적 종자기업을 우리 미래를 똥칠할 요소의 하나로 추가하고 있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미래세계는 재앙의 종합선물세트로 인해 넝마가 되고 인류는 제한된 지역 안에서 안주하는 수축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 절대적으로 희소해진 화석연료로 인해 인류문명은 근대 이전의 기술사회로 되돌아가 다시 운동 에너지에 의존한다. 동물을 이용해 스프링을 감아 운동에너지를 저장해 새로운 동력원으로 사용하고 컴퓨터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그러기 위해선 칼로리가 필요하다. 즉 음식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수축시대를 지나 다시 팽창 시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속에서 이전 시대에 이미 세계 식량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다국적 종자기업들은 자사의 GMO종자에 전염병이 퍼져 세계를 위험에 빠트린 원인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칼로리가 중요해진 시대 분위기로 인해 계속해서 그 권력을 잃지 않고 다시 세계 위에 군림한다.

이야기는 이런 다국적 기업에 맞서 쇄국정책을 취하며 철저하게 자국의 종자를 지켜내려는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다국적 기업들은 산업 스파이를 사업가로 위장시켜 종자를 수집하고, 한편으론 태국 내 권력다툼을 배후조정하며 어떻게든 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태국정부와 종자기업 간의 암투, 태국 내 권력 다툼, 인종문제와 유전자 조작으로 발생한 이름모를 전염병들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과연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다국적 종자기업은 무슨 헛짓꺼리를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당당히 세계를 망치는 주인공으로 SF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일까?

[와인드업 걸]에서 칼로리 회사라고 일컫는 다국적 기업들은 유전자 조작 식물로 식량을 독점하며 거대 권력을 쥐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태국정부를 압박한다. 이는 지금 세계를 무대로 양아치 짓을 일삼고 있는 다국적 종자기업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세계를 망치는 주인공으로 이 작품에 낙점된 것은 너무나도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현재 몬산토를 위시한 이런 거대 다국적 종자기업들은 그들이 개발한 GMO종자를 앞세워 세계의 종자시장을 집어삼키고 있다. 대부분 미국기업인 이들 종자기업들이 빠르게 GMO종자를 개발해 세계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재 전세계 GMO종자의 87%를 몬산토에서 개발하였다.

애초부터 토착종이 부족했던 미국은 미래의 식량 확보를 위해 20세기 초부터 세계 각지의 종자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동아시아 지역에도 1929년에 식물학자를 파견하여 4500여종의 종자를 수집해 가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재 미국이 보유한 식물종자원은 65만종, 세계 1위의 식물종자원 보유국이 되었다. 이렇게 수집한 종자를 미국은 민간 종자회사의 연구에 지원하였고 풍부한 종자 샘플을 이용하여 미국의 종자회사들은 현재의 GMO종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식량확보를 위해
세계각지의 종자를 수집하도록 지시하였다
.









영진공 self_fish

미국이라는 동화는 이제 없다


아, 미국.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그 나라.
그 나라엔 초콜릿이 산처럼 쌓여있고, 코카콜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며, 석유가 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겐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있고 언제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팝송이 있고 마음 내키면 아무데서나 뽀뽀할 수 있다 했다. 오죽하면 포르노까지 세계 최고라 하지 않았던가.

그랬었다.
그렇게 그 나라는 낙원이었다.
그 나라에선 흑인, 백인, 아시아인, 중남미인, 러시아인 할 것 없이 다 어울려 잘 산다 했다. 차별 없이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Land of Opportunity라 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난 아사 직전의 어느 소녀는 미국에 와서 엄청난 돈과 명성을 얻었다. 러시아 벽촌에서 살던 어느 아이도 미국에 와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과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에서 온 어느 소년도 미국에서 큰 돈을 벌고 상상할 수 없이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단다.

그런데 그 동화는 이제 없다.
젖과 꿀이 끊이지 않고 흐를 것 같던 그 땅이 이젠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것이다.

그 곳에 사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한 끼 밥을 벌기 위해 고달피 땀을 빼야 하고 하루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다른 이들과 부대껴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부유한 이들도,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도 자기들끼리 고고하고 우아하게 살아지질 않는다.

글쎄, 저 위 아주 까마득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수들의 삶은 어떨지 몰라도.

그런데 도대체 왜 언제부터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던 미국이 이렇게 돼 버렸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거기도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다만 화려한 앞 모습 뒤에 애초부터 함께 있던 어두운 부분이 가리워지기도 하고 또 보는 이들이 애써 보려 하지도 않았기에 그 곳이 마치 낙원처럼 또 동화의 나라처럼 보였던 것뿐이다.

그 나라와 그리고 거기에서 유복하게 사는 이들이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 내어 그걸 가지고 부와 행복을 누렸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것을, 혹은 스스로 제공케 하고 혹은 뺏어오고 혹은 더 많이 가지고 하여 그렇게 멋져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멋져 보이는 꺼풀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니 거기도 별 다를 것 없이 사람끼리 부대끼고 부딪치고 그러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냥 그런 세상이다.

오랫동안 가리워져 보이지 않던 꺼풀 속의 그 모습이 이제 더 이상 숨겨지지 못하고 있는 대로 내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동화 속의 나라는 저 멀리 별 나라에 원래부터 있었다고 애써 믿고 살던 그들이 더는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동화 속의 나라는 저 혼자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걸 떠받치는 다른 쪽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동화 속의 나라에서는 각 개인의 범위를 침범치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내가 잘 나서 나를 챙기면 되고 다른 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챙기면 된다고, 그러다 보면 모든 게 다 잘 되는 거라 하였다.

그런데 결국 내가 잘 나서 더 많이 챙기고 더 행복한 이면에는 잘 나지 못해서 덜 가져가고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남 보다 더 많은 걸 가져가려면 다른 이들과 부대껴야 하고 부딪혀야 한다. 우아하고 품위있는 선자(善者)에게 남이 스스로 부(富)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악스럽거나 교활하게 부나 명성을 추구하는 이에게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면 스스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려면 저 멀리 구름 위에 있으면 안 되고 원하는 게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하기에 그걸 더 가지려면 서로 부딪혀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적당히 나누기도 해야 한다.

다 가질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가지려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에게 뭔가 주어야 한다.
한 동네에서 왕자인 사람이 다른 동네에서는 조직폭력배 수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다.
그게 자본주의 미국이 사는 모습이다.

이제 미국에 더 이상 동화 속 해피엔딩은 없다. 자신들에게 없는 해피엔딩을 남과 함께 나눌 여유나 의도는 더더구나 없다. 있다고 해도 그건 해피엔딩이라기 보단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 사건들일 뿐이다.

영화 “21그램”에서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분)는 이런 말을 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Life goes on).”

달갑지않은 현실을 꼼짝 없이 받아들이며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저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아간다.

영진공 이규훈

쿵푸 팬더, 미국인들을 위한 무협???


언제나 강호는 소란하고
기존의 질서는 땅에 떨어지고
악당의 손에 놀아나는
풍전등화의 상황입니다

영웅은 늘 여러분의 옆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이거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
부랑아들에서만 나옵니다

다만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노력해 봐야
절대 소용없습니다





헐리우드의 애니메이션이 아시아로 눈을 돌렸던 적은
좀 오래됐지만 성공한 디즈니의 <뮬란>에서 시작 됩니다.

실사로 보면 70년대 이소룡 큰 형님의 반짝 무협천하 이후 지리멸렬 했던
헐리우드에서 2000년대 들어와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 차이없이 B급 동시상영관에서
전설을 꿈꾸었던 홍콩 무협의 키드들이 미국의 액션에 중국 무협을
가미하였고 무협영화의 집대성이라고 본인 혼자 믿고 있는 <매트릭스> 시리즈와
일본 사무라이 영화와 홍콩 쇼브라더스의 비내렸던 영화를 홀로 마스터 하신
쿠엔틴타란티노 형님의 <킬빌>과 그리고 앙리 형님의 <와호장룡>들이 히트 하면서
그리고 윤발이 연걸이 성룡 형님 그리고 오우삼 서극 감독님의 활동들이 배양으로 어우러저
무협의 신화는 헐리우드에서 한 장르로 자리잡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디즈니는 로봇의 고독과 사랑을 다룬 <WALL-E>로 승부를 보려 하고 있고 드림웍스는 홍콩 무협으로 승부를 보았습니다. 일단 디즈니의 로봇영화도 대박이 예상되지만 드림웍스는 이러한 시류를 잘 타고 일단 대박을 터트리고야 말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고 내용을 들으신 분도 많겠지만 90여분의 영화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 하고 전형적인 무협지의 양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강호는 늘 악당에게 휘말려 있고 이를 무찌르고 물리칠 영웅은 어려서 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한 엘리트 또는 고수들이 지키는게 아니라 돌연히 선택 받아 나타난 이름모를 용사에 의해서 지켜진다는 간단한 스토리 입니다.

이러한 스토리에 어린이들의 눈높이와 지겨운것을 못참고 코메디를 좋아하는 대부분 미국인들의 성향을 만족 시키기 위해 지지리 궁상이지만 귀여운 판다와 호랑이의 대결로 상징성을 몰고간 전략 역시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형적인 무협의 구성은 이름없고 핍박받은 계층의 사람중의 한명이 구조적으로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세상을 악당의 손에서 구원한다는 식으로 전개 되기에 사회가 어지러울 수록 시대가 힘들수록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경향이 강하게 있습니다. 또한 힘이면 모든지 정의라는 기본적으로 단순한 가치관 때문에 통치수단으로도 본의 아니게 이용되는 수가 있었지요.

아이러니 하게 우리나라에서 무협이 가장 인기 있었던 50년대 70년대, 80년대 시기를 보면 오비이락일 수도 있겠지만 위의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게 되지요.

영화는 재미 있게 보았습니다. 비판할 점도 별로 없었고 드디어 동양 문화가 헐리우드에서 꽃이 피는구나라는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무협의 근본적인 모순이자 기본전제, 즉 최선을 다하고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대다수는 열심히 살아봐야 결국 영웅은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서나 나온다는 것.  즐거운 볼거리를 한꺼풀 벗기고 이를 대입해보면, 우리 대다수는 그저 제 삼자에 불과한 박수 부대일 뿐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팬더는 하층민임에도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단순히 선택 받은 자이기에 십 수 년 수련을 거듭한 5인의 용사나 악당 주인공도 결국은 단기 속성의 판다에게 상대도 안되는 들러리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논리는 누구 자식으로 어떤 나라에서 태어 났냐라는 단지 출발점의 차이로 갈 수록 큰 차이가 나는 우리들의 현실과 마찬 가지로 씁쓸해 지기 마련 이지요.

결국 영웅이 절대 될 수 없는 대다수 우리의 해결책은 그래도 더 망가지지 않게 하루 하루 열심히 살다가 소주 한잔 하는 일이 다가 아닐까요.

이상 팬더와 비슷한 몸무게지만 전혀 운동신경이 없어 태권도 노란띠인 클린트 였습니다.


영진공 클린트

美농무성의 광우병 관련 미친 짓 [LA 타임즈 사설 전문]

<편집자 註: 아래 사설은 미국 LA Times 2008년 6월 19일자 사설 전문과 번역본입니다.  이번 미국 쇠고기 수입 파동 및 추가협상 논란과 관련하여 참고할 사항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올리는 것입니다.  이 사설은 일본과 한국(원문에서는 남한)의 고객들이 더 철저한 검사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정부가 미국의 기준과 자체 검사를 “신뢰”한다고 합의하고 추가협의한 상황입니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나 오류에 대해서 지적이 있으면 검토하여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미농무성의 광우병 관련 미친 짓

민간기업의 자체질병검사를 거부한 건 소비자 안전망을 거부한 것과 동일

2008년 6월 19일

광우병을 검사하는 테스트가 쓸모없을 때는 언제일까?  미국 농무성에 따르면, 민간기업이 그 테스트를 할 때라고 한다.

적어도 이는 미농무성이 개별 육류생산자가 자체 소도축물에 대한 검사를 행하는 걸 막고있는 근거이다.  연방기관은 현재 고위험도 축우에 대해서 속성 심사에만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크릭스톤 팜즈라는 육류생산자가 하려는 전수검사를 “무용지물”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 특히 일본과 남한같은 외국 소비자들이 미농무성의 랜덤 검사 프로그램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걸 잘 아는 캔사스의 식육회사는 자신들이 보유한 최고 수준의 검사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미농무성과 4 년째 투쟁 중에 있다.  현재 미농무성은 100% 정확성이 담보되기 어려운 속성검사를 채용하고 있기에, 크릭스톤은 여전히 자체 도축물에 대해 광우병(기술용어로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보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 업체의 고객들은 별도의 추가 검사가 가치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미농무성은 민간의 검사는 불필요하며 그들의 자체 프로그램, 즉 1% 미만의 소에 대해 행해지는 검사가 대중들을 광우병으로부터 적절히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현재까지 미국 쇠고기가 인간변종질병의 원인이 되었다고 알려진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선도적인 기업이 동물이나 인간의 건강에 害가 되지 않는 검사를 시행하여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왜 못하게 하는가?  미농무성은 크릭스톤의 방식에 반대하는 [미국]소고기 산업의 입장을 더 중시하는 듯 하다.  이러한 검사가 시행되면 다른 기업들도 동일한 검사를 하라고 소비자들의 압력이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크릭스톤은 첫 소송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미농무성은 항소를 하였고, 판결이 곧 나올 예정이다.  그러는 와중에 미합중국은 크릭스톤 같은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는 걸 거들지 않고, 대신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쇠고기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거나 강압하여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최근에 남한의 대통령 이명박과 맺은 거래는 엄청난 거리 항의로 이어졌다.  우리[미국]의 삥뜯기식 쇠고기 외교가 고객 대신 적개심만 벌어들이고 있는 사이에 호주는 시장 점유율을 증가시키고 있는 중이다.

미농무성은 최근 몇 년간 육류기업들이 농무성 안전기준을 충족토록 하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일부터 제대로 마무리 해야 할 것이며 개별 생산자가 고객들이 원하는, 농무성 기준보다 더 상향되고 우수한 안전 기준을 제공하려 하는 걸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http://www.latimes.com/news/opinion/la-ed-madcow19-2008jun19,0,3257268.story ]



USDA mad cow madness


The agency’s refusal to let firms test for the disease denies consumers a safety net.

June 19, 2008

When is a worthwhile test for mad cow disease not worthwhile? According to the U.S. Department of Agriculture, it’s when a private company uses the test.

At least, that’s part of the argument the USDA has been using to keep a beef producer from screening the carcasses of all its cattle, saying that although the federal agency relies on the rapid-screen test for high-risk cattle, the test would be “worthless” in the hands of Creekstone Farms.

Knowing that customers, especially foreign ones such as Japan and South Korea, remain wary of the USDA’s spotty screening program, the Kansas meat company has been fighting the agency for four years for the right to use the state-of-the-art testing lab it built. The rapid-screen test is not completely accurate, but it has been useful enough for the USDA to employ. Creekstone still would not be able to legitimately label its products as free of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the technical term for mad cow disease, but its customers should have the choice of deciding whether the extra screening is worth paying for.

The USDA contends that private testing is unnecessary and that its own program, which tests fewer than 1% of cattle, adequately protects the public from mad cow. This might well be true. There is no known instance of U.S. beef causing a case of the human variant of the disease. But as long as the test presents no threat to animal or human health, why shouldn’t an innovative company give customers what they want? The USDA’s motivation probably has more to do with the beef industry’s opposition to Creekstone: Testing might put consumer pressure on other companies to do the same.

Creekstone won its first battle in court, but the USDA appealed; a ruling is expected soon. Meanwhile, instead of letting farms like Creekstone grow their businesses, the United States has been trying to persuade or strong-arm foreign countries into accepting U.S. beef standards, with limited success. Its recent deal with South Korean President Lee Myung-bak led to massive street protests. And while our bullying beef diplomacy reaps enmity instead of customers, Australia is increasing its market share.

The USDA has had enough problems in recent years making sure that companies meet its safety requirements. It ought to get that job done, and not interfere with producers that are going above and beyond to provide the safety standards some consumers want.


영진공 이규훈

“Borat … 보랏!” <영진공 68호>

구국의 소리
2007년 2월 3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랏… 간만에 정말 징한 영화 였습니다.

사챠 바론 코헨, 이 사람 평소 사진은 멀쩡하더만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것.
뻔뻔함이라고 해야 할까, 용감함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광기라고 해야 할지도…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보랏이 미친 짓을 해댑니다.
미친 짓의 압권은 게이레슬링 쇼 입니다.
아즈맛의 그 푸짐한… 은 정말 대단합니다.
둘은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을 호텔 로비에서까지 해댑니다.
이 영화에 관련된 소송이 줄을 이을만 합니다.
(호텔에서는 체포될 뻔 한적도 몇번 있었다죠.)

그러다가 파멜라의 본색을 알고 나서 가방을 패대기친(그때 나는 꼬꼬댁 소리는 압권…-_-)
다음부터 보랏은 오히려 정상적이 되고 미국이 미친 짓을 해댑니다.

뭐 보랏이나 오순절날 거기 모인 사람들이나 비슷비슷해보이죠.
게다가 대법원장이라는 아저씨 나와서 하시는 말씀이 압권이고…

예로부터 광대들은 바보 광인 역을 하면서 세상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까발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광대는 불가촉천민에 가까웠기 때문에 지배계급도 웬만해서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걔네들하고 상대하면 자기들 체면이 깎이는 셈이었으니..
게다가 그건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책이고 체제 유지의 보완책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소할 수 없다면 축적된 스트레스는 결국 체제를 위협하게 되죠.
민중이 광대의 광대짓을 보며 스트레스도 풀고, 사회의 모순을 맘껏 비웃는게
불만을 축적해뒀다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나았던 셈입니다.
그러니 지배계급은 이런 광대들을 대부분 묵인해줍니다.
심지어 왕실에도 광대가 한둘씩 있기도 했었고요.

<왕의 남자>에서 사당패가 한 것도 그런 일이었고,
패로디 라는 말도 그런 광대짓에서 연유한 것이고,
인형극, 광대놀이 대부분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보랏을 보며 이런 광대 본연의 역할을 떠올린건,
이 영화가 바로 그 광대짓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이겠죠.

하나 더, 우리나라에서 이런 짓이 통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진은 로데오 경기장에서 미국국가에 맞춰 (가짜)카자흐스탄 국가 부르는 장면인데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짓을 했다면?

많은 이들이 보랏(혹은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에 감정이입하던데
저는 사실 그 불쌍한 미국사람들에 감정이입이 되더라구요.
광대 앞에서 나름 매너 지켜가며 상대해주려 노력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대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영화속 미국인들의 태도를 위선이라고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그런 위선이라도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만든 영화를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어도 흥행 1위를 할 수 있었을까요?
관객들은 즐거워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개봉 자체가 가능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때 그 사람>도 삭제 개봉되고, 의사 다루면 의사들이 들고일어나고
변호사 다루면 변호사들이 들고 일어나는 이 나라에서 말이죠.

그래도 누군가 미친 척 하고 정치인, 관료, 의사, 변호사, 교수들 한테 가서
이런 거 하나 찍어오면 참 재미있을거란 생각도 드는 군요.

이거 결국 몰래카메라와 같은 컨셉입니다.
단지 본색이 까발려지는 대상이 연예인이 아니라 점잖으신 분들이라는 게 차이.

이경규 아저씨는 고만고만한 연예인들 몰카나 찍지 말고
한번 이런 거 찍어보는 거 어떠실지.

물론 방송생명 끝장날 각오도 해야겠지만…

새해들어서도 계속 구국의 소리로 마실 나오는
국립과학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