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는 동화는 이제 없다


아, 미국.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그 나라.
그 나라엔 초콜릿이 산처럼 쌓여있고, 코카콜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며, 석유가 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겐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있고 언제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팝송이 있고 마음 내키면 아무데서나 뽀뽀할 수 있다 했다. 오죽하면 포르노까지 세계 최고라 하지 않았던가.

그랬었다.
그렇게 그 나라는 낙원이었다.
그 나라에선 흑인, 백인, 아시아인, 중남미인, 러시아인 할 것 없이 다 어울려 잘 산다 했다. 차별 없이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Land of Opportunity라 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난 아사 직전의 어느 소녀는 미국에 와서 엄청난 돈과 명성을 얻었다. 러시아 벽촌에서 살던 어느 아이도 미국에 와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과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에서 온 어느 소년도 미국에서 큰 돈을 벌고 상상할 수 없이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단다.

그런데 그 동화는 이제 없다.
젖과 꿀이 끊이지 않고 흐를 것 같던 그 땅이 이젠 더 이상 낙원이 아닌 것이다.

그 곳에 사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한 끼 밥을 벌기 위해 고달피 땀을 빼야 하고 하루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다른 이들과 부대껴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부유한 이들도,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도 자기들끼리 고고하고 우아하게 살아지질 않는다.

글쎄, 저 위 아주 까마득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소수들의 삶은 어떨지 몰라도.

그런데 도대체 왜 언제부터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던 미국이 이렇게 돼 버렸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거기도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다만 화려한 앞 모습 뒤에 애초부터 함께 있던 어두운 부분이 가리워지기도 하고 또 보는 이들이 애써 보려 하지도 않았기에 그 곳이 마치 낙원처럼 또 동화의 나라처럼 보였던 것뿐이다.

그 나라와 그리고 거기에서 유복하게 사는 이들이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 내어 그걸 가지고 부와 행복을 누렸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것을, 혹은 스스로 제공케 하고 혹은 뺏어오고 혹은 더 많이 가지고 하여 그렇게 멋져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멋져 보이는 꺼풀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니 거기도 별 다를 것 없이 사람끼리 부대끼고 부딪치고 그러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냥 그런 세상이다.

오랫동안 가리워져 보이지 않던 꺼풀 속의 그 모습이 이제 더 이상 숨겨지지 못하고 있는 대로 내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동화 속의 나라는 저 멀리 별 나라에 원래부터 있었다고 애써 믿고 살던 그들이 더는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동화 속의 나라는 저 혼자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걸 떠받치는 다른 쪽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동화 속의 나라에서는 각 개인의 범위를 침범치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내가 잘 나서 나를 챙기면 되고 다른 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챙기면 된다고, 그러다 보면 모든 게 다 잘 되는 거라 하였다.

그런데 결국 내가 잘 나서 더 많이 챙기고 더 행복한 이면에는 잘 나지 못해서 덜 가져가고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남 보다 더 많은 걸 가져가려면 다른 이들과 부대껴야 하고 부딪혀야 한다. 우아하고 품위있는 선자(善者)에게 남이 스스로 부(富)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악스럽거나 교활하게 부나 명성을 추구하는 이에게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면 스스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려면 저 멀리 구름 위에 있으면 안 되고 원하는 게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남들도 원하기에 그걸 더 가지려면 서로 부딪혀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적당히 나누기도 해야 한다.

다 가질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가지려면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에게 뭔가 주어야 한다.
한 동네에서 왕자인 사람이 다른 동네에서는 조직폭력배 수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자본주의다.
그게 자본주의 미국이 사는 모습이다.

이제 미국에 더 이상 동화 속 해피엔딩은 없다. 자신들에게 없는 해피엔딩을 남과 함께 나눌 여유나 의도는 더더구나 없다. 있다고 해도 그건 해피엔딩이라기 보단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 사건들일 뿐이다.

영화 “21그램”에서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분)는 이런 말을 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Life goes on).”

달갑지않은 현실을 꼼짝 없이 받아들이며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저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아간다.

영진공 이규훈

“환상의 그대”, 홍상수 영화와 닮은 우디 앨런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환상의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껏 오랫동안 두 감독의 영화를 봐왔지만 이번처럼 비슷하게 느껴졌던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심 놀랍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두 감독의 영화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를 않았던 것인지를 판가름해보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처음부터 닮아있었다고 보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결론이다. 특히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이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며 – 단순히 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 그런 와중에 이번 <환상의 그대>를 통해서 우연찮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무척 닮아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환상의 그대>가 유난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유는 등장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분 좋은 결말을 – 영화가 끝난 이후의 더 나은 미래를 – 맞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토록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을 취했었던가 싶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항상 암담한 결말만을 그렸던 것도 아닐진데, 이를 통해 두 감독의 영화가 접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 무척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환상의 그대>는 전지적 나레이션을 활용해서 – 홍상수 감독 역시 종종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 씨퀀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편인데, 그 중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경구,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이 자기 삶의 현주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그런 허영과 욕망의 추구가 하나 같이 낭패를 불러오고 만다는 점에서 – <환상의 그대>는 기존의 우디 앨런 영화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는 인물은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을 전부 열 받게 만들어버리던 헬레나(젬마 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혼자서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토록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서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에서 그나마 답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의존했던 바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원제목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우리가 삶에 대해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란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로이(조쉬 브롤린)의 대사였지만, 이 말의 의미가 영화 초반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냉소적인 경구와 맞물리면서 결국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인 기조를 이루게 된다. 노년의 알피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창녀(루시 펀치)와 재혼까지 하지만 물질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알피의 허영은 결국 좌초를 하게 된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의 남편인 작가 로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흠모하던 “환상의 그대” 디아(프리다 핀토)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은 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게 되면서 그 역시 인생의 바닥으로 완전히 침몰을 하고 만다. 큐레이터인 샐리 역시 갤러리의 사장 그렉(안토리오 반데라스)과의 연애에 헛물을 켠 데다가 어머니 헬레나가 예언을 핑계로 창업 자금 제공을 거부하자 몹시 분노를 하게 된다.



<환상의 그대>는 분명 우디 앨런의 최고작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솜씨 좋고 지칠 줄도 모르는 시네아스트의 현재를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태 풍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자신의 삶에도 그와 같이 허탈하고도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실제로 닥치지나 않을까 싶어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정에 휩쌓이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거장의 행보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영진공 신어지








 

“인터내셔널 (2009)”, 악의 무리에 홀연히 맞서는 초췌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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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인터내셔널”은 몹시도 현실적이고자 노력하는 영화입니다.
당 영화의 정확한 내용은 본(Bourne) 시리즈틱하게도 거대한 지배세력에 홀로 맞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만, 주인공인 실린저(클라이브 오웬)는 혼자 모든 것을 해내는 능력자도 아니며, 특수요원들 너댓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코마상태로 직행시키는 살벌한 싸움꾼도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꼬질꼬질해진 머리에 너절한 옷, 면도도 하지 않은 행색으로 화면을 누빕니다.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대면하고 처음 건네는 말이 “You look awful.”(너 꼬라지가 엉망이다)라니 주인공 가오는 처음부터 포기하고 들어가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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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씻어라 이 화상아 …


다행히 남주인공이 ‘2,3일 면도 안한 수염에 최적화된 얼굴’을 가지고 있는 클라이브 오웬이기에, 당 영화는 구질구질한 비주얼로 빠지지는 않습니다. (사실 나오미 왓츠님의 화사한 금발머리 덕도… 크죠. 으흥)

하지만 잠도 못자고, 개인생활은 완전 포기.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온갖 개고생을 하는 주인공을 보고 있노라면 처절함이 자연스레 묻어나오게 됩니다. 예, 주인공 정말 처절하게 싸웁니다.   주인공이 왜 이렇게, 우아하게 총 빵빵 쏴서 악당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노숙자적 행태를 유지하며 힘겨운 진흙탕 개싸움을 하고 있느냐. 바로 당 영화의 악당은 흔한 히어로무비의 악당하고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유의하세요 ^^ *

당 영화의 악당은 은행입니다. 거대자본이죠. 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 무기나 전쟁자금이 필요한 곳에 공급하고 빚을 떠넘겨 준다
– 그 과정에서 발생한 채무를 물어서
– 남들이 피흘리며 싸우던 나라의 이권을 낼름 꼴깍 넙죽 먹는다

뭐 이런 과정입니다. 거대한 사채업이라고 할까요.

이들의 무기는 총칼이 아닌 자본인만큼,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손길을 뻗치고 있으며 정말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총칼이 없는곳은 많지만 돈이 없는곳은 없는 까닭이지요.

뭣 보다 이들은 “합법적 기업”이라는 강력한 가면으로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지요. 이들과 싸우려면 스티븐 시갈 횽아처럼 손발을 꺾고 머리에 총알을 박는 식으로 싸울 수 없습니다. 넥타이를 맨 변호사 군단과 이빨싸움부터 해야 하죠. 잡아서 뒤지게 패 주면 참 좋겠는데 그러려면 먼저 증거를 잡아야 하고, 은행측에 매수당한 사람들의 갖은 태클로부터 호나우두스럽게 빠져 나와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국제법 공부도 해야 하고, 당국의 협조도 구해야 하고 … 시갈 횽아였다면 “ㅆㅂ 나 안해!!”라면서 감독의 목을 꺾어 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악당들과 싸우려니 우리의 주인공들, 몸뚱이가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인 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나오미 왓츠와 클라이브 오웬은 리용, 베를린, 뉴욕, 이스탄불 등등을 정신없이 쫒아다닙니다. 저 같은 사람은 평생 가도 못 모을 항공 마일리지를 일주일이면 족히 꽉 채워버릴 지경이더군요.

주인공의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영화는 매우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며, 숨 돌릴 틈이 없고, 쓸데없이 잔가지를 치지도 않습니다. 미남 미녀 주인공간에 로맨스도 당근 없고, 필요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죠. 넣고 싶어도 못 넣었을 겁니다. 하나의 목표를 놓고 심플하게 달려가는 당 영화의 드라마가 흐트러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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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바 나 안해 …




자, 그렇다면 이렇게 복날에 뭐빠지게 뛰는 개 모냥으로 뛰댕기는 주인공들이 원하는 대로, 거대 자본에게 죄를 묻고 쇠고랑을 채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과연? 정말?

될리가 없죠 … 처음부터 이 싸움은 승부가 정해진 셈입니다. 주인공들은 “합법”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죠. 인터폴 수사관과 지방검사보인 이들은 절대 법과 국경을 초월한 거대 기업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은행 관계자들이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죠. 맘에 안 드는 놈이 정보를 빼돌리는 것 같으면 킬러를 고용해서 죽여 버리면 되고, 수사망이 좁혀오면 당국 관계자들을 매수해서 수사관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아 버리면 됩니다. 킬러가 잡힐 것 같다? 다른 킬러를 고용해서 또 죽여 버리면 됩니다. 이들의 무기는 다름 아닌 “돈”이기에, 그만큼 철저하고 비인간적이며 새어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빈틈도 없죠.

영화 또한 그러한 점을 지적합니다. 상대방은 똥창에서 노는데 시냇가에 앉아서 잡을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주인공은 스스로 똥창으로 뛰어들어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기로 결정을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자신도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는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당 영화의 후반은 복수를 위해 모든것을 버린 남자가, 거대조직과 맞서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감행하는 액숑영화로 탄생할것만 같은 느낌이 마구마구 피어오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당 영화의 가장 큰 액션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총격신이며, 이는 주인공이 총을 들게 하는 계기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당 영화는 어떤 이유에선지 화끈한 액션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극히 현실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던 영화가 액션 블록버스터로 끝맺음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이유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관객 입장에선 뭔가 섭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건 선악이 분명한 액션 영화인데, 권선징악의 흔해터진 결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화끈한 끝맺음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당 영화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가 마치 잔뜩 분위기를 달궈 놓고 몇 번의 펌프질로 장렬하게 뻗어 주시는 17세 남성의 첫경험처럼 끝나 버립니다. 물론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엔딩화면으로 어느 정도 메꾸어 집니다만, 관객들이 원하는 카타르시스를 전해줄 클라이맥스는 매우 부족한 느낌이죠.


그 전에 드라마가 매우 헐렁하여 긴박감과 스릴을 고조시키지 못했다면 당 결말 또한 그닥 허무하지 않겠으나 결말에 가기 전까지 매우 착실하게 드라마를 쌓아가며 달려왔기에 더욱 의자에서 일어나기가 힘들게 만듭니다.


클라이브 오웬이 핸드건을 연사하며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장면을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관람을 자제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당 영화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는 스릴넘치는 드라마에 가깝지 좋은 액션영화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에, 따라서, 기호에 따라서 선택을 하셔야 할 듯 합니다.  당 영화는 클라이브 오웬이 등장하는 007 시리즈도 아니고, 본 시리즈도 절대 아닙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예고편은 종종 영화의 장르를 모호하게 만들어 우리를 속이지요.






영진공 거의없다



덧글> 클라이브 오웬은 배가 좀 나왔습니다. 주름은 멋지지만 톡 튀어나온 배는 좀 관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 … 머리 긴 여성들, 나오미 왓츠가 목도리 감는 법을 잘 보세요. 밑줄 쫙쫙 치면서… 목도리도 섹시할 수 있군요.
















스테이 (Stay, 2005)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영화”



이완 맥그리거의 이전 출연작인 <아일랜드>나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 <오로라 공주>가 비평적으로는 별로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영화라고 할 지라도 일단 대다수의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는 영화들이었다고 한다면, <스테이>와 같은 영화는 꽤 준수한 스타 캐스팅과 기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으면서도 관객들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테이>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거나 내러티브의 구성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정리도 제대로 안해주고 끝을 맺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혼란, 즉 주인공이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의 진상이란 것이 최종 결말에서 마침내 밝혀졌을 때 ‘고작 그런 거였나’라는 반응 밖에 얻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하자면 <스테이>는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이야기의 출발점 자체가 다수 관객들의 동감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은 설정의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일부 관객들은 미스테리의 결론이 다소 허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를 쉽게 폄하하지는 않는다. <스테이>는 이야기의 최종 결말에 앞서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 보여지는 밀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 거의 모든 컷과 씨퀀스에서 돋보이는 탁월한 비주얼, 그리고 이 영화가 끌어들이고 있는 다양한 이종 장르들과 메타포의 풍성한 배합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포만감을 선사해주는 영화다. 앞으로 이완 맥그리거에게는 <아이 오브 비홀더>, 나오미 왓츠에게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21그램>과 함께 자주 언급될만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름 아닌 젊은 캐나다 출신 배우 라이언 고슬링의 영화로 모든 내용이 다시 정리되고 기억될 작품이기도 하다. 실망스럽기만 한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간절하고도 슬픈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고자 했던 영화 <스테이>의 진짜 표정이 라이언 고슬링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