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트 스타>와 존 키츠에 대한 잡담


부산에 초청된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25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는 생전에 딱히 그 위대한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지는 못했다. 어릴 적 천애고아가 되고 생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어찌어찌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3년만에 땄다는데, 그가 의학엔 별 관심이 없고 시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던 것을 아는 가까운 친구들, 특히 시인이거나 시인 지망생 친구들은 그가 3 년만에 의사자격증을 딴 것에 대단한 질투와 허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키츠는 패니 브론과의 절절한 연애로도 유명한데, 패니가 말하자면, [오만과 편견]으로 쳤을 때 미스터 다아시 같은 남자 하나 낚으려고 사교계에서 좀 나대는, 엘리자베스 베넷 정도 가문의 여자였던 모양이다. 리즈 베넷이야 지성미와 유머가 풍부한 여인이었지만 패니는 또 그런 타입은 아니었던 듯, 영화 <브라이트 스타>에서도 키츠를 후원하는 그의 작가 친구 찰스 브라운은 패니를 너무나 못마땅해 해서, 그녀를 “남자나 꼬시려고 사교계에서 꼬리 흔들고 다니는 무식하고 허영심만 센 여자” 취급을 한다.

하지만 패니를 그리는 제인 캠피온의 시선은 그닥 삐뚜름하거나 시니컬하지 않다. 영화의 초반, 키츠를 처음 사교파티에서 만난 뒤 패니가 키츠의 시를 그 앞에서 읊으면서 작업 한번 들어간 뒤, 그녀는 “시를 공부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며 다시 키츠를 찾아간다. 물론 이 역시 삐뚜름하게 보자면 ‘작업의 2차 작전’으로 보일 수 있고 제인 캠피온 역시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찰스에게 패니의 얄팍함이 폭로당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패니의 이런 에피소드를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패니의 진정성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시켜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기억되는 것도 그녀가 찰스에게 봉변을 당하며 그 얄팍한 허영심이 폭로당한 것보다는, 키츠에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그 반짝이던 눈빛, 그 눈 안에 담겼던 동경과 열망이다. 나처럼 시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그 장면이 더욱 크게 남는다. 나 역시 영화가 끝난 뒤 “키츠의 시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들었으니까. 하여간 <브라이트 스타>에 대한 리뷰는 이미 여기에 쓴 바 있고.

Bright Star

존 키츠, 혹은 존 키츠로 분장한 벤 위쇼의 고혹적인 눈. (<브라이트 스타>)

며칠 전 모 극장을 갔다가 바로 옆 서점에서 민음사에서 출간한 김우창 번역의 키츠의 시선집 [가을에 부쳐] 를 샀다. 이후 웹 검색을 해보니 그 외에 키츠에 대한 다른 책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오래 전에 대학출판부 같은 데에서 나왔다가 절판, 절판, 품절.) 이 기회에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 대해 눈동냥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낭만주의 문학’같은 키워드로 돌려봤지만 역시 헛수고다.

사실 또 다른 방식의 치열한 시대정신이었던 낭만주의가 국내에서는 현실도피용으로 포장되고, 그에 따라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를 신봉한 이들에겐 또 다시 부당하게 폄하되는, 그런 식의 분위기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형식의 외피와 감정적 나르시시즘에만 집착하고 과장한 것 정도로 오해된 분위기가 있달까. 아니 근데 센티멘털리즘과 로맨티시즘이 동의어는 아니잖아, 그게 문학이든, 회화든. 영화쪽으로만 보자면,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조금씩 낭만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근 허진호가 내놓은 <호우시절>이야말로, 제대로 된 낭만주의의 본격적인 부활의 바람의 서두에 놓아야 할 것같다. “허진호가 변했다”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흥미롭기는 하지만.

외서 쪽을 돌려보니,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문고판으로 그의 주요 시와 편지 일부를 편집해놓은 책이 보인다. 랜덤하우스에서는 그의 시 전체를 모아놓은 책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오디오북으로는, 새뮤얼 웨스트와 마이클 쉰이 낭송한 CD도 보이고. 마이클 쉰이, 그러니까 <더 퀸>의 토니 블레어와 <프로스트 vs. 닉슨>의 프로스트로 나왔던 배우인 그 마이클 쉰이 맞나 싶어 찾아보니 … 허허, 맞네!

새뮤얼 웨스트는 좀 낯선 이름이라 찾아봤더니 <반 헬싱>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로 출연했다는데 필모그래피가 어째 다 단역 및 조연. 그 … 근데, 잘 생겼다? 허걱, <하워즈 엔드>에 조연으로 출연해 BAFTA상 남우조연 부문 후보로 올랐었어? 뭐, 옥스포드 출신? 런던드라마평론가협회 세익스피어상 수상… 엄훠 나 이거 사야 하는 거 맞는 거? 뭣보다 잘생긴 것에 침 주르릅… 아니, 잘생기기도 잘생겼지만 딱 목소리 멋있게 생겼단 말이야! 예컨대 케네스 브래너의 목소리로 세익스피어 낭독을 듣는다고 쳐봐, 그게 그냥 목소리인가? 주르르 몸이 녹아내려 황홀경에 빠뜨릴 천상의 음악이지!

<브라이트 스타>의 말미에도, 그러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에서 키츠로 출연한 벤 위쇼가 나지막하게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한다. 정확히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할 때 나오기 시작해, 마지막 카피라이트 표시와 제작사 로고가 끝날 때 낭송도 끝이 난다. 벤 위쇼의 나직하면서도 팬시하고 발음 좋은 목소리와 키츠의 시가 어우러져, 비록 눈은 자막을 뒤쫓느라 정신없었긴 해도, 도저히 그냥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게 나만 그런 건 아닌 게, 대체로 아무리 영화제라고 해도 엔딩타이틀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대면서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짐을 챙기지만 이 영화의 자막 땐 아무도 그러지 않더라. 만약 영화가 국내에서도 정식으로 개봉한다면, 그 시의 낭송을 꼭 즐기시기 바란다.

John Keats

[부록] John Keats,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영진공 노바리

ps1. 온라인에서 이런 페이지도 발견. 참고하시라.

ps2. 듣자하니 벤 위쇼는 영화 찍기 전엔 키츠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의 벤 위쇼 칭찬은 정말 … 으하하하! 처음 만나자마자 느낀 것이 “세상에, 당신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잖아!”였다니, 난 캠피온 언니의 취향이 듬직한 돌쇠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출처는 여기(새 창으로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