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조금 실망스럽지만 여전히 유쾌한 영화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 사랑을 믿고 있는 – 그러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낭만과이다 – 부류 중 하나인 나는,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남남이든 여여든 남녀든 유시진이 어느 만화에서 말했던 대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 기적이라 믿고 있는데, 그 사랑을 서로 확인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니까, 잘 생기고 진국이고 성품도 좋고 능력도 있고 게다가 ‘인권 변호사’라는 그럴 듯한 직업도 가진 남자와 사랑을 확인을 하긴 했는데, 그걸 과연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브리짓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고난은 그의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라, 그와 그의 세계가 가진 허위의 속물의식이고, 이것은 그 둘의 명확한 계급 차에서 출발한다. 하긴,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그래서 살고 있는 세계가 기초적으로 생겨먹은 모양도 다른데 말이다.

브리짓 – 과 나,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 – 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그런 거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은 상류층의 극우 또라이들이나 내뱉는 말이지만, 그의 세계에선 그게 절대적 믿음인 것이다. 마돈나가 영국에서 발표한 최초의 싱글이 영국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론 “럭키 스타” 라 해도,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홀리데이”가 정답이 되는 그런 세계가 마크 다아시가 속한 세계이다.

브리짓은 이 세계에서 계속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마크 다아시와 브리짓이 상반된 두 세계를 능숙하게 오가게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둘이 그럼에도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는 건 브리짓이 처했던 곤경이지만 –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는 리지 동생의 정분난 야반도주 – 그래서 둘은 사랑을 고백하고 약혼을 하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지만, 글쎄, 과연 결혼을 한다고 둘의 사랑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가 정말로 실패한 지점은 이것이다. 즉,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이 야심차게 시도한 것은, “사랑의 확인까진 갔는데 유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지만, 이 영화는 또다시 사랑의 확인만 할 뿐, 유지를 위해서 정작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있긴 하다. 그건 우리의 브리짓의 자신감 결여와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출렁이는 뱃살이 당신의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애인 앞에서 당당하게 뱃살을 내밀지만 예쁘고 늘씬하고 똑똑하고 상류층 출신 가문의 동료 변호사가 애인 곁에 자주 출몰하자 당장 의부증이 발동하는 브리짓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 앞에 당당하자는, 그리고 사랑의 필요조건은 믿음과 신뢰라는 쓸 만한 교훈을 얻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둘의 사이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 마크 다아시가 브리짓과 헤어진 뒤 정말로 레베카와 잠깐 사귀고 – 그래서 섹스도 한 번 하고 – 브리짓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그토록 혐오했던 자기계발서들을 몰래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관계의 유지를 위해 마크 다아시가 변하고 노력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영화엔, 그게 없다. 오로지 브리짓 탓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유있고, 공감할 만한 브리짓의 일련의 행동들은 정말로 “주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속편 제작팀이 전편이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었나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브리짓은, 평범하고 결점 많고 적당히 영악하려 하지만 별 수 없이 어리숙하고 사회적 성공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은,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긍정하고자 노력하며 낙천적인, 우리 시대 여자들의 모습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그저, 브리짓이 뚱뚱한 몸으로 벌이는 일련의 해프닝에 웃느라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술고래에 줄담배에 통통하고 민망한 실수들만 줄줄이 저지르면서 예쁜 척, 귀여운 척하곤 거리가 먼 나이먹은 노처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통상 사람들이 주책이라 생각하는 한 여성의 어떤 면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게, 그런 여성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전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다.

마크 다아시가 반한 브리짓도 마찬가지고, 그는 그렇기에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전작에서 원작소설에는 없는 ‘두남자 유치싸움씬’이 굳이 들어간 것도, 그렇게 (사회적 편견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위해 두 남자가 치고받고 투다닥을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점잖은 척하는 남자들의 후까시란 게 실은 그렇게 유치하고 웃기는 것임을,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숭’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 위해 두 남자의 격투씬은 유치함이 더욱 과장되었고, 이것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을 단단히 살려준 씬이 되었다.)

또한 이 격투씬이야말로, 치사스럽고 능글맞은 대니얼 클리버와 진지하고 속 깊으며 겉으론 무뚝뚝해도 속으론 열정으로 들끓고 있는 마크 다아시의 성격을 몸으로, 단적으로 드러낸 씬이다.

속편에서도 두 남자의 결투씬은 반복된다. 물론 상체를 바짝 위로 세운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는 대니얼 클리버의 ‘왠지 치사스럽고 웃긴’ 도망치기와 큰 보폭으로 열심히 쫓아가는 마크 다아시의 ‘폼만큼은 멋진’ 추척이 코믹한 건 사실이지만, 두 남자의 대조적인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난 유부녀가 더 땡겨”는 충분히 대니얼 클리버다운 밉살스러운 ‘매 벌기’ 발언이지만, 치사스럽진 않다. (전편에서 대니얼 클리버의 치사스러움은, 마크 다아시 뒷통수 가격과 브리짓한테 엄살 부리기 등으로 딱 표현된다.)

뭇 여성들이 열광한 마크 다아시 캐릭터 분석도, 좀 잘못되어 있다. 전편에서 콜린 퍼스가 보여준 마크 다아시의 매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오만함’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론 소심하고 – 언제나 브리짓을 따라다니던 그의 눈빛! – 속깊고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나뭇토막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펄펄 들끓고 있는 열정이다.

속편 원작소설에서 이런 마크 다아시의 모습은 약간 변하기는 하지만 – 조금 더 인간적이고 연약한 면을 드러낸다 – 속편 영화에서의 마크 다아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의 평에 의해 설명될 뿐 (“당신은 오만해” “난 그 녀석 잘난 척해서 밥맛이었어”)이다. 마크 다아시는, 겉으로 표나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물론 콜린 퍼스는 태국 교도소 면회씬이나, 스피커폰 전화통화나 미팅 같은 ‘브리짓 실수연발’ 씬에서 마크 다아시 특유의 무뚝뚝한 자기방어적 성격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애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만, 정작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완벽한 남자’일 뿐이다.

영화는 그래서, 둘이 행복해지려면, 전적으로 브리짓이 그의 세계에 맞춰 (서민적인) 자신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결론을 전제해두고 있다. 결국, 각본과 연출의 방향에서 이미 캐릭터가 잘못 잡힌 것이다. 얄미운 대니얼 클리버의 유들유들한 매력도 지나치게 단순해졌고. (그저 섹스광으로만 묘사되다니.)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은, 그래도 유쾌하다. 그것은, 좀스럽고 치사한 나쁜 남자 대니얼 클리버, 알고보니 진국 마크 다아시의 매력을, 한계가 명확한 각본 내에서도 최대한 드러내 주고자 노력한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제 브리짓 존스라 하면 더이상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는, 완벽한 브리짓 그 자체의 “르네 젤웨거”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 젤웨거는 침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마크 다아시를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자 온몸을 던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 정말 온몸으로 연기한다 – 브리짓의 당당한 용기를 보여준다. (그것이, 각본에 의해 결국은 “주책”이 되고 말아버리긴 하지만.)

전편에서 All by Myself에 맞추어 처절한 외로움을 이쁜 척 하지 않고 완전히 막 가게 드러내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던 “르네 젤웨거”는(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번에는 태국의 교도소에 날아왔지만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마크 다아시를 보며 상처를 받는 씬에서 진정성을 전달하며 또 한 번 사람을 울린다. – 정말로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브리짓의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자고로, 주인공이 엉엉 울 때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웃으려 애쓸 때 관객은 더 슬픈 법이다. 천하의 브리짓을 그토록 아프게 울게 만드는 그 슬픔의 결을, 참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진공 노바리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매력을 디벼보자 …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한국에서 흥행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1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참으로 겸손한 규모로 겸손하게 개봉했다. 아무리 “르네 젤웨거”가 『제리 맥과이어』에서 상큼발랄 매력을 보여주었다 한들 『제리 맥과이어』는 엄연히 “톰 크루즈”의 영화였고, “르네 젤웨거”는 그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귀여운 여배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성미 넘치는 섹스 심벌’이라는, 참으로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칭송받는 “콜린 퍼스”가 한국 관객들에겐 “저 넘은 누구여?” 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고. 그나마 관객들에게 알려진 “휴 그랜트”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과 『노팅힐』 등등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진, 그 어리버리 소심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무려 ‘악당’이고 실은 ‘조연’이라니, 이 영화의 흥행가능성은 영화판에서 밥 좀 먹었다 싶은 사람들에게서 두루두루 ‘아니올시다’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히트를 치기를 했나, 그것도 아니고, “멕 라이언” 언니께서 나오시는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듣기에도 요상한 영국식 억양으로 도배된 낯선 코드의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가 먹힐 거라 생각한 사람… 감식안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대단히 형편없거나, 둘 중 하나였으려니.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는 그녀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에 나름대로 성공한 데다 일부에서 극도의 추앙을 받는 컬트작이 되기에 이르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한국에서 개봉했던 그 때, 단 2주 극장?걸렸던 이 영화는 몇 주 뒤 몇몇 극장에서 재상영을 감행했고, 이래저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본전을 두 번 뽑고도 남을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의 소문은, 극장에서 간판이 떨어진 뒤에 더 불어났다. 비디오, DVD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 따위는 연애에 환상을 가득 갖고 있는 여자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던, 자고로 영화는 액션이 짱이라 외치던 남자관객들도 슬금슬금 이 영화를 나중에사 보고 어머니나!를 외치곤 했으니…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이냐?



난 외로왔을 뿐이고 …

이제, 이 영화에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초간단 스피드로 짚어보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를 가슴 두근 벌렁 콩당대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어도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나름의 여성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층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20대 후반 ~ 30대 초반 여성들이었고, 그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는 했으나, 이 관객층에서 나름대로 특별한 관객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남들이 이름도 어려워하는 “콜린 퍼스”를 보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헬렌 필딩의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물론 제인 오스틴의 고전 [오만과 편견]의 열혈 광팬들이었던 것이다.

헬렌 필딩의 원작소설은 이해가 가지만 갑자기 제인 오스틴이 왜 튀어나오냐고? 그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바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출생의 비밀이다. TV 드라마의 숱한 주인공들만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재벌집의 하나밖에 없는 혈통이었다더라, 알고 보니 쌍둥이였다더라, 알고 보니 바꿔치기 당한 거라더라… 따위 상투적인 레퍼토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출생의 비밀이.

영국의 국립방송인 BBC에서는 곧잘 자기네들의 고전 소설을 TV 시리즈로 각색해 이런저런 배우들을 모셔다가 미니 시리즈로 만들곤 한다. 그 바닥에서도 유명한 수 버트휘슬이라는 프로듀서가 앤드류 데이비스라는, 역시 그 바닥에서 유명한 베테랑 작가를 데리고 1995년, ‘무모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TV 시리즈로 옮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것이다. 제목은 디립다 거창하고 문학계에서는 근대 소설의 효시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껏 추켜세우는데, 엄청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책인가보다 하고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했다가 애걔? 이거 웬 하이틴 연애소설이냐? 며 깜짝 놀라는 소설. 혹자들은 빠져들고 혹자들은 유치하다며 책을 던지고 마는 소설. 그 [오만과 편견]은, 영국 여성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문학 작품이다.

중류층의 똘똘한 아가씨가 상류층의 거만한 미혼남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다가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며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줄거리의 이 소설이 과연 어디가 대단해서 근대 문학의 효시고 대단한 고전 걸작이란 말인가? 라고 의문을 표시할 독자들이 있다는 것, 다 안다. 그런데 여성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되고, 재산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만 상속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 사회 풍속도와 계급간 모습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리고, 당대 소설들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체적이고 자립심 강한 여주인공이 나오며, 그런 무지막지한 사회의 틀 안에서 사람이 갖기 마련인 어떤 본성들을, 그것도 유머와 재치 통통 넘치는 설정과 문장으로 묘사한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시는 동인도 회사니 서인도 회사니 하며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하던 때고, 인텔리 및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또 한편으론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가난한 여성들과 심지어 5, 6살 어린아이들도 공장에서 마구 일하던 상황… 기존의 계급 제도에 균열이 오던 그 미묘한 상황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매우 미묘하고 암시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한 계급의 한남한녀들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문체는… 자기도 속한 계급이라 그런지 애정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가벼운 냉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6부작 TV 미니시리즈… 사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장면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까지 영국의 모든 여성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렸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뭐, 니가 나에 비해선 좀 심하게 쳐지긴 하지만, 내가 너랑 결혼해 줄게. (잘난척 으쓱~)” 요로코럼 재수없게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고 어이가 없었던 남주인공, 이후에 분노에 들끓기보다 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다. 그것은 옷을 입은 채로 자신의 그 드넓은 호화저택에 딸린 연못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으니. 일명 ‘젖은 셔츠 씬’이라 불리는 이 장면에 모든 영국 여성들과 한국의 팬들은 쌍코피 줄줄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언제나 고개를 30도 가량 위로 들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보는 듯한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눈멀어 흩어질 때, 여성들은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며 흥분하던가. 그리고 영 재수꽝인 줄 알았던 그가 알고 보니 심성도 좋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기꺼이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이고, 실은 사교성 없는 성격을 스스로 방어하느라 남들에게 재수없어 보이는 것임을 알았을 때, 어찌 이 남주인공에 빠지지 않을 텐가. 얼굴에 거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채 여주인공과 계속 다투고 싸우는 척해야 했던 남자주인공, 미스터 다아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콜린 퍼스였으니 …

사회적 체면도 그렇고, 자기자신도 당황할 만큼 뜻하지 않은 사랑의 감정에 제스처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기자신을 부여잡다가, 호수에 뛰어들고 젖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다 딱 걸렸네! 여주인공과 마주쳐 버리고,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 말 없이 생색도 안 내면서 모든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연기하기가 꽤 까다로운 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는, 심지어 원조 미스터 다아시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를 능가해 버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역을 맡았던 남자 배우, “콜린 퍼스”가 평소에 보이는 처신과 행동거지는… 사람이 참 바르다. 게다가 지적이고 똑똑하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오만과 편견』의 연기를 하면서 인터뷰에서 했던 캐릭터 분석이, 유수의 문학평론가들도 글이 실리기 어렵다는 문학잡지에 떡하니 실려서 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을까 말이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역시나 이 BBC 시리즈와 “콜린 퍼스”의 미스터 다아시에 홀딱 반해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헬렌 필딩이 쓴… 일종의 팬픽이다. 이 BBC 시리즈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키득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설정들. 예를 들면 원작에서 마크 다아시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슬쩍 “콜린 퍼스”의 특징을 끼워넣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이 BBC 시리즈가 영국을 얼마나 초토화 시켰는지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TV 방영시간마다 거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져버리는 런던 거리를 사랑한다고 브리짓이 썼던 구절이 있지 않던가. 브리짓이 우울할 때마다 친구들이 들고와 밤새 또 보고 또 보고 하던 게 『오만과 편견』 테이프, 그 중에서도 젖은 셔츠 씬이 아니던가. 한술 더 떠서, 속편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원작이기도 한 [브리짓 존스의 애인]에는 브리짓이 “콜린 퍼스”를 인터뷰하러 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기억하시는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콜린 퍼스”가 맡았던 그 캐릭터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음을. 성도 똑같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원작을 각색하고 원작에 없던 장면을 넣으면서 굳이 『오만과 편견』을 언급한다.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가 살던 대저택의 이름, ‘펨벌리’가 영화로 오면 브리짓이 일하는 출판사 이름이 되어 있고, 출판사 리셉션 장면에선 『오만과 편견』 출연자였던 “크리스핀 본햄 카터”가 카메오 출연을 한다. 대니얼 클로버(휴 그랜트)와 브리짓이 보트 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 그것은 단지 영화 『타이태닉』의 오마쥬 및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패러디가 아니라, 실은 『오만과 편견』의 젖은 셔츠 씬의 패러디인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개봉된 이후, 원작소설의 판매부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오만과 편견』을 방영했던 EBS나 케이블 방송 등의 게시판에는 『오만과 편견』의 재방을 요청하는 글들이 러쉬를 이루었다. 그리고 실제로 On Style 같은 케이블 방송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방영해주기도 했고. 『노팅힐』에서 보듯, 미국인의 영어 악센트가 섞여야 관객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었던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였으나, 완전히 영국식 악센트의 영어로만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또한 ‘워킹 타이틀’ 표 코미디가 완전히 한국 관객들에게 친근함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러브 액추얼리』의 슬리퍼 히트를 기억해 보라.)

겉만 번드르하고 매력적이지만 실속없는 남자와 눈에 잘 안 띄지만 알고보니 진국인 남자 사이에서 한 여자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는 흔하고 흔하다.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이루어낸 것은 좀 더 특별하다.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고, 어처구니 없어 민망할 지경의 실수만 연발하는 여자가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여자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뭇 사람들을 유쾌하게 녹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다. 또한 그저 마케팅 리서치 결과를 참조해 책상 머리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이래저래 끼워 맞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현대 도시인의 당면한 과제를 풍부하게 덧붙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이것이 그 사회에 내재한 단단한 문학적 / 문화적 토양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은 Eric Carmen

(피아노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차용하였다.)


 




영진공 노바리

패스트푸드 네이션, “일상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정치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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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하나가 가진 정치학만 이해해도 ...
몇 년 전 영국에서 커피 농가를 착취하는 초국적 거대 커피기업들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가했을 때,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안에 담긴 만큼만의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일상 하나하나가 복잡다단한 정치와 경제, 무역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란 하나의 거대한 허상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흔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물론이고, 하루 세 끼 먹는 밥과 매일 갈아입는 속옷도 마찬가지다. 오늘 끼니 중 하나로 먹은 햄버거 하나도 예외가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우리가 어쩌면 오늘 낮에 점심으로 먹었을지도 모를 햄버거에 담긴 거대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추적해 들어간다.

2006년에 일찌감치 수입되었지만 촛불정국을 타고서야 겨우 개봉될 수 있었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지금 쇠고기 문제가 터지면서 극적으로 개봉할 수 있었지만 그 쇠고기 정국과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패스트푸드 네이션>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의 쇠고기 정국의 어떤 한계와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영화는 쇠고기의 위생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기 과소비’의 시대에서 식량, 그것도 고기를 ‘공장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는 탐욕스러운 근대 대량생산 체제와 더불어 소위 ‘불법사람’의 노동착취 문제까지 다루니까. 사실 이 영화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오히려 저 이민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노동착취에 대한 고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먹고 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회에서 목숨을 내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값싼 고기가 넘쳐나는 소위 ‘풍요의 땅’ 미국이다. 그 값싼 고기는 규격에 맞춘 공장제 대량생산에 의해 가능한데, 이를 위해 동물들은 옆으로 한걸음 움직이기조차 좁은 공간에서 마치 물건들이 창고에 쟁여지듯 갇혀 얼른 살을 찌우고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동종의 동물을 섞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찐 뒤 도축장으로 옮겨져 햄버거 패티로 거듭난다. 동물만이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대량생산 공장체제에도 인간의 노동력은 필요하기 마련.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불법이민자 신세라는 이유로 온갖 위험과 불공평을 감수해야 하는, 불법으로 국경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심지어 마약의 힘을 빌어야 하는 이들이 사고로 무참히 팔다리가 짤린들, 그는 해고되고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마약을 먹었다는 이유로) 보상금도 받지 못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대가로 일자리를 구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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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불법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조건에서의 노동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이른바 ‘노동소외’가 바로,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 제기되는 이른바 “음식에 소똥이 들어간” 이유이다. 결국 우리가 값싸게 먹고 즐기는 모든 생산품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누군가의 노동을 (말 그대로)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값싼 햄버거 하나에 들어가는 쇠고기 패티 한 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말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한 대가인지, 이 영화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이런 대량생산 체제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풍요를 거부할 용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생산된 ‘값싼 물품’을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결코 상류층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디자이너의 값비싼 옷을 걸치는 사람과, 제3세계에 세워진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티셔츠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 옷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국 이 자본주의가 동작하는 모습이란 거대한 먹이사슬, 더욱이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뜯어먹으며, 혹은 약한 자가 더 약한 자의 피눈물에 기생하며 생존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죄책감 같은 것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이 ‘안전하게 차단’ 해주는 – 소비자 개인은 구체적인 생산자 개인을 알지 못한다 – 거대한 톱니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그 톱니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중예술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그런 의무에 너무 사명감을 많이 가진 탓인지 전반적으로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다 다루려다 보니, 실비아(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불법이민자의 이야기와 돈 앤더슨(그렉 키니어)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앰버(애쉴리 존슨)를 중심으로 한 또다른 판매 고용 노동자(즉, 알바) 및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한 채 따로 논다. 사실 이 영화는 돈 앤더슨에서 시작해 앰버의 주변 이야기로 갔다가, 실비아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돈 앤더슨의 회사네 풍경은 ‘에필로그’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진행돼 가면서도 중간중간 교차하는 방식이 별로 다소 거칠고, 영화를 지루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한국의 아주 일반적인 관객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이슈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전면에 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면에서 분명 링클레이터의 용기는 박수를 쳐줄 만하지만, 이것을 만드는 방식에 조금만 더 재치와 유머를 섞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실비아가 소 내장제거반 작업실로 따라가며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참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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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이쁘더란… 이쁘기론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도 만만치 않다만 사진이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미국 쇠고기 더럽대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상품들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온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가 섞여들어간 것인지, 우리의 일상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모두 정치와 자본주의의 작동의 결과물인지, 다시 한번 깨우쳐주는 그런 영화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단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미행, 감시, 도청당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살해협박까지 받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섞인 핸드폰과, 어린아이가 눈이 멀어가면서까지 만든 축구공, 역시 어린아이가 아침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일하며 만든 운동화와 커피와 면옷과… 그들이 그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 각자 통찰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영진공 노바리

ps1. 영화가 원래 2006년에 수입돼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는데, 영화사로서는 늦게 개봉하게 된 게 한편으로 도움을 받은 면도 없진 않다. 예컨대 그 사이에 폴 다노가 확 떠줬다던가…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소규모나마 개봉이 됐다던가… 물론 폴 다노나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까지 많진 않다. 게다가 어쨌건 영화가 창고에서 묶이게 되면 그만큼 비용이 올라가고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ps2. 강기갑 의원이 영화를 함께 봤다. 끝나고 기자간담회도 했는데, 열심히 취재를 해놓고 결국 기사를 못 썼다. 그나저나 가까이서 본 강기갑 의원은 초큼… 무서워 보이더란… 실은 이 날, ‘한국의 도축 및 검수 시스템 역시 엉망 아닌가’ 뭐 이런 질문을 하려다가 간이 떨려서 말았다는.