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덕후가 아니어도 충분히 흥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영화

 

 


 


 


이거 조으다 ^.^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을 처음 보고 온 뒤에 트위터 계정에 이렇게 올렸다. “저는 덕이 아닌데 왜 <퍼시픽 림>이 재밌는 거죠?”


 


이후 3D 아이맥스로 한 번, 그리고 다시 2D로 한 번, 이렇게 총 세 번을 보았다. 그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건 베켓 형제가 집시 데인저를 타고 첫 출격하는 장면을 3D 아이맥스로 봤을 때다.


 


거대한 집시 데인저의 각 근육 부분과 이 기계 덩어리의 각 부분이 연결돼 있는 데크들, 심지어 베켓 형제가 입은 수트까지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기스와 흉터가 나 있다. 너무 반짝반짝 화려한 새 것이 아닌, 사용감과 시간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카이주가 처음 등장한 지 이미 십 년은 훨씬 넘었고, 예거 프로그램이 가동된 지도 몇 년은 지난 때니 당연한 거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내게 그 흠집들과 상처,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들이 이유 모를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 스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


 


 


 


그 와중 라민 자와디의 테마음악이 울리며 긴장감과 흥분을 점점 고조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물살을 가르며 발걸음을 떼는 집시 데인저의 모습은, 2D에서보다 3D에서 훨씬 더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락스타처럼 영광을 누리던’ 초기의 중후한 파일럿들이 이미 은퇴를 하고 베켓 형제처럼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기보다 ‘어린’) 파일럿들이 투입되었던 때. 내레이션에서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라는 서술은 “피로와 매너리즘이 쌓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는 건 바로 그 시점이고, 첫 4등급 카이주가 등장했던 이들의 첫 전투는 처절한 패배로 기록된다.


 


그리고 영화는 5년 뒤로 건너뛴다. 예거 프로그램의 잠정 폐지를 앞두고 알래스카 기지가 폐쇄되는 날이다. 주요 기지가 홍콩의 섀터돔으로 옮겨지고, 5년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마음을 닫아걸었던 우리의 주인공 롤리가 돌아오고, 여주인공이 비로소 등장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현재’ 시점이란, 이제 예거 프로그램이 이미 ‘민영화’된 후의 일이다. 서른 대도 넘던 예거는 이제 네 대가 남았을 뿐이고, 이들의 자금책 중 가장 큰 돈줄은 카이주 장기 밀매시장의 일인자이다. 대장인 스태커가 “우리는 레지스탕스”라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계 정부들은 ‘장벽’을 세우는 것으로 이미 전략을 전환한 후이다.


 


무수한 이들이 지적하듯 <월드워 Z>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도 ‘장벽’이 등장하되 주인공이 5년간 방황한 정처 정도로만 언급된다. 장벽은 방어막이자 ‘보호’를 위한 것이되, 한편으로 ‘고립’을 뜻하기도 한다. <월드워 Z>나 <퍼시픽 림> 모두 이러한 고립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러한 고립이 현대사회에선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혹은 가능할 리 없다는 믿음에 대한 공포가 어렴풋하게나마 동시에 읽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립이 어느 정도 얼개를 갖추고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면 바로 <설국열차>의 기차 안이다.)


 


 


 



장벽이라고? 풉!


 


 


그리고 좀비나 카이주 모두 ‘난공불락’이라던 장벽을 너무 쉽게 뚫는다. <퍼시픽 림>에서 형을 잃고 마음을 닫은 롤리가 하필이면 장벽 건설현장으로만 돌았던 것으로 설정된 건, 하루 벌어 하루를 살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노가다 일감이 주로 장벽 건설현장에 제일 많았기 때문이지 설마 방어태세 속에 고립을 자처하는 롤리의 심적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벽이 뚫린 바로 그 시점, 롤리가 예거로의 복귀를 결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장벽을 포기하고 예거로 돌아왔으니 또 너무 쉽게 마코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예거들은 주로 저 머나먼 바다 한가운데를 프론트라인으로 잡고 괴수들을 상대하지만, 이놈의 괴수들은 툭하면 도시로 난입해 도로며 건물이며 전선들을 부순다. 체르노 알파와 크림슨 타이푼이 안타깝게 사망한 홍콩 앞바다에서의 전투씬에서도, 두 녀석이 나타나서는 한 녀석이 힘겹게 예거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다른 한 놈은 기를 쓰고 도심을 향해 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지구상 ‘인간’이라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혹은 겁 없이 드리프트를 해온 인간 녀석을 찾기 위해서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또한 우리는 스토리 밖에서, 그것이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수는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예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시로, 시내 중심부로 향하는 괴수들의 몸짓에는, 그러한 장르 자체의 혹은 스토리 내외적 설정 외에도 내게는 어떤 기묘한 절박함이 보인다.


 


이 괴수들은 자신들을 조종하고 명령하는 식민주의자들의 명령과는 별개로, 그것이 설사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라는 수단일지언정 어떻게든 인간들에게 말을 걸고 접촉하려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들은 인간이 방어를 위해 쌓았으나 결과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게 될 ‘장벽’을 그렇게 손쉽게 뚫어버리는 것인가 … 는 개소리.


 


 


 



기운 센 천하장사아~ 무쇠로 만든 사라암~


 



 


하지만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퍼시픽 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의 상처와 흔적이 가득했던 예거들이 새단장과 중무기 보강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그 육중한 철골의 무게감을 자랑하며 괴수들과 싸우는 장면들 자체의 쾌감이다.


 


바위 재질처럼 단단하고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괴수의 피부를, 저 육중한 ‘무쇠팔 무쇠다리’가 주먹질하고 찢고 박살낸다. 괴수영화를 본 게 별로 없음에도 우주에서 나타난 괴수의 피부는 바로 저렇게 표현되는 게 정석일 것 같고, 메카닉물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저 타격감과 무게감은 메카닉물이 응당 갖추어야 할 미덕처럼 보인다.


 


아무리 로봇영화나 로봇만화에 별 흥미나 향수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징가제트와 태권브이를 보고 자랐고 그 주제가가 유전자에 박혀있으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로봇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나왔으며, 이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과 기계의 공명과 동기화를 전제한 에반게리온을 보며 20대를 보냈다. 그러니 <퍼시픽 림>에 스스로도 납득 못 할 흥분을 느끼며 어쩐지 “고맙습니다”를 읊조리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박해천 교수가 말하는 대로 70년대에 태어나 시간과 경제의 여유를 누린 중산층에서 자라 소년잡지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갖는 마지막 판타지인지 어쩐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것이 출산과 양육의 포기와 부동산 하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더욱.)


 


 


 



ps1. OST 쩐다! 음악 맡은 라민 자와디가 한스 짐머 사단 출신이라더만, 청출어람인듯.


 


ps2. 극장에서 3번밖에 못 봤는데 다 내리다니 덕 횽아들 좀 실망이었다능?! 내가, 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를, 어? 극장서 7번을 봤는데, 7번까지는 무리라도 5번 볼 동안 정도는 버텨줘야 하는 거 아니었냐능?!?!


 


ps3. 덕 중의 덕들은 역시 체르노 알파에 열광하는 게 내가 봐도 당연해 보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집시 데인저… 체인 소 달고 원자로 몸에 단 아날로그 구형에 제일 마징가 제트랑 닮았다. (흥, 체르노 알파는 깡통로봇 닮았다!)


 


ps4. 기쿠치 린코의 모리 마코는 볼수록 싫어지는 게, 일본 만화/애니에서 익히 봐왔던 소녀들, 그러니까 공부도 잘하고 명랑하고 뭐도 잘하고 막 그런데 좋아하는 오빠 앞에만 서면 얼굴 새빨개져서 들지도 못하고 어리버리하다 실수하고 당황하고 도망가는 그런 귀여운 캐릭터를 연기한답시고 연기하는 거 같은데 언니, 얼굴이 그런 귀여운 척하기에는 스스로 삭았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좋게 말하면, 포스 있게 생겼는데 귀여운 척을 해서 계속 당황스러웠음요.


 


ps5. 난 이드리스 엘바의 스태커 펜테코스트 대장님의 그 ‘연극하는 듯한’ 말투가 매우 좋은데 그거 거슬려하는 사람 많구나. 아주 정갈하신 발음과 인토네이션의 영어로 셰익스피어 고전극의 독백대사 읊듯 대사하시는 게 대장님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렸음요.


 


ps6. 뉴트가 한니발 차우네 본부 가서 “으악 여기가 천국일세! 여기 장기! 여기 뇌! 여기 기생충!”하며 꺅꺅거리는 장면에서 좀 웃었음. 아, 어쩜 덕의 마음을 저리도 잘 표현하는 씬인가.


 


 


 


영진공 노바리


 


 


 


 


 


 


 


 


 


 


 


 


 


 


 


 


 


 


 


 


 


 


 


 


 


 


 


 


 


 


 


 


 


 

“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


 


 


 


 


 


 


 


 


 


 


 


 


 


 


 


 


 


 


 


 


 


 


 


 


 


 


 


 


 


 


 


 


 


 

<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앤 라이스


 


 




3. 앤 라이스와 버피와 엔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뱀파이어물’이 어제 오늘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얘기하긴 힘들다. 분명 과거의 뱀파이어물과 오늘의 뱀파이어물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작품들로 한편으로는 앤 라이스의 전설적인 뱀파이어 연대기(와 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를, 또 한편으로는 무려 7시즌까지 갔던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이는 5시즌짜리 스핀오프 <엔젤>을 낳기도 했다.)를 언급해야만 한다.


 


사악한 공포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뱀파이어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 게 바로 앤 라이스 연대기에 등장하는 레스타드일 것이다. 그러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들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악으로서 고딕세계에 갇혀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기보다는 이전의 시기의 마지막 뱀파이어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레스타드에게 열광한 것은 그의 ‘귀족적인’ 자태,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유산처럼 간직해온 그의 귀족의 분위기와 전통 때문이다. 지금의 뱀파이어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리즈는 결국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된다. 여전히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과거의 사악한 악마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예외적 존재로 설정된 엔젤을 통해 ‘유혹적인 악’으로보다는 ‘공존이 가능한 존재’로서의 매혹적인 뱀파이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전직 엔젤, 현직 FBI 요원


 


 


 


그 스핀오프 시리즈인 <엔젤>은 그런 뱀파이어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돕는, 그러니까 도시의 밤에 더없이 잘 섞여 살아가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뱀파이어 탐정물의 시작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뱀파이어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 그어주는 구분선으로 <버피와 뱀파이어>가 제시한 깜찍한 트릭이 의외로 긴 수명으로 다른 시리즈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뱀파이어가 보통 인간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집의 거주자가 공식적으로 ‘초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


 


<버피와 뱀파이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 설정은 <트루 블러드>에서는 물론 북구에서 날아온 영화 <렛미인>에도 고스란히 사용된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조차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 혹은 ‘원치 않음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했던 시기에 이런 설정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못할 설정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인간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보다 잠재되고 은밀한 공포를 다루거나, 이존재와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는 보다 로맨틱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종의 ‘안전지대’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그 결과 ‘초대’와 관련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중 속 고독’으로 대표되는 소외현상을 심화시키는 도시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도시의 성원들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기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괴물이나 이존재 중에서도 뱀파이어는 가장 감정이입하기 쉽거나 매혹을 주는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True Blood

<트루 블러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이후 만들어진 뱀파이어 시리즈들, 그러니까 <블레이드> 시리즈나 <언더월드> 시리즈 같은 것은 버피가 제시한 혁명적 전환의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변화를 작게든 크게든 반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인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반인 반뱀파이어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뱀파이어는 죽어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전제한다. 당장 주인공의 직업부터가 뱀파이어 슬레이어다. 다만 뱀파이어보다 더 악한 리퍼들이 등장할 때 일시적으로 휴전과 동맹의 대상이 되기는 한다.


 


<블레이드> 시리즈보다는 <언더월드> 시리즈가 좀더 새로운 뱀파이어물에 한 발 가까이 가있다. 이 시리즈는 적어도 도시 속에 인간들 모르게 살고 있는 뱀파이어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더월드>의 세계는 21세기에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주인공 역시 뱀파이어인 여전사로 설정돼 있긴 하되, 일반 인간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자신들만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 시리즈가 <트와일라잇>에 미친 영향을 언급할 수 있다.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전쟁이라는 테마야말로, <트와일라잇>의 속편 <뉴 문>이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뱀파이어들’의 출현은 2000년대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뱀파이어물들은, 말하자면 과도기의 것이었다. 2000년에 나온 <드라큐라 2000>과 2002년에 나온 <퀸 오브 뱀파이어>가, 그리고 2004년에 나온 <반 헬싱>이 일견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뱀파이어 장르에 밀어닥치고 있는 일련의 변화를 별로 반영하지 못한 탓일 게다.


 


하긴 <퀸 오브 뱀파이어>는 앤 라이스의 원작을 뒤늦게 영화한 버전이었고, <반 헬싱>은 본격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다기보다 유니버설이 판권을 갖고 있던 온갖 괴물류를 한 화면에 등장시킨다는 야심이 더 컸던 영화이긴 했다.


 


그보다 살짝 이전, 1998년에 나온 <슬레이어>는 정통적인 뱀파이어 슬레이어물로서 사악한 뱀파이어들을 다 때려잡는 화끈한 슬래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이 보이는 지점이 있다.


 


 


 


4. 다시, <문라이트>로


 


다시 <문라이트>로 돌아와서,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이 특별한 것은, 저 엔젤을 적통으로 이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


 


캐나다산 시리즈인 <블러드타이즈>만 해도 뱀파이어인 헨리 피츠로이를 매개하는 여자주인공으로 비키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 역시 비키라는, 시력을 잃어가는 형사 출신 탐정이고, 헨리는 관객에게 그녀의 유혹자로서, 그녀의 타자로서 비키의 매개를 통해서 제시되는 것.


 


<트루 블러드> 역시 ‘수키’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뱀파이어 존이 제시되며, <트와일라잇> 역시 여주인공 벨라를 통해 컬렌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비로소 소개된다. 뱀파이어에게 매혹된 여성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서만이 타자로서 뱀파이어 주인공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Moonlight

<문라이트>의 주요 출연진.


나쁘지 않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1시즌 15화로 종방된 비운의 시리즈.


 


 


 


그러나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통 인간인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인간이던 시절을 잊고싶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만 있다면 다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는 그럼에도 뱀파이어로서 자신의 능력과 성격을 최대한 활용하며, 괴물/야수로서의 성격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다소 ‘불쌍하게’ 생긴 알렉스 오로린이 가장 섹시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뱀파이어로서 난폭하게 날뛰는 장면들에서다.)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믹 세인트 존은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에 충실한 다른 뱀파이어들(그를 뱀파이어로 만든 코럴린(섀넌 소서몬)과 조셉(제임스 도어링))과, 그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일반 인간 베스(소피아 마일즈) 사이를 잇는 중간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베스보다 오히려 더욱, 뱀파이어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상반된 이중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도 바로 믹 세인트 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믹 세인트 존은 코럴린을 통해 임시방편적이기는 하지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얻고, 단 며칠 인간으로 살며 베스와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베스가 다른 뱀파이어 조직에 납치돼 위기에 닥친 순간, 그는 조셉의 도움을 빌어 다시 뱀파이어로 돌아간다. 뱀파이어들과 싸워 베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뱀파이어 시절에 가졌던 괴력과 초능력이 필요했던 탓이다.


 


시리즈의 외형상,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로맨틱한 희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뱀파이어 시절 그가 가지고 누렸던 뱀파이어의 초능력은, 그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형태의 일종의 기득권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5. 덧붙여


 


앞으로 뱀파이어물이 어떤 형태로 더 진화해갈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당장 앞으로 나올 뱀파이어물들은 지금 제시된 이 다양한 버전의 ‘보다 느슨해진’ 신화들과 탐미적이고 로맨틱한 특징들을 철저히 우려먹을 것으로 보인다.


 


<원더월드 3 : 라이칸의 반란>은 여전히 그 세계에서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전투를 계속하고 <뉴 문>과 이후 만들어질 <이클립스(월식)>, <브레이킹 던(여명의 새벽)>이야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터인데, 1편에서 제시된 쇼킹한 설정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거란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벨라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약간의 파장을 가져온다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음습한 암흑과 음모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은 <트루 블러드>의 경우 조금 기대가 크다. 원작의 나이브한 한계가 있고 앨런 볼의 시도가 아직은 위태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앨런 볼이 시도하고 있는 보이는 복잡한 문화지도 그리기가 성공할 경우 새로운 전환을 제시해주는 걸작으로 남게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이야기를 사정없이 벌리고 수습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 원작의 원래의 허술한 기둥이 이런 서브텍스트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 오히려 거대한 재난이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1시즌 피날레가 참… 거시기 했다.) 이 시리즈가 제발 제대로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발전시키며 나아갈 수 있기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문라이트>에서 제시된 가능성을 어떤 시리즈든 어떤 식으로든 이어줬으면 하는 것. 異존재가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음에도, 이 쇼가 삼각관계 연애놀음에서 지지부진했던 것, 나아가 좀 엄한 이유로 중단된 것은 여러 모로 아쉽기 그지 없다.


 


 


 


영진공 노바리


 


 


 


 


 


 


 


 


 


 


 


 


 


 


 


 


 


 


 


 


 


 


 


 


 


 


 


 


 


 


 


 


 


 


 


 

<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1부]

 

 


 


 


 



 


 


 



2009년에 우연히 접했던 뱀파이어 로맨틱 탐정물 <문라이트>의 리뷰로 시작했다가, 곧 뱀파이어물 이것저것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뱀파이어물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글’을 지향하며 야심차게 전개하…다 흐지부지된 글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시간적 한계가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재미있습니다. 제 글이 재미있다기보다는(뭐 저는 그렇다고도 생각합니다만 -.-), 뱀파이어물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때문이겠죠. 한편으로는, 2000년대 초반과 중반의 획기적인 ‘뱀파이어물의 진화’의 양상은 다소 주춤한 대신, 그 진화를 시리즈물을 통해 ‘유지’하는 데에 더 주력하는 분위기인 듯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일부분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뒤늦게나마 공개합니다.


 


장르물에 지식이 일천한지라 곳곳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히 받고 수정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1. <문라이트 Moonlight>는 어떤 시리즈인가


 


<트와일라잇>이 ‘새로운 뱀파이어’ 얘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대 도시 안의 뱀파이어를 좀더 매력적이고 시크하게 표현한 걸로 미국 TV 시리즈 <문라이트>가 있다. 비록 쇼 러너가 넷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 나쁘지 않은 시청율에도 시즌 1로 끝나버린 비운의 드라마긴 하지만.


 


호주 출신의 알렉스 오로클린(그러나 국내 인터넷에서는 ‘알렉스 오로린’으로 통용되는)과 영국 출신의 주목할 만한 젊은 연기파 배우 소피아 마일즈, 거기에 <기사 윌리엄>이나 <40 데이즈 40 나잇> 등에 나왔던 독특한 매력의 섀니언 소서몬이 주연을 맡았다.


 


사립탐정과 인터넷 기자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명목상 탐정물. 그러나 실질적으론 간질간질하지만 지나치게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은, 꽤 괜찮은 로맨틱 뱀파이어물이다.


 


알렉스 오로클린과 소피아 마일즈가 워낙 괜찮은 배우들인데다 둘 사이 케미스트리도 매우 좋았다. 여직도 시즌 2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여성팬들이 전세계에 많은데, 알렉스 오로클린은 <하와이 5-0>의 주연으로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문라이트>의 2시즌 제작은 당분간 물 건너간 셈이다.


 


 


 



Moonlight

<문라이트>의 두 주인공, 알렉스 오로클린(오른쪽)과 소피아 마일즈


 


 


 


<문라이트> 시리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뱀파이어물에 그 분장이 꽤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설정들은 제법 쿨하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역시 뱀파이어 탐정물인 <블러드 타이즈>가 각종 악마와 저주와 주문 등등을 요란하게 다루는 것과 달리, <문라이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로 오직 뱀파이어만이 등장하고, 뱀파이어도 감각 예민하고 일반 인간들 기준으로는 괴력과 초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도시 정도라면 햇볕 아래에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알려진 ‘심장에 말뚝박기’도 이 시리즈에서는 ‘뱀파이어를 마비만 시킬 뿐 죽일 수는 없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2. 넘쳐나는 새로운 뱀파이어물


 


그러고 보면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었다는 게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요 몇 년간 서양은 확실히 이런 새로운 뱀파이어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있는 중이다.


 


<트루 블러드>는 골든글로브에서 안나 파퀸에게 TV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CBS에서는 <뱀파이어 일기>라는 새로운 시리즈가 론칭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던 <문라이트>도, 캐나다에서 제작된 <블러드타이즈>도 모두 국내에서 케이블을 통해 소개되었다. 영화 쪽으로 가면 물론 <트와일라잇>이 있고, 이것의 속편 <뉴문>과 <렛미인>이 뒤를 이었다.


 


15년 전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처단할 존재로 전제하고 영혼을 가진 뱀파이어 ‘엔젤’을 저주에 걸린 예외의 타자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근간의 뱀파이어물은 보다 적극적으로 뱀파이어를 매력적인 이존재로, 도시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자’로 그린다.


 


 


 



 


 


 


또한 전통적으로 알려진 뱀파이어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들을 오히려 ‘뱀파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퍼뜨린 루머’로 역이용하는 재치도 보인다. 단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여러 뱀파이어물은 공통적으로, 이것들이 뱀파이어들이 일반사람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뿌린 잘못된 루머라고 주장한다. 마늘도 취향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에 대해서는 시리즈마다 이견이 있다. <문라이트>에서 뱀파이어들이 햇빛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진 않은 걸로 표현하고 있지만 <트루 블러드>나 <블러드 타이즈>는 여전히 햇빛이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라 주장한다. 다만 <트루 블러드>의 경우 과거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스티브 모이어가 연기하는 주인공 뱀파이어 빌 콤튼은 1시즌 마지막회에서 연인인 수키(안나 파퀸)를 구하기 위해 대낮에 나왔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목숨은 부지한다.


 


뱀파이어물이 이토록 급증하고 더욱이 과거와 달리 뱀파이어를 매혹적인 이방인 정도로 그려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일반화되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시골에서 폐쇄적 생활을 하는 지주, 유지로 설정되며 근대 이전의 귀족을 상징했다면, 이후 불야성의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도시물이 활기를 띄었다가 지금은 도시물과 시골물이 공존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현대의 뱀파이어물은 아무래도 도시가 어울린다. 도시야말로 바로 옆동네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데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올빼미족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시골물은 과거 시골에 은둔하는 지주나 지방 유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골에 새로이 보금자리를 틀러 온 타지 출신 정도로 묘사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깡촌, 그러니까 촌스러운 시골 백인들을 가리키는 ‘힐빌리’ 혹은 ‘레드넥’들만 살던 동네에도 이젠 유색인종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게다.


 


 


 



 


 


<트와일라잇>만 해도 배경은 분명 워싱턴 주의 시골 깡촌인데 인종 분포는 LA의 웬만한 동네 못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전형적인 북구 미남들부터 네이티브 어메리칸은 물론, 심지어 동양인들까지. <트루 블러드>의 배경도 루이지애나 주의 깡촌 시골이다.


 


그러니까 봉건시대의 잔재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던 뱀파이어가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 와서는 도시의 여피를 상징하거나, 시골로 낙향한 부유한 도시 출신 백인, 혹은 미국 정착에 성공한 흑인 외 다종다양한 유색인종들의 비유로 그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저 할리퀸 로맨스 수준이었던 원작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의 작가 앨런 볼의 손을 거친 <트루 블러드>가 종교적 광기와 이종존재간 문화충돌, 카트리나 이후의 미국 남부의 트라우마를 다루며 6, 70년대 반문화적 성격까지 차용해와 복잡한 문화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의 훌륭한 통찰과 비유도 이제는 시대적 효력을 살짝 상실했다는 얘기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노바리


 


 


 


 


 


 


 


 


 


 


 


 


 


 


 


 


 


 


 


 


 


 


 


 


 


 


 


 


 


 


 


 

“브로크백 마운틴”, 이방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앙리의 미국 문화 관찰

 


 

 


 


 


 




 



 


다소 거리를 두고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미국 문화를 훑는 ‘이방인’ “앙리” 감독의 시선은 너무나 놀랍다. 그는 외부자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도 않지만 굳이 강조하거나 드러내지도 않는다.


 


‘앙리’라는 이름을 듣기 전에, 그 감독의 커리어와 배경을 듣기 전에, 누가 『센스, 센서빌리티』를, 『헐크』를, 『아이스스톰』을,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역시 외부자의 시선이군’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만큼 드라이하고 냉정하면서도 훌륭한 테크닉으로 연출을 해간다. 그가 영화의 씬을 쌓아가는 솜씨는 마치 영화로 작업하는 인류학자의 방식처럼 느껴진다.


 


 


 



 


 



생각만큼 잭과 에니스의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거나 절절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내겐 앨마와 로린, 그 웨이트리스 같은 여성들이 훨씬 더 크게 보였으니까. ‘도대체 저들 사이에 있던 저것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묻고 싶다.


 


저렇게 주위 사람을, 상대를, 자신을 할퀴고 또 할퀴면서 20년을 간 그 집착, 그 떨림, 그 욕망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원하는 걸 갖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삶에 대신의 만족을 얻지도 못했던 저 기나긴 세월, 그걸 만든 저게 과연 무엇인가.


 


에니스가 아내 앨마에게 가졌던 것, 웨이트리스에게 가졌던 것, 잭이 ‘새 목장 관리감독’과 가졌던 관계에서 가졌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에니스가 아내와 섹스하다가 그녀를 뒤집을 때, ‘아이를 더 낳지 않을 거라면 더이상 잘 이유가 없지’라고 말했을 때 분노했고, 실소를 터뜨렸다.


 


 


 




 


 


 


저 바보같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잔인한 인간, 그럼에도 자신이 주체할 수도 극복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짐을 한껏 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거만하게 걷는 저 남자, 음절의 종성을 흐물흐물하게 뭉쳐 발음하는 저 촌스러운 액센트의 거만한 말투가 입에 밴 저 남자가 가진 지옥이,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묻고 싶었다.


 


금지되었기에, 스스로 금지라 선언했기에, 이룰 수 없었기에 더욱 길게 간 건 아니었을까 …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다. 더없이 이기적이고 서툰 어린 아이 하나가 보일 뿐이다.

“앙리” 감독, 『헐크』를 일컬어 “두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지독한 멜로”라고 한 적 있다. (나는 “그러면서 키스씬 하나 없더라!”라고 웃곤 했지.) 이 영화엔 “앙리” 답지 않게 베드씬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냉정하다.


 


나는 그들의 사랑보다, 그들의 20년을 풀어내는 “앙리”의 방식이 더 지독하다 … 정말 지독한 인간. 『센스, 센서빌리티』를 찍을 때 윌리엄과 매리앤의 장면에서 우연히 끼어든 호수의 백조들을 휘휘 내쫓으며 “내 영화가 쓸데없이 낭만적이 되잖아!”를 외쳤다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그런 인간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그의 영화에 매번 감탄하는지도 모른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