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조금 실망스럽지만 여전히 유쾌한 영화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 사랑을 믿고 있는 – 그러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낭만과이다 – 부류 중 하나인 나는,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남남이든 여여든 남녀든 유시진이 어느 만화에서 말했던 대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 기적이라 믿고 있는데, 그 사랑을 서로 확인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니까, 잘 생기고 진국이고 성품도 좋고 능력도 있고 게다가 ‘인권 변호사’라는 그럴 듯한 직업도 가진 남자와 사랑을 확인을 하긴 했는데, 그걸 과연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브리짓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고난은 그의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라, 그와 그의 세계가 가진 허위의 속물의식이고, 이것은 그 둘의 명확한 계급 차에서 출발한다. 하긴,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그래서 살고 있는 세계가 기초적으로 생겨먹은 모양도 다른데 말이다.

브리짓 – 과 나,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 – 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그런 거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은 상류층의 극우 또라이들이나 내뱉는 말이지만, 그의 세계에선 그게 절대적 믿음인 것이다. 마돈나가 영국에서 발표한 최초의 싱글이 영국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론 “럭키 스타” 라 해도,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홀리데이”가 정답이 되는 그런 세계가 마크 다아시가 속한 세계이다.

브리짓은 이 세계에서 계속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마크 다아시와 브리짓이 상반된 두 세계를 능숙하게 오가게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둘이 그럼에도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는 건 브리짓이 처했던 곤경이지만 –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는 리지 동생의 정분난 야반도주 – 그래서 둘은 사랑을 고백하고 약혼을 하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지만, 글쎄, 과연 결혼을 한다고 둘의 사랑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가 정말로 실패한 지점은 이것이다. 즉,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이 야심차게 시도한 것은, “사랑의 확인까진 갔는데 유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지만, 이 영화는 또다시 사랑의 확인만 할 뿐, 유지를 위해서 정작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있긴 하다. 그건 우리의 브리짓의 자신감 결여와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출렁이는 뱃살이 당신의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애인 앞에서 당당하게 뱃살을 내밀지만 예쁘고 늘씬하고 똑똑하고 상류층 출신 가문의 동료 변호사가 애인 곁에 자주 출몰하자 당장 의부증이 발동하는 브리짓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 앞에 당당하자는, 그리고 사랑의 필요조건은 믿음과 신뢰라는 쓸 만한 교훈을 얻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둘의 사이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 마크 다아시가 브리짓과 헤어진 뒤 정말로 레베카와 잠깐 사귀고 – 그래서 섹스도 한 번 하고 – 브리짓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그토록 혐오했던 자기계발서들을 몰래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관계의 유지를 위해 마크 다아시가 변하고 노력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영화엔, 그게 없다. 오로지 브리짓 탓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유있고, 공감할 만한 브리짓의 일련의 행동들은 정말로 “주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속편 제작팀이 전편이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었나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브리짓은, 평범하고 결점 많고 적당히 영악하려 하지만 별 수 없이 어리숙하고 사회적 성공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은,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긍정하고자 노력하며 낙천적인, 우리 시대 여자들의 모습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그저, 브리짓이 뚱뚱한 몸으로 벌이는 일련의 해프닝에 웃느라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술고래에 줄담배에 통통하고 민망한 실수들만 줄줄이 저지르면서 예쁜 척, 귀여운 척하곤 거리가 먼 나이먹은 노처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통상 사람들이 주책이라 생각하는 한 여성의 어떤 면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게, 그런 여성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전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다.

마크 다아시가 반한 브리짓도 마찬가지고, 그는 그렇기에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전작에서 원작소설에는 없는 ‘두남자 유치싸움씬’이 굳이 들어간 것도, 그렇게 (사회적 편견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위해 두 남자가 치고받고 투다닥을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점잖은 척하는 남자들의 후까시란 게 실은 그렇게 유치하고 웃기는 것임을,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숭’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 위해 두 남자의 격투씬은 유치함이 더욱 과장되었고, 이것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을 단단히 살려준 씬이 되었다.)

또한 이 격투씬이야말로, 치사스럽고 능글맞은 대니얼 클리버와 진지하고 속 깊으며 겉으론 무뚝뚝해도 속으론 열정으로 들끓고 있는 마크 다아시의 성격을 몸으로, 단적으로 드러낸 씬이다.

속편에서도 두 남자의 결투씬은 반복된다. 물론 상체를 바짝 위로 세운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는 대니얼 클리버의 ‘왠지 치사스럽고 웃긴’ 도망치기와 큰 보폭으로 열심히 쫓아가는 마크 다아시의 ‘폼만큼은 멋진’ 추척이 코믹한 건 사실이지만, 두 남자의 대조적인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난 유부녀가 더 땡겨”는 충분히 대니얼 클리버다운 밉살스러운 ‘매 벌기’ 발언이지만, 치사스럽진 않다. (전편에서 대니얼 클리버의 치사스러움은, 마크 다아시 뒷통수 가격과 브리짓한테 엄살 부리기 등으로 딱 표현된다.)

뭇 여성들이 열광한 마크 다아시 캐릭터 분석도, 좀 잘못되어 있다. 전편에서 콜린 퍼스가 보여준 마크 다아시의 매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오만함’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론 소심하고 – 언제나 브리짓을 따라다니던 그의 눈빛! – 속깊고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나뭇토막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펄펄 들끓고 있는 열정이다.

속편 원작소설에서 이런 마크 다아시의 모습은 약간 변하기는 하지만 – 조금 더 인간적이고 연약한 면을 드러낸다 – 속편 영화에서의 마크 다아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의 평에 의해 설명될 뿐 (“당신은 오만해” “난 그 녀석 잘난 척해서 밥맛이었어”)이다. 마크 다아시는, 겉으로 표나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물론 콜린 퍼스는 태국 교도소 면회씬이나, 스피커폰 전화통화나 미팅 같은 ‘브리짓 실수연발’ 씬에서 마크 다아시 특유의 무뚝뚝한 자기방어적 성격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애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만, 정작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완벽한 남자’일 뿐이다.

영화는 그래서, 둘이 행복해지려면, 전적으로 브리짓이 그의 세계에 맞춰 (서민적인) 자신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결론을 전제해두고 있다. 결국, 각본과 연출의 방향에서 이미 캐릭터가 잘못 잡힌 것이다. 얄미운 대니얼 클리버의 유들유들한 매력도 지나치게 단순해졌고. (그저 섹스광으로만 묘사되다니.)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은, 그래도 유쾌하다. 그것은, 좀스럽고 치사한 나쁜 남자 대니얼 클리버, 알고보니 진국 마크 다아시의 매력을, 한계가 명확한 각본 내에서도 최대한 드러내 주고자 노력한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제 브리짓 존스라 하면 더이상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는, 완벽한 브리짓 그 자체의 “르네 젤웨거”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 젤웨거는 침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마크 다아시를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자 온몸을 던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 정말 온몸으로 연기한다 – 브리짓의 당당한 용기를 보여준다. (그것이, 각본에 의해 결국은 “주책”이 되고 말아버리긴 하지만.)

전편에서 All by Myself에 맞추어 처절한 외로움을 이쁜 척 하지 않고 완전히 막 가게 드러내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던 “르네 젤웨거”는(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번에는 태국의 교도소에 날아왔지만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마크 다아시를 보며 상처를 받는 씬에서 진정성을 전달하며 또 한 번 사람을 울린다. – 정말로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브리짓의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자고로, 주인공이 엉엉 울 때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웃으려 애쓸 때 관객은 더 슬픈 법이다. 천하의 브리짓을 그토록 아프게 울게 만드는 그 슬픔의 결을, 참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진공 노바리

 

<브라이트 스타>와 존 키츠에 대한 잡담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이거나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 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 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눈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John Keats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영진공 노바리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매력을 디벼보자 …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한국에서 흥행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1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참으로 겸손한 규모로 겸손하게 개봉했다. 아무리 “르네 젤웨거”가 『제리 맥과이어』에서 상큼발랄 매력을 보여주었다 한들 『제리 맥과이어』는 엄연히 “톰 크루즈”의 영화였고, “르네 젤웨거”는 그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귀여운 여배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성미 넘치는 섹스 심벌’이라는, 참으로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칭송받는 “콜린 퍼스”가 한국 관객들에겐 “저 넘은 누구여?” 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고. 그나마 관객들에게 알려진 “휴 그랜트”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과 『노팅힐』 등등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진, 그 어리버리 소심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무려 ‘악당’이고 실은 ‘조연’이라니, 이 영화의 흥행가능성은 영화판에서 밥 좀 먹었다 싶은 사람들에게서 두루두루 ‘아니올시다’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히트를 치기를 했나, 그것도 아니고, “멕 라이언” 언니께서 나오시는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듣기에도 요상한 영국식 억양으로 도배된 낯선 코드의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가 먹힐 거라 생각한 사람… 감식안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대단히 형편없거나, 둘 중 하나였으려니.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는 그녀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에 나름대로 성공한 데다 일부에서 극도의 추앙을 받는 컬트작이 되기에 이르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한국에서 개봉했던 그 때, 단 2주 극장?걸렸던 이 영화는 몇 주 뒤 몇몇 극장에서 재상영을 감행했고, 이래저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본전을 두 번 뽑고도 남을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의 소문은, 극장에서 간판이 떨어진 뒤에 더 불어났다. 비디오, DVD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 따위는 연애에 환상을 가득 갖고 있는 여자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던, 자고로 영화는 액션이 짱이라 외치던 남자관객들도 슬금슬금 이 영화를 나중에사 보고 어머니나!를 외치곤 했으니…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이냐?



난 외로왔을 뿐이고 …

이제, 이 영화에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초간단 스피드로 짚어보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를 가슴 두근 벌렁 콩당대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어도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나름의 여성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층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20대 후반 ~ 30대 초반 여성들이었고, 그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는 했으나, 이 관객층에서 나름대로 특별한 관객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남들이 이름도 어려워하는 “콜린 퍼스”를 보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헬렌 필딩의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물론 제인 오스틴의 고전 [오만과 편견]의 열혈 광팬들이었던 것이다.

헬렌 필딩의 원작소설은 이해가 가지만 갑자기 제인 오스틴이 왜 튀어나오냐고? 그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바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출생의 비밀이다. TV 드라마의 숱한 주인공들만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재벌집의 하나밖에 없는 혈통이었다더라, 알고 보니 쌍둥이였다더라, 알고 보니 바꿔치기 당한 거라더라… 따위 상투적인 레퍼토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출생의 비밀이.

영국의 국립방송인 BBC에서는 곧잘 자기네들의 고전 소설을 TV 시리즈로 각색해 이런저런 배우들을 모셔다가 미니 시리즈로 만들곤 한다. 그 바닥에서도 유명한 수 버트휘슬이라는 프로듀서가 앤드류 데이비스라는, 역시 그 바닥에서 유명한 베테랑 작가를 데리고 1995년, ‘무모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TV 시리즈로 옮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것이다. 제목은 디립다 거창하고 문학계에서는 근대 소설의 효시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껏 추켜세우는데, 엄청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책인가보다 하고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했다가 애걔? 이거 웬 하이틴 연애소설이냐? 며 깜짝 놀라는 소설. 혹자들은 빠져들고 혹자들은 유치하다며 책을 던지고 마는 소설. 그 [오만과 편견]은, 영국 여성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문학 작품이다.

중류층의 똘똘한 아가씨가 상류층의 거만한 미혼남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다가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며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줄거리의 이 소설이 과연 어디가 대단해서 근대 문학의 효시고 대단한 고전 걸작이란 말인가? 라고 의문을 표시할 독자들이 있다는 것, 다 안다. 그런데 여성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되고, 재산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만 상속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 사회 풍속도와 계급간 모습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리고, 당대 소설들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체적이고 자립심 강한 여주인공이 나오며, 그런 무지막지한 사회의 틀 안에서 사람이 갖기 마련인 어떤 본성들을, 그것도 유머와 재치 통통 넘치는 설정과 문장으로 묘사한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시는 동인도 회사니 서인도 회사니 하며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하던 때고, 인텔리 및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또 한편으론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가난한 여성들과 심지어 5, 6살 어린아이들도 공장에서 마구 일하던 상황… 기존의 계급 제도에 균열이 오던 그 미묘한 상황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매우 미묘하고 암시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한 계급의 한남한녀들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문체는… 자기도 속한 계급이라 그런지 애정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가벼운 냉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6부작 TV 미니시리즈… 사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장면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까지 영국의 모든 여성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렸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뭐, 니가 나에 비해선 좀 심하게 쳐지긴 하지만, 내가 너랑 결혼해 줄게. (잘난척 으쓱~)” 요로코럼 재수없게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고 어이가 없었던 남주인공, 이후에 분노에 들끓기보다 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다. 그것은 옷을 입은 채로 자신의 그 드넓은 호화저택에 딸린 연못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으니. 일명 ‘젖은 셔츠 씬’이라 불리는 이 장면에 모든 영국 여성들과 한국의 팬들은 쌍코피 줄줄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언제나 고개를 30도 가량 위로 들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보는 듯한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눈멀어 흩어질 때, 여성들은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며 흥분하던가. 그리고 영 재수꽝인 줄 알았던 그가 알고 보니 심성도 좋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기꺼이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이고, 실은 사교성 없는 성격을 스스로 방어하느라 남들에게 재수없어 보이는 것임을 알았을 때, 어찌 이 남주인공에 빠지지 않을 텐가. 얼굴에 거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채 여주인공과 계속 다투고 싸우는 척해야 했던 남자주인공, 미스터 다아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콜린 퍼스였으니 …

사회적 체면도 그렇고, 자기자신도 당황할 만큼 뜻하지 않은 사랑의 감정에 제스처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기자신을 부여잡다가, 호수에 뛰어들고 젖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다 딱 걸렸네! 여주인공과 마주쳐 버리고,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 말 없이 생색도 안 내면서 모든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연기하기가 꽤 까다로운 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는, 심지어 원조 미스터 다아시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를 능가해 버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역을 맡았던 남자 배우, “콜린 퍼스”가 평소에 보이는 처신과 행동거지는… 사람이 참 바르다. 게다가 지적이고 똑똑하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오만과 편견』의 연기를 하면서 인터뷰에서 했던 캐릭터 분석이, 유수의 문학평론가들도 글이 실리기 어렵다는 문학잡지에 떡하니 실려서 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을까 말이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역시나 이 BBC 시리즈와 “콜린 퍼스”의 미스터 다아시에 홀딱 반해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헬렌 필딩이 쓴… 일종의 팬픽이다. 이 BBC 시리즈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키득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설정들. 예를 들면 원작에서 마크 다아시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슬쩍 “콜린 퍼스”의 특징을 끼워넣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이 BBC 시리즈가 영국을 얼마나 초토화 시켰는지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TV 방영시간마다 거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져버리는 런던 거리를 사랑한다고 브리짓이 썼던 구절이 있지 않던가. 브리짓이 우울할 때마다 친구들이 들고와 밤새 또 보고 또 보고 하던 게 『오만과 편견』 테이프, 그 중에서도 젖은 셔츠 씬이 아니던가. 한술 더 떠서, 속편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원작이기도 한 [브리짓 존스의 애인]에는 브리짓이 “콜린 퍼스”를 인터뷰하러 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기억하시는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콜린 퍼스”가 맡았던 그 캐릭터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음을. 성도 똑같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원작을 각색하고 원작에 없던 장면을 넣으면서 굳이 『오만과 편견』을 언급한다.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가 살던 대저택의 이름, ‘펨벌리’가 영화로 오면 브리짓이 일하는 출판사 이름이 되어 있고, 출판사 리셉션 장면에선 『오만과 편견』 출연자였던 “크리스핀 본햄 카터”가 카메오 출연을 한다. 대니얼 클로버(휴 그랜트)와 브리짓이 보트 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 그것은 단지 영화 『타이태닉』의 오마쥬 및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패러디가 아니라, 실은 『오만과 편견』의 젖은 셔츠 씬의 패러디인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개봉된 이후, 원작소설의 판매부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오만과 편견』을 방영했던 EBS나 케이블 방송 등의 게시판에는 『오만과 편견』의 재방을 요청하는 글들이 러쉬를 이루었다. 그리고 실제로 On Style 같은 케이블 방송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방영해주기도 했고. 『노팅힐』에서 보듯, 미국인의 영어 악센트가 섞여야 관객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었던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였으나, 완전히 영국식 악센트의 영어로만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또한 ‘워킹 타이틀’ 표 코미디가 완전히 한국 관객들에게 친근함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러브 액추얼리』의 슬리퍼 히트를 기억해 보라.)

겉만 번드르하고 매력적이지만 실속없는 남자와 눈에 잘 안 띄지만 알고보니 진국인 남자 사이에서 한 여자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는 흔하고 흔하다.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이루어낸 것은 좀 더 특별하다.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고, 어처구니 없어 민망할 지경의 실수만 연발하는 여자가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여자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뭇 사람들을 유쾌하게 녹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다. 또한 그저 마케팅 리서치 결과를 참조해 책상 머리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이래저래 끼워 맞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현대 도시인의 당면한 과제를 풍부하게 덧붙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이것이 그 사회에 내재한 단단한 문학적 / 문화적 토양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은 Eric Carmen

(피아노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차용하였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