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최후의 전쟁”, 브렛 래트너의 엑스맨 망쳐버리기???




엑스맨 시리즈는 스탠 리의 원작만화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될 거라는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 X-men: The Last Stand)에 대한 기대 역시, 저나 제 주변의 영화광들 말고도 데이트 코스로서 영화를 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도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뭐 결국 2011년에 프리퀄 형식으로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가 개봉되었습니다만.) 

단적으로 말하면, <엑스맨 3>가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였던 건 확실합니다. 전편에서 확립되어온 캐릭터들의 특징이 있기에 굳이 캐릭터들 설명하느라 시간을 분배할 필요도 없죠. 매그니토는 이미 2편에서 탈옥했기에 이제 그 양반이 본격적으로 미쳐돌아 날뛰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3편에서 활약할 만한 뉴 페이스들은 이미 전편에서 조금씩 소개가 끝났습니다. 3편은 그러니까, 신나게 때려부수어주면 되는 겁니다.

부제대로 “최후의 전쟁”을 벌여주는 거죠. “브렛 래트너”는 그래도 상업영화에서 기본은 해주는 사람이고, 이 영화에서도 ‘액션’으로서의 몫은 해냅니다. 전편에서 짭짤하게 돈을 번 폭스가 제작비도 블럭버스터 완결편에 합당한 수준으로 때려넣어준 거 같고요. (감독들은 언제나 부족한 예산이라고 말하겠지만.) 즉, 규모도 꽤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의 전편들이 블럭버스터치고 지나치게 훌륭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확실히 “브렛 래트너”는 “브라이언 싱어”에 비해 뒤져도 한참 뒤집니다. 캐릭터를 발전시키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솜씨도 그렇지만, 화면을 만들고 액션씬을 조합해내는 솜씨 그러합니다.

3편을 보고 집에 와서 1, 2편을 다시 봤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솜씨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2편 도입부에서 쿠르트 가드너의 백악관 습격씬은 블럭버스터가 CG를 쳐바르지 않아도, 굳이 동양무술로 안무하지 않아도 얼마나 우아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지 한눈에 보여줍니다. 이 우아한 액션은 편집 리듬과 사운드의 탁월한 사용에서 기인합니다. 움직임은 충분히 빠르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화면은 낭비컷 하나 없이 정확하게 움직이며, 사운드의 리듬만으로 박진감을 증폭시킵니다.
 
게다가 전편들에서 “브라이언 싱어”가 구축해놓은 엑스맨 세계는, 3편에서 “브렛 래트너”가 시도한 ‘무조건 대규모로 때려부수기’ 액션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아무리 대규모 액션과 CG가 나온다 해도, 1편은 로그와 울버린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였으며 2편은 한편으로는 울버린의 정체성 찾기이자 또 한편으론 진의 고결한 희생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전체를 떠받치는 전제에는, 재비어와 매그니토의 애증, 서로 적이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는 신뢰가 존재합니다.




재비어(원래 발음은 이그재비어, 더군요.) 교수네 엑스맨 팀과 매그니토의 팀은 돌연변이로서의 생존에 대해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때론 맞서 싸우고 때론 연합전선을 펴면서 각자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울버린은 진을 사랑하지만, 1편에서 드러난 울버린과 로그 사이의 교감, 이를 표현해낸 화면은 가슴을 찡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울버린이 로그를 구출해내는 장면, 악몽에 시달리던 울버린이 로그를 찌르고 로그가 자가치유를 하는 장면은 에로틱하기까지 해요.

2편에서 진의 장면은 어떻습니까. 일단 화면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는 장면입니다만, 그 거대한 물살 앞에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간 진이 블랙버드기와 쏟아지는 물살 사이에 서서 물을 막는 장면은, 거대한 운명의 힘 앞에 홀로 맞서는 ‘완성된 인간’, 혹은 ‘초인’의 존재를 보여주며 눈시울을 적십니다. 매그니토의 그 위엄과 우아함은 어떻고요? 누구보다도 파워풀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소심하고 다정한 성격 때문에 다른 동료들에게 가려지는 스톰은 또 어떻습니까? 게다가 “브라이언 싱어”의 유머감각은 꽤나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재치있죠. 대놓고 들이대는 코미디가 아니라 재치있는 하이코미디의 감각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이 3편에 오면 무너집니다. “우린 엑스맨이야!”를 외치는 울버린의 모습이란 어이없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실 3편에서도 극적인 캐릭터성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 각본에서만.

2편에서 그렇게 희생하고 스러져간 진이, 사실은 재비어의 정신적 억압 때문에 이중인격이 되었고 그 결과 선하고 착하며 자신감없고 희생적인 이면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드적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설정, 그리고 ‘피닉스’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부활한 진이 심지어 매그니토마저 두렵게 만드는 초강대한 존재로 부상한다는 설정, 그리고 돌연변이를 이제 ‘질병’ 취급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소위 ‘치료약’과, 이 약의 원천이 되는 돌연변이 아이의 존재, 바비와 로그와 키티 사이를 흐르는 사랑의 갈등, 등은 이전 시리즈가 지향하는 ‘캐릭터의 이야기’라는 측면에 상당히 부합합니다.

그러나 “브렛 래트너”는 이러한 부분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구현하는 데 실패합니다. 남는 건 돈을 쏟아부은 대규모의 액션인데, 사실 이것도,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건 알겠는데 그만큼 효율적으로 규모감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1, 2편을 다시 보면, 오히려 이 3편보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순전히 아이디어와 비주얼의 감각, 그리고 훌륭한 편집의 리듬으로 얼마나 스펙터클하게 화면을 구축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3편의 규모가 1, 2편에 비하면 대단히 초라하게 보이니, 효율성 면에서 완전히 망한 거고, 이것의 원인은 미장센 구축 능력, 즉 화면을 만드는 솜씨에서 기인하는 것이죠.

첫 출발은 상당히 “브라이언 싱어”스러웠습니다. 진을 발탁하던 당시를 보여주고, 진의 불안정한 내면과 무의식의 상태를 암시해주죠. 또한 자막에서 이름 한번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앤젤(거대한 새의 날개를 단, ‘큐어’ 제약회사 사장의 돌연변이 아들 말입니다.)의 어린시절 에피소드를 인상깊게 보여주죠. 그러나 이후 진행은… 이야기의 핵심이 되면서도 겉돌기만 하는 큐어의 근원인 아이는 어떡할 거며, 이 앤젤은 이후 고작 큐어 주사 거부 장면, 재비어 학교가 문을 닫느냐 마느냐 기로에서 학교를 찾아오는 장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는 장면에서나 나올 뿐입니다.

상당히 뜬금없이 파편화돼 있고 전체 이야기 속에 융화되질 못하고 있죠. 그럴 거면 도대체 왜 오프닝에서 그 아이의 그 처절한 날개자르기 씬을 보여주는 건지? 뭐, 저거니토 같은 캐릭터도 그렇고, 매그니토 팀에 새로 들어오는 캐릭터들(주로 동양계 배우들이 연기한)도 그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며 낭비되고 있습니다. 파이로는 매그니토 편으로 가더니 바보가 됐더군요.



역시나 “브렛 래트너”가 “브라이언 싱어”의 빈 자리를 메꾸기에는 상당히 딸렸습니다. 사실 영화사 입장에서는, 그토록 성공을 거두었으니 거기에 ‘화끈한 액션을 때려부으면 더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릅니다. 사실 엑스맨 시리즈가 성공한 건 그런 무조건적 액션을 절제하고 오히려 캐릭터 강화로 액션의 정당성을 확보해준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가정을 하고 나면, “브라이언 싱어”가 결국 엑스맨 시리즈를 떠난 이유도 추측이 돼요. 그 자리를 “브렛 래트너”가 메꾸게 된 것도요. (물론 공식적인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지만.) 하지만 “브렛 래트너”의 장기는 이런 대규모 액션이 아니라 오밀조밀하게 짜인 귀여운 액션이고, 다소 전형적인 인물들이 품어내는 서민적이고 작은 갈등의 드라마입니다. (『러쉬 아워』 시리즈나 『패밀리 맨』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영화를 아트냐 상업영화냐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걸 무척 싫어하지만 편의를 위해 잠깐 그 틀을 빌리자면, 영화사는 어쩌면 “브라이언 싱어”가 블럭버스터에 안 어울리게 너무 아트지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가 했던 것은, 그간 블럭버스터의 제작자와 감독들이 무시해온, 대규모의 화끈한 액션이 절절하게 필요한 이유를 섬세하게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싱어”는 아주 좋은 상업영화 감독인거죠. 암튼 3편을 보고 나서 새삼, “브라이언 싱어”가 얼마나, 그리고 왜 훌륭한 감독인지 절절히 알게되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2008)”, 좋다는 재료는 다 넣었는데 … 맛이 왜 이러냐???



몇 년 전에 호주에 간 적이 있다.  아들레이드(Adelaide)에서 열린 국제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는데, 7일 일정으로 시드니(Sydney)와 아들레이드에 머물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에서는 야밤에 오페라하우스 근처를 배회하다가 게이 친구로부터 유혹(?)도 받았고 아들레이드의 호텔에 투숙하려고 숙박부를 기재하다가 “우리 스코틀랜드에서는 … (호주 아니었어???) … 날짜를 일, 월, 년으로 쓴다”라고 지적받기도 했고, 시내 술집에서 우연히 호주 공산당원하고 합석이 되어 태평양 전쟁 시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목소리 높여 성토하기도 했었다.  아, 그리고 렌터카 빌릴 때 미국 면허증을 내밀면 국제면허증 따위는 보자고도 하지 않고 바로 빌려줍디다.

그런데 도대체 이 얘기를 왜 하냐고???
내 말이 그거다.  이 영화가 그런 식이다.
이 얘기 저 화면 마구 들이대기는 하는데 요점도 없고 그닥 재밌지도 않으며 무쟈게 식상하다.  게다가 물경 2 시간 30 분 동안 두 남녀의 뻔한 사랑 이야기를 지리하게 늘어놓고서는 느닷없이 실은 지난 세월 호주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잃어버린 세대(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을 지칭함)”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노라고 자막을 띄워서 숙연해주시기까지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 경험들 하신 적이 있을 것이다.  좋다는 재료는 다 넣어서 만들었다는 음식을 받아들고 흐뭇한 마음에 허겁지겁 수저를 놀려 입에 넣었는데 … 정작 혀를 감싸는 맛은 이게 뭥미???

호주라는 광활한 자연, 호주 출신의 이름값 높으신 두 주연배우(니콜 키드먼 & 휴 잭맨), 비쥬얼로 승부하여 성공한 호주 출신 감독(바즈 루어만), 짭잘한 조연들 (FX의 그 아저씨와 쿵후허슬의 주인아저씨 등등), 1억 8천만 달러의 제작비 등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좋은 재료들.

거기에 러브스토리, 서부극, 전쟁물, 휴먼드라마, 권선징악, 마법, 가족애 등의 효과가 검증된 모든 요리방식들까지 아낌없이 다 동원한 이 영화.

에고, 정작 결과는 이런저런 영화들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다시 찍어서 짜깁기하느라 광활하고 거친 매력이 넘치는 호주의 자연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어째서 코알라는 한 마리도 안 보여주는거냐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어야 우리가 나올 수 있다능~

뜬금없이 대입되는 “오즈의 마법사”는 또 뭐냐능~

그러니까 사라(니콜 키드먼 분)가 도로시이고 호주가 매직랜드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 … 납득 실패!!!!!

거기에다가 그 노래, (Somewhere) Over The Rainbow … 이거 아주 좋은 재료긴 하지만 적정량을 사용해야 효과가 커지는데 있는대로 온통 풀어 넣는 바람에 … … 감동 실패!!!!!


Over The Rainbow를 탄생시킨 영화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쥬디 갈란드

뭐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주 막장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겠다.
골똘히 화면을 응시하며 주파수를 맞춰 보고자 노력하는 덕후분들의 기준에는 많이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보아 넘겨줄 수 있는 비쥬얼과 CG 그리고 친숙한 스타들의 연기로도 세상의 시름을 영화 한 편으로 잠시 잊어보려는 관객분들이 보시기에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일단 상영시간이 너무나 길어주시는 건 매우 불편한 점이다.

결론적으로다가 한 줄로 정리하자면,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는 맛과 질보다는 가짓수와 양으로 승부하는 부페 식당 되시겠다.

끗.


뽀나스.
개인적으로 “뮤리엘의 결혼”과 함께 최고로 꼽는 호주 영화 “프리실라”의 한 장면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