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파리의 패륜적 인생플랜 (1/2)

 

 


 


 


 




나? 혹파리!!


 


 

파리 중에는 혹파리라는 녀석이 있다. 똥이 아닌 균류(fungi), 그중에서도 버섯을 집이자 음식삼아 살아가는 녀석이다. 녀석을 언급하는 이유는 버섯이라는 유별난 음식 취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오줌 지릴 정도로 살벌한 번식방법 때문이다.

 


혹파리의 위장에 대면 버섯은 한 두 끼 만에 먹어치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버섯 한 개는 한동안 놀고 먹으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일확천금을 얻은 혹파리는 풍족한 삶 속에서 베짱이 마냥 실컷 춤추고 노래 부르며 풍족한 삶을 살다 갈 것 같지만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혹파리들은 새로운 버섯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번식에 미친 듯이 열을 올린다.

 

 



 


 

혹파리는 먼저 알을 낳는데 여기서 모두 암컷인 새끼들이 태어난다. 근데 이 새끼들은 성충으로 자라지 않고 애벌레나 번데기 상태로 머무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몸 속에서 새끼들을 기르기 시작한다.

 

근데 경악스럽게도 요넘들이 얌전히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내부에서부터 먹어치우면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새끼들의 몸속에서는 이틀 내에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나 또다시 어미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이런 끔찍한 패륜의 사슬은 식량이 떨어져야 끊어지게 된다.

 

버섯이 줄어들면 혹파리는 모두가 수컷이거나 암수가 혼합된 새끼를 낳기 시작하고 결국 굶주리게 되면 정상적인 파리로 성장하여 다시 다른 버섯을 찾으러 날아간다.

 


 




 


 


근데 자연에는 이런 패륜 곤충이 또 있다. 미크로말투스 데빌리스(micromalthus debilis)라는 딱정벌레 역시 혹파리와 똑같은 패륜적인 인생 플랜을 가지고 있다.


 


이 벌레는 축축하고 썩은 나무를 먹고 사는데 이들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을 때는 무성 생식을 하며 암컷만을 낳는다. 요놈의 새끼들도 몸 안에서 성장하고 결국 속에서 엄마를 먹어 치우며 나온다. 새끼들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또다시 번식을 하고 그 새끼들은 다시 그들의 몸을 안에서부터 먹어치운다. 그러다 먹을게 떨어지면 다시 수컷과 암컷을 낳고 정상적으로 성숙한 개채로 성장한다.




도대체 왜 요놈들은 이렇게 한 여름밤의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살벌한 방식으로 번식하는 것일까? 왜 풍족한 식량을 앞에 두고 즐기진 못할 망정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번식에 목을 메는 걸까? 이러한 궁금증에 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이 호로자식이란 오명을 뒤집에 쓰면서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번식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익후! 뉘신지??


 


 



다윈 할아버지가 진화론을 들고 나왔을 당시에는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그에 맞게 형태를 개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진화론도 발전을 거듭하면서 버전업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이론 개체군 생태학(theoretical population ecology)이란 학문도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진화론자들은 생물들이 크기와 모양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시기와 각각의 활동, 예를 들면 먹이 섭취, 성장, 번식 등에 들이는 에너지량을 조절해서도 환경에 훌륭히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리의 형태를 개선한 핀치의 부리


 



 


이러한 조절 작용을 ‘생활사 전략(life history strategy)’이라고 부른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이론으로는 로버트 헬머 맥아더(Robert Helmer MacArthur, 1930~1972)와 에드워드 윌슨이 1960년대에 개발한 R선택(r-selection)과 K선택(k-selection)이론이 있다.



 


 


 



 


 


 


영진공 self_fish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기를 소망하며

지구는 멸망한 듯 보인다. 동물은 사라졌고 작물은 자라나지 않으니 사람은 먹을 게 없다. 남은 먹이는 사람 뿐이다. 코맥 맥카시가 창조한 지옥 ‘더 로드’의 풍경이다.

아비와 아들이 남았다. 자신들을 먹이로 삼으려는 사람 앞에서 아비는 한 알 남은 총을 겨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굶주림을 짐작하는
아들은 남은 통조림을 건넨다. 아비의 총과 아들의 통조림. 코맥 멕카시의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비의 총과 아들의 통조림 사이에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동물들이 사는
세상은 아비의 총처럼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그것이 동물 세계의 규칙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그것은 인간의 규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이기만 한 것일까?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진화론에서 나왔지만 다윈은 인간에게는 적자생존을 넘어선 ‘사회적 본능’이 있다고 말했다. 동류에게 건네는
통조림과 같은 본능. 그것은 동물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만의 감정이다. 동물이지만 동물과는 또 다른 감정을 지닌 인간.
‘진보’와 ‘보수’는 여기서 갈린다. 인간은 동물일 뿐이라며 동물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보수’이며 인간은 동물의 규칙을
넘어선 인간만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진보’인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나 ‘믿음’은 과학이 아니다. 다시 말해
불확실한 것이다. 인간은 이 믿음을 변하지 않는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더 로드’는 인간의 본능은 ‘진보’에 가깝다며 결론 맺는다.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다행히 ‘더 로드’와 같은 지옥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