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이방인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앙리의 미국 문화 관찰

 


 

 


 


 


 




 



 


다소 거리를 두고 아주 냉정한 시선으로 미국 문화를 훑는 ‘이방인’ “앙리” 감독의 시선은 너무나 놀랍다. 그는 외부자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도 않지만 굳이 강조하거나 드러내지도 않는다.


 


‘앙리’라는 이름을 듣기 전에, 그 감독의 커리어와 배경을 듣기 전에, 누가 『센스, 센서빌리티』를, 『헐크』를, 『아이스스톰』을,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역시 외부자의 시선이군’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만큼 드라이하고 냉정하면서도 훌륭한 테크닉으로 연출을 해간다. 그가 영화의 씬을 쌓아가는 솜씨는 마치 영화로 작업하는 인류학자의 방식처럼 느껴진다.


 


 


 



 


 



생각만큼 잭과 에니스의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거나 절절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내겐 앨마와 로린, 그 웨이트리스 같은 여성들이 훨씬 더 크게 보였으니까. ‘도대체 저들 사이에 있던 저것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묻고 싶다.


 


저렇게 주위 사람을, 상대를, 자신을 할퀴고 또 할퀴면서 20년을 간 그 집착, 그 떨림, 그 욕망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원하는 걸 갖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삶에 대신의 만족을 얻지도 못했던 저 기나긴 세월, 그걸 만든 저게 과연 무엇인가.


 


에니스가 아내 앨마에게 가졌던 것, 웨이트리스에게 가졌던 것, 잭이 ‘새 목장 관리감독’과 가졌던 관계에서 가졌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에니스가 아내와 섹스하다가 그녀를 뒤집을 때, ‘아이를 더 낳지 않을 거라면 더이상 잘 이유가 없지’라고 말했을 때 분노했고, 실소를 터뜨렸다.


 


 


 




 


 


 


저 바보같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잔인한 인간, 그럼에도 자신이 주체할 수도 극복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짐을 한껏 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거만하게 걷는 저 남자, 음절의 종성을 흐물흐물하게 뭉쳐 발음하는 저 촌스러운 액센트의 거만한 말투가 입에 밴 저 남자가 가진 지옥이,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묻고 싶었다.


 


금지되었기에, 스스로 금지라 선언했기에, 이룰 수 없었기에 더욱 길게 간 건 아니었을까 …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다. 더없이 이기적이고 서툰 어린 아이 하나가 보일 뿐이다.

“앙리” 감독, 『헐크』를 일컬어 “두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지독한 멜로”라고 한 적 있다. (나는 “그러면서 키스씬 하나 없더라!”라고 웃곤 했지.) 이 영화엔 “앙리” 답지 않게 베드씬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냉정하다.


 


나는 그들의 사랑보다, 그들의 20년을 풀어내는 “앙리”의 방식이 더 지독하다 … 정말 지독한 인간. 『센스, 센서빌리티』를 찍을 때 윌리엄과 매리앤의 장면에서 우연히 끼어든 호수의 백조들을 휘휘 내쫓으며 “내 영화가 쓸데없이 낭만적이 되잖아!”를 외쳤다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그런 인간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그의 영화에 매번 감탄하는지도 모른다.


 


 



 


영진공 노바리

 


 


 


 


 


 


 


 


 


 


 


 


 


 


 


 


 


 


 


 


 


 


 


 


 


 


 


 


 


 


 

기억의 궁전과 그래픽 인터페이스

 


 

 


 


 








 


 

흑사병과 전쟁이 휩쓸어버린 중세의 유럽은 쑥대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은 골로 가고, 큰 도시들은 약탈과 흑사병의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시골로 줄행랑을 쳤다. 그로써 중세의 마을들은 농경시대의 촌락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별다른 교통수단도 없고, 세상도 흉흉해서 여행이란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마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립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취와 수탈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에 겨웠다. 학문은 고사하고 항문에 힘쓰기에도 밥이  아까웠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상황이 요렇다 보니 정보는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one, for the money~

two, for the show~


 


 


음악가와 시인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인 방랑 연예인들은 마을을 돌며 실제 있었던 일을 시나 노래로 부르며 공연을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알 수 있었다. 공연은 운율로 이루어져 있었고 반복적이어서 공연자와 관객 모두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들 음유시인들은 가끔씩 서로 만나 이야기꺼리도 교환하고 자신들의 놀라운 기억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시 경연회 같은 것도 펼쳤다. 머리 좋은 이들은 서너 번만 듣고도 수백 줄이나 되는 시 전체를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다. 한술 더떠 대학의 교사들은 제자들이 큰소리로 말하는 백 줄의 텍스트를 단 한번만 듣고서 암송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는 ……


 



 


이처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던 세계에서는 좋은 기억력이 필수였다. 왕의 전언을 직접 전해야 하는 조신들은 긴 전언을 말 그대로 암송하는 훈련을 받았다. 학자들 역시 값비싼 필기 재료들 때문에 기억 훈련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의 문학 형태에는 쉽게 기억할 수 있게 압운의 형식을 띄고 있다. 14세기에 이르기까지, 법률적인 서류들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글에 압운이 쓰였다.


 


또한 학자들 사이에선 기억술이 수사학의 표제 아래 교육되었다. 그 교재로는 [헤레니우스에게 바치는 수사학]이라는 기억술 참고서가 쓰였다. 이 책은 ‘기억 극장’이란 테크닉을 이용해 엄청난 분량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담고 있었다. ‘기억 극장’이란 간단히 말해 머릿속에 가상의 극장을 만들고 요소들을 기억해야할 것과 연결짓는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기억의 ‘대리물’ 역할을 했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억 극장을 이용한 이미지 기억법을 

종교적인 문제들을 기억한는 데 활용할 것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이런 기억술의 기원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일화가 전해져온다. 시모니데스는 한 귀족이 베푼 파티에서 그 귀족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송했다. 그러나 있는 놈이 더한다고 귀족은 시모니데스에게 원래 비용의 반만 준다. 시의 내용에 자신 뿐만 아니라 카스토르와 폴룩스라는 쌍둥이 신도 찬양했기 때문에 나머지 비용은 두 신에게 받으라는 핑계였다.


 


빈정상한 시모니데스는 파티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장은 폭삭 무너지고 만다. 시모니데스 만큼 빈정상한 쌍둥이 신이 파티장을 뭉개버린 것이다. 나중에 달려온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지만 너무나 피떡이 되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짠 하고 나타난 시모니데스는 집안 구조부터 누가 어디에 앉아있었는지를 완벽하게 기억해내어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시모니데스가 파티장의 모든 것을 완벽히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의 궁전’이라는 기억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전개를 건축물로, 이야기 속의 추상적인 개념들을 널찍하고 치밀하게 장식된 상상의 집으로 생각했다. 시모니데스의 방법은 시각적 기억이 문자 기억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런 ‘기억의 궁전’ 개념이 중세를 지나 현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컴퓨터 때문이었다.

 


 





The ENIAC computer and its coinventor, John W. Mauchly.

© Bettmann/Corbis




 

초기의 컴퓨터는 지금과 비교하면 전혀 세련되지 못한 물건이었다. 이진법 코드와 축약된 명령어, 펀치 카드에 어설프게 입력된 데이터, 타자기로 찍은 출력물 같은 것을 뱉아내는 깡통이었다. 요녀석으로 뭘 쫌 하기 위해선 일일이 명령어를 입력해야만 했기 때문에 누구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 깡통으로 돈을 벌기 위해선 누가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 문제는 1970년대에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Xerox PARC에서 최초로 개발되어 애플사의 매킨토시 컴퓨터에 의해 대중화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가 대성공을 거두고 널리 채택됨으로써 해결되었다. GUI의 등장으로 사람과 컴퓨터가 상호작용하는 방법이 극적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컴퓨터 사용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모바일 GUI도 중요해졌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는 쉽게 말해 윈도우을 떠올리면 된다. 윈도우의 등장으로 이제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컴퓨터의 복잡한 명령어를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콘을 클릭만 하면 누구나 컴퓨터를 쉽고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한 명령어를 이미지로 형상화 시킨 것이다.

 

또한 데이터 공간을 이미지화 시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폴더를 만들어 비슷한 자료를 모아놓고, 화면상에 아이콘들을 필요에 맞게 배치시킴으로써 무형의 데이터 공간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릴 수 있게 형상화 시킨 것이다. 특히 저장매체의 용량증가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가상공간은 등장은 오늘날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주었다.

 


컴퓨터가 차지하는 책상 위 물리적 공간은 기껏해야 1㎥지만 그 컴퓨터가 품고 있는 가상의 공간은 어마어마하다. 누구나 자기 방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만한 데이터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컴퓨터들이 인터넷에 연결됨에 따라 우리가 접하는 데이터 공간이나 복잡한 네트워크를 ‘상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런 시대에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는 현대판 ‘기억의 궁전’이다. 머릿속에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정보를 이미지화 시키듯이 GUI는 0과 1로 이루어진 사이버 공간을 이미지화 시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 주었다. 우리는 인터페이스라는 연결 통로를 통해 이 가상 공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엥겔바트 할아버지



 


엥겔바트는 정보에 대한 안내를 해주는 가이드 역할이 꼭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위대한 기술 혁신은 ‘직접 조작’을 원칙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1968년 그가 제시한 마우스는 현재 가장 중요한 인터페이스 도구가 되었다. 마우스 덕분에 우리는 정보 공간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그 안의 정보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마우스는 단순한 지시 도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엥겔바트가 개발한 최초의 마우스


 


 


 




그래픽 인터페이스라는 비트맵으로 구성된 정보 공간, 즉 비트매핑*의 등장과 가상적인 공간과 물리적인 피드백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마우스의 등장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을 변화시켰으며 컴퓨터를 상상하는 우리의 방식 또한 바꾸었다.

 


공간의 개념이 기술에 의해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기억의 궁전’은 이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현실의 궁전’이 되었다.


 


 


 



* 비트매핑bitmapping: 지도와 컴퓨터의 이진법 코드가 결합하여 정보라는 새로운 세계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뜻.

 


컴퓨터 스크린의 각 픽셀에는 메모리가 조금씩 할당되어 있다. 단순한 흑백 스크린에서는 이 할당된 조그만 메모리 공간이 컴퓨터 내부에서 0 또는 1을 나타내는 한 개의 비트다. 픽셀에 불이 들어오면 이 1비트의 값은 1이고, 픽셀의 불이 꺼지면 0이다. 컴퓨터는 스크린을 이와 같은 픽셀들이 가로 세로로 꽉 차 있는 2차원적 공간으로 인식한다. 처음으로 데이터가 물리적 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자가 컴퓨터 프로세서를 통해 왔다갔다 하면서 시각적인 이미지가 스크린에 나타나는, 물리적인 ‘동시에’ 가상적인 공간이 생긴 것이다.



 


 



– 참고 및 발췌 –


제임스 버크 저, 장석봉 역, [우주가 바뀌던 날], 궁리, 2010

스티븐 존스 저, 유제성 역, [무한상상, 인터페이스], 현실문화연구, 2003

 


 




영진공 self_fish


 


 


 


 


 


 


 


 


 


 


 


 


 


 


 


 


 


 


 


 


 


 


 


 


 


 


 


 


 

혹파리의 패륜적 인생플랜 (2/2)

 

 


 


 


* 1편에서 이어집니다 *


 


 


 



 


 





자연이란 예측하기가 어려운 녀석이다. 기상청 운동회 날에도 비가 쏟아지는 판국에 하물며 컴퓨터는 커녕 계산기 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생물들이 자연을 예측하고 대비하기란 불가능 하다.


 


결국 가뭄이나 폭우와 같은 극단적이고 불규칙한 환경 속에서 생물들은 운명을 걸어야 한다. 특히 작고 약한 생물일수록 이런 환경의 변화는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이들에겐 자연에서 적응할 만한 안정적인 패턴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자신을 환경에 맞게 정밀하게 조율하기가 매우 힘들다. 이럴 때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접고 속편하게 무작정 번식만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는 것처럼 언젠가 상황은 끝날 것이고 그때 자손이 살아남아 새로운 식량을 찾을 수 있으려면 지금 먹을 것이 있을 때 미친 듯이 번식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번식을 극대화하려는 진화적 압력을 r선택이라 부르며 이런 방식으로 적응한 생물을 r전략가라 칭한다.

 


반면에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서 환경이 허용하는 최대의 개체군을 이루며 존재하는 생물 종이라면, 적응 능력 자체가 별 볼일 없는 자손을 많이 낳아 봤자 특별한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밀 조율된 소수의 자손을 낳아서 기르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런 생물을 K전략가라고 부른다.




혹파리는 r전략에 따라 생존플랜을 짰던 것이다. 그럼 혹파리와 비슷한 환경에 사는 다른 녀석들도 이와 비슷한 번식 방법을 쓰고 있을까? 맞다. 바로 진딧물이다.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예전 포스팅에서 진딧물의 독특한 번식 방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 소개했던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진딧물은 새로운 잎에 정착하면 모두 암컷인 새끼만을 낳으며 무성생식을 시작한다. 이 새끼들은 날개가 없는 미성숙 개체로 자라면서 태어남과 동시에 몸속에서 또다른 새끼들을 기른다. 즉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아기 몸 속에 다음에 태어날 아기가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진딧물은 이런 방식으로 암컷 한 마리로 1년 뒤 5240억 마리로 불어날 수 있다. 깨끗하던 농작물이 며칠 새에 진딧물로 코팅(?)되는 것이 다 이런 번식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먹이가 감소하면 암컷과 수컷인 새끼를 낳으며 날개 달린 진딧물이 태어난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천천히 성장 발달하여 유성생식을 한다. 그들은 다른 새 잎을 찾으러 날아가고 거기서 낳은 자손들은 또다시 날개없는 형태로 되돌아가 무성생식을 시작하며 미친 듯이 번식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빠른 번식을 위해서라면 알을 많이 낳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까하고 말이다. 스스로의 몸을 아이를 위한 식량으로 바치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진작부터 부지런한 생태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알을 많이 낳는 것보다 번식을 일찍 시작하는 것이 개체군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번식 개시 연령을 10퍼센트 앞당기면 출산력은 100퍼센트 증가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전형적인 K전략가이다. 우리는 대부분 한 번에 한 명을 낳아 금이야 옥이야 키운다. 이런 K전략가의 관점에서 일부 r전략가들의 번식방법은 종종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우리의 관점일 뿐이다. 이는 혹파리 뿐만 아니라 최근 영화의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는 ‘연가시’도 마찬가지다.


 


K전략이든, r전략이든 간에 생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번식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취하는 것 뿐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필요치 않다. 사실 입장을 바꿔 다른 생물들이 판단할 때 인간의 번식 방법도 썩 유쾌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태어나서 인생의 절반이 지나도록 부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종이니 말이다.


 


어미를 파먹으며 태어나는 혹파리와 평생을 부모에 기대어 사는 인간 중 누가 더 못난 번식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덧붙여 …



 

예전 진딧물이 왜 저런 번식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했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번식방법일 거라 두루뭉실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찝찝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에세이를 읽던 중 진딧물이 그러한 번식 방법을 채택한 이유를 명확하게 정리해준 글을 찾게 되었다.

 

이 글은 사이언스 북스에서 출간한 [다윈 이후]에 실려있는 ‘파리의 모체살해’라는 에세이에서 발췌, 편집한 글이다.

 


 


영진공 self_fish



 


 


 


 


 


 


 


 


 


 


 


 


 


 


 


 


 


 


 


 


 


 


 


 

혹파리의 패륜적 인생플랜 (1/2)

 

 


 


 


 




나? 혹파리!!


 


 

파리 중에는 혹파리라는 녀석이 있다. 똥이 아닌 균류(fungi), 그중에서도 버섯을 집이자 음식삼아 살아가는 녀석이다. 녀석을 언급하는 이유는 버섯이라는 유별난 음식 취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오줌 지릴 정도로 살벌한 번식방법 때문이다.

 


혹파리의 위장에 대면 버섯은 한 두 끼 만에 먹어치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버섯 한 개는 한동안 놀고 먹으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일확천금을 얻은 혹파리는 풍족한 삶 속에서 베짱이 마냥 실컷 춤추고 노래 부르며 풍족한 삶을 살다 갈 것 같지만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혹파리들은 새로운 버섯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번식에 미친 듯이 열을 올린다.

 

 



 


 

혹파리는 먼저 알을 낳는데 여기서 모두 암컷인 새끼들이 태어난다. 근데 이 새끼들은 성충으로 자라지 않고 애벌레나 번데기 상태로 머무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몸 속에서 새끼들을 기르기 시작한다.

 

근데 경악스럽게도 요넘들이 얌전히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내부에서부터 먹어치우면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새끼들의 몸속에서는 이틀 내에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나 또다시 어미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이런 끔찍한 패륜의 사슬은 식량이 떨어져야 끊어지게 된다.

 

버섯이 줄어들면 혹파리는 모두가 수컷이거나 암수가 혼합된 새끼를 낳기 시작하고 결국 굶주리게 되면 정상적인 파리로 성장하여 다시 다른 버섯을 찾으러 날아간다.

 


 




 


 


근데 자연에는 이런 패륜 곤충이 또 있다. 미크로말투스 데빌리스(micromalthus debilis)라는 딱정벌레 역시 혹파리와 똑같은 패륜적인 인생 플랜을 가지고 있다.


 


이 벌레는 축축하고 썩은 나무를 먹고 사는데 이들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을 때는 무성 생식을 하며 암컷만을 낳는다. 요놈의 새끼들도 몸 안에서 성장하고 결국 속에서 엄마를 먹어 치우며 나온다. 새끼들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또다시 번식을 하고 그 새끼들은 다시 그들의 몸을 안에서부터 먹어치운다. 그러다 먹을게 떨어지면 다시 수컷과 암컷을 낳고 정상적으로 성숙한 개채로 성장한다.




도대체 왜 요놈들은 이렇게 한 여름밤의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살벌한 방식으로 번식하는 것일까? 왜 풍족한 식량을 앞에 두고 즐기진 못할 망정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번식에 목을 메는 걸까? 이러한 궁금증에 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이 호로자식이란 오명을 뒤집에 쓰면서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번식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익후! 뉘신지??


 


 



다윈 할아버지가 진화론을 들고 나왔을 당시에는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그에 맞게 형태를 개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진화론도 발전을 거듭하면서 버전업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이론 개체군 생태학(theoretical population ecology)이란 학문도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진화론자들은 생물들이 크기와 모양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시기와 각각의 활동, 예를 들면 먹이 섭취, 성장, 번식 등에 들이는 에너지량을 조절해서도 환경에 훌륭히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리의 형태를 개선한 핀치의 부리


 



 


이러한 조절 작용을 ‘생활사 전략(life history strategy)’이라고 부른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이론으로는 로버트 헬머 맥아더(Robert Helmer MacArthur, 1930~1972)와 에드워드 윌슨이 1960년대에 개발한 R선택(r-selection)과 K선택(k-selection)이론이 있다.



 


 


 



 


 


 


영진공 self_fish

 


 


 


 


 


 


 


 


 


 


 


 


 


 


 


 


 


 


 


 


 


 


 


 


 


 


 

“레미제라블”, 나는 꿈을 꾸었네

 



 


 


 


 


수잔 보일(Susan Boyle)이 하도 집안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옆집 사람한테 고소를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기사 참고)


 


수잔 보일이 누구냐하면 수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 중에서,


엄청난 반전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데,


 


지난 2009년 “Britain’s Got Talent”에 47세의 나이로 참가하여,


극성맞은 아줌마의 외모와는 다르게 놀라운 가창력으로 결승에 올라,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 기세를 몰아 그녀는 세계 투어를 하기도 하였고, 발표한 앨범


“I Dreamed A Dream”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챠트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처음 오디션장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그걸 한 번 보도록 하자.







 


 



 


그녀가 오디션에서 부른 노래의 제목은 “I Dreamed A Dream”.


이 곡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에,


삽입되어있는 곡인데 극 중에서는 Fantine이 부르는 노래이다.


 


프랑스에서 조촐하게 만들어졌던 이 무대극을 영국의 제작자가 뮤지컬로 만들어 공개한 것이 1985년, 그리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진 건 1987년.


 


그 후로 이 뮤지컬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극 중의 하나로 손 꼽히며 브로드웨이에서 지금도 계속 공연 중에 있다.


 


우리에게는 쟝발잔과 신부의 에피소드 정도로 알려져있는 작품, “레미제라블”.


허나 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프랑스 혁명 시기 가난과 핍박에 허덕이던,


“비참한 인생들 (Les Misérables)”이다.


 


 









 


 


 


그러니까 극 중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Fantine처럼,


직장을 잃고 생계를 위해 매춘의 길로 들어서는 이들,


그녀의 딸 Cosette처럼 어릴때부터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는 이들,


처참한 대우를 받으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던 공장노동자들,


그런 사회의 현실에 분노하여 혁명을 외치며 투쟁에 나서는,


Marius 같은 이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과 지금의 우리 현실이 구조적으로 뭐가 그리 다를까.


누리는 사회적 자원의 양이 늘고 정치 참여의 정도와 기회가 넓어졌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변하지는 않은 듯 하다.


 


요즘은 오히려 소위 선진국의 부자들과 고위정책담당자들이 지레 나서서,


호들갑스럽게 자본주의의 종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는데,


과연 그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있는 미래의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의 심중과 우리의 꿈은 결국은 일치하게 될까.


 


 


 


I Dreamed A Dream


From the musical “Les Misérables”


 


 


 



 


 


 


 


There was a time when men were kind
When their voices were soft
And their words inviting
There was a time when love was blind
And the world was a song
And the song was exciting
There was a time
Then it all went wrong


 


사람들이 서로를 챙겨주던 때가 있었지,


그때는 모두가 다정한 목소리로,


서로를 이해하는 말들을 나누었어,


그때는 사랑에 조건이란 건 없었어,


세상은 온통 노래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노래는 모두 흥겹기만 했었지,


그런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 모든 게 잘못돼 버렸어 ……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No song unsung, no wine untasted


 


그 꿈을 꾸었던게 언제였던가,


부푼 희망과,


삶의 의욕이 넘치던 그때,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꿈꾸었지,


신은 모든 걸 용서하시리라 꿈꾸었지,


하지만 그때 난 어리고 겁이 없었어,


그 꿈들은 옛일이 되었고 잊혀진채 버려졌다네,


그때에는 사람을 몸값으로 흥정하지 않았지,


그때에는 누구나 노래를 불렀고, 모두들 술을 나눠 마셨지,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As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하지만 한밤 중에 그 호랑이들이 나타나고 말았지,


천둥처럼 낮고 음산한 울음을 그르렁대면서,


그 놈들은 나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놓았고,


그 놈들은 내가 꾸었던 꿈을 수치로 바꿔 놓았지,  


 



He slept a summer by my side
He filled my days with endless wonder
He took my childhood in his stride
But he was gone when autumn came


 


그는 나와 함께 여름을 지냈다네,


그는 나의 나날들을 멈추지않는 경이로 채워주었지,


그는 내 어린시절을 그의 걸음으로 감싸주었지,


그러나 가을이 오자 그는 떠나버렸네,   


 



And still I dream he’ll come to me
That we will live the years together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And there are storms we cannot weather


 


난 여전히 그가 내게 돌아오리라 꿈꾸고있네,


우리 오랜 세월을 함께 살거라 믿고있다네,


하지만 이뤄지지 않을 꿈이 있다는 걸 나는 아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있다는 것도 아네,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난 꿈꾸었다네,


지금의 지옥과는 전혀 다른 나의 삶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나의 삶을,


하지만 지금의 삶은 내가 꾸었던 꿈을,


죽여버렸다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