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 케이스”, 현대판 무당들


굳이 옛날 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들추어내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1970년대 미국의 한 고아원에서 원아 한 명이 죽은 사건이 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건을 파헤치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대부분의 원아들은 체벌을 신조로 삼는 수녀에게 다양한 도구로 죽기 직전까지 맞았었고,
어떤 아이들은 병원에 가서 방사능 처리된 콘플레이크를 먹고 불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애는 입양되기에는 너무 나부댄다는 이유로 전기충격치료를 받다가 결국 죽었다.
게다가 그 애는 ……

『Cold Case』라는 미국에서 제작하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다.
『C.S.I 』와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 파헤치는 범죄의 진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최소한 10년 전 범죄, 어떤 경우엔 50년 전의 미해결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도 따끈따끈한 사건(Hot Case)이 아니라 이미 식어버린 사건(Cold Case)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릴리 러쉬’ 역을 맡은 “캐서린 모리스”



오래된 사건을 파헤치는데는 크게 세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그 사건의 기록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라지거나 이미 남아있는 기록도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관계자들의 증언도 그렇다. 50년이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변형되고 윤색되어도 여러 번 될 시간이다. 고로 한 증인의 증언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이 남아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증인들 대다수는 죽어버렸다. 증거들도 거의 해석불능이거나 어떤 것은 사라져버렸다.

이 첫 번째 이유가 현실적인 제약이라면, 두 번째는 보다 인식론적인 장벽이다. 그것은 그 당시 맥락에서 벌어진 사건을 지금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콜드케이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건이 일어났던 1970년대는 미국도 냉전이 한참이던 시기이다. 당시에 핵무기는 인류 이전에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무기였고, 그 무기의 대응책을 찾아내기 위한 실험은 (비록 그 실험에 아무것도 모르는 고아들을 데려다 썼다고 해도)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적어도 오늘 에피소드에 등장한 의사는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애국이었다고 ……

체벌도 그렇다. 당시에는 체벌이 당연한 훈육수단이었다. 닥터 스포크가 쓴 육아책이 전 미국에 퍼지기 전까지는 애들은 때려서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믿음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애들을 사랑한다면 때려야 했다.

마지막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제기다.
이미 지난 일을 끄집어내서 뭘 어쩌겠냐는 거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므로 처벌할 수도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그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뿌리부터 건드려야 한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 ……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그닥 유명하지도 않은 드라마 얘기를 푸는 건, 이 드라마에서 다루는 위의 두가지 문제가 우리나라의 과거사 규명에 제기되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허술한 기록시스템은 당시의 증거들도 오리무중으로 만들기 십상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두 번째의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이전까지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 계속 우리나라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30년이 넘게 지속되어왔다. 30년이면 한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 환경에서 태어나서 그 환경을 당연히 여기며 자라난 세대가 활동인구의 절반이 넘는 시점이란 뜻이다.

당시 일본의 위치는 마치 지금 우리에게 미국의 위치와도 같았다. 최소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피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고로 일부의 인간들은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행동들은 친일과 일상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다고 주장을 한다. 즉, 당시에 일어난 사건은 당시의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
시대가 달라져도 탓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체벌은 당시의 교육방식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때리다가 애가 죽으면 과실치사인 것은 변함없다. 핵무기에 대한 대응방법을 실험하는 거야 애국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불임으로 만들어버려야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과거사도 그렇다. 어쩔수 없었던 것도 있고, 당시엔 당연했던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걸 다 빼고나서도 남는 잘못도 있다.

내가 알기로 과거사 규명은 그때 치부해서 재벌이 된 사람의 재산을 뺏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신문을 처벌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단지 그때 그랬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경험이다. 굳이 지난 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인간이 매일같이 하는 게 바로 그거다. 해결되지 않은 과거를 곱씹기 ……
자기가 과거에 한 일, 과거 경험을 통해서 현재의 나를 정의하고 행동하기 ……

인간에게 과거는 없다. 최소한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한,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그의 현재를 정의하고 구속하는 틀이다.

『콜드케이스』에서 수사관들이 굳이 다 지나간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도 그거다. 그 사건의 해결은 이미 식어버린 사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일이다.

사건이 해결된 후,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사건의 당사자들)은 갑자기 20년전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사건이 해결된 후련함을 누린다. 이 장면은 마치 일본 만화에서 귀신이 성불하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은 그 해결되지 못한 시점에 묶여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되면서 과거의 구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삶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현대판 무당들

이 드라마 『콜드케이스』는 수사드라마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치료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구원(舊怨)을 꺼내어 해결해주는 현대판 무당이다. 이들이 해결하는건 결국 정신건강의 문제이다.

뭐 아직도 우리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고 그걸 위해서 과거따위는 거들떠 볼 여유가 없다면, 지금까지 그랬듯 과거는 넘어가자.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났다면 과거를 현재에 비추어 계속 조명하여야 할 것이다.

웃긴 건 과거사를 규명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오히려 과거사를 걸핏하면 들먹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인간을 정의한다는 원칙은 사실 그들이 더 고지식하게 지킨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이 과거사 규명을 그렇게 싫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만, 그런 그들 때문이라도 과거사 규명은 필요하다.


영진공 짱가

“여선생 VS 여제자”, 이젠 이런 영화도 못 보게 하려나???

[편집자 주]
일제고사를 체험학습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알려주고 이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그리 하도록 하였다는 이유로 “전교조” 선생님들 일곱 분이 <성실의 의무>위반과 <명령불복종>의 사유로 해임 또는 파면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보도나 발표를 보면 그냥 선생님이 아니고 꼭 “전교조”를 앞에 붙이는 건 뭐며, 교사는 성직이라던 이들이 <명령불복종>을 운운하는 건 또 뭔가.
전교조의 내부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은 느끼고 있는 바이나, 머리에 띠두르고 투쟁을 외친 것도 아니고 시험시간에 교실 문을 못으로 박은 것도 아닌데 해임 또는 파면이라니. 도대체 누가 정치적인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고 사회 구성원간 갈등을 조장하는 건지.
권력이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알아서 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지 날씨마저 사뭇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당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의 감독은 『선생 김봉두』를 연출했던 장규성.

그런 탓에 당 영화는 『선생 김봉두』의 구성이 그랬던 것처럼 전반부에는 여선생 ‘여미옥'(“염정아” 분)과 여제자 ‘고미남'(“이세영” 분)이 학교에 갓 부임한 꽃미남 ‘권상춘'(“이지훈” 분) 새임을 가운데 두고 펼치는 피 튀기는 쟁탈전에 뽀인트를 맞춰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연적이자 사제인 둘 간의 화해를 통해 아랫목 같은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생 김봉두』가 오로지 김봉두 개인의 교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당 영화는 제목처럼 여선생과 여제자간의 맞짱 구도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캐릭터 싸움에 집중하는데 그 핵심은 나이 꽉 찬 노처녀지만 하는 짓은 얼라같은 미옥, 그리고 꼬맹이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한 미남, 이 둘의 상식을 뒤집기 한 판 하는 역할 파괴로써 이 지점이 바로 관객의 허파를 간지럼 피는 태풍의 눈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미옥의 경우, 권상춘 동료새임을 보자마자 끓어오르는 기쁨을 참지 못해 ‘앗싸라비아 콜롬비아’를 외치며 오징어 구워 들어가는 거 마냥 별 오도방정을 다 피우는 것에 반해 미남은 다 큰 처녀에게나 볼 수 있는 육탄공세를 펼치며 꽃미남 새임을 유혹하는 등 둘 다 그 연령대에 구사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선생 vs 여제자』가 이렇게 단순히 웃기다가 끝나고 마는 영화는 아니다. 전작 『선생 김봉두』에서 보았듯, “장규성” 감독은 교육계의 부조리한 단면을 소재 삼아 웃음을 주다가 스리슬쩍 그 현실에 똥침을 놓는 것이 장기인데 무엇보다 일품은 그러한 현실 고발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미이다.

당 영화 역시 그렇다. 보기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선생과 제자의 숙명적 치정극 같지만서도 그 맞짱의 이면에는 일개 지방의 초등학교라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새임들이 서울로만 가려는 등 개인의 영달에만 신경 쓰고, 또 부모는 부모대로 먹고 싸기 힘든 빠듯한 현실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은 까닭에 자라나는 우리의 새싹들이 방치되고 있는 안타까운 교육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감독은 이런 부분들이 잘못되었다고 직접적으로 똥침 놓는 것이 아니라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미옥과 미남이 이런 현실을 깨닫고 결국 화해에 이르는 눈물 콧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 바대로 당 영화는 『선생 김봉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독특한 소재와 스토리를 무리 없이 소화하면서 많은 재미를 안겨주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끗.

영진공 나뭉이

 

그대, 혹시 꿈을 죽이셨나요 …

 

“朝聞道 夕死可矣”
뜻인즉슨,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나 같은 필부야 아침에 도를 들어도 그게 뭔줄 알지 못하겠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도를 얻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즐겨야지,
왜 죽어도 좋은 것이냔 말이다.

어렵사리 얻은 걸 잘 간직하고 가끔 꺼내어 보여주기도 하고 은근히 자랑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의 즐거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런게 아닌가 보다.
난 도가 무슨 100평짜리 아파트나 현금 50억 쯤이나 되는 건 줄 안 건가 보다.
도는 깨우침이요, 살아가는 길인데 난 그걸 물질로 생각하여 소유하는 건줄 안 거다.
그러다 오히려 소유에 내가 노예가 되어버린 거다.

왜 그런 걸까.
왜 난 모든 걸 물질로, 소유로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가.
내 삶의 조건을 부유하게 그리고 편하게 해 줄 것에 얽매여,
도리어 스스로 거기에 삶을 종속시키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자초하고 있느냔 말이다.

삶을 소비로 알고, 물질의 많음을 권력으로 계산하는,
그래서 꿈을 욕구로 대체하는 걸 미덕이라 아는 지금 나의 모습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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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각 지방단위별로 교육감 선거를 치르고 있고, 서울에서는 내일(7월 30일) 투표를 한다.
그래서 여러 후보들이 저마다의 교육관을 내세우며 선출을 호소하고 있다.

그걸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교육이라? … 뭘 가르치는 걸까? … 누군가에게 뭘 가르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걸까? …”

‘이것이 옳으니 이리 하여야 한다’ 또는 ‘저것이 그르니 저리 하지 말거라’ 라고 제시하고 그대로 따르라는 건 강요나 주입이지 교육이 아닐 것이다.

사실을 보여주고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함께 토론하여 스스로의 판단과 방법론을 정립하도록 서로 돕는 활동,

그런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분석과 해석 그리고 전망을 할 수 있는 종합적 사고 능력이 발전되도록 하는 활동,

그게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가 절대진리라 “배웠고”, 그리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간’이 되라 “배웠다”.

자, 그건 그렇게 배웠으니 됐고 … 그리고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일점이라도 더 받고 남들보다 반발짝이라도 빠르게 세상에 적응하는 요령을 외우고 몸으로 익혔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공식을 외우고, 소설과 시의 의미를 외웠다.
그러면서 경쟁에서 앞서야 대우 받는다는 걸, 어떻게든 눈에 띄고 능력있어 보여야 무시 당하지 않는다는 걸 온 감각으로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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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다시 우리의 아이들이 배우고 겪게 하겠는가?
그걸 “교육”하겠는가?

돈 있으면 편하고, 성공하면 잘 나가고, 권력을 쥐면 무시 당하지 않는다 …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변치 않는 진리가 아니다.
강요하고  주입할 무엇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할 여러 길 중 몇 가지일 뿐이다.

‘나라에 충성’함을 원한다면 스스로 그 당위성과 방식을 찾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부모에 효도’를 원한다면 복종과 고득점 고연봉 이외에도 많은 길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길을 찾고 어려우면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고집도 부리고 다툴줄 아는,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는 이들이 실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대,
혹시 꿈을 죽이지 않았나 …
길 가 어느 한 켠에 스러진 꿈을 외면하고 욕망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는가 …

나 그리고 그대,
그걸 탓하지 말자.

허나 …
나의 욕망을 우리 아이들의 꿈에 억지로 우겨 넣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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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함께 추구하는 하나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오노 요코


영진공 이규훈
 
 



그 소식 이제 듣게 됐어 크게 놀라진 않았지,
버려진 마음 구석 어느 벌판에 마치 벌레와 같이 비참히,
한때 친한 친구였던 내 꿈이 죽어있다고,


그 소식 이제 알게 됐어 눈물은 나지 않았지,
눈썹을 찌푸리고 아주 오래 전 모습 더듬어봐도 흐릿해,
한때 친한 친구였던 내 꿈이 죽었다는데,





도대체 난 그 언제부터 그를 버리고 살아온 건지,
숨가쁜 세상에 홀로 살아남으려 덤을 줄이고 싶었는지,
어떻게 난 그 오랫동안 꿈을 버리고 살아왔는지,


이제야 무서운 진실을 알게 됐어,
어쩜 내가 내 손으로 내 꿈을 죽였다는 걸,


어쩜 내가 내 손으로 내 꿈을 죽였다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