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


 


 


 


 


 


 


 


 


 


 


 


 


 


 


 


 


 


 


 


 


 


 


 


 


 


 


 


 


 


 


 


 


 


 

“마루 밑 아리에티”, 하야오 없는 지브리의 미래



올해로 70세의 나이가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언제 처음 은퇴를 선언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1997년작 <원령 공주> 때였던 것 같은데 작품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연출작이라는 소식에 일본에서만 2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을 했다던가 그랬었다. 그 이후로 감독의 은퇴와 복귀 선언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그리고 재작년 <벼랑 위의 포뇨>(2008) 을 계속 내놓으며 “지브리 스튜디오는 곧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등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간 후계 양성을 목적으로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연출 데뷔의 기회를 여러 차례 주어왔지만 – <귀를 기울이면>(1995)의 콘도 요시후미, <고양이의 보은>(2002) 의 모리타 히로유키,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2006)의 미야자키 고로 – 그 가운데 어느 누구도 두번째 연출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노감독이 마음 편히 뒷자리로 물러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195년에 처음 씌여진 영국 아동문학가 메리 노튼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각색과 기획, 제작을 담당하고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연출 데뷔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연출하지 않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스튜디오의 후계 구도에 관한 고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보았을 때에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후계자를 찾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작품의 내용과 주제, 그외 기술적인 부분들까지 모든 면에서 창업주의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근작 <벼랑 위의 포뇨> 보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의 데뷔작 <마루 밑 아리에티>가 훨씬 더 미야자키 하야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쏙 빼어닮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과정에 각본과 제작자로 참여한 창업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바꿔 말하자면 신인 감독의 재량권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방법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원제목인 <The Borrowers>는 인간들의 도구와 음식을 빌려다가 사는 소인들이라는 의미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마루 밑에 거처를 마련해놓고 인간들 몰래 필요한 가재도구와 음식물을 얻어다 쓰며 살아가는 이 존재들은 외관상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외관을 갖추었지만 그 자체로 대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 인간 자신들을 모함해서 – 모든 생명체를 상징하는 듯 하다.

그런 상징적인 존재들이 조금씩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끼고 무언가 행동으로써 도움을 주는 등장 인물의 모습은 곧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해야 돼” – 이 지극히 일상적인 작별의 인사말에 간절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은 <마루 밑 아리에티>가 지브리 스튜디오와 창업주의 세계관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곤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마루 밑 아리에티>는 비교적 작은 스케일의 작품이라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공간적으로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특별한 스펙타클을 전시하고 있지도 않는 편이다. 등장 인물들도 거의 만나자 이별인지라 개별 캐릭터에 깊이 감정이입이 되기 보다는 그들의 짧은 만남과 이별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전반적으로 넉넉하게 진행되는 전개 속도와 섬세한 작화 스타일 만큼은 확실히 지브리 스튜디오 특유의 시청각적 체험을 재연해준다고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으로도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계속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연출하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 사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체제 하에서 연출 일을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했댄다 – 판타지를 기반으로 자연과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의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담아 때로는 인간의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 날선 비판을 던지기도 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고유의 작품 세계와 스타일이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에도 충분히 재현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는 앞으로 자주 언급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영진공 신어지












 

“벼랑 위의 포뇨”, 벼랑 끝의 미야자키 할아버지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각종 해산물, 이종교배 생물 포뇨, 섬마을 사람들


2008년의 연말에는 산타 할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어른은 물론 우는 아이들에게도 선물을 안준다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산타 할아버지와 달리 미야자키 할아버지는 남녀노소 모두 희희낙락 즐길 수 있다는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들고 오셨더랬습니다.


아들이 먹칠한 회사의 명예를 다시 되살리고자 은퇴 선언을 철회하고 분연히 일어선 그가 선택한 것은 ‘인어공주’입니다. 극장수입은 둘째 치고 캐릭터 판매로도 매우 짭짤할 것으로 보이는 ‘포뇨’가 등장하는 당 작품은 제작 전에 과거로의 회귀를 천명한 것처럼 ‘토토로’ 적으로 훌쩍 타임머신을 탔습니다. 100% 수작업 셀화로 완성한 손맛이 살아있는 그림과 작품 의 주 대상을 아이들로 한 점 등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마냥 미야자키 할아버지는 그렇게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연어마냥 잘 뛰어 다니는 포뇨. 파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일선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미야자키 할아버지의 모습은 물론 아직 작품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겠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후계자를 정해놓지 못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 어떤 슈퍼스타도 결국 평생 전성기 일 수는 없습니다. 천하의 미야자키 할아버지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로 확실히 전성기가 지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비주얼을 벗겨내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작품성은 ‘포뇨’에 이르러서도 나아지지 못한 모습입니다. 비록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밋밋한 이야기와 주먹구구식의 사건들 그리고 시대착오적 결말은 실망스럽습니다. 점점 진부해져가는 미야자키식 이야기는 이제 그가 슬슬 용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전성기는 갔지만 그래도 그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상상력은 여전히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줍니다. 포뇨와 소스케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보는 것 만 으로도 영혼이 1g정도는 거뜬히 정화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작품 활동을 할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작품들은 내 인생에서 손난로와 같았습니다.


미야자키 할아버지. 뒤늦게나마 메리 크리스마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