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 (Stay, 2005)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영화”



이완 맥그리거의 이전 출연작인 <아일랜드>나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 <오로라 공주>가 비평적으로는 별로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영화라고 할 지라도 일단 대다수의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는 영화들이었다고 한다면, <스테이>와 같은 영화는 꽤 준수한 스타 캐스팅과 기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으면서도 관객들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테이>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거나 내러티브의 구성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정리도 제대로 안해주고 끝을 맺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혼란, 즉 주인공이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의 진상이란 것이 최종 결말에서 마침내 밝혀졌을 때 ‘고작 그런 거였나’라는 반응 밖에 얻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하자면 <스테이>는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이야기의 출발점 자체가 다수 관객들의 동감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은 설정의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일부 관객들은 미스테리의 결론이 다소 허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를 쉽게 폄하하지는 않는다. <스테이>는 이야기의 최종 결말에 앞서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 보여지는 밀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 거의 모든 컷과 씨퀀스에서 돋보이는 탁월한 비주얼, 그리고 이 영화가 끌어들이고 있는 다양한 이종 장르들과 메타포의 풍성한 배합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포만감을 선사해주는 영화다. 앞으로 이완 맥그리거에게는 <아이 오브 비홀더>, 나오미 왓츠에게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21그램>과 함께 자주 언급될만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름 아닌 젊은 캐나다 출신 배우 라이언 고슬링의 영화로 모든 내용이 다시 정리되고 기억될 작품이기도 하다. 실망스럽기만 한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간절하고도 슬픈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고자 했던 영화 <스테이>의 진짜 표정이 라이언 고슬링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신어지

“여선생 VS 여제자”, 이젠 이런 영화도 못 보게 하려나???

[편집자 주]
일제고사를 체험학습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이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그리 하도록 하였다는 이유로 “전교조” 선생님들 일곱 분이 <성실의 의무>위반과 <명령불복종>의 사유로 해임 또는 파면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보도나 발표를 보면 그냥 선생님이 아니고 꼭 “전교조”를 앞에 붙이는 건 뭐며, 교사는 성직이라던 이들이 <명령불복종>을 운운하는 건 또 뭔가.
전교조의 내부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은 느끼고 있는 바이나, 머리에 띠두르고 투쟁을 외친 것도 아니고 시험시간에 교실 문을 못으로 박은 것도 아닌데 해임 또는 파면이라니. 도대체 누가 정치적인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회 구성원간 갈등을 조장하는 건지.
권력이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알아서 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날씨마저 사뭇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당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의 감독은 『선생 김봉두』를 연출했던 장규성.

그런 탓에 당 영화는 『선생 김봉두』의 구성이 그랬던 것처럼 전반부에는 여선생 ‘여미옥'(“염정아” 분)과 여제자 ‘고미남'(“이세영” 분)이 학교에 갓 부임한 꽃미남 ‘권상춘'(“이지훈” 분) 새임을 가운데 두고 펼치는 피 튀기는 쟁탈전에 뽀인트를 맞춰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연적이자 사제인 둘 간의 화해를 통해 아랫목 같은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생 김봉두』가 오로지 김봉두 개인의 교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당 영화는 제목처럼 여선생과 여제자간의 맞짱 구도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캐릭터 싸움에 집중하는데 그 핵심은 나이 꽉 찬 노처녀지만 하는 짓은 얼라같은 미옥, 그리고 꼬맹이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한 미남, 이 둘의 상식을 뒤집기 한 판 하는 역할 파괴로써 이 지점이 바로 관객의 허파를 간지럼 피는 태풍의 눈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미옥의 경우, 권상춘 동료새임을 보자마자 끓어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해 ‘앗싸라비아 콜롬비아’를 외치며 오징어 구워 들어가는 거 마냥 별 오도방정을 다 피우는 것에 반해 미남은 다 큰 처녀에게나 볼 수 있는 육탄공세를 펼치며 꽃미남 새임을 유혹하는 등 둘 다 그 연령대에 구사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선생 vs 여제자』가 이렇게 단순히 웃기다가 끝나고 마는 영화는 아니다. 전작 『선생 김봉두』에서 보았듯, “장규성” 감독은 교육계의 부조리한 단면을 소재 삼아 웃음을 주다가 스리슬쩍 그 현실에 똥침을 놓는 것이 장기인데 무엇보다 일품은 그러한 현실 고발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미이다.

당 영화 역시 그렇다. 보기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선생과 제자의 숙명적 치정극 같지만서도 그 맞짱의 이면에는 일개 지방의 초등학교라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새임들이 서울로만 가려는 등 개인의 영달에만 신경 쓰고, 또 부모는 부모대로 먹고 싸기 힘든 빠듯한 현실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은 까닭에 자라나는 우리의 새싹들이 방치되고 있는 안타까운 교육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감독은 이런 부분들이 잘못되었다고 직접적으로 똥침 놓는 것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미옥과 미남이 이런 현실을 깨닫고 결국 화해에 이르는 눈물 콧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대로 당 영화는 『선생 김봉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독특한 소재와 스토리를 무리 없이 소화하면서 많은 재미를 안겨주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끗.

영진공 나뭉이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2008)”, 좋다는 재료는 다 넣었는데 … 맛이 왜 이러냐???



몇 년 전에 호주에 간 적이 있다.  아들레이드(Adelaide)에서 열린 국제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는데, 7일 일정으로 시드니(Sydney)와 아들레이드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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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에서는 야밤에 오페라하우스 근처를 배회하다가 게이 친구로부터 유혹(?)도 받았고 아들레이드의 호텔에 투숙하려고 숙박부를 기재하다가 “우리 스코틀랜드에서는 … (호주 아니었어???) … 날짜를 일, 월, 년으로 쓴다”라고 지적받기도 했고, 시내 술집에서 우연히 호주 공산당원하고 합석이 되어 태평양 전쟁 시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목소리 높여 성토하기도 했었다.  아, 그리고 렌터카 빌릴 때 미국 면허증을 내밀면 국제면허증 따위는 보자고도 하지 않고 바로 빌려줍디다.

그런데 도대체 이 얘기를 왜 하냐고???
내 말이 그거다.  이 영화가 그런 식이다.
이 얘기 저 화면 마구 들이대기는 하는데 요점도 없고 그닥 재밌지도 않으며 무쟈게 식상하다.  게다가 물경 2 시간 30 분 동안 두 남녀의 뻔한 사랑 이야기를 지리하게 늘어놓고서는 느닷없이 실은 지난 세월 호주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잃어버린 세대(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을 지칭함)”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노라고 자막을 띄워서 숙연해주시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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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험들 하신 적이 있을 것이다.  좋다는 재료는 다 넣어서 만들었다는 음식을 받아들고 흐뭇한 마음에 허겁지겁 수저를 놀려 입에 넣었는데 … 정작 혀를 감싸는 맛은 이게 뭥미???

호주라는 광활한 자연, 호주 출신의 이름값 높으신 두 주연배우(니콜 키드먼 & 휴 잭맨), 비쥬얼로 승부하여 성공한 호주 출신 감독(바즈 루어만), 짭잘한 조연들 (FX의 그 아저씨와 쿵후허슬의 주인아저씨 등등), 1억 8천만 달러의 제작비 등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좋은 재료들.

거기에 러브스토리, 서부극, 전쟁물, 휴먼드라마, 권선징악, 마법, 가족애 등의 효과가 검증된 모든 요리방식들까지 아낌없이 다 동원한 이 영화.

에고, 정작 결과는 이런저런 영화들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다시 찍어서 짜깁기하느라 광활하고 거친 매력이 넘치는 호주의 자연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어째서 코알라는 한 마리도 안 보여주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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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칼립투스 나무가 있어야 우리가 나올 수 있다능~

뜬금없이 대입되는 “오즈의 마법사”는 또 뭐냐능~

그러니까 사라(니콜 키드먼 분)가 도로시이고 호주가 매직랜드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 … 납득 실패!!!!!

거기에다가 그 노래, (Somewhere) Over The Rainbow … 이거 아주 좋은 재료긴 하지만 적정량을 사용해야 효과가 커지는데 있는대로 온통 풀어 넣는 바람에 … … 감동 실패!!!!!


Over The Rainbow를 탄생시킨 영화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쥬디 갈란드

뭐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주 막장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다.
골똘히 화면을 응시하며 주파수를 맞춰 보고자 노력하는 덕후분들의 기준에는 많이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보아 넘겨줄 수 있는 비쥬얼과 CG 그리고 친숙한 스타들의 연기로도 세상의 시름을 영화 한 편으로 잠시 잊어보려는 관객분들이 보시기에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일단 상영시간이 너무나 길어주시는 건 매우 불편한 점이다.

결론적으로다가 한 줄로 정리하자면,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는 맛과 질보다는 가짓수와 양으로 승부하는 부페 식당 되시겠다.

끗.


뽀나스.
개인적으로 “뮤리엘의 결혼”과 함께 최고로 꼽는 호주 영화 “프리실라”의 한 장면

영진공 이규훈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매력을 디벼보자 …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한국에서 흥행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1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참으로 겸손한 규모로 겸손하게 개봉했다. 아무리 “르네 젤웨거”가 『제리 맥과이어』에서 상큼발랄 매력을 보여주었다 한들 『제리 맥과이어』는 엄연히 “톰 크루즈”의 영화였고, “르네 젤웨거”는 그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귀여운 여배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성미 넘치는 섹스 심벌’이라는, 참으로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칭송받는 “콜린 퍼스”가 한국 관객들에겐 “저 넘은 누구여?” 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고. 그나마 관객들에게 알려진 “휴 그랜트”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과 『노팅힐』 등등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진, 그 어리버리 소심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무려 ‘악당’이고 실은 ‘조연’이라니, 이 영화의 흥행가능성은 영화판에서 밥 좀 먹었다 싶은 사람들에게서 두루두루 ‘아니올시다’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히트를 치기를 했나, 그것도 아니고, “멕 라이언” 언니께서 나오시는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듣기에도 요상한 영국식 억양으로 도배된 낯선 코드의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가 먹힐 거라 생각한 사람… 감식안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대단히 형편없거나, 둘 중 하나였으려니.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는 그녀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에 나름대로 성공한 데다 일부에서 극도의 추앙을 받는 컬트작이 되기에 이르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한국에서 개봉했던 그 때, 단 2주 극장?걸렸던 이 영화는 몇 주 뒤 몇몇 극장에서 재상영을 감행했고, 이래저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본전을 두 번 뽑고도 남을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의 소문은, 극장에서 간판이 떨어진 뒤에 더 불어났다. 비디오, DVD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 따위는 연애에 환상을 가득 갖고 있는 여자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던, 자고로 영화는 액션이 짱이라 외치던 남자관객들도 슬금슬금 이 영화를 나중에사 보고 어머니나!를 외치곤 했으니…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이냐?



난 외로왔을 뿐이고 …

이제, 이 영화에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초간단 스피드로 짚어보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를 가슴 두근 벌렁 콩당대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어도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나름의 여성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층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20대 후반 ~ 30대 초반 여성들이었고, 그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는 했으나, 이 관객층에서 나름대로 특별한 관객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남들이 이름도 어려워하는 “콜린 퍼스”를 보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헬렌 필딩의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물론 제인 오스틴의 고전 [오만과 편견]의 열혈 광팬들이었던 것이다.

헬렌 필딩의 원작소설은 이해가 가지만 갑자기 제인 오스틴이 왜 튀어나오냐고? 그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바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출생의 비밀이다. TV 드라마의 숱한 주인공들만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재벌집의 하나밖에 없는 혈통이었다더라, 알고 보니 쌍둥이였다더라, 알고 보니 바꿔치기 당한 거라더라… 따위 상투적인 레퍼토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출생의 비밀이.

영국의 국립방송인 BBC에서는 곧잘 자기네들의 고전 소설을 TV 시리즈로 각색해 이런저런 배우들을 모셔다가 미니 시리즈로 만들곤 한다. 그 바닥에서도 유명한 수 버트휘슬이라는 프로듀서가 앤드류 데이비스라는, 역시 그 바닥에서 유명한 베테랑 작가를 데리고 1995년, ‘무모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TV 시리즈로 옮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것이다. 제목은 디립다 거창하고 문학계에서는 근대 소설의 효시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껏 추켜세우는데, 엄청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책인가보다 하고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했다가 애걔? 이거 웬 하이틴 연애소설이냐? 며 깜짝 놀라는 소설. 혹자들은 빠져들고 혹자들은 유치하다며 책을 던지고 마는 소설. 그 [오만과 편견]은, 영국 여성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문학 작품이다.

중류층의 똘똘한 아가씨가 상류층의 거만한 미혼남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다가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며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줄거리의 이 소설이 과연 어디가 대단해서 근대 문학의 효시고 대단한 고전 걸작이란 말인가? 라고 의문을 표시할 독자들이 있다는 것, 다 안다. 그런데 여성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되고, 재산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만 상속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 사회 풍속도와 계급간 모습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리고, 당대 소설들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체적이고 자립심 강한 여주인공이 나오며, 그런 무지막지한 사회의 틀 안에서 사람이 갖기 마련인 어떤 본성들을, 그것도 유머와 재치 통통 넘치는 설정과 문장으로 묘사한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시는 동인도 회사니 서인도 회사니 하며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하던 때고, 인텔리 및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또 한편으론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가난한 여성들과 심지어 5, 6살 어린아이들도 공장에서 마구 일하던 상황… 기존의 계급 제도에 균열이 오던 그 미묘한 상황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매우 미묘하고 암시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한 계급의 한남한녀들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문체는… 자기도 속한 계급이라 그런지 애정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가벼운 냉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6부작 TV 미니시리즈… 사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장면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까지 영국의 모든 여성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렸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뭐, 니가 나에 비해선 좀 심하게 쳐지긴 하지만, 내가 너랑 결혼해 줄게. (잘난척 으쓱~)” 요로코럼 재수없게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고 어이가 없었던 남주인공, 이후에 분노에 들끓기보다 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다. 그것은 옷을 입은 채로 자신의 그 드넓은 호화저택에 딸린 연못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으니. 일명 ‘젖은 셔츠 씬’이라 불리는 이 장면에 모든 영국 여성들과 한국의 팬들은 쌍코피 줄줄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언제나 고개를 30도 가량 위로 들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보는 듯한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눈멀어 흩어질 때, 여성들은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며 흥분하던가. 그리고 영 재수꽝인 줄 알았던 그가 알고 보니 심성도 좋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기꺼이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이고, 실은 사교성 없는 성격을 스스로 방어하느라 남들에게 재수없어 보이는 것임을 알았을 때, 어찌 이 남주인공에 빠지지 않을 텐가. 얼굴에 거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채 여주인공과 계속 다투고 싸우는 척해야 했던 남자주인공, 미스터 다아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콜린 퍼스였으니 …

사회적 체면도 그렇고, 자기자신도 당황할 만큼 뜻하지 않은 사랑의 감정에 제스처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기자신을 부여잡다가, 호수에 뛰어들고 젖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다 딱 걸렸네! 여주인공과 마주쳐 버리고,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 말 없이 생색도 안 내면서 모든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연기하기가 꽤 까다로운 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는, 심지어 원조 미스터 다아시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를 능가해 버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역을 맡았던 남자 배우, “콜린 퍼스”가 평소에 보이는 처신과 행동거지는… 사람이 참 바르다. 게다가 지적이고 똑똑하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오만과 편견』의 연기를 하면서 인터뷰에서 했던 캐릭터 분석이, 유수의 문학평론가들도 글이 실리기 어렵다는 문학잡지에 떡하니 실려서 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을까 말이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역시나 이 BBC 시리즈와 “콜린 퍼스”의 미스터 다아시에 홀딱 반해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헬렌 필딩이 쓴… 일종의 팬픽이다. 이 BBC 시리즈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키득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설정들. 예를 들면 원작에서 마크 다아시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슬쩍 “콜린 퍼스”의 특징을 끼워넣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이 BBC 시리즈가 영국을 얼마나 초토화 시켰는지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TV 방영시간마다 거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져버리는 런던 거리를 사랑한다고 브리짓이 썼던 구절이 있지 않던가. 브리짓이 우울할 때마다 친구들이 들고와 밤새 또 보고 또 보고 하던 게 『오만과 편견』 테이프, 그 중에서도 젖은 셔츠 씬이 아니던가. 한술 더 떠서, 속편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원작이기도 한 [브리짓 존스의 애인]에는 브리짓이 “콜린 퍼스”를 인터뷰하러 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기억하시는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콜린 퍼스”가 맡았던 그 캐릭터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음을. 성도 똑같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원작을 각색하고 원작에 없던 장면을 넣으면서 굳이 『오만과 편견』을 언급한다.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가 살던 대저택의 이름, ‘펨벌리’가 영화로 오면 브리짓이 일하는 출판사 이름이 되어 있고, 출판사 리셉션 장면에선 『오만과 편견』 출연자였던 “크리스핀 본햄 카터”가 카메오 출연을 한다. 대니얼 클로버(휴 그랜트)와 브리짓이 보트 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 그것은 단지 영화 『타이태닉』의 오마쥬 및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패러디가 아니라, 실은 『오만과 편견』의 젖은 셔츠 씬의 패러디인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개봉된 이후, 원작소설의 판매부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오만과 편견』을 방영했던 EBS나 케이블 방송 등의 게시판에는 『오만과 편견』의 재방을 요청하는 글들이 러쉬를 이루었다. 그리고 실제로 On Style 같은 케이블 방송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방영해주기도 했고. 『노팅힐』에서 보듯, 미국인의 영어 악센트가 섞여야 관객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었던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였으나, 완전히 영국식 악센트의 영어로만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또한 ‘워킹 타이틀’ 표 코미디가 완전히 한국 관객들에게 친근함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러브 액추얼리』의 슬리퍼 히트를 기억해 보라.)

겉만 번드르하고 매력적이지만 실속없는 남자와 눈에 잘 안 띄지만 알고보니 진국인 남자 사이에서 한 여자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는 흔하고 흔하다.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이루어낸 것은 좀 더 특별하다.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고, 어처구니 없어 민망할 지경의 실수만 연발하는 여자가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여자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뭇 사람들을 유쾌하게 녹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다. 또한 그저 마케팅 리서치 결과를 참조해 책상 머리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이래저래 끼워 맞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현대 도시인의 당면한 과제를 풍부하게 덧붙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이것이 그 사회에 내재한 단단한 문학적 / 문화적 토양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은 Eric Carmen

(피아노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차용하였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